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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사랑 여행 스크랩 역사의 순간을 함께한 나무들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43 14.08.11 18: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안녕하세요, 제 4기 문화재청 블로그 기자단 류누리입니다!  

6월은 순 한글로 '누리달'이라고 하는 것 알고 계시나요?^^ 온 누리에 생명이 가득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누리달'의 기사는 바로 이 생명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바로 '나무'인데요. 여러분들은 나무와 같은 생물들이 문화재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바로 '천연기념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찰, 탑, 도자기, 서책 등만을 문화재로 생각하기 쉬운데요. 그러나 나무 역시 자연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가치가 있다면 얼마든지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습니다. 특히 나무의 경우, 한 자리에서 수백 년 수천 년을 살아오며 사람들과 함께 공존합니다. 전국에는 250여 군데의 천연기념물 나무와 숲이 있다고 합니다. 적게는 2~300년 청년 나무부터 1000년이 넘는 노인 나무들까지 자신들만의 모습으로 오랫동안 삶의 터전을 지켜왔는데요. 오늘은 이 중에서도 '역사의 순간을 함께한 나무들'에 대해서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천연기념물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문화재에는 네 가지 유형이 존재합니다. 건물, 사적, 그림 등의 유형문화재, 연극, 음악, 무용 등의 무형문화재, 희귀 동식물 등의 천연자원과 아름다운 명승지 등을 포함하는 기념물, 그리고 의복, 건물 등의 민속자료, 이렇게 네가지 입니다. 천연기념물은 이 중에서 '기념물'에 속한답니다. 또 식물 천연기념물 경우 고목 나무, 희귀 식물, 자생지, 수림지 등의 종류로 분류합니다. 그렇다면 왜 '천연기념물'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일까요? 바로 환경오염 때문인데요. 산업혁명 이후 자연환경이 급격히 파괴되고, 오염이 심해지면서 자연보호에 대한 필요성은 점차 증가합니다. 1803년 독일을 시작으로,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이 천연기념물을 지정하기 시작했으며, 우리 나라는 일제강점기인 1913년 처음으로 일부 고목 나무를 조사하면서 천연기념물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광복 후에도 오랫동안 일제가 만든 '조선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을 지켜오다가 1962년 1월 10일 법률 제961호로 문화재 보호법이 신설하면서, 우리 손으로 우리의 천연기념물을 돌보기 시작합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 식물들은 나라로부터 고유번호를 받습니다. 이 고유번호는 권위가 있기 때문에, 만일 식물이 천연기념물에서 해지가 된다고 하더라도 해당 번호는 비워두기 마련입니다. 2012년 4 월말 기준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식물은 259건입니다.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76호)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이 나무는 높이는 29m, 가슴둘레 14.8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두꺼운 은행나무라고 입니다. 무려 1,000~1,200살로 오랜 시간 영월과 함께해왔는데요 원래는 대정사(對井寺)라는 절 앞에 있었지만, 절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마을이 들어서먼서 지금은 마을 정중앙에 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나무의 원래 줄기는 이미 죽어 없어지고, 지금의 줄기들은 새로운 줄기가 자라난 것이라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 안에 신령한 뱀이 살고 있기 때문에 동물이나 곤충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고, 아이들이 나무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다고 여긴다네요. 또한, 자식을 낳게 해주는 나무라고도 생각합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1962년 12월 3일입니다.

 

 

  단종의 비운을 함께하다

 

  그렇다면 이 나무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요? 이 나무는 단종의 비애를 함께한 나무라고 합니다. 세조 3년(1457년) 당시 청령포에 유배를 와 있던 단종이 읍내의 관풍헌으로 옮겨질 때, 단종은 이 나무 아래서 잠깐 쉬어갔다고 합니다. 그 때 은행나무의 은행을 따다가는 자신의 운명을 점쳤다고 하네요. 물론 그 점괘가 어찌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지요. 은행나무 아래서 자신의 비극적인 삶을 한탄했을 어린 왕의 마음이 괜스레 느껴지는 나무입니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것은 엄홍도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12대조 조상이 바로 이 은행나무를 심은 엄임의라는 사람이구요. 단종과 운명을 함께한 은행나무인 것이 확실한 모양입니다. 그 외에도 이 은행나무는 한일합방, 해방, 6.25전쟁 때마다 나무줄기를 부러뜨려 나라의 운명과 함께 했다고 전해진다네요.

 

 

영월 하송리 나무를 찾아가는 법!

 

 

 

→ 자가용 :

      중앙고속국도의 제천나들목으로 나가서 영월군 방면으로 갑니다. 국도 38호선을 이용해 영월군에 들어간 뒤, 남면 소재지를 지나면 청령포 방면으로 가는데요. 이 때, 청령포교차로에서 영월군청 방면으로 좌회전합니다. 공설운동장와 군청사거리를 지나 300m 쯤 가면 하송사거리가 나옵니다. 이 사거리에서 우회전해서 300m 가량 가면 나무가 보인답니다.

→ 대중교통 :

      버스 이용하실 경우, 영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하동행 시내버스를 이용합니다.

 

 

서울 재동 백송 (천연기념물 제8호)         

 

 

서울 재동 백송

 

  백송은 하얀 소나무라는 의미로, 나무껍질이 벗겨져 흰빛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는 중국에서 자라던 것인데, 조선 시대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 재동 백송은 약 600살 정도로, 높이 17m, 뿌리 부분의 둘레는 3.82m입니다. 다른 백송들에 비해서는 조금 큰 편인데요. 줄기가 V자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 2.4m와 1.9m의 둘레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 소나무는 껍질이 아름다워 더욱 유명한데요. 우리나라 5그루의 백송 천연기념물 중에서 '최고령 백송'이라고 합니다. 또한 백송은 빛깔이 희면 더욱 건강하다는 증거이기에, 이 백송이 건강하다고 합니다.  현재 이 나무는 헌법재판소에 있다고 합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1962년 12월 3일입니다.

 

 

 조선의 역사를 함께하다

 

 먼저 백송이 존재하는 재동의 이름부터 '계유정난'과 관련이 있습니다. 단종 1년(1452) 10월 10일 밤, 재동에 있던 김종서의 집에서는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계유정난'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동네는 며칠 동안 피바다였지요. 동네 사람들은 계유정난이 끝난 후 마을의 핏자국을 없애기 위해 재를 뿌렸다고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잿골'로 불렸다가 '재동'으로 변했다고 하네요. 이 백송이 처음 심어진 것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이 심은 것으로 알려져 백송과 조선의 역사는 함께 시작합니다. 백송이 조금 더 컸을 무렵에는, 백송 주변에는 영조 때 재상인 조상연이 살았다고 합니다. 조상연은 조선 후기 풍양조씨 세도정치를 시작한 인물로, 100여 년 동안 백송은 풍양조씨의 권세를 지켜봐 온 셈입니다. 그 이후 순조 19년(1819)에 이르러는 풍양조씨 조만영의 어린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기도 하는데요. 이 세자빈이 훗날 고종을 왕위에 세우는 대비 조씨입니다. 게다가 이 대비 조씨의 친정에서, 흥선대원군과 조씨 일가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종식하는 노력을 하였는데요. 백송은 세력 교체도 지켜본 셈입니다. 그러다가 1863년 고종이 왕위에 올랐을 즈음, 대비 조씨의 친정 일대가 개화 사상가의 대부인 박규수에게 넘어가는데요. 백송은 박규수의 사랑채 뜰에 있어서 개화기 역시 함께 겪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창덕여고가 있었다가, 1989년 창덕여고가 방이동으로 이사 간 후에 헌법재판소의 지킴이 나무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즉, 조선의 개국과 쇠퇴, 개화기까지 함께한 것입니다.

 

서울 재동 백송을 찾아가는 법!

 

 

→ 자가용 :

  재동초등학교 앞 삼거리에서 안국역 방향으로 운전하시면 오른편에 헌법재판소가 보인답니다.

 

→ 대중교통 :

  버스 이용하실 경우, 간선(파랑)은 109번, 151번, 162번, 171번, 172번, 272번, 지선(초록)의 경우는 7025번을 타고 돈화문(비원)

  또는 종로경찰서 앞에서 하차하면 헌법재판소가 보입니다! 지하철을 이용하실 경우, 3호선 안국역 2번출구 북촌방향으로 100m 가량 가면 헌법재판소가 있습니다. 

 

 

 

의령 세간리 현고수(천연기념물 제493호)         

 

의령 세간리 현고수(느티나무)

 

  느티나무는 한국, 일본, 대만, 중국 등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는 나무입니다. 우리나라 마을에 있던 커다란 정자나무가 주로 이 느티나무라고 하네요. 이 세간리에 있는 느티나무는 나이가 520여 년 정도로, 키 20m, 가슴높이 둘레 8.4m, 가지 펼침은 동서 16m, 남북 15m 정도로 줄기 대부분은 지지대에 의해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원래 나무의 줄기는 중력과 같은 방향으로 자라면서 중심을 잡기 위해 옆으로 가지를 뻗습니다. 그래서 커다란 나무들은 줄기가 땅과 직각으로 자라는 것이 보통이지요. 그런데 이 느티나무는 그렇지 않습니다. ㄱ자로 기울어져 있지요. 이런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나무의 끝 부분을 잡아당겨 일부러 구부려 놓았다거나, 아니면 줄기를 잘라 옆으로 뻗은 가지만 남겨놓았다고 추측할 뿐입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2008년 3월 12일입니다.

 

 

 임진왜란의 의병을 일으키다

 

  이 의령 유곡면 세간리는 명종 7년(1552) 곽재우 장군이 태어난 마을입니다.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내고, 잠시 벼슬살이를 하던 곽재우 장군은 임진왜란 즈음 고향에 머물고 있었는데요. 당시 정규군이 일본에 계속 밀리자, 41세의 유생 곽재우 장군은 왜적과 싸우기로 결심하고 1592년 4월 22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이 나무를 현고수(懸鼓樹)라고 하는데요. 그 뜻은 북을 매다는 나무라는 뜻입니다. 왜 북을 매달았을까요? 의병을 모집하고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의병을 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곽재우 장군은 커다란 북을 마련하고 이 느티나무에 달아, 북을 치며 의병을 모으고 사기를 북돋우며 훈련했다고 전해집니다. '두둥두둥'하는 북소리는 멀리 퍼져 나가 근처 젊은이들의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기에 더욱더 많은 의병이 모일 수 있었던 셈인데요. 이 힘을 받아, 곽재우 장군은 의병을 잘 훈련해 왜적에 맞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임진왜란의 고난과 적에 맞서는 조상들의 기백을 느낄 수 있는 나무입니다

 

 

의령 세간리 현고수를 찾아가는 법!

 

 

 

→ 자가용 :
    대구, 부산 방향으로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함안 IC로 빠져, 법수, 정곡을 지나면 유곡면 세간리가 있습니다. 혹은 진주방면
으로 남해고속도로에서 의령 군복 IC로 빠져, 의령에서 국도 20번 도로를 이용해 정곡을 지나 유곡면 세간리로 가는 법도 있답니다.

→ 대중교통 :

    의령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대구 방향 시외버스를 타고, 유곡면 세간리에서 내리면 도보로 5분 정도 걸린답니다. 다른 나무들에 비해 찾아가기가 조금은 까다로운 나무이네요. 

 

 

 

강화 갑곶돈대 탱자나무(천연기념물 제78호)         

 

 

강화 갑곶돈대 탱자나무

 

  현재 강화 역사박물관 앞에 있는 이 탱자나무는, 높이 4.2m, 뿌리둘레 2.12m되는 400살 정도의 나무입니다. 탱자나무는 주로 영, 호남 지방에 분포하며 일본과 중국에서도 자라는 나무인데요. 한국과 일본의 탱자나무는 중국에서부터 전해진 것으로 추측합니다.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쓰이고, 줄기의 가시가 날카로워 과수원 울타리로도 쓰인다고 합니다. 현재는 북한에도 탱자나무가 자라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조선 시대 당시에는 강화도가 탱자나무의 북방한계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도 강화도의 탱자나무에 주목했다고 하네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해는 1962년 12월 3일입니다.

 

 

 강화의 혼란을 함께하다

 

  이 탱자나무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돈대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돈대는 일종의 방어시설로, 성곽이나 방어 요지에 구축한 진지를 말합니다. 원래 강화도는 고려 시대 원나라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좋은 지역으로, 그 후 나라의 군사적 요충지로 여겨졌는데요. 임진왜란을 겪은 후 이 강화도에 관한 관심이 커져, 제물진을 설치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노력의 하나로 숙종 5년(1679)에, 강화도의 해안선을 따라 갑곶돈대를 비롯한 53개의 돈대를 설치했다고 하네요. 이러한 군사, 방어시설은 외적을 막아야 하므로, 성을 쌓는 것이 기본이었고 그 외에도 성을 견고히 하는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이 '탱자나무'입니다. 탱자나무의 가시는 손가락 길이 정도로 날카로웠기 때문에 성을 방비하기에 좋았습니다. 즉 적군이 성벽을 넘을 시도 조차 못하게 만든 것이지요. 물론 이 탱자나무를 언제 심었는지에 대해 확실하진 않으나, 시기로 보아 돈대를 설치할 때 당시 숙종이 심은 것으로 추측합니다. 성벽을 따라 수많은 탱자나무가 있었지만 남아있는 것은 천연기념물 제79호인 강화 화도면 사기리 탱자나무와 함께 두 그루 뿐 입니다. 이 탱자나무는 외적에 대비하던 조상의 태도를 알 수 있는 한편, 강화도가 가지고 있는 혼란을 엿보게 하는 나무인 셈입니다.

 

 

강화 갑곶돈대 탱자나무를 찾아가는 법!

 

 

 

 

→ 자가용 :

   강화대교를 타고 강화도로 들어가자마자, 왼편에 갑곶돈대가 보입니다. 그 안에 탱자나무가 있답니다.

→ 대중교통 :

   인천터미널 부근에서 80,88번 버스를 타고 강화대교에서 내려, 갑곶돈대까지 걸어가시면 됩니다!

 

 

 

  이 뿐 아니라, 천연기념물에는 많은 나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목나무 중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 이외에도, 시·도기념물 130여 건, 보호수 1만 3천여 건이 있고, 비지정 고목 나무를 포함하면 2만 그루는 족히 넘는다고 하네요. 각자 자신들만의 사연을 가지고, 자신들의 자리에서 마을 주민이 살아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주고 있습니다. 이 나무들 외에도 여러분에게 의미를 주고 있는 나무가 있나요? 이번 주말은 나무를 보러 나들이를 떠나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이상, 든든한 나무가 되고픈 류누리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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