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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눅22:35)라고 시작됩니다. 예수께서는 전도를 위해서 제자들을 두 번 파송하셨습니다. 한번은 열두 명의 제자들만 따로 구별해서 파송하셨습니다. 이때는,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마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마라.”(눅9:3b)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또, 한번은 열두 제자를 포함해서 모두 70(72)명을 파송하셨습니다. 이때는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마라.”(눅10:4a)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한 조건은 하나였습니다. 99.9%를 쏟아 부은 진심眞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투자한 최선도 아니었습니다. 결코 내놓을 수 없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0.1%의 전심全心이었습니다. 이 0.1%의 전심 앞에서 99.9%의 진심은 의미가 없습니다. 최선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희생과 헌신과 충성과 봉사와 섬김도 마찬가지입니다. 0.1%의 전심이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100세에 낳은 이삭입니다. 부자 관원이었던 청년에게는,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는 맘몬Mamom입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에게 닥쳐오는 많은 염려, 걱정, 근심, 실망, 절망, 고민 등은 하나같이 이삭과 관계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는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을 얻기 위해서 투자하는 대상이 언제나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삶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는 바로 이 이삭이 위협받거나 제거될 때입니다. 그때, 우리의 반응은 둘 중 하나입니다. ① 하나는 헤어 나오기 힘든 원망과 분노와 절망입니다. 그 결과 감정의 진흙탕 속에서 뒹굴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내가 어떻게 얻은 아들인데 제물로 바치라는 거야!”라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 자리까지 올라오기 위해서 평생을 투자했는데 내 놓으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야!”라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기 위해서 자기 멋대로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거나, 복수하거나, 평생 지켜왔던 소신까지 저버리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문제는, 그러다 영원히 낙심 속에 살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② 다른 하나는 순종입니다.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이끌고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모리아산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삭은 제 생명과 같습니다. 당연히 이삭 없는 삶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를 이삭 없는 삶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신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하겠습니다. 이삭 없는 삶을 살겠습니다. 당신 한 분만 있는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싶다면,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남은 것이 없어야합니다. 사실 하나님만 계시다면 우리의 삶에 필요한 부와 명예와 권세와 자랑과 안전과 평안과 쉼은 모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잃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만 남아야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랬습니다. 자신의 생명과 같은 이삭까지도 내려놓았습니다.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순종했습니다. 0.1%의 전심全心까지 다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당신 한 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성장, 성숙시키고 싶으셨습니다. 그를 무수히 많이 다가오는 삶의 모든 염려와 걱정과 근심과 실망과 절망과 고민으로부터 구원하고 싶으셨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빚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까지나 지극히 선했습니다.
그러나 당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죽을 만큼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삭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너무나 매정해 보였습니다. 마치 버림받은 것 같았습니다. 요셉도 그랬었고, 모세도 그랬었고, 다윗도 그랬었습니다. 그들을 영원한 죽음과 저주로 이끄는 우상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고난 같은 상황을 거쳐야 비로소 당신 한 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제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눅22:42)라는 말씀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치러내신 치열한 싸움이었습니다.
아니 물과 피를 남김없이 다 흘리고 죽어야 끝나는 처절한 싸움이었습니다. 겟세마네에 올라가신 예수께서는 다른 방법이 없는지 여쭈어 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외면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결국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모진 고난을 받고 갈보리로 올라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따라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가 결코 원치 않는 일을 허용하신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끝까지 하나님 한 분만 신뢰할 수 있어야합니다. 0.1%의 전심全心까지 다 드릴 수 있어야합니다. 온전히 순종할 수 있어야합니다.
예수께서는 전도를 위해서 파송하는 제자들에게도 전심을 요구하셨습니다. 사람, 환경, 조건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제자들은 주님의 요구에 전심으로 반응했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빼닮은 사역을 펼쳤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명령을 하나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순종했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온갖 더러운 귀신들이 물러갔습니다.
각종 병든 자들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는 현장을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전심으로 반응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가 무엇인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부족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까지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로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찌어다.”(눅22:36)라고 이어집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難解 구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개혁 성경에는 헬라어 원문의 “그러나 지금αλλα νυν”이라는 구절이 빠져 있습니다. 이는 앞 절에서 언급한 내용과는 전혀 반대되는 상황이 펼쳐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살아서 공생애를 보내고 계시던 시기에는 전도 여행을 함에 있어서 어떤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어디가 되었든 맨몸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환영 속에 숙식까지도 제공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은 기득권 유지에 완전히 매몰埋沒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이 이르기 전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로 결의했습니다. 예수께서 정치, 종교적인 죄를 지었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무지한 백성들은 그들의 선동에 너무나 쉽게 현혹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주님에 대한 태도를 바꿨습니다. 돌변했습니다. 살기殺氣에 사로잡혔습니다. 배신자 유다는 그들에게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을 넘겨줄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에는 참혹한 살생과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먹을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서로 높은 자리를 차기하기 위해서 툭하면 싸우고 있던 그들에게, 섬김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성찬식을 제정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후, 감람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마치 기름을 짜내듯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모세혈관이 터졌습니다. 땀에 섞여 흘렀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때가 임박하자, 스스로 당신 자신을 원수들의 손에 내어주셨습니다. 백성들은 그런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비웃고,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모질게 매질했습니다. 채찍이 휘감은 곳마다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왔습니다. 시뻘건 선지피가 덩어리째 솟구쳤다 흘러내렸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당연한 일이라도 한 듯 서로를 보며 환호했습니다. 드디어 오랫동안 앓고 있던 이가 빠졌다며 기뻐했습니다. 이제 두 다리 쭉 펴고 잘 수 있겠다고 외쳤습니다.
예루살렘 입성과 함께 한 자리씩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 논공행상까지 벌였던 제자들은 혼비백산했습니다. 죽는 자리까지도 함께 따라가겠다고 호언했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각자 도생圖生을 위하여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불과 이틀 만에 나타난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꿈속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이후, 그들은 지극히 은밀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순절 날, 하나님의 성령께 완전히 사로잡힌 뒤에야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상황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들이 달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들을 붙들어 주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그들은 입신양명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혹독한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있던 주님을 병들고 왜곡된 자아만족, 자아성취,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들 가운데 하나 정도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전심全心을 쏟아 붓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면 펼쳐지게 될 끔찍한 상황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심은 이렇습니다. 수시로 생겼다, 사라졌다합니다.
정욕에 완전히 매몰되었을 때는 아예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이전과는 180도 달라진 환경에 대해서 가르쳐주셔야 될 필요성을 느끼셨습니다. ① 이제는 전대와 주머니를 가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본문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눅22:37)라고 이어집니다. 예수께서는 불법을 저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아니 스스로 그들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그들을 위한 속전贖錢으로 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존귀한 자들과 함께 자기 몫을 차지하게 하며, 강한 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겠다. 그는 죽는 데까지 자기의 영혼을 서슴없이 내맡기고,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사53:12)라는 선지자의 예언을 그대로 성취하셨습니다. 사도가 “그분은 (허물과 죄로 죽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를 속전으로 내주셨습니다.”(딤전2:6a)라고 외쳤던 이유입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막8:34b-35)라는 말씀에 따르면,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고 있던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는 절대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할 때 비로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다른 보혜사로 오신 성령께 완전히 사로잡힌 그들은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예수께서 앞서 가셨던 길을 따라갔습니다.
결국 전대와 주머니를 가지라는 명령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을 생명의 속전贖錢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 하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 또 예수께서는 검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일교차가 상당히 심합니다. 한낮에는 35-40˚C를 넘기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물론, 습기는 많지 않기 때문에 그늘에 들어가면 금방 더위를 피할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밤이나 겨울입니다. 두툼한 겉옷을 입고 모닥불을 피워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춥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겉옷은 필수였습니다. 겨울에는 여러 벌 겹쳐 입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염소 털로 조악하게 짜서 만들어 입기도 했습니다. “너희가 정녕 너희 이웃에게서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 지기 전에...돌려주어야 한다.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오직 그것뿐이다.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는데...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자애로운 나는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출22:26-27)라는 율법에 따르면, 잠잘 때 덮는 이불로도 사용했습니다. 담보도 잡은 겉옷은 반드시 해지기 전에 돌려주어야했습니다.
생명과 직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그 겉옷을 팔아서 검을 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검劍”이 생명을 상징하는 겉옷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오.”(엡6:17b),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말씀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요1:1)라는 사도들의 외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당신의 고난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앞두고 이 가르침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1-12)라는 외침에 따르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영적 전쟁이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 생명, 하나님 나라와 연결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무장하지 않고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시작 자체를 할 수 없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본문은 “저희가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눅22:38)라고 마무리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평소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칼 두 자루를 내놓았습니다. 특히 성경은 “...베드로가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귀를 잘라버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고난의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요18:10-11)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생명만큼 사랑하는 주님이 위기에 처한 것을 발견한 베드로는 즉시 칼을 빼들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 쪽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무려 삼년 반 동안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로 살아왔던 베드로조차도 주님의 뜻과 완전히 배치되는 어리석은 짓을 행했습니다. 부와 명예와 권세와 자랑을 자신의 수호신으로 확신하는 저와 여러분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주님의 꾸지람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직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강림하시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병들고 왜곡되어 있는 자아로 충만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원래 죽음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생명에 이르는 길로 바꿔 놓으시기 위해 놀라운 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로서는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는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였습니다. 죄와 진노 사이에서 영원히 갈라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전적으로 불리한 관계였습니다. 십자가를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이 단절은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고통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아니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꼭 닮은 인생을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 안에 충만한 생명을 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과의 단절, 어두운 미래, 회복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의지적이고 의도적인 범죄를 저지른 우리의 몫이었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안타까운 일도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바로 그 순간, 여호와 하나님께서 등장하셨습니다. 자발적으로, 다른 방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어떤 일을 해야만 된다는 조건도 달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방식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 높이 달린 놋 뱀만 바라보면 아픈 병이 나았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부어지는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무엇이든 다 해결되는, 우리로서는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당신 스스로의 손과 발에 대못을 박으셨습니다. 창으로 허리를 찌르셨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하는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밀어 주신 화해의 손짓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확신과 긍휼과 고뇌와 고통과 아픔과 영원한 승리가 담겨 있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과 순종 곧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과 제물 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는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전심全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저와 여러분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당신과 마찬가지로 전심이기를 바라십니다. 당신 한 분만으로 충만하기를 바라십니다. 오로지 당신 한 분만 유일하게 남아있기를 바라십니다.
0.1%의 전심까지 하나님께 내놓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병들고 왜곡된 자아의 완전한 부인과 죽음을 선포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된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마음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남겨 놓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서가신 길을 기꺼이 따라갈 수 있는 복된 삶,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영적 도전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참고 견디며 마침내 싸워 이기는 복된 삶, 무엇보다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