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근 <종소리>
새벽이 아직 창을 다 열지 않았을 때, 나는 종소리를 떠올린다. 들리지 않는 종, 그러나 분명 울리고 있는 종, 그것은 귀로만 듣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의 밑바닥을 건드리는 떨림이었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예술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어디까지가 예술일까. 예술의 마지노선을 찾으려면, 무엇인가를 더하기보다 먼저 덜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불필요한 수식, 과잉된 설명, 지나친 의도, 그런 것들을 하나씩 지워보면, 남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서로 다른 예술들 사이에 흐르는 공통의 맥은 무엇일까.
나는 케이지의 <4분 33초>를 떠올렸다. 연주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지만,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시간을 듣는다. 음악이 결국 시간이라는 사실을, 그 작품은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서 시간은 마치 논둑길에 남은 발자국처럼 더 또렷해진다. 폴 세잔의 백색의 표면이나 주위 안장 같은 것들도 내 앞을 스쳐 갔다. 흰 표면은 시각적 평면이 아니라, 몸과 사물이 접촉하는 촉각적 공간, 의자나 안장은 인간이 부재한 자리이면서도, 몸의 흔적을 암시하는 사물성을 드러낸다. 두 작품 모두 세계를 재현하는 그림이 아니라, 몸이 세계를 만나는 방식을 그린 그림이다. 내용이 아닌 형식이 먼저 말을 건네는 작품들이다. 그것들은 나에게 예술은 결국 형식이라고 속삭였다.
그러나 그것은 빈 껍데기가 아니라, 정감이 스며든 형식이라는 걸 나는 문득 알았다. 예술은 사유의 형식도, 의지의 형식도 아니다. 그것은 정감을 대상화한 형식이다. 기쁨과 슬픔, 떨림과 고요, 환희와 두려움 같은 것들이 어떤 형태를 입을 때, 우리는 그것을 예술이라 부른다. 수필 또한 그렇다. 수필은 단순한 이야기나 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미의식으로 독자를 설득하는 작업이다. 철학적 통찰이 뼈대라면, 미적 울림은 살과 피다. 둘이 어긋나면 글은 살아 있지 않다. 수필은 세계를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세계를 느끼게 하는 글이다.
길을 걷다 보면, 나는 종종 생각한다. 왜 어떤 글은 오래 남고, 어떤 글은 금세 사라질까. 그것은 구조 때문만도, 주제 때문만도 아니다. 결국 울림 때문이다. 이야기 속 인물과 사건, 문장과 호흡, 시선과 침묵이 서로 공명할 때, 비로소 울림이 생긴다. 소설가 최명희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남에게 빚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글을 썼다고 했다. 그 말이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글쓰기란 가벼운 노동이 아니라, 매번 산고를 치르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일본을 울렸다는 <우동 한 그릇>과 한국을 울렸던 <인연>을 떠올렸다. 그 이야기들이 허구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많은 이들이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 배신감조차, 그 작품들이 지닌 울림의 증거는 아니었을까.
미적 울림이란 결국 텍스트와 독자의 만남에서 태어난다. 글은 홀로 완성되지 않는다. 읽히는 순간, 독자의 감정과 상상력이 만나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그것은 때로 감정이입이 되고, 때로 카타르시스가 되며, 때로는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꾼다. 안동 야산에서 발견된 편지 <원이 엄마>, 춘천 김유정문학촌의 이야기, 그리고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는 김영한 보살의 말, 이 모든 것은 문학이 단순한 글이 아니라, 삶을 움직이는 힘임을 보여준다.
나는 다시 성덕대왕신종을 떠올린다. 그 종은 단순한 금속 덩어리가 아니다. 종교철학과 구조미학이 하나로 합쳐져 태어난 울림이다. 한 번 울리면 오래 남아 가슴속을 맴도는 소리, 나는 그런 종소리 같은 수필을 꿈꾼다. 외국인이 한글 서예를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결국 형식 때문이다. 글자를 모르면서도, 선의 흐름과 여백의 떨림을 감지한다. 그러나 그것이 ‘순형식’만은 아니다. 그 선들 속에는 누군가의 숨결과 정감이 스며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예술이란 결국, 정감을 대상화한 형식이다. 정감은 형체를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하며, 그 형체를 만드는 가장 깊은 방식이 바로 예술이다. 그리고 수필은 그 길 위에서, 가장 낮은 목소리로 울리는 하나의 종일지도 모른다. 밤이 깊어질 때, 나는 다시 창밖을 본다. 바람이 지나가고, 어딘가에서 보이지 않는 종이 울린다. 그 소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내가 쓰는 문장 하나하나가, 그 종을 조금씩 빚어가고 있다.
▮권대근 주요 약력
△경남 남해 출생 △'동양문학' 수필 등단(1988) △'문예사조' 문학평론 △'경북신문' 문학평론 △미주 '중앙일보' 수필 신춘문예 당선 △현재 대신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본격문학가협회 회장 △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역위원회 명예회장 △평론집 '수필은 사기다', 번역서 '한국의 명수필', 문학이론서 '문장가로 가는 길' △수필집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등 28권 △부산수필문학상, 부산펜문학상, 월강문학상, 여산문학상, 정과정문학상, 부산pen번역문학상 등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