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스 황의 휴머노이드 시대 선언에도
삼성전자의 이재홍인가 황인가 하는 사람의 2인자가 재무전무인데
그 사람이 사라져야 삼성전자가 살아난다는 둥.
반도체의 파운드리가 핵심이라든가.
CPU에 GPU. 의도는 아니지만 인공지능 구동에 딱 이더라 해서 후자가 떳다는데.
그래도 난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이 전쟁의 반향으로 봇물처럼 터진 1922년의 서구 문학과 예술 작품 소개를 읽고 있다.
몸살이 등짝에서 바이킹을 타고 있을 때,
어느 한가로운 평일 오후, 영하 5도 눈바람 성주산을 이리저리 강아지처럼 놀아다녔다.
'나무들은 겨울의 아름다움으로 단장하고
숲속의 오솔길들은 눈비단길이 되었다.
12월의 오후 볏 아래
소나무의 흰 가지는 하늘을 비추고 있다.
가득 차 있는 산 속 나뭇가지들 사이에
열 너덧 마리의 산새들이 추위를 잡고 있다' (예이츠의 시를 패러디했다)
그래, 난 적당히 미치면 휴모노이드 하나를 사겠다.
그 놈에게 내가 평생 사랑한 여인의 모든 데이터를 집어 넣어 그 녀로 만들 것이지.
내 정신 건강은 그렇게 유지될 것이다.
문제라면 내 죽어 썩은 육체가 넘에게 전염병이나 옮기지 않을까 하는 거다.
내 휴모노이드도 같이 걱정해 줄것이다.
내가 그렇게 하라고 모드를 공감과 친절모드로 정해놓을 것이니.
문제는 내 포함 늙은 것들이다. 이 나라가 새나라가 되는 것은 젊음에 있다.
윤머시기가 체포가 되든, 뭐가 되든 그 결정은 젊음에 달려 있다. 늙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해서 관저 앞 찬반 대결은 가위바위보도 좋지만, 참석자 수 나이 합산으로 덜 나가는 젊음이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
이 시를 보라~
'저것은 늙은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다.
팔에 팔을 낀 젊은이들, 숲속의 새들
저 죽음의 세대들은 저희들의 노래에 취하고
연어 오르는 폭포, 고등어 우글거리는 바다
고기나 짐승이나 새들은 온 여름 동안
생겨서 나서 죽는 온갖 것들을 찬양한다.
모두들 관능의 음악에 취하여
늙지 않는 이지(이성과 지혜)의 기념비를 모르는구나(예이츠의 시를 옮겼다)
1922년 '탐욕스러운 사회'를 쓴 토니(1880~1962)의 자본주의 비판에 동의하는 것은, 그가 장교로 임관하는 것을 거부하고 사병
으로참호 속에서 복무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이고, 아일랜드 출신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문장과 문체, 언어의 조탁
은 하나도 모르겠고, 관심도 매우 많이 없지만, 소설의 주인공인 블룸이 '세상을 타인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편견
의 굴레에서 벗어난 인물'이었기에 그의 소소하고 시시하고 평범한 하루의 일상을 닮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그래 나는 모르겠다. 젠슨 황의 돈을..그 자켓을. 그저 하루 열심히 사는 존재로 그를 존중해 줄 것이다 오늘 나는 성주산 어느
골짝에서 너무나 눈부신 소나무 나뭇가지를 보고 결심했다. 그래 이거다.
평범하되 편견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