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여행 백배 즐기기ㅡ조운제 산생님
주의 사항
이 글은 50쪽이 넘는 긴 글입니다.따라서 시간 여유를 가지고 읽기 바라며 시간 여유가 없으신 분은 10탄으로 구성된 소제목을 보고 골라 읽으시기 바랍니다.
1탄 전주의 사적지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인다.
전주를 여행하기 전에 사전 지식을 익혀두면 여행을 백배 즐길 수 있다.
우문유답 회원들이 내고향 전주로 1박2일 여행을 간다기에
쪼매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경기전과 조경묘는
전주사람이나 전주 출신은 누구나 누차 둘러 봤을 것이다.
요즘은 전주 한옥마을이 핫한 관광지로 뜨게 됨으로서 많은 젊은이와 외국 사람들이 전주로 전주로 몰려가 한옥마을을 구경하고 있다.
경기전과 조경묘는 한옥 마을 앞에 있다. 그래서 관광객들은 자연스레 저 두 곳에 들려 둘러보곤 한다.
경기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 둔 곳이고, 조경단은 전주이씨 시조인 이한의 무덤이고, 조경묘는 이한 부부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제 풍남문의 유래를 소개한다.
풍남문의 풍은 *풍패 지향*이란 말에서 따왔다.풍패 지향은 전주를 가리키는 말이다.그리고 풍패란 중국 한나라 시조 유방의 고향이다.
따라서 풍패는 왕조를 일으킨 시조의 고향을 일컫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전주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란 뜻이다.
전주객사를 풍패지관이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성계의 고향은 전주가 아니다.이성계의 고향은
영흥 즉 함흥이다. 그러면 왜 조선왕실은 전주를 이성계의 고향처럼 여겼는가 ?
이성계는 전주 이씨이다.
전주는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의 고향이다.뿐만 아니라 이성계의 5대조 할아버지 이안사의 고향도 전주이다.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이성계의 5대조 조상들은 (목조,익조,도조,환조 등) 왕으로 추존 되었다. 전주는 이성계의 고향이 아니라 이성계 조상들의 고향이다. 즉 조선왕실의 고향인 것이다.
옛날에 전주현을 둘러싼 전주성이 있었다.
전주성에는 네게의 문이 있었다.
완동문은 전주성의 동쪽문이고
패서문은 전주성의 서쪽 문이고
풍남문은 전주성의 남쪽문이고
공북문은 전주성의 북쪽문인데
지금은 풍남문만 남아 있다.
일제가 길을 낸다고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역사 교과서에는 전주성이 딱 한 번 나온다.
동학혁명 때 동학군이 전주성을 함락시켰다고 말이다.
이제 부터는 전주의 대표적인 사적지 경기전,조경묘,조경단,
오목대에 대한 이야기이다.
경기전의 경기는 경사 慶에 터 基자로 *조선의 건국*이란 경사스런 일이 일어나게 한 성스러운 터란 뜻이다.
덕진 건지산에 있는 조경단은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이 묻힌 곳이다.
경기전 뒷켠에 있는
조경묘는 이한 부부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이한의 17대 손이고,이성계는 21대 손이다.
경기전과 조경묘는 일주문과 하마석이 따로 있다. 두 곳이 별개로 된 신성스런 사적지란 뜻이다.
그리고 조경단,조경묘의 조경은 비롯될 肇와 경사 慶으로 경사스런 일이 비롯된 곳이란 뜻이다.
경기전과 조경묘는 조선왕실이 전주를 조선왕조의 발원지로 인정한 증표인 것이다.
또한 이목대는 이성계의 고조 할아버지 즉 4대조 이안사가 살던 터이고 오목대는 이성계가 황산벌 싸움에서 왜구들에게 대승을 거두고 승전을 자축하는 잔치를 벌인 곳이다.
그 자리에 포은 정몽주가 축하차 함께 해서 이성계에게 역성혁명의 뜻이 있는지 이성계의 의중을 떠 본 일화는 유명하다.
이성계가 한고조 유방이 불렀던 대풍가를 부르는 걸 보고 이성계의 혁명의지가 확고함을 간파한 포은이 오목대에서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고려 왕실의 운명을 염려 하며 탄식했단다.
포은은 그 길로 개경이 바라다 보이는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 자신의 심경을 담아 시 한 수를 짓는다.이성계 목전에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순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절경으로 오목 요대라 해서 완산 승경의 하나이다.
완산은 전주의 옛 이름이다.
757년 신라 경덕왕 때 전주로 바뀌었다.
2탄 이성계와 아지발도
지금 부터는 이성계가 황산벌에서 왜구를 무찌른 이야기이다.
려말 선조 때 왜구들은 남해와 서해로 한반도 남쪽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일삼다가 최무선에게 금강 전투에서 패하여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퇴로가 끊긴 상태였다.왜구의 장수는 아지발도란 용맹한 소년장수였다.그는 온 몸을 철갑으로 두른 갑옷을 입고 있어서 명궁인 이성계도 그를 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계략을 써서 그를 잡게 된다.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들은 열배가 넘는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와 툰두란의 계략에 말려 대패했었다.
툰두란은 함경도 영흥에 살던 여진족 출신이지만 이성계와는 어릴적 부터 절친이었다.
그는 이름까지 이지란으로 바꾸고 이성계에게 충성을 다했었다.
이성계는 한 노파를 이용하여 아지발도를 황산으로 유인하였다.
그리하여 다가 오는 아지발도의 투구를 여진족 출신 이지란이 활을 쏘아 떨어뜨리자 그가 "아악!"하고 입을 벌렸다.
그 틈을 타 이성계가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입에 활살을 꽂았다.
아지발도는 말에서 굴러떨어져 절명 하고 말았다.
그가 절명하자 대장을 잃고 갈파질팡,우왕좌왕하는 왜구들을 이성계의 장수들이 쓸어 버린 것이다.
남원에는 인월면이 있다.
인월이란 달을 끌어 올린다는 뜻이다. 이성계가 아지발도를 공격하기로 한 날이 그믐날이었단다. 그믐날 밤이라서 달이 뜨지 않으면 이성계와 이지란이 아지발도를 활로 쏘아 맞출 수가 없다.
그래서 이성계가 낛시로 달을 끌어올려 밤을 밝혔단다. 그리하여 작전에 성공하고 아지발도를 잡을 수 있었단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이야기이다.
원래 설화는 모두가 저렇게 황당한 것이다.
남원의 운봉면 황산리에 가면 거대한 황산대첩 승전비가 세워져 있다.
계백장군이 이끄는 5천 결사대가 5만의 신라 군에게 전멸한 곳도 황산이다.김제에도 황산이 있다. 황산은 전국도처에 있다.땅이 누런색인 산을 황산이라 하기 때문이다.
3탄 조선 왕실과
전주와의 관계
전주는 조선왕조의 고향이요 발원지임이 분명하다.
왕실에서 그렇게 여기고 전주를 중시하고 대접해 왔음이 전주 곳곳에 있는 사적에 드러나
있어서 하는 말이다.
전주이씨 시조 이한은 신라에서 사공이란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전주에 터를 잡고 세도가로 살아왔다.그의 17대손 이안사(목조로 추존됨)는 관기를 두고 별감과 싸우는 불미스런 일에 연루되어 별감의 친구인 전라 감사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강원도 삼척의 두타산 속으로 피신 하게 된다.그런데 별감의 친구인 전라감사가 강원감사가 되어 강원도로 부임 하자 이안사는 함경도 영흥으로 까지 도망가 살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영흥은 조선왕실에서 전주 못지 않게 중요시 했었다.
경기전 내에 있는 전주사고 만 해도 그렇다. 조선왕조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가 성균관과 충주,성주 그리고 전주 등 네곳 뿐이었는데 저기에 전주를 끼워 준 것만 봐도 알쪼다.
전주사람들은 전주를 대접해 준 조선왕실에 보답이라도 하듯 죽기 살기로 조선실록과 이성계의 어진을 보존해왔다.
그 결과 이성계의 어진도, 조선실록도 전주에 있는 것만 살아 남았다.다른 것들은 전란에 죄다 불타 없어졌단다.
전주인들의 수고가 없었으면 조선실록과 이태조 어진은 오늘 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독자들은 이성계의 어진이 별거냐고 생각할 지 모르겠다.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이다.조선 왕실은 오백년 넘게 이태조를 신처럼 받들어 모셨었다.어진을 살아있는 태조로 여겼던 것이다.
어진을 봉안할 때도 왕의 행차와 똑같은 절차와 격식을 갖추었었다.
송하진 전 전주시장은 실록 보존 사적비를 경기전 사고 앞에 세웠다.참고로 정동영과 송화진은 필자의 전주고 1년 후배이다.
전면의 비석명은 자신의 아버지 강암 송성룡의 글씨이고 비의 뒷면에 새겨진 글은 송화진 시장 자신이 쓴 것이다.
전주시민은 예나 지금이나 기록물 보존유지에 있어서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종은 친필로 조경단 앞에 *대한 조경단비*를 세웠을 뿐 아니라
이목대에도 친필로 *태조고황제주필 유지*란 비석을 세웠다.태조고황제는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 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