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시노드 여정] (11) 이냐시오 영성으로 본 시노달리타스 이냐시오 영성, 하느님의 길 향해 나아가도록 ‘회심’의 삶으로 초대 - 예수회 수도자로서 첫 번째 교황인 프란치스코가 오늘날 교회 쇄신의 화두로 강조하고 있는 ‘시노달리타스’는 사실상 그분의 ‘영적 회심 체험’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바로크 시대 거장 피터 폴 루벤스가 그린 ‘성 이냐시오 로욜라’ 초상(왼쪽 그림)과 프란치스코 교황.
이냐시오 영성으로 본 시노달리타스
성 이냐시오는 자신의 삶 안에 밴 ‘하느님 체험’을 통해 관상·식별·활동과 투신을 지향하는 예수회를 설립하였다. 그의 신앙과 생애를 꿰뚫는 이냐시오 영성은 ‘활동 중에 관상’을 실천하며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찾기’라는 모토로 요약된다. 이냐시오 영성의 핵심 원천인 ‘영성수련’은 성인이 평신도였던 시절,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기록해왔던 자신의 ‘영적 회심 체험’에 기초하고 있다.
예수회 수도자로서 첫 번째 교황인 프란치스코가 오늘날 교회 쇄신의 화두로 강조하고 있는 ‘시노달리타스’는 사실상 그분의 ‘영적 회심 체험’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베르골리오 신부는 37세 젊은 나이에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으로 선출되어 과도한 책임감과 확고한 결단력으로 성실하게 책무를 다했다. 하지만 뒤늦게 돌아보니 그러한 태도는 일종의 ‘권위주의’로서 자신의 미성숙한 모습이었다고 고백하였다.
바오로 사도가 초대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 고향 타르수스에서 유배생활을 보냈듯이(사도 9,29), 베르골리오 신부는 코르도바 섬에서 유배생활(53~55세)을 하며 인생의 밑바닥을 치고, 수난받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깊이 체험하면서 ‘복음의 기쁨’을 열정적으로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교구의 대주교가 되어선 (관구장 때의 통치스타일을 버리고) ‘듣고 또 듣고’ 자문회의를 확대하며 그야말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 나서며’ 경청하는 가운데 교회의 신앙과 공동선에 필요한 식별과 결정을 해나가게 되었고, 로마의 주교(교황) 자리로까지 불림 받게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 「사랑의 기쁨」, 「찬미 받으소서」, 「모든 형제들」 등 회칙을 열정적으로 반포하면서 성교회와 전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하는 참된 종교 지도자로서 전 세계인들에게 자리매김해왔다. 그런데 종교사회학자인 필자가 보기에 그분의 모든 말씀과 회칙·가르침은 총체적으로 시노달리타스를 지향하고 있으며,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교회 쇄신’이라는 가장 현실적이면서 중차대한 성교회의 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
- 2012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장 시절, 화재 희생자 유가족을 만나 위로하는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이냐시오 영성은 모든 식별과 결정에 앞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청원하는 기도를 강조한다. 사실상 ‘영적 식별’은 처세술 같은 기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주도권 앞에서 나의 권위·바람·애착을 내려놓는 불편심(indifference)을 갖도록 요구하는데, 이렇게 할 때에야 기도와 성찰 등 영적 훈련을 통해 (내 뜻에 앞서서) 성령님의 이끄심을 더 깊이 알아듣는 영적 감각이 자라난다. 이것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가운데 체험하는 은총으로서 나 중심의 편협함에서 벗어나 더 큰 ‘내적 자유(inner freedom)’를 누리게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주교 서품식에서 “성령을 자기 마음으로 길들이려 하지 말고, 성령님께 기도 안에서 길들여져야 한다”는 훈화 메시지를 나누곤 하셨다. 우리가 교회의 탄생을 ‘성령 강림 대축일’로 보듯이 살아계신 하느님, 곧 성령님께서 교회의 참된 인도자이심을 고백하고 그분의 영감과 이끄심을 감지하고 깨닫고 따르는 길이 영적 식별과 결정의 목표인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함께 걷는 동반 여정(syn hodus)이야말로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다.
특히 소임과 직책을 맡은 성직자나 평신도가 사적으로 친밀한 신자들의 이야기만 듣고 자기가 좋아하는 프로젝트만을 추진하고자 할 때 ‘사춘기 영성’에 빠질 위험이 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꼭 이루고 말겠다는 방식은 미성숙한 개인으로서 종교 지도자가 ‘무질서한 애착’에 빠져 있는 표지가 될 수 있다.
이냐시오 영성의 관점에서 교회의 일, 사도직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며, 성직자·수도자·평신도 지도자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주시는 협조자 성령님의 영감과 이끄심을 알아듣는 기도와 식별의 삶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에 앞서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애쓰시고 수고하시며 활동해 오셨다.’(영신수련 #236)
- 2019년 한국을 방문한 예수회 총장 아르투로 소사 신부와 예수회 회원들. 오세일 신부 제공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벗으로
이냐시오 영성은 인간의 불완전함, 나약함, 자기중심으로 기우는 경향, 즉 하느님께로 나아가기에 부족한 죄인 됨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인격적으로 체험하는 은총으로서 영적 성장을 도모한다. 예수님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이후에도 자기중심의 ‘죄인’ 됨의 성향을 스스로의 힘으로 도려내 없앨 수 없다.
우리 신앙인은 ‘겉보기에 좋은 선익(apparent good)’, 즉 부와 명예, 성공과 자족자만 같은 ‘세상의 유혹’이 아니라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영적 투쟁을 하도록 주님으로부터 벗으로 초대받는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때에야 우리는 자신의 무질서한 애착을 넘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그분의 뜻과 마음을 조금 더 헤아리고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은총을 입게 된다. 우리는 공동체 안이나 각자 삶의 자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맞아들이고 체험하는 여정을 통해 성령께서 이끄시는 고유한 은사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다.
동반 여정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취약함을 인정하는 공동체 동반여정은 우리가 영적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된다. 인스타그램에서 보듯이 요즘 세상은 힘 있고 능력 있고 잘난 사람만을 칭송하고 루저(패배자)들은 무시하고 있지만, 성교회는 그러한 미성숙한 세속적 친교 방식을 단호히 거부한다.
예수님은 남들에게 위세 부리며 군림하지 말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섬기라고 강조하셨다. 교회 공동체나 세상 속 사도직 안에서도 우리는 가난하고 소외된 형제자매들에게 우선적인 선택과 관심, 열린 친교, 참여와 미션을 살아가도록 초대받는다. 우리가 참된 교회 공동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신의 약함과 상처, 보잘 것 없던 삶의 여정을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동반 여정을 통해 온전히 대면하고 품어 안는 ‘영적 회심의 체험’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이냐시오 영성은 한마디로 평생 하느님의 길을 향해 나아가도록 끊임없는 ‘회심’의 삶으로 초대한다. 우리의 내면이 (세상 다른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 자비와 사랑에 조금씩 젖어들어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교회와 가족, 직장과 공동체 안에서 ‘복음의 기쁨’을 맛 들이며 성령님의 은총 안에서 친교·참여·미션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증거해나갈 수 있게 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6월 16일, 오세일 신부(예수회 · 서강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