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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4) 클뤼니 수도원
수도생활 영성의 핵심으로 자리잡아
카롤링거 왕조의 수도원 쇄신운동은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던 아니아네의 베네딕도(756~821)에 의해 시작됐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죽자 곧바로 중단됐다. 그러나 그가 추진했던 쇄신 운동은 10세기 거대한 베네딕도 수도원이었던 클뤼니 수도원에 의해서 다시 부활했다. 클뤼니 수도원은 특별히 베네딕도 규칙서의 엄격한 준수와 순명, 엄격한 금욕, 전례를 강조하면서 규모가 큰 수도원 제국으로 급속히 성장했다. 그 당시 클뤼니 수도자들은 문학이나 영성 그리고 여러 분야에서 교회에 크나큰 공헌을 했다. 사실 클뤼니 수도원은 초기에 성덕과 분별력이 뛰어난 위대한 아빠스들의 지도 아래에 있었기에, 약 200년간 교회 개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특히 성 오도 아빠스는 수도자의 생활은 전례나 렉시오 디비나에 의해 활력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클뤼니 수도원에서도 이렇게 렉시오 디비나를 인정하긴 했지만, 옛날 수도자들이 강조했던 것보다는 그 중요성이 많이 줄었다. 더욱이 렉시오 디비나의 대상은 더욱더 많아져 성경주석서, 신학서적, 교부들의 문헌뿐만 아니라 심지어 백과사전도 포함됐다. 고대의 수도자들에게 렉시오 디비나의 대상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뿐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대상이 계속 확대됐다. 심지어 영성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백과사전도 포함됐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특별히 클뤼니는 육체노동을 소홀히 하고 전례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수도생활의 세 축인 기도, 일, 그리고 렉시오 디비나의 균형을 잃게 됐다. 그들은 너무 제도화된 생활과 거대한 조직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수도생활의 관상적인 측면들을 소홀히 하는 경향도 있었다. 이로 인해서 아이러니하게도 10세기에 교회 쇄신의 상징이었던 클뤼니 수도원은 불과 한 세기 후인 11세기 말에는 오히려 부의 상징이 되어 교회 쇄신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 후 11세기와 12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수도승 전통 안에서는 다시 본래의 수도생활로 되돌아가려는 분위기가 강하게 형성되어 새로운 수도회들이 계속 탄생했다. 그 대표적인 수도회들이 가말돌리회, 카르투시오회, 시토회다. 이들 모두는 클뤼니 수도원이 잃어버린 수도원의 영성을 회복하려 시도했고 특별히 렉시오 디비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시토회의 성 베르나르두스는 성경에 대한 연구보다는 오히려 그 말씀 안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겨야 함을 강조하면서, 성경에 대한 렉시오 디비나를 하느님을 만나는 데 있어 확실한 안내자로 보았다. 성경 렉시오 디비나를 하느님과의 정감적인 일치를 일으키고 관상을 준비하기에 가장 적합한 수행이라고 보았다. 카르투시오회의 원장이었던 귀고 2세는 수도자들이 지상에서 하느님과의 높은 일치를 향해 올라가야 할 영적 사다리로써 렉시오 디비나의 네 단계, 즉 독서와 묵상 그리고 기도와 관상을 아주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이렇듯 수도 전통에서는 언제나 성경에 대한 학문적인 독서의 방법보다는 마음으로 읽고 맛들이는 단순한 렉시오 디비나 방법이 제시됐다. 그래서 수도자들은 성경을 통해 지식보다는 지혜를 더 추구하고자 했으며, 자신들의 논리적 결과보다는 오히려 말씀의 신비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자 하였다. 중세의 수도자들은 수도생활의 기본적인 영감을 렉시오 디비나로부터 받았다.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5) 근대 이후의 위기와 렉시오 디비나의 재발견
훌륭한 영적 보화의 부활
수도 전통에서 행해졌던 단순한 렉시오 디비나는 12~13세기를 거치면서 위기를 맞고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는 여러 탁발 수도회들이 출현하였고 특별히 스콜라 학문의 논리적 영향으로 인해서 수도자들 역시 렉시오 디비나 시간에 온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읽고 되새기며 기도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질문과 논증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중세 말기에 수도승들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스콜라 학문의 논리적인 접근을 비판하였으며 또한 그 이후에 나타나는 추론적인 묵상 방법인 이냐시오 묵상 방법에 대해서도 아주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 후 16세기 인문주의자들은 성경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으로써 비판적이고 조직적인 독서 방법을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성경에 대한 학문적인 발전에 크게 공헌을 하였다. 이 때문에 수도 전통 안에서 행해진 단순한 방법, 곧 성경을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읽고 되새김으로써 말씀과 삶이 분리되지 않았던 렉시오 디비나 수행은 사람들로부터 점점 더 도외시되어 버렸다.
이렇게 전통적으로 수도원들 안에서 행해졌던 렉시오 디비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 영향력이 감소되어 갔고 잊히게 되었다. 이로써 오늘날 성경에 대한 여러 기교적이고 심리적인 접근 방법들이 더 많이 소개되었고, 오랜 기간 수도 전통 안에서 전해져 오던 단순한 성독 수행은 거의 잊히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교회 전통 안에 있었던 훌륭한 영적 보화인 렉시오 디비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말씀과 영성 그리고 삶 사이에 부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수도 전통에 있었던 단순한 렉시오 디비나 수행의 재발견은 분명히 영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특별히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회 복음화의 강력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고대의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강조했고, 베네딕토 16세 교황도 역시 여러 곳에서 고대의 전통적인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렉시오 디비나 수행이 교회에 영적인 봄(a new spiritual springtime)을 가져오는 중요한 수단임을 천명했다.
특별히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렉시오 디비나를 잘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였다. 성경이 성령의 감도 하에 쓰였듯이, 같은 성령의 빛 안에서 조명된 정신과 마음을 간직하고 겸손된 들음의 태도로 렉시오 디비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성령의 빛 없이는 그 참된 영적인 의미들을 결코 깨달을 수가 없다. 오직 성령의 빛 안에서만이 하느님 말씀의 깊은 영적인 의미들을 깨달을 수가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된 태도로 잘 듣는 것도 중요하다. 잘 듣지 않을 때 말씀은 우리와 아무런 관계 맺음 없이 흘러가 버린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귀를 기울여 잘 들어야 한다. 그 말씀은 그 순간 하느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사랑 지극한 그분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복음화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교회에 영적인 봄을 가져오는 구체적인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교회의 오랜 전통 안에 있었던 렉시오 디비나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6) 학문적인 성경 독서
성경의 학문적 접근, 준비 단계에 불과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은 성령의 감도 하에 쓰여진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성경 영감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단순히 오늘날처럼 소설책을 읽듯이 눈과 머리로 재빨리 읽어 버리면 그 본래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을 수가 없다. 성경 독서는 분명히 오늘날 우리의 독서 방법과는 달라야 한다.
이에 대해 중세 수도승 전통의 권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장 르끄레르 신부는 두 개의 큰 범주로서 성경 독서법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 성경 독서는 ‘학문적인 독서’(the scholastic lectio)이다. 이것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지적인 접근 방법으로써 분석적이고 논쟁적인 측면을 지닌다. 이러한 방법은 오늘날 특히 성경학적인 측면에서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성경을 단순히 지적인 호기심이나 학문적인 측면에서만 접근한다면, 말씀이 담고 있는 본래의 참다운 의미와 영적인 측면을 소홀히 할 위험이 있다. 예수회의 윌리암 존스턴 신부는 이러한 접근법으로는 사랑에서 나오는 숨겨진 하느님에 대한 참된 지혜와 그리스도의 현존을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임을 지적하였다. 실제로 오늘날 성경학자 중에는 신앙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현실에 우리는 놀라움을 가지게 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유다인들은 성경을 경건하게 대하고 열심히 탐구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 5,39) 또한 바리사이들도 성경을 열심히 연구는 했지만 진정 살아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52)
가르멜 수도회의 유명한 영성가이자 저술가인 라르킨(E. Larkin)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만약 우리가 순전히 지적으로만 성경에 접근한다면 혹시 아름다운 신학적인 표현들과 문장들에 대한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주님을 만날 수는 없다.”
현대의 영성가 중의 한 분인 토마스 머튼 역시 이 점을 지적하였다. 비록 현대에 수많은 학문적인 성경 연구가 우리의 성경 이해에 도움을 주었지만, 그 반대로 너무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영역의 복잡함으로 인해 오히려 성경에 대한 관심을 덜 갖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러한 학문적 연구의 단계가 더 깊은 하느님 말씀과의 인격적인 단계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준비 단계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세계적인 구약 성서학자인 루이스 알론소 쇠켈(L.A. Schkel)은 평생을 성경 연구에 투신했던 학자였지만, 자신의 고별 강연회에서 다음과 같은 겸손의 말을 남겼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아직도 나의 성경 연구가 신랑의 목소리를 찾아 밤거리를 헤매는 아가의 신부 마음 같고, 마치 광대한 태평양을 바라보며 그 태평양의 물 한 모금을 조금 맛본 듯한 그런 심정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단순히 학문적인 측면에서만 접근하려는 시도는 시작부터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수도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7) 수도승 생활의 성경 독서
성경, 머리 아닌 마음으로 다가가야
장 르끄레르 신부가 제시하는 두 번째 성경 독서는 수도승 전통 안에서 오랫동안 전해져온 독특한 성경 독서(the monastic lectio)인 렉시오 디비나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머리가 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읽고 듣는 수행이다. 이러한 독서의 수행은 자연스럽게 ‘묵상’(meditatio)과 ‘기도’(oratio)를 향하며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인 ‘관상’(contemplatio)에로 나아가게 한다. 윌리암 존스턴 신부는 이것을 관상적이고 신비적인 접근 방법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마음을 열고 믿음을 가지고 성령의 빛과 인도에 따라 말씀을 맛보고 음미하라는 것이다.
중세를 거치면서 수도승 전통 안에서 행해졌던 단순한 독서는 점차 전문적인 연구들로 대체되어 갔다. 그래서 성 빅토르 수도원의 휴(Hugh)는 새로운 학문적인 방법을 거슬러 렉시오 디비나 본래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중세의 시토회원이었던 아르놀드(Arnould) 역시 성경 독서를 할 때에는 성경으로부터 단순히 지식(scientia)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참다운 지혜(sapientia)를 찾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성 베르나르도 역시 성경을 대함에 있어 그것에 대한 단순한 연구보다는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그 안에 몰입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가르멜회의 유명한 영성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머리로 하느님을 아는 것과 직접 체험하는 것은 다른 차원임을 지적하였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지식을 얻어 하느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성경 안에서 살아계신 그분의 소리를 직접 듣고 그분을 알아 뵙고 체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토마스 머튼 역시 이러한 깊은 단계, 즉 말씀 안에서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이 성경을 참으로 알게 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단계는 단순히 학문적인 성경 독서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더 깊은 인격적이고 신비적인 차원이다.
수도승 전통 안에서는 언제나 이러한 하느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만남과 신비 체험을 위해 단순한 마음으로 말씀에로 다가가 온 마음으로 말씀을 소리 내어 읽고 들으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수도자들은 단순한 마음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수도생활을 더욱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었다. 다행히 오늘날 교회는 렉시오 디비나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단순히 학문적인 측면에서만 성경을 읽을 때, 말씀 안에 살아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참으로 만날 수가 없다. 그러나 수도승 전통에서 행했던 것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다 보면 어느덧 그 말씀 안에 현존하시며 살아계시는 참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라르킨(E. Larkin)은 하느님의 말씀을 머리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전(全) 존재로 읽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2010년에 입적한 법정 스님은 살아계실 때 여러 권의 아름다운 책들을 출간하셨다. 특별히 스님은 자신의 저서 「내가 사랑한 책들」에서 50권의 책을 간추려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마음으로부터의 책 읽기를 강조했다. “우리가 책을 대할 때는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자신을 읽는 일로 이어져야 하고 잠든 영혼을 일깨워 값있는 삶으로 눈을 떠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 역시 머리가 아니라 온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8) 귀고의 영적 사다리
독서 · 묵상 · 기도 · 관상 순으로 하는 성독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는 수도승들에게 중요한 영적 수행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초기 수도승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그러한 수행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렉시오 디비나 수행에 대해 많은 수도 교부가 강조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문헌들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당시 수도승들은 누구든지 렉시오 디비나 수행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자료들을 남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중세를 거치면서 성독에 대한 중요한 자료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12세기 카르투시오회의 제9대 원장이었던 귀고 2세(?~1188)는 그의 저서 「수도승의 사다리」(The Ladder of Monks)에서 매우 체계적이고 일목요연하게 렉시오 디비나를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렉시오 디비나를 언급할 때 귀고의 문헌은 매우 중요하며,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많은 글은 거의 귀고의 개념을 직ㆍ간접으로 인용하고 있다.
귀고는 렉시오 디비나를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영적 사다리’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네 개의 단계, 즉 △ 독서(Lectio) △ 묵상(Meditatio) △ 기도(Oratio) △ 관상(Contemplatio)의 단계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수도승들을 지상에서 천국으로 오르게 하는 하나의 영적 사다리를 만들어 준다고 보았다.
영적 사다리의 첫 번째 단계인 ‘독서’는 복된 삶의 감미로움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인 ‘묵상’은 그것을 깨닫는 단계이며, 세 번째 단계인 ‘기도’는 그것을 청하는 단계이고, 마지막 네 번째 단계인 ‘관상’은 그것을 맛보는 단계를 말한다.
귀고는 이것을 쉽게 음식의 비유로 설명하였다. 독서는 음식 자체를 입에 넣는 단계이고, 묵상은 그것을 씹어 분해하는 단계이다. 그리고 기도는 그것의 맛을 느끼는 단계이고, 관상은 그것으로 인해 기쁘고 새롭게 되는 감미로움 그 자체를 말한다.
귀고 2세는 이러한 단계들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묵상 없는 독서는 쉽게 메마름에 떨어질 수 있고, 독서가 없는 묵상은 쉽게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묵상 없는 기도는 냉담해질 수 있고, 기도 없는 묵상은 참된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기도가 열정적일 때 관상에 이르는 것이지, 기도 없이 관상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희박하고 그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보았다.
귀고는 독서의 단계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단계로 보았고, 묵상과 기도 그리고 관상의 단계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응답의 단계로 보았다. 이것은 기도의 리듬인 들음과 응답의 관계를 잘 함축하고 있다. 비록 그가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점진적인 발전의 단계와 그리고 각 단계의 긴밀성을 언급했지만 이러한 단계가 영성생활에서 반드시 필연적으로 어떤 연속적인 단계로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독서의 단계에서 묵상의 단계로 그리고 기도와 관상의 단계로 나아갈 수 없음을 귀고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단계들이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하는 수도자로 하여금 성경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능케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면을 직시할 때, 우리는 수도자들이 성독 수행 안에서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어떻게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였는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19) 능동적인 독서의 수행
눈으로 보고, 소리 내 읽고, 귀로 듣고
렉시오 디비나에 있어 귀고 2세의 문헌이 중요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첫 번째 단계인 성경 독서에 대한 것은 고대 수도승들의 전통에서 행했던 단순한 성경 독서의 수행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한 예로 귀고는 독서를 설명하면서 라틴어 단어 ‘inspectio’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의 뜻은 관찰, 조사, 고찰을 의미한다. 귀고에게 독서란 본문을 주의 깊게 관찰하거나 혹은 조사하고, 고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히 이 점은 고대 수도자들이 온 마음으로 성경을 소리 내어 읽고 암기했던 수행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가능하면 귀고의 4단계 전체적인 도식은 받아들이지만, 그의 견해보다는 더 원천적으로 고대 수도승 전통의 문헌들로부터 그 근거를 가져오고자 한다.
전통적으로 고대의 수도승들은 성경을 읽을 때, 오늘날과 같이 단순히 눈과 머리만 이용해서 대충 그리고 빨리 읽지 않았다. 그들은 천천히 눈으로 본 내용을 입술로 작게 소리 내어 읽고 직접 귀로 듣고 또 그것을 기억과 마음에 간직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전 존재를 활용하는 능동적인 독서의 수행이다.
사실 고대에서 의사들은 종종 환자들에게 걷고 달리는 운동과 같은 하나의 훈련으로서 독서의 처방을 내주기도 하였다. 그것은 독서가 인간의 다양한 기능을 사용하는 전인적인 운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에도 그 옛날 독서는 오늘날과 같은 묵독이 아니었다는 증거를 볼 수 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필리포스의 이야기는 그 하나의 예이다. 에티오피아 고관이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 앉아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 그때 필리포스가 가까이 다가가니, 그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사도 8,26-30) 즉 그 당시 독서는 소리 내어 읽고 듣는 것이었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도 다음과 같은 예가 나온다. 어느 날 세 명의 수도승들이 한 원로를 찾아가서 저마다 자기들의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시작하였다. 한 형제가 “스승님, 저는 구약과 신약을 모두 암기하였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그러자 원로는 즉시 그에게 “어지간히 시끄러웠겠소!”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말씀을 읽고 묵상한다는 것은 당연히 성경을 소리 내어 읽고 암송하는 수행이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 시대에도 일반적으로 독서는 소리 내 행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고백록」에서 발견하게 된다. 어느 날 아우구스티노가 암브로시오 성인을 방문했을 때, 그가 책을 읽고 있었는데 혀로는 소리 내지 않고, 눈으로 책장을 젖히고, 마음으로 그 뜻을 새겨 나가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근거는 오늘날 독서학에서도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베네딕도 규칙서」에서도 여름철 동안 식사 후에 형제들은 침묵 중에 휴식을 취하든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독서를 원하는 사람은 독서를 하되 남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48,4-5). 이것은 그 당시 독서를 한다는 것이 작게 소리 내어 읽고 듣는 수행이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을 눈으로 보고, 본 내용을 천천히 입으로 작게 소리 내고, 소리 낸 내용을 다시 자신의 귀로 귀 기울여 듣는 전인적인 독특한 독서 수행이 바로 수도승 전통에서 전해준 훌륭한 영적 유산이다. 이것은 성경 독서 시간에 본문을 구조 분석하는 방법과는 차이가 있다.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20) 천천히 읽음
천천히 하느님 말씀의 의미 음미하며
현대의 영성가 중의 한 분인 오스트레일리아의 트라피스트 수도승 마이클 캐시(Michael Casey)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경 독서는 마치 시집을 읽는 것과 같다. 우리는 성경 본문을 천천히 읽고, 우리가 읽은 것을 맛보고, 그 본문을 우리의 기억 속에 남길 필요가 있다.” 즉 성경을 재빨리 읽지 말고 천천히 소리 내어 시집을 읽듯이, 하느님 말씀의 의미를 음미하며 읽으라는 권고이다.
독서학에서는 색독(色讀)과 체독(體讀)을 구분한다. ‘색독’이란 표현된 글의 문자적 의미만 읽는 것을 말하지만, ‘체독’은 표현된 것 이상의 내포적 의미를 온몸으로 느끼며 읽는 것을 말한다. 즉 책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천천히 올바르게 읽고, 또한 온몸으로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수도 전통에서 전해준 렉시오 디비나에서의 독서는 바로 이렇게 꼼꼼히 온몸과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 체독(體讀)의 경지를 말한다.
체독의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독서할 때 천천히 글의 의미를 음미하면서 읽어야 한다. 사실 천천히 읽는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오늘날 모든 것이 자의든 타의든 빨리빨리 움직여지고 있으며, 심지어 가만히 있어도 “빨리! 빨리!” 문화에 휘둘려 들어가게 된다. 인간에게는 생체리듬이 있다. 걷는 것이나 먹는 것을 평상시와 달리 빨리하게 되면 신체 기관이 즉시 거부 반응을 보여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빨리 읽는 것은 그렇지가 않아서 막을 수가 없다. 책을 재빨리 읽는 사람은 좋은 책을 천천히 읽어 나갈 때의 묘한 힘을 결코 발견할 수 없다.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퇴계 이황은 책을 꼼꼼히 읽어야 할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책을 읽을 때 중요한 점은 반드시 성현의 말씀과 행동을 마음으로 읽되 푹 잠겨 그 참뜻을 구해야 한다. 설렁설렁 넘어가고 벙벙하게 외울 따름이라면 귀로 듣고 입으로 옮기는 쓸데없는 재주에 지나지 않는다. 수백 편의 글을 다 외우고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경전을 본다 한들 뭐가 대수일까?”
그러므로 참으로 책을 잘 읽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우선 아주 천천히, 아주 느릿느릿 읽는 연습을 해야 한다. 책을 향락하거나 스스로 배우기 위해서도 또 그것을 비평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천천히 읽어야 한다. 이렇게 천천히 읽다 보면 가끔 1년에 한 두어 번이라도 문득 황홀한 기분에 젖어들 때가 있다. 비록 1년 365일 가운데 그런 기쁨이 찾아오는 일은 단 몇 분이나 몇 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빨리빨리 건너뛰면서 읽는다면 단 몇 분, 몇 초의 그 기쁨조차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솔직히 바쁜 일상 속에서 천천히 책을 읽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포도 한 알의 싱싱한 맛을 제대로 맛보고 느끼기 위해서는 먹는 방법이 중요하다. 그것을 재빨리 씹어서 삼켜버리면 포도 한 알의 충만한 맛을 제대로 맛볼 수가 없다. 이처럼 책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도 책 자체의 맛이 달라질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참된 맛을 한껏 맛볼 수도 있고 혹은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에 대해 고대 수도자들의 독특한 독서의 방법은 성경의 참된 맛을 어떻게 맛볼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을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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