아이폰의 초기화 소동
최 화 웅
어제 아침 아이폰을 사용할려고 켰더니 비밀번호의 입력을 요구했다. 몇 차례 계속 입력시켰으나 재시도를 요구한다. 비밀번호가 틀린다는 반응과 함께 대기시간이 길어지더니 결국 자체적으로 비활성화 되어버렸다. 비활성화란 아이폰의 모든 기능이 정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아이폰에 매달린 채 비밀번호를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입력시켜봤으나 허사였다. 비활성화로 인한 대기시간만 연장될 뿐이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고 외부와의 소통이 두절된 상태로 갑갑답답한 마음이 억눌렀다. 감방에 갇힌 수인, 격리된 공간에 인간의 모습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투석치료가 끝나기 무섭게 휴대폰 가게에 들렀다. 한참을 만지더니 A/S 센터에 가야겠다고 안내한다. 그 길로 지하철을 타고 센텀으로 갔다. 대기번호를 뽑아들고 문정희의 시집 ‘응’을 읽으며 기다리고 기다렸다. 지루한 시간이 흐른 뒤에 “55번 손님!”하고 불렀다. 정비사가 신원을 확인한 뒤에 다시 부르더니 “초기화(初期化, initialization) 시켜야겠다.”고 말한다. 아이폰의 초기화란 구입당시 공장에서 나온 최초의 상태로 되돌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이제까지 저장된 모든 전화번호와 메모, 사진과 동영상, 그리고 자주 듣는 음악 등 모든 자료와 앱을 날려버렸다. 기억을 상실한 아이폰은 오직 하나의 쇠붙이로 침묵을 계속했다.
이 상황을 집에 있는 아내에게 알릴 방법마저 없었다. 무엇보다 하나뿐인 손녀, 리아가 태아 때부터 보내온 초음파 사진을 비롯해서 5천여 장의 리아 사진과 동영상이 날아 가버렸다. 내일은 수필부산문학회 번개모임이 있는 날이고 이어서 음악회와 크고 작은 모임이 있어서 연락을 주고받아야할 형편이었다. 신경은 오직 아이폰을 다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데 모아졌다. 궁리를 했다. 이참에 휴대폰 없이 단절의 삶을 살아봐? 아니면 통신비가 싼 효도폰을 새로 하나 더 구입해? 아니 앞으로는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을 휴대폰을 아예 끄는 날로 정해볼까 하는 등 별별 생각을 다했다.
결국 손재주가 좋은 사위, 조 서방을 찾아 가기로 했다. 조 서방은 나의 컴퓨터 선생님이고 리아가 태어날 때부터 나라안팎의 가족들이 아이폰으로 그룹 카톡을 만들어 소통시키며 백업과 교체를 책임진 관리자다. 오랜만에 찾아간 사위는 마침 사무실에 있었다. 장인의 예고 없는 방문에 놀란 사위는 의자를 권하며 무슨 일인가 하고 나를 살폈다. “자네, 내 아이폰이 먹통이 됐네”하며 휴대폰을 내놓고 비활성화 단계부터 A/S센터에서 초기화를 시킨 과정까지를 설명했다. 커피를 내가 좋아하는 연한 아메리카노로 만들어 내고는 재바른 솜씨로 비밀번호를 입력시켰다. 나도 헷갈리는 비밀번호를 사위는 몇 가지를 입력시키더니 “됐습니다.”한다. 숫자 앞에 리아의 영문이름 ‘Leah'가 들어가야 하는데 그걸 깜빡하는 바람에 난리를 친 것이다.
그때서야 나도 정신이 들었다. 초기화된 아이폰에 영혼과 숨통을 틔우는 일이 남아 있었다. 제일 큰 걱정은 리아가 태아 때부터 유치원에 다니는 최근의 동영상과 사진의 복원이었다. “아버님, 걱정 마십시오. 아마 제가 지난해 컴퓨터에 한 차례 백업해 놓았을 겁니다. 제가 밤에 들러서 복원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고맙네”라는 응답만 했다. 밤이 되어 딸이 먼저 오고 그 뒤에 오늘의 구세주 같은 사위가 등장하고 돌아왔다. 내 컴퓨터의 아이튠즈(iTunes)와 아이클라우드(iCloud)로 백업시켜놓은 데이터를 찾아내 복원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나의 건강상태와 습관, 그리고 기억력 등이 화제가 되었다. 아이폰의 비밀번호를 깜빡 잊고 허둥지둥한 하루였지만 내 아이폰은 가족의 정다운 말문을 열어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데이터의 정리와 리아의 최근 사진과 동영상을 가족들로부터 전달받아 하나둘 복원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하루에 단 5분씩이라도 절대 침묵에 들어가자고 다짐했다. 우리가 살면서 한 번씩 뇌와 몸을 초기화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원하고 인생, 우리가 그리는 세상을 백업시킬 수 있기를 기도했다. 다시 조용함을 들을 수 있게 해준 아이폰의 초기화 소동이 고마웠다. 순간 완전한 정적에 들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삶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열차는 이미 초기화된 나와 아이폰을 태우고 출발의 기적을 울렸다. 복더위에 내 아이폰의 초기화 소동은 그렇게 유난을 떨며 지나갔다.
첫댓글 절대 침묵의 시간을 묵상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요..남의 일 같지 않네요.. 요즘 깜빡 깜박 하며 ...그래도 즐겁게..지내고 있습니다..ㅎ
휴대폰은 아니지만 오래전 컴퓨터에서 작업한 것이 몽땅 날라갔던 기억이 나네요.
뭐라 표현할 수 없을만큼 난감했는데...
저 역시도 모두 날리진 않았지만 비슷한 기억이 있습니다. 아쉽지만 제 머리도 '초기화(?) 하자!' 하고 지내니
별일 아니란 생각이 드는군요~^^
휴대폰을 잃어버려 모든 전화번호가 다 날아간 적이 있어요. 얼마나 답답하던지요.
그날 이후 휴대폰에 있는 모든 사진이나 주소를 컴퓨터에 저장해 두는 습관이 생겼어요.ㅎ ㅎ
대견한 사위가 있어 소중한
자료를 복원시킬 수 있어 다행입니다.
정말 없으면 불안할만큼 우리의 삶에 크나큰
비중을 차지하는것 같아요.
미래에는 로봇의 자존심까지도
고려해야 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ㅋ
믿기 어려운 추측도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