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부채 이야기
옷치레에 빠질수 없는 중요한
물건이 있으니 바로 부채입니다.
역사에 나타난 부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후백제의 견훤이 고려의
왕건에게 지리산 대화살과 공작선을
보냈다는 고려사의 기록입니다.
조선조에는 임금님이 단오에 맟추어
신하들에게 부채를 하사했습니다.
팔도의 각 감영에도 수 백개의 단오선을
보내어 나누어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요즘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각 은행이나
관공서에서 갖가지의 부채를 나누어주는
풍습은 예사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부채의 소비에 따르는
갖가지의 제약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예외없이 사치가 심했다는 걸 알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부채 장식에 금은의 사용을
금하는 명을 내렸고 옻칠의 과다한 사용을
금했던 기록도 있습니다.
중국의 기록에 조선인들은
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닌다고 했는데
그만큼 옷치레의 중요한 장식이
부채였음을 말해줍니다.
단순히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가 아닌 햇빛가리개로 쓰기도 하고
남녀 내외용 차면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알려지는 부채의 종류만 해도 70여종인데,
그 으뜸을 합죽선으로 쳤습니다.
대나무 살을 정갈하게 다듬어 그 얇은 살로
엮어 투명한 광택이 나는 한지를 발라
사군자를 친 합죽선은 그 맑은 청아함으로
선비의 정신 세계를 표방했습니다.
넓게 펼쳤다가 접으면 한 손 안에 든다 하여
쥘부채라고도 하고 접선이라고도 했지요.
또 둥글 부채라는 것도 있습니다.
모양도 둥글게 아름답거니와 그 장식도
선추에 백옥 호박 비취등에 문양을 새겨
다회에 꿰어 동심결을 맺은 술을
늘어 뜨려 호사스럽기도 합니다.
모양도 그 둥그러운 모습에 따라
오엽선 봉미선 연엽선 연화선
파초선 태극선 등으로 부릅니다.
조선조의 궁중 부채로 진주선이라는 것도
있는데 둥근 금속테에 초화를 수놓은
비단을 끼워 손잡이에 진주를 장식했는데
가례나 길례때 이용되었습니다.
반가에서는 손잡이에 진주 대신에
꽃무늬의 문양만 넣었습니다.
조선의 기록에 부채가 여러번 역사에
등장하는데 정조때의 학자 이긍익의
사서 연려실기술에 중종반정을 일으킨
박원종의 부채이야기가 나옵니다.
1506년 9월 1일밤 도총부 도총관이었던
박원종은 창덕궁 밖에 진을 치고 반정을 지휘했는데 군복 차림에 칼 대신
부채를 휘둘렀다는 기록입니다.
그 모습이 대단히 엄정하고 아름다워
마치 신과도 같았다고 하니 부채가 그 결연한
순간에 화룡점정이 되었다고 보아집니다.
또 가슴이 에이는듯한
충정을 받아안은 부채도 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때 동래부사였던 송상현은 전사하기 직전 지니고 있던 부채에 부친에게 남기는 마지막 글을 절절하게 남겼습니다.
'외로운 성에는 달무리 쌓이듯 적이
에워쌓는데 각처 진에서는
배게를 높이고 안연히 있습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중하므로
부자간의 은의는 경하게 됨을 용서하소서!'
송상현은 길을 내달라는 왜군을 향해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줄수는 없다."
라는 기개를 보인 충신으로 어려운 전투끝에
성이 함락되자 급히 갑옷위에 관복을 차려입고
지니고 있던 부채에 이 글을 써서 남겼습니다
부채에 쓴 시 때문에 벼슬이 떨어지고
귀양길에 오른 사람도 있습니다.
선조때의 임제는
죽은 황진이의 무덤에 술을 따르고
가지고 있던 부채에 진혼시를 썼습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듯 누웠는다....
잔 잡아 권할이 없으니 이를 설워 하노라.
이 시가 화근이 되어 그는 탄핵을 당했고
종내는 벼슬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한낱 기생의 무덤에
시를 지어 올린 그의 행동이 사대부의
체모를 깍았다는 것이 이유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시에 부채를 주고
받는 것에 대한 문장들이 있습니다.
또 많은 풍속화에도
부채 그림은 빠지지 않습니다.
여름의 모시 한복의 치레로
부채만큼 어울리는 것이 없습니다.
현대에도 부채가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경우가 있으니 다름 아닌
판소리등 국악 공연의 쓰임새입니다.
아무리 명창이어도 손에 한자락의 쥘부채의
펼침이 없다면 아마도 매우 심심하게 보일 것입니다.
*♡*
첫댓글
부채의 유래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