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천차만별 의사들
어떤 의사에게 진료 받느냐가 중요하다
나를 진료한 정신과 원장은 내가 지나친 성취욕구로 스스로 소모했고 그에 따른 피로와 자책, 회한이 우울증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치료의 첫 단계는 망가진 몸과 마음, 정신을 원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좀 쉬고 자신을 즐겁게 해주세요.”
내 몸과 마음을 더는 혹사하지 말고 편하게 해주라고 했다.
선생님의 인생 경력을 보면 어려운 여건을 잘 참아오셨고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니 좋게 생각하십시오. 세상만사 마음 정한 대로란 말 있죠? 정말 맞는 말입니다.”
그의 환자 중에는 부유층 환자가 적지 않다고 했다.
“정말 부러울 것 없는 여건을 가지고도 전혀 행복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뜻밖에 많습니다. 열 가지 중 아홉 가지가 잘 돼도 한가지가 안 돼 불행해하는 분들입니다. 이것이 우울증입니다.
그러나 남편도 없이 파출부를 하면서 자식들을 키워나가는 아주머니들에게는 삶이 힘들지언정 우울증이 찾아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 오직 자식 잘 키워야겠다, 잘 살아야겠다는 뚜렷한 삶의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왠지 마음에 힘이 솟는 걸 느꼈다. 이 의사는 내가 1개월전에 처음 접했던 의사와는 달랐다. 그때 나는 밤에 난데없는 공황발작으로 혼이 난 뒤 지인에게 물어물어 개인 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서울 변두리의 낡은 상가 건물 2층에 위치한 병원에 들어서니 서너 사람이 앉아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심이 가득한 표정의 40대 아주머니, 백수로 보이는 20대 청년, 30대 초반 여성 등…. 다들 활기를 잃은 모습이었다. 나는 괜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원장이 몇 가지 테스트와 진찰을 마친 뒤 말했다.
“우울증인데 한 1년은 치료받아야 할 겁니다.”
나는 그렇게 긴 기간 동안 치료받아야 한다는 데 수긍하기 어려웠다.
“선생님은 그동안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심신이 지친 것이죠.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쉬세요.”
그의 말에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내 나이 이제 56세. 그런 데 현역에서 물러나라니….
“무릎을 많이 쓰면 연골이 닳듯 머리와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뇌세포도 닳고 신경전달물질들이 원활히 공급되지 않으니 활동이 둔해지죠. 그래서 행복감을 높이는 신경전달물질을 인공적으로 공급해줘야 합니다.”
“그게 뭐죠?”
“세로토닌(serotonin)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편하게 하는 신경전달물질이죠. 우울증에 걸리면 뇌에서 세로토닌 분비량이 적어져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겁니다.“마음과 머리를 많이 써서 그렇습니다”
내게는 완쾌 여부가 중요했다. 이 지긋지긋한 병을 고치지 못해 마음의 기운이 이렇게 다운된 채 평생 살아가야 한다면 정말 힘들 것 같았다.
“치료를 받으면 완쾌될 수 있나요?”
“이런 병은 어차피 완치란 없고…. 이젠 병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심드렁한 표정에 사무적 말투. 불치병을 선고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매우 실망했다. 의사는 환자에게 따뜻한 신뢰와 애정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래야 환자는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고 그의 말에 따르게 된다. 그러나 이 의사는 내게 희망보다는 절망을 주었다.
의사는 일주일분의 수면제와 함께 세로토닌을 처방했으나 나는 하루치만 먹고 더 이상 먹지 않았다. 그 의사 말이 신뢰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방문한 병원의 원장은 내게 힘을 북돋워주었다. 내게 극복할 수 있다며 격려하고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그 덕분에 내 마음에서 희망의 빛이 솟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과 치료가 일반적인 서양 선진국에서는 성직자보다 정신과 의사나 심리 상담사를 찾아가 마음속 고민을 털어놓는다는 얘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상념에 젖었다.
‘지난 몇 개월간 내게 일어난 일을 가지고 글을 쓴다면 참 파란만장하겠다. 요즘 난 너무 나 자신에게 빠져 있다.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늘 마음이 복잡하다. 아프다. 엉켜 있다. 불안하다. 사람들 보기가 두렵다. 왜 그럴까. 이렇게 사는 게 최선일까? 예전과 너무나 달라진 지금의 모습….
불안, 초조, 죄책감, 우울증, 불면증, 격심한 심장박동, 공황발작 등 참으로 여러 가지를 겪었다. 인생의 뒤안길, 내 정신의 밑바닥을 본 셈이다. 이 모든 것을 이겨야 한다. 참아야 한다. 난 참을성이 부족하다. 과거에도 참지 않고 감정대로 처리해서 생긴 업보를 지금 다 받는 것이다.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 희망을 품자. 늘 좋은 생각만 하자. 곧 달라질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글로 쓰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