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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박사, 네 인생. 네 내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은
요 약 취직도, 사랑도 경우에 따라서는 두 번 이상도 할 수 있으나 인생은 누구나 단 한 번 살 수 있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을 눈치와 채면과 통념에 메이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야 성공할 수 있고, 후회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사례로 12명을 제시하였다. 남은 인생이라도 후회 없는 삶을 원한다면 요약이라도 읽으면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
〇『한 번뿐인 네 인생, 네 뜻대로 살아라』는 책 제목을 보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도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반론을 하고 싶어서 책을 잡았습니다. 저자는 인생은 절대로 두 번의 기회가 없고,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므로, 자신의 뜻대로 살아야 일이 잘되고 후회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12명을 소개합니다.
인터넷에서 각 장을 요약한 것을 퍼와서 수정하고, 우유 팔아서 ‘민족사관고’ 설립한 고 최명재의 글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〇 내용요약
1장 왕위 계승 포기, 구도자 길 걸은 석가모니: 석가모니는 북인도 부족국가의 왕자로 태어났지만 중생 구제에 인생을 바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한다. 최상의 진리를 얻기 위해 출가를 선택하고 두려움과 공포를 마주하는 고행의 길로 스스로 걸어가서, 구도자의 길에 인생을 바친 인류의 스승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2장 ‘술 한 잔에 시 한 수’, 방랑시인 김삿갓: 홍경래의 난 때 홍경래에게 항복하고 목숨을 구걸한 조부 김익순을 비판해 급제한 김병연. 자신의 과거와 조부를 비난한 죄를 알게 되자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오른다. 전국을 유랑하며 수 많은 시를 남기고 낭만 가객으로 명성을 후대에 남긴다.
3장 ‘단종 폐위’ 맞서 보던 책 불태운 김시습: 당대 최고의 인재였지만 세조의 왕위 찬탈에 출사를 포기한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사육신이 처형되었으나 세조의 보복이 두려워 수습하는 사람이 없었다. 김시습은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고 머리를 깎고 팔도를 유랑하고 경주 남산에서 금오신화를 집필한다. 암울한 시대에 뜻을 펼치지 못했지만 배우고 익힌 것을 실천하는 인생이었다.
4장 ‘세 차례 유배, 여섯 차례의 파직’ 허균: 뛰어난 문장으로, 명나라 사신과 교류하며 수창외교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관직에 나갔지만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수 차례 파직되는 아픔을 겪는다. 서자 등 소외계층과 어울리면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정치개혁 사상을 제시한다. 광해군 시절 정치적 음모로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형에 처해졌지만, 기득권 세력은 인조반정 후에도 명예를 회복해주지 않았다. 시대를 앞서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와 학문을 펼쳐 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
5장 “50 이전의 나는 한 마리 개였다” 이탁오: 명나라 사상가 이탁오는 백성의 뜻을 따르는 지인의 정치를 추구하며 관직생활을 했으며, 양명학과 불교를 연구한다. 유교를 정면 비판하고, 여성을 교육시킨다. 사회 윤리를 어지럽힌다고 처벌당하게 되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이탁오의 개혁사상은 사회주의 중국에서 빛을 보게 되고 일대 종사로 추앙된다.
6장 불온한 조선 청년을 사랑한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는 아나키스트 테러리스트 박열의 아내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무적자로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며 압박받는 조선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진다. 일본 사회주의자 동맹에 가입한 박열과 동거했고 테러 계획이 발각되어 무기징역에 처했으며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7장 행동파 경제학자, 실천적 생태론자 니어링: 공산주의자 스콧 니어링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반전운동을 펼치고, 자급농으로 살아간 실천적 생태론자이기도 하다. 과격한 진보성향을 보여 대학에서 퇴출당하고 평화주의자, 채식주의자, 사회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공산당에 가입했지만 레닌의 주장과 반대되는 과격한 주장을 펼쳐 공산당에게서도 축출당한다. 헬렌 노드와 재혼하고 자급농으로 살면서 평화주의자 및 인본주의자로 추앙받게 된다.
8장 하버드대 출신의 통나무집 ‘자연인’ 소로우: 형의 사망, 대안학교 운영 실패, 산불을 일으키며 윌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살기로 결심한다. 물질과 문명의 안락함을 거부하고 숲속에서 고독과 사색의 삶을 살아간다. 인두세 납부 거부로 공권력에 저항하면서 시민 불복종 선언을 한다. 당대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환경운동 주의자들에게 환경수호성인이라고 재평가 받는다.
9장 운동권 출신 생명·협동조합 운동가 장일순: 좌파 정당 소속으로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한다. 용공분자로 처벌당하고, 고등학생들의 시위에 책임을 지고 교육에서도 물러선다.전 지구적 문제인 생명 존중과 자연 및 환경보전 운동으로 투쟁 방향을 전환하고 협동조합을 만들어 한살림을 운영한다.
10장 밤농사 지으며 ‘친일파’ 연구한 임종국: 한일 양국 수교를 반대하기 위해 친일 인명사전을 만든다. 먼지 투성이 자료를 뒤지며 경제적 궁핍, 학계의 외면, 주변의 오해를 무릅쓰고 자기길을 간다.
11장 우유 팔아서 ‘민족사관고’ 설립한 최명재: 이란에서 운송업을 통해 큰 돈을 벌어서, 파스퇴르 유업을 세워 저온살균법을 홍보하며 다른 우유를 비난하며 우유 전쟁을 시작한다.민족사관고등학교를 설립했지만 명문대 입시에 뒷전인 학교는 외면을 받는다. IMF로 파스퇴르 유업은 부도 났지만, 민족사관고등학교는 명문고의 명성을 얻는다.
12장 자유로운 삶 살다간 ‘농부 작가’ 송성영: 도를 공부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고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한다. 산골 생활을 하면서 글쟁이, 철학자, 방랑자, 자유인으로 자유롭게 살다가 위암으로 생을 마무리 한다.
〇 우유 팔아서 ‘민족사관고’ 설립한 고 최명재
- 강원도 횡성에 있는 민족사관고등학교(약칭 민사고)는 파스퇴르 우유 창업자 최명재 회장이 설립한 학교로 ‘사관’은 사관 학교의 ‘사관’이 아니라, 역사관 할 때 ‘사관(史觀)’이다.
최명재는 1927년 전북 김제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서 전주 북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충무공 이순신을 알게 되어 민족혼에 불이 붙었고, 훗날 영국의 이튼스쿨을 방문했다가 출신 넬슨 제독의 트라팔카 해전 전승 기념식을 보고 이순신을 다시 떠올렸다. 민사고 설립의 꿈은 이때부터 움트기 시작했다.
- 전주북중을 졸업하고 상경하여 경성경제전문학교(서울대 상대 전신)에 입학하여 재학중 6.25사변을 만났고, 전쟁이 끝난 후 한국 상업은행에 합격하여 동대문 지점에 배치돼 은행원 생활을 시작했다.
- 은행 최초로 업무 규정집을 만들어 5급 행원에서 일약 3급 대리로 승진했고, 종로 지점으로 전근해서는 묵은 창고에서 상업은행의 전신인 천일은행의 인허장을 찾아낸 일로 행장 비서실로 발령이 났으나, 월급쟁이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7년간 재직한 상업은행을 퇴직하고 택시 운전사로 취직해서 열심히 일을 해서 2년 만에 택시 한 대를 소유하였고, 6년째 되는 해는 다섯 대로 소규모 택시 회사를 세웠다.
- 월남전 특수가 지난 후 중동 산유국에 관심이 쏠릴 때 이란의 석유 채굴권을 지배하고 있던 걸프사가 유럽으로부터 이란으로 실어 나르는 유전용 자재 수송업을 소개받고 도전해 보기로 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출발하여 동유럽과 발칸반도, 터키를 지나 테헤란에 이르는 대장정을 온 영국인 운전사들은 왕복 24일 걸렸으나, 최명재는 30대의 트럭 선두에 직접 트럭을 몰아서 불과 8일에 테헤란에 도착했다. 20대를 추가해서 유럽의 생필품을 테헤란 시장에 팔자, 이란 정부는 관세 면제는 물로 장려금까지 주어서 그야말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 돈을 벌자 영국의 이튼스쿨을 세우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서 대관령과 비슷한 조건이면서도 서울에서 가까운 횡성군 안흥면 소사리 일대 덕고산 자락에 여의도 크기와 비슷한 70만 평을 매입하여 지천명의 나이에 퇴로를 끊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 미국에서 우수한 젖소 70마리를 들여와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책을 보면 관련 지식을 습득하여 3년 만에 젖소는 450마리로 늘어났고, 하루에 우유 생산은 4~4.5t에 달했다. 일본 낙농업계에 견학을 가서 우유에는 가짜가 있고, 진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젖소에서 막 짠 원유를 130도가 넘은 초고원으로 살균하면 일주일 넘게 우유를 변하지 않도록 유지할 수 있다.[L.L 우유(Long Life Milk)] 그러나 고온으로 삶아 내면 우유의 생명력이 전부 파괴되기 때문에 죽은 우유, 가짜 우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63도로 저온 살균을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일본 유가공업자들은 다 알고 있었으나 유지관리를 위해서 초고온 멸균 방식이 유리하기 때문에 주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 1987년 9월 7일, 파스퇴르 우유가 첫선을 보였지만 가격이 두 배나 비싸기 때문에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외에는 납품을 받지 않았다. 비상수단으로 아파트를 돌면서 홍보한 결과 한 달 만에 하루 생산량 4.5t을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우유 전쟁은 이제부터였다.
- 그러나 당국에서는 과대 선전이기 때문에 행정 조치를 하겠다면서 ‘우유는 전부 소의 젖인데 같은 소의 젖으로 만든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식으로 주장하였다. 그래서 신문에 소위 ‘의견 광고’를 하기로 했다. ‘최명재식 광고’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거센방해가 있었지만 파스퇴르 우유는 국내 최초로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군에도 납품하였다. 출범 이듬해에 파스퇴르 우유는 매출이 10배나 신장되었으며, 이후 매년 2~3배씩 가파르게 성장하였다.
- 우유가 성공하자 민족 주체성을 가진 세계적 지도자 양성에 자신을 바치기로 했다. 1992년 10월, 교육청에 ‘학교 법인 명재학원’ 설립 허가를 신청했다. 재단 출연금은 그의 개인 재산과 파스퇴르 유업의 이익금으로 충당키로 했다. 초대 교장으로 이규철 씨와 28명의 교사도 기존 교사의 급료 2~3배를 약속하고 28명의 교사도 선발하고 선발 대상자는 학년 성적 상위 1% 이내 수준의 수재들로 국한시켰다. 경쟁률은 5:1이었고, 합격생 30명 전원 장학생이었다. 96년 봄, 소요된 비용은 총 500억 원, 학교 부지(38만 5천 평) 대금을 합산하면 대략 1천억 원 정도가 투입되었다.
-1996년 3월 1일, 덕고산 중턱에서 민족사관고등학교 개교 및 제1기생 입학식이 연단 앞에서는 한복차림의 신입생 30명이 도열하였다. 남자 기숙사 앞마당에 15좌의 노벨상 수상자 동상 좌대를 만든 것도 그런 의미였다. 학생들이 빈 좌대를 보면서 그 자리에 자신의 동상이 올라가 있는 꿈을 꾸며 공부하라는 무언의 암시였다.
-첫 번째 어려움은 학부모 중에는 서울대 보내 의사나 판검사 만드는 것이 꿈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학부모회에서 학교 운영에 간섭하기 시작했으나 타협할 수 없었다. 결국 2학년에 진급할 무렵 19명이 떠나고 말았다. 교사도 몇 명 학교를 떠났다. 당시 서울대는 모 외국 기관의 세계 대학 순위 조사에서 800등을 했다. 겨우 800등 하는 학교에 가려고 그 좋은 머리를 쓰다니 아깝지도 않은가. ‘서울대를 목표로 하는 학생은 민사고에 오지 마라!’며 폭탄선언을 했다. 대신 그들에게 세계 10위권 명문대 진학의 길을 개척하고 대학 간판이 아니라 자신이 평생 연구하고 싶은 과제를 가장 잘 공부할 수 있는 대학을 찾는 학생들만 입학시키기로 했다. 이를 위해 학생들에게 영어 상용을 도입하였다.
- 1997년 11월,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가게 되자, 고품질 고가의 파스퇴르 우유도 매출이 급락하였다. 그는 유일한 부동산이었던 아파트를 팔고 본인과 가족 명의의 회사 주식도 전부 회사에 기부하였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지만 이듬해 1월 말 회사는 부도가 나고 말았다.
- 1987년 창사 이래 11년 만이었다. 민사고의 든든한 뒷배였던 파스퇴르 유업이 부도가 나자 학교도 흔들렸다. 부도 이후 경영에서 손을 뗐으나 채권단의 요청으로 다시 회사 경영에 복귀하였다. 복귀 조건은 민사고에 대한 지원을 계속한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 99년에는 전성기 매출 3분의 2 수준으로 회복되어 채무도 빠르게 갚아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2000년 봄부터 그의 몸에 이상 신호가 울렸다. 그의 나이 만 73세였다. 아내와 함께 모처럼 제주도로 휴식을 취하러 갔다가 호텔 사우나에서 전신 85%가 화상을 입게 됐다. 몇 차례의 피부 이식 수술과 재활을 통해 상당 부분 회복하였으나 외부 활동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민사고가 순항하였다. 부도 사태 이후 민사고는 학비를 내도록 방침을 바꿨으나 학교의 지향점은 예전 그대로 유지했다. 1999년 개교 이래 2021년까지 하버드대 13명, 예일대 20명 등 985명을 해외 유명 대학에 진학시켰다. 서울 강남 학원들 중에는 민사고 반을 따로 편성한 곳도 많고, 심지어 해외 유학생들의 역유학 현상도 생겨났다. 민사고는 명실공히 ‘국내 최고의 명문고’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〇 느낀점
-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난 최명제 회장은 2022년 6월 26일 향년 95세로 별세하셨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필자와 고향이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일한 넓은 만경평야를 바라보고 살았으면서도 고 최명제 회장님은 은행, 택시운전, 운송회사, 중동유통업, 낙농, 민사고설립등 변화와 개혁을 하면서 꿈을 이루셨음에 비추어 너무도 초라한 내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 단 한 번뿐인 인생을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산다는 것은 본능이 시키는 데로 사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사명을 붙잡고 사는 것이라 정리했습니다. 체면과 눈치 그리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큰 방향을 위해서 굳굳하게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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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운현 지음,『한 번뿐인 네 인생, 네 뜻대로 살아라』, 새빛, 2022년 12월.
하고싶은것을 하면서 산다는건
큰 행운입니다
명분을 갖고 일을한다해도
세상과 타협해야 되는것들이 많음에
그럼에도
이뤄내신분들은
훌륭함을 인정하는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