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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과 기독교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라고들 한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기독교는
죄사함, 거듭남, 영생, 천국, 하나님 나라, 부활 같은
구원의 언어들을 전승을 통해 간직해왔다.
소중한 언어들이다.
이런 소중한 언어들이 게토 언어로 전락한 현실이 슬프다.
기독교 서클 밖에서는
물론 내부에서조차 소통의 능력을 상실한 사어(死語)가 된 현실이 안타깝다.
소통을 상실한 언어에 생명력이 있을까.
생명력을 잃은 언어에 구원의 힘이 있을까.
이 언어들이 생명력을 회복하고 소통의 능력을 회복하지 않으면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모든 진술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기독교의 선교적 과제는 양적 팽창이나 외적 성장이나 지리적 확장에 있지 않다.
죽어가는 구원의 언어들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일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구원의 언어들이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기독교는 근본에서 허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징후가 이미 농후하다.
구원의 언어들을 살리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으며 삶의 토대가 되는 범주들,
즉 일상을 구성하는 삶의 기본 범주들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런 삶의 기본 범주들 안에서 구원의 언어들이 소통 능력과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구원의 능력은 신화적 껍질을 벗고 현대인의 삶 속에 진정으로 성육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때 기독교 역시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을 구성하는 삶의 기본 범주들에는 ‘
시간’과 ‘공간’을 비롯하여, ‘존재’와 존재의 ‘내면’, 삶의 ‘상태’ 같은 것들이 있다.
이런 범주들 안에서 인간은 자신을 형성해나가며 삶을 구성해나간다.
구원의 언어들이란 교리로 암송해야 할 무미건조한 공식이 아니다.
이런 삶의 범주들 안에서 경험되고, 경축되고, 전승되어온
인간과 삶의 어떤 새로운 ‘리얼리티’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 새로운 리얼리티에 대한 경험을 일컫는 말이 바로 ‘구원’이다.
구원의 언어들 중에서 사순절을 염두에 두고
묵상하고 싶은 구원의 언어가 있다. ‘영생’이다.
영생이란 무엇인가.
죽은 다음에까지 무한히 지속되는 시간의 흐름인가. 아니다!
한 마디로 말해 영생이란 ‘시간’이라는 범주와 관련된 구원의 언어이다.
덧없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원’이라는 신적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 영생이다.
크로노스적
인간의 시간 속에
카이로스적
하나님의 시간이 침입하는 것을 허용할 때
경험하게 되는 삶의 리얼리티가 영생이다.
이때 시간의 무상성과 무의미성은 극복되며
시간의 모든 순간들은 의미와 가치로 빛나기 시작한다.
이런 ‘순간’은 덧없는 시간의 무한한 지속보다 값지다.
그래서 “한 방울의 영원은 시간의 망망대해보다 무게가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기독교의 진술이다.
교회력이란 무엇인가.
예수 안에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시간’이라는 범주로 일상을 재구성한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안에서 ‘공허한’ 인간의 시간이 ‘충만한’
하나님의 시간으로 변하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했다.
무미건조했던 시간이 활기를 띠고, 어떤 궁극적인 목적을 갖고
종말론적 미래의 영광을 향하여 일관되게 나아가고 있다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들은 일상의 중심을 관통하는 신적 구원 의지를 감지했으며
그것을 세속사의
깊이와 이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또 다른 시간인 하나님의 구원사로 파악한 것이다.
이 구원사의 빛에서 기독교인의 일상과 시간을 새롭게 구성한 것이 교회력인 것이다.
구원사의 중심은 예수다.
따라서 구원사의 빛에서 기독교인의 일상을 재구성한
교회력의 중심도 예수여야 함은 물론이다.
교회력은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대림절’이다.
대림절은
인간의 덧없는 삶과 인류의 역사적 질곡에 대한 깊은 탄식과 부르짖음을 터뜨린다.
이러한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이 ‘성탄절’이다.
성탄절은 덧없는 인간의 시간 속에 침입한 영원 즉 신적 시간이다.
신적 시간인 영원이 인간의 시간 속으로 침입할 때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는다.
시간적 사건이 존재론적 사건으로 변형된다.
이렇게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 하나님으로 인해 인간의 시간은
그 덧없는 수평의 흐름을 멈추고 돌연 수직으로 비상하며 빛을 발한다.
주현절(主顯節)’이다.
주현절에는 예수의 세례 받으심과 그 뒤에 이어지는 공생애를 묵상한다.
주현절 마지막 주일은 변화주일로서 “높은 산”에서 있었던 예수의 변모 사건을 회상한다.
한 마디로 주현절은
예수의 공적 삶에 침투한 신적 시간들을 기독교인의 삶 속에 확장하는 기간이다.
이로써 기독교인의 일상의 시간들은 ‘예수화’한다.
주현절이 끝나면서 시작되는 ‘
사순절’은 교회력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사순절은 구원사의 클라이맥스인 부활절에 직접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이 구원사의 준비과정이라면
사순절은 구원사의 정점이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절기인 부활절도
이 사순절의 과정이 없다면 무의미하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의미가 있겠는가.
아니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사순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모든 국면이 극한으로 치닫는다.
그것은 마침내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르며 마침내 부활의 생명으로 폭발한다.
따라서 사순절에 예수가 빠진다면 이 모든 것이 헛일이 된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오늘날 한국교회의 사순절에 예수는 없다.
보라색 장식과 특별 새벽기도회 정도가 있을까.
그리고 그 기도회조차 세속의 축복을 욕망하는 기복의 시간일진대….
사순절이 어떤 절기인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부터 시작되는 회개의 절기 아닌가.
회개란 덧없는 것들에 탐닉했던 지난 시간들에 대한 깊은 회오(悔悟)이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을 예수의 빛에서 새롭게 빚으려는 몸부림이다.
이런 회오와 몸부림이 그래도 옛날에는 있었다.
금식을 한다든지 육식을 금한다든지 이마에 재를 찍어 바르면서 흙으로 돌아갈
인간의 덧없는 운명을 생각한다든지….
떠들썩하고 화려한 음악회나 오페라는 물론이고, 알렐루야나
대영광송 같은 기독교 음악도 금지했다고 한다.
회개와 금욕을 통해 영적 갱신을 이루어 예수를 닮고 예수를 따르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런 기독교인들의 노력 이면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사람들만이
그의 부활에도 동참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지극히 소박한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교회에서는 진정한 회개도 금욕도,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려는 소박한 마음 씀씀이도 없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 없는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덧없는 것들에 탐닉했던 지난 시간들에 대한 깊은 회오(悔悟) 없이는 구원사가 진행되지 않는다.
‘덧없는 것들에 탐닉했던 지난 시간들’을 한 마디로 일컫는 성서적 언어가 바로 ‘죄’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가 의미하는 덧없는 것들에 탐닉했던
지난 시간들과의 ‘접속’을 끊고, 예수와 더불어 예수 안에서 열리는
신적 시간(영원)에 새롭게 접속되는 사건이다.
한 마디로 회개란 ‘
새로운 시간과의 해후’로서 시간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함축한다.
그런데 시간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경험은 존재론적 사건이기도하다.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적 시간과의 접속은 과거의 덧없는 시간이
빚어낸 존재를 돌파(突破)하여 신적 시간이 빚기 시작한 새로운 존재로
돌입(突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출현하는 새로운 존재 앞에 ‘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새로운 삶의 지평이 펼쳐진다.
그러면 새로운 시간과의 해후를 통한
존재론적 사건이 한국교회의 사순절에 이루어지고 있는가.
진정한 회개를 통한
새로운 존재가 시대를 향해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주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까닭은, 한국교회를 오염시킨 세속의 실재관과 인간관 때문이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즉 오감(五感)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실재(진짜!)로 여기는 피상적인 실재관과,
(이 실재관에 따라) 육체라는 고깃덩어리를 인간이라고 착각하는
천박한 인간관이 교회 내에까지 침투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실재관과 인간관을 흉내내고 복제하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확대재생산하는 온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교회는 더 이상 세속의 피상적인 실재관과 천박한 인간관을 막아내는 보루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시간과의 해후를 통한 존재론적 사건인 ‘회개’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려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감수성이 살아나야 한다.
다시 말해 비가시적 차원을 그 어떤 것보다 생생하고 리얼하게
경험할 수 있는 실재관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껏해야 회개란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 잘못된 행동에 대한
감상적 후회의 차원에 머물고 말 것이다.
이런 후회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덧없는 것들에 탐닉했던
과거의 시간은 또 다시 일상의 모든 시간을 점령할 것이며,
신적 시간과의 해후를 통해 시작된 구원사는 그 동력을 잃고 중단되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과 사기(거짓 증거)를 금하고 있는
십계명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실재관과 인간관에 비추어 생각해보자.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이 실재라고 생각하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인이 아니다.
타인을 칼로 찔러 살해하지 않으며,
배우자 이외의 상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지 않으며,
남의 지갑이나 물건을 훔치지 않으며,
현실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노골적으로 남을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보이지 않는 것을 그 어떤 것보다 생생하고 리얼한 것으로 경험하고
고백하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그는 거의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보이는 행동의 차원에서는 몰라도 보이지 않는 내면의 차원에서는
수없이 계명을 범한 대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로 상처를 주어 영혼을 죽이는 경우가 허다하며,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경우가 셀 수 없으며,
타인의 기쁨과 평화를 뺏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말과 실천이 다른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차원을 더 리얼하게 여기는 실재관에서는 이런 것이 더 큰 죄가 된다.
자신을 가리켜 ‘죄인의 괴수’라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은
바로 이런 사정을 깊이 통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모든 죄에는 벌이 주어져야 하므로 ‘죄인의 괴수’로 자신을 인식한
그는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원하랴!”
사망 곧 죽음으로,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으로만
죄값을 치를 있는 실존의 궁지를 깨달은 사람만이 부르짖을 수 있는 처참한 절규이다.
물론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궁지에서 벗어나는 길을 발견한다.
그리고 율법에 연루된 과거의 시간과의 접속을 끊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신적 시간과의 만남 속에서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재구성한다.
그것이 ‘사울’에서 ‘바울’로의 존재론적 변화이다.
바울에게서 일어난 일이 이번 사순절에 우리에게서도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차원에 대한 감수성과,
그런 감수성에서 나오는 실재관과 인간관을 토대로한 처참한(!) 회개이다.
회개는 깨달음의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실천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야 존재의 변화에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진정한 회개는 새로운 기도의 실천을 요청한다.
그러려면 예수와 상관없는 기도로부터 과감하게 등을 돌려야 한다.
아무리 합리화해도 기복의 혐의를 벗을 수 없는 청원기도가 대표적이다.
물론 청원기도가 나쁜 것은 아니다.
청원기도의 바탕에는 인간의 연약함과 왜소함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대한 소박한 믿음이 깔려 있다.
그래서 청원기도는 기도의 원초적인 형태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주의 기도)도 청원기도 아닌가.
하지만 세속의 축복을 부르짖는 ‘우리들의’
청원기도가 통성기도의 옷을 입을 때
청원기도의 솔직성과 소박성은 심각하게 훼손되고 만다.
이때 기도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신적 시간과 해후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도 아닌,
기껏해야 자신의 소원과 욕망을 이루는 주술적 테크닉에 불과하다.
새로운 기도의 실천이란 관상기도를 의미한다.
관상기도는 명상기법이나 훈련이 아니다.
마음을 이완시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기술도 아니다.
관상기도란 한 마디로 내면에 모신 그리스도
(또는 자신 안에 내재하는 그리스도성)를 바라보는 기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관상기도는 그 동안 한국교회가 해온 기도의 실천과 전적으로 다르다.
관상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청원하기 위해 ‘말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존 속에 ‘머무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
바라봄’과 ‘머뭄’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저 침묵할 따름이다.
그런데 이러한 침묵 속에서 진짜 기적이 일어난다.
과거의 시간을 돌파하여 새로운 신적 시간 안으로 돌입함으로써
존재가 새롭게 빚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존재의 변형, 이것만한 기적이 또 있을까.
내면에 모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동안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점점 발전한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한, 마치 맞선 보는 남녀처럼 호기심은 있지만
아직은 낯선 관계에 머문다.(acquaintanceship)
그 다음에는 낯선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호감으로 바뀌면서
친근해지는 단계로 발전한다.(friendliness) 더 나아가 호감이 우정과 사랑으로 바뀔 때처럼
그리스도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고 삶의 중심에 자리잡게 된다.(friendship)
관상기도가 깊어짐에 따라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마침내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고
그 누구도 침입할 수 없는 깊은 친밀함에 도달하며 이 친밀함 속에서
기도자는 마침내 그리스도를 닮는다.(intimacy)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발전한다는 것은 과거의 시간과의
단절이 더욱 철저하게 진행되며,
신적 시간과의 해후가 더욱 깊게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의 발전과 새로운
시간의 경험을 통해 기도자의 존재의 변화 역시 그 정도가 깊어진다.
처음에는 부분적인 수정(repairing)이 이루어지지만,
나중에는 전면적인 수정(remodeling)이 이루어지며,
나중에는 래디컬한 존재의 변화를 통해 삶의 모든 것이 재편되는
패러다임의 변화(rebuilding)에까지 이른다.
어느 날 문득 기도자는 ‘사람의 일’을 하는 ‘
인간의 아들(또는 딸)’이 아니라 예수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는 ‘
하나님의 아들(또는 딸)’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또는 딸)로서 예수를 닮는 것이
사순절에 기독교인들이 회복해야 할 궁극적인 비전이다.
관상기도 이것을 돕는데
사순절이야말로 이러한 새로운 기도를 실천하기에 적절한 때다.
기도와 함께 말씀은 기독교 영성의 두 기둥이다.
기도가 숨이라면 말씀은 밥이다.
밥보다 긴급한 것이 숨이긴 하지만
만일 밥이 없다면 생존이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말씀은, 예수 안에서 신적 시간(영원)과 해후함으로써
덧없는 과거의 시간을 돌파한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영양소인 것이다.
크게나뉘면
되어진일과 되어질 일로 나눌수있다
한국교회에서 기록된 말씀(성서)과 선포된 말씀(설교)은 넘치지만
인격화된 말씀인 그리스도와 성령의 영감을 통한 현재적 깨달음(내적 말씀)은 빈약하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을 통해 현재화되는 ‘나의’ 말씀이 절실하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을 통한 말씀의 현재화만이
나를 새로운 존재로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성서 읽기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보와 지식을 얻기 위한 성서 읽기(informational reading)가 그 하나요,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빚기 위한 성서 읽기(formational reading)가 다른 하나다.(토머스 머튼)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서 읽기는 존재를 새롭게 ‘형성하기’ 위한 것보다는
정보와 지식을 얻는 것에 그치는 성서 읽기가 대세다.
이런 성서 읽기로는 새로운 시간의 경험과 새로운 존재의 경험이 불가능하다.
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사는 예배를 통해 다시 한 번 재현되고 경축되며,
성령의 임재를 통해 현재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의 예배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구원사)은 더 이상 중심이 아니다.
각종 악기와 현란한 찬양으로 사람을 흥분시키는 쇼이거나 기껏해야
선포된 말씀인 설교를 형식적으로 듣는 시간일 뿐이다.
그래서인가.
교회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도 설교 시간에만 들어와 자리를 채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까닭은?
설교라는 것도 그렇다. 교훈적인 담화나 도덕적인 훈계, 심지어는
세속적인 대박의 욕망에 불을 지르는 각종 간증이나 성공담에 불과한 경우가 적지 않다.
예배의 문제점이 하나 더 있다.
하나님의 임재에 머물거나 말씀 하나 가슴에 깊이 새길 시간적 여유나 여백이 없다는 점이다.
예배 시간 내내 ‘내가’ 말하고, ‘
내가’ 찬양하고, ‘
내가’기도하는 동안 하나님이 머무시거나 일하실 여백은 완전히 점령당한다. ‘
내가’ 말하고, 찬양하고, 기도를 쏟아내는 동안 심리적 응어리와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이나,
감정이 흥분되고 고양되는 것을 예배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예배란 경건한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과 일하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 침묵의 여백 속에서 하나님은 소리 없이 임재하시고,
조용히 당신의 뜻을 밝히시며,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섬세하게 일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예배 인도자들은 이런 여백과 침묵을 두려워한다.
그런 여백을 무능의 징표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말과 소음과 현란한 노래로 예배의 모든 시간을 빈틈없이 채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영적 자위에 불과하다.
새로운 예배 형식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
무엇보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머물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경청할 수 있는 예배 형식이라야 한다.
이런 예배에는 ‘부름과 들음의 예배’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다. ‘
찬양과 침묵의 예배’인 까닭이다.
이런 맥락에서 떼제 형식의 예배는 한국교회의 예배 갱신을 위한 많은 힌트를 준다.
떼제 찬양의 단순성과 침묵의 여백이 ‘우리의’ 예배에 부족한 것을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떼제 노래들은 거의 한 마디로 된 짧은 기도이다.
몇 번 부르면 반주하는 악기 없이도 부를 수 있다.
이 단순한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는 동안
기도는
입술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영혼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떼제 예배에는 침묵과 고요가 풍성하다.
떼제 예배에는 3-5번 정도의 침묵 시간이 있다.
침묵 속에서 예배를 시작하며,
노래를 부르다가 침묵하며,
시편 영창을 하고 침묵하며,
성서 독서를 하고난 다음 침묵하며,
끝날 때도 침묵 속에서 끝난다.
이러한 풍성한 침묵의 부피와 무게 속에서 예배자는
하나님의 임재에 머물며, 하나님의 소리를 경청하며, 성령의 활동을 수용한다.
예배자는 예배의 주체이면서도 객체이며,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수동적 받아들인다.
이런 침묵의 여백과 능동성과 수동성의 신비적 합일 속에서 예배자는 새롭게 빚어지며,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가 그의 삶 속에서 재현되고 현실화된다.
이런 떼제 형식의 예배는 얼마든지 개신교 풍토에서 활용할 수 있다.
찬양도 꼭 떼제 노래만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 버금가는 훌륭한 묵상적 찬양이 얼마든지 있다.
중요한 것은 찬양으로 기도하는 것이며 침묵을 통해서 ‘듣는 것(!)’이다.
인간의 말과 소리를 줄임으로써 하나님의 소리와 임재의 여백을 늘이는 것이다.
때때로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답답하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그 처지인 것 같다.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다.
특히 사순절이 갖고 있는 구원사적 의미, 회개와 금욕을 통한 수난에의 동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적 시간과의 해후,
그로 인한 영적 갱신과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부활에의 참여라는
진정한 기독교적 사건들에 대한 감수성이 거의 마비된 까닭이다.
그래서 답답하다.
그리스도를 향한 새로운 영적 순례가 또 한 번 맞이하는 이번 사순절에 절실하다.
진정한 회개와 함께, 관상기도와 거룩한 독서의 실천,
그리고 ‘부름과 들음 예배’가 이 순례의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진정한 예배의 회개가 있어야한다
사람을위한 예배가아님 하나님을위한 예배로
사람중심예배가아닌 하나님중심예배로 전환되어야한다
그리할때 기도또한 청원기도보다 영성바로세우기기도인 관상기도를 하게되고
기복신앙은 살아지고 하나님의 기쁨이되는 예배가될것이다
금년 사순절을 보내며 자신의 신앙을 냉철하게 돌아보고 우리구주 예수께서
사순절을 보내신 바르고 참된 그뜻을 우리마음속에 체득 해하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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