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여운과 무한한 자유를 선물하는 언어
―김선옥의 시 세계
권온
1.
김선옥의 시는 젊다. 2019년에 시인의 위치에 도달한 그는 부지런한 활동을 축적하면서 2022년에 첫 시집 바람 인형을 간행하였다. 첫 시집의 해설에서 고명철은 “소리의 풍경과 생의 율동”의 관점에서 시인의 시작(詩作)을 이해하였다.
2024년 하반기에 김선옥의 신작시 다섯 편이 우리에게 도착하였다. 이번에 소개되는 신작시들은 ‘죽음’으로 귀결되는 ‘삶’의 본질을 적확하게 포착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특히 시인은 ‘몸’을 강조하는 ‘몸의 시학’을 두드러지게 전개함으로써, 독자들이 ‘삶’과 ‘인생’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한다.
2.
김선옥이 이번에 제공하는 신작시들로는 「몸을 맡기다」, 「실직」, 「비 내린 뒤」, 「드라이플라워」, 「허수아비」 등이 있다. 다섯 편의 신작시들에는 특이한 공통점이 있으니 작품의 제목 또는 본문에 ‘몸’이라는 표기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곧 「몸을 맡기다」, 「실직」, 「드라이플라워」에는 “몸”이 제시되고 「비 내린 뒤」에는 “내 몸”이 등장하며 「허수아비」에는 “온몸”이 제시되고 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에 의하면 “인간의 몸은 인간의 영혼을 가장 잘 담은 그림이다(The human body is the best picture of the human soul).”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존중한다면, 김선옥 시인의 시편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몸’은 ‘영혼’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이제 인간의 영혼을 담은 그림 또는 캔버스로서의 시를 구체적으로 확인해야 할 시간이다.
웃음도 통증도 내 것이 아니다
살아서 저승을 갔다
부모님을 만나 더 늙은 인사를 드린다
자식들이 울다가 다녀갔는지
메스로 뱃속을 가르고 내장을 꺼냈다 넣었는지
알 수 없다
눈 뜨세요
몸 맡겼다 정신을 돌려받는지
가물가물
죽음이 살아나는 중이다
―「몸을 맡기다」 전문
시적 화자 ‘나’는 “통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몸을 맡”겼을 테다. 그 누군가는 병원에서 수술을 담당하는 의사일 수 있다. ‘나’는 “살아서 저승을 갔다”가 돌아왔다. 마취제 또는 마취약의 투입으로 인해 ‘나’는 수술의 세부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어느 순간 눈을 감았을 테고, “눈 뜨세요”라는 말과 함께 “정신을 돌려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수술 동의서를 작성하는데, 이때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나’가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가물가물/ 죽음이 살아나는 중이다”라고 언급하는 이유는 수술의 위험성과 관련된다. 수술을 받은 당사자이지만 ‘나’는 마취된 상태에 있었기에 “부모님을 만나 더 늙은 인사를 드”렸는지 “자식들이 울다가 다녀갔는지/ 메스로 뱃속을 가르고 내장을 꺼냈다 넣었는지/ 알 수 없다” 김선옥이 제안하는 미지의 경험으로서의 수술 관련 표현은 죽음을 염두에 둔 삶을 영위하는 독자들에게 신선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냉장고 티브이 세탁기가 수거차에 오른다
한때는 거실에서 주방에서 몸값을 톡톡히 하던 저들
흔전만전 내부를 파먹다가
붉은 살 군데군데 붙어있는 수박껍질처럶
내다 버린다
신제품이 출시 되면서
십 년 수명도 못 채우고 고물이 된
고장 한번 없이 아직은 쓸 만한데
차에 실려 중고센터로 가는 몸
정년이 멀었는데 누가 버렸나
끊긴 출근길에서
갈고 닦고 조여보지만
어디에서도 중고품이 된 남자
신상품에
앉았던 자리를 내어주고
어금니 거뭇거뭇 녹슬어 가는 몸
―「실직」 전문
이 시는 두 개의 시적 대상을 동시에 포섭한다. 이번 시가 주목하는 하나의 대상은 “냉장고”, “티브이”, “세탁기” 등을 가리키는 ‘가전제품’이고, 다른 하나의 대상은 “남자” 또는 ‘사람’이다. ‘상품’이나 ‘제품’이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사람’이나 ‘인간’이 다른 하나의 계열을 이루면서 진행된다.
김선옥이 동일하지 않은 두 개의 시적 대상을 동시에 도입한 이유는 이들 사이에서 어떤 유사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시인에 의하면 가전제품은 “십 년 수명도 못 채우고 고물이” 되었다. “고장 한번 없이 아직은 쓸 만한데”도 불구하고 누군가 가전제품을 “내다 버린” 것이다. 그는 “차에 실려 중고센터로 가는” 상품을 “몸”으로 표기한다. 이 대목에서 가전제품과 같은 상품은 인간의 몸으로 치환된다. “정년”, “중고품이 된 남자”, “어금니 거뭇거뭇 녹슬어 가는 몸” 등은 버림받은 몸으로서의 사람을 형상화한다. 이 시의 제목인 “실직” 역시 직업을 상실한 인간과 중고품, 고물로서의 상품을 동시에 가리킴으로써 풍성한 해석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새소리도
바람 소리도
계곡물 소리도
말매미 소리도
숲속엔 온통 푸른 것들 뿐이다
내 몸에 흐르는 피도 푸르러진다
저 푸름 속에도
빛깔 고운 단풍잎 하나 갖고 싶을 게다
―「비 내린 뒤」 전문
“비 내린 뒤”에 “숲속”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가? 김선옥에 의하면 비 온 뒤의 숲속에서는 “새소리”, “바람 소리”, “계곡물 소리”, “말매미 소리” 등 다채로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시인이 이와 같은 소리들을 색채로 수용한다는 사실이다. 곧 그는 숲속에서 접하는 소리들을 “푸른 것들”로 이해한다. “내 몸에 흐르는 피도 푸르러진다”라는 시적 화자 ‘나’의 언급은 “푸름”이라는 빛깔을 향한 엄청난 열정을 보여준다.
시인은 자신의 몸을 중심에 두고서 다양한 소리들을 수집한 후 이를 푸른 계열의 색채로 해석한다. 그는 3연 2행에서 “빛깔 고운 단풍잎 하나”를 제시하는데, 이것은 ‘붉음’이라는 이름의 빛깔 또는 색채이다. 요컨대 김선옥은 독자들에게 청각과 시각을 통합함으로써 감각의 대화 또는 복합 감각을 제안한다. 또한 ‘푸름’과 ‘붉음’의 조화를 실천함으로써 시각의 확장과 심화를 유도한다.
삼성의료원 암 병동 705호실
꽃이 피고 있다
넌, 부지런한 그녀를 어릴 적부터
수레바퀴를 닮은 수레국화라 불렀다
반년 동안 쉼 없이 물을 주면
눈동자를 굴려 두 눈만 슬며시 피워 내는
그녀는 잠 속에서 죽음을 연습한다
살아서 수의를 입었다
네 귀퉁이가 뭉툭한 관 속에서
또 한 생 펼쳐지는 눈동자 속의 삶
그녀의 목 아래 조용한 내장을 뼛속을
더는 다칠 것 없는 마음을
나는 가늠 할 수가 없다
병실의 전등이 잠시 깜빡
가쁜 숨소리로 죽음의 곁 바퀴를 굴리던 그녀
몸을 지탱하는 충혈 된 두 눈
되돌릴 수 없는 수레바퀴는 녹슬지 않아도 튿어진다
피기 위해 피었던
지기 위해 지는 꽃
향기를 숨긴 꽉 다문 입술이 말랐다
내게 무언가 말하려는 듯 혀를 움직이는 그녀
아직 뿌리가 심장에 박혀있는
마른 꽃이 피고 있다
―「드라이플라워」 전문
김선옥은 이번에도 두 개의 시적 대상을 동시에 포괄한다. “드라이플라워” 또는 “마른 꽃”은 일차적으로 피어 있는 상태 그대로 말린 꽃을 가리킨다. 그러나 시인이 이 시에서 주목하는 드라이플라워는 단순한 “꽃”이 아니다. 시적 화자 ‘나’가 “그녀”라고 부르는 인물 역시 ‘드라이플라워’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위치한 곳은 “삼성의료원 암 병동 705호실”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수레국화”로 불러왔다. ‘나’가 ‘그녀’를 ‘수레국화’로 규정하는 이유는 “수레바퀴”처럼 “부지런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삼성의료원 암 병동 705호실에 입원한 수레국화’는 독자들에게 구체적인 인물, 배경으로서 다가설 수 있는 표현이다. ‘그녀’ 또는 ‘수레국화’는 “암”이라는 이름의 무서운 병 앞에서 “죽음을 연습한다” ‘그녀’는 “죽음”, “수의”, “관”, “병실” 등의 어휘에 포위되어 있다. ‘그녀’라는 이름의 드라이플라워에게 주어진 “생” 또는 “삶”의 궤적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눈도 코도 앞산 쪽으로 말뚝을 박고
밤과 낮이 번갈아 온몸을 훑고 가도
불평 없는 그를 언제든 만날 수 있다
사방을 넓히는 어둠이 찾아와
보이지 않는 눈빛이 겹치면
개구리울음과 풀벌레 소리가
척추뼈 휘도록 매달린다
날마다 두 팔에 내걸던 그의 눈길
묵묵히 서서 들판을 지키고 키우는 일이 그의 몫인,
내 엄마가 그랬듯이 나도 그랬다
그와 나의 거리는 보이지 않아도 가깝고
눈앞에 서 있는 관계는 멀다
그나 나나 나이가 들면 표정에도 굳은살이 생기나 보다
어느 날, 미간에서 뻑뻑한 헛기침이 새어 나온다
발자국도 없는 그 자리가 온통
꽉 다문 입으로 살아온 날들이다
―「허수아비」 전문
이 시를 주도하는 인물에는 시적 화자 ‘나’, “내 엄마”, “그” 등이 있다. 김선옥이 주목한 ‘그’는 “허수아비”이다. 시인은 2연 3행~4행에서 ‘허수아비’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한다. 곧 “개구리울음과 풀벌레 소리가/ 척추뼈 휘도록 매달린다”라는 문장은 ‘청각’과 ‘촉각’의 완벽한 결합으로 완성된다. 또한 ‘그’와 ‘나’의 관계를 암시하는 5연의 “보이지 않아도 가깝고/ 눈앞에 서 있는 관계는 멀다”라는 진술 역시 돋보인다. 이 대목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가깝다’와 ‘멀다’가 역설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김선옥은 이번 시에서 “나이”, “굳은살”, “살아온 날들” 등의 표현을 하나의 계열로 포섭하면서 ‘늙음’ 또는 ‘노화’를 힘차게 형상화한다. 그것은 ‘내 엄마’가 걸어간 길이자 ‘나’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며 동시에 ‘허수아비’에게도 적용되는 길일 수 있다. 이제 인간은 경건한 시간의 흐름 앞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3.
김선옥의 신작시 다섯 편을 함께 점검하였다. 그가 이번에 내세운 시들은 공통적으로 ‘몸’이라는 단어를 품고 있었다. 시인이 다섯 편의 시에서 ‘몸’을 공약수로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김선옥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 ‘몸’의 변화를 감지했을 테다. 그 변화는 늙어가고 있다는 것이고,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며, 죽음에 근접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직간접적인 체험이나 경험에서 추출한 낡은 ‘몸’, 병든 ‘몸’, 죽음을 목전에 둔 ‘몸’ 등을 날렵한 언어와 신선한 비유를 곁들여서 요리한다.
김선옥이 포착한 시적 대상은 단일한 방향을 가리키는 대신 두 개의 방향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가령 시 「실직」에서의 “고물”이나 “중고품”은 “냉장고”, “티브이”, “세탁기” 등만을 지시하는 게 아니다. 시인은 우리 사회 곳곳에 포진한 ‘고물’ 또는 ‘중고품’으로서의 “남자”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시 「드라이플라워」에서의 “드라이플라워”는 마른 꽃이나 말린 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김선옥은 삼성의료원 암 병동 705호실에 입원한 “그녀”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전제품’이나 ‘꽃’ 같은 시적 대상과 ‘남자’나 ‘그녀’ 같은 시적 대상을 동시에 아우르는 김선옥의 시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그녀의 어떤 시들은 단순하고 소박한 의미로 규정되는 것이 아닌 복합적이며 중층적인 의미로 확장될 수 있다. 시인의 시 세계가 지향하는 이러한 경향성은 독자들에게 깊은 여운과 무한한 자유를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도 김선옥이 추구하는 여운과 자유의 시편이 그윽한 커피 향처럼 널리 퍼져나갈 수 있기를 곡진하게 기원한다.
필자 : 권 온(문학평론가)
약력 : 2008년 계간 문학과사회(문학과지성사) 신인문학상 평론(비평) 부문 수상(문학평론가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