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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날들과 사람의 아들의 날들
말씀 : 누가복음 17:26-29.
주님은 마지막 때의 교회를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믿음에 대한 열정이 식어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고 미지근하여 토해 내신다고 하셨습니다. (계 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그런즉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므로 내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리니]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날씨가 너무 뜨거워도 살기 힘들고 너무 추워도 살기 힘듭니다. 음식이 너무 뜨거워도 먹지 못하고 너무 차가워도 먹지 못합니다. 신앙도 너무 뜨거우면 이단으로 빠지기 쉽고 너무 차가워도 성장하지 못합니다. 물론 신앙은 차가운 것보다는 뜨거운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뜨거우면 분별력을 잃고 물불을 가리지 못합니다.
라오디아 사람들의 교회는 믿음에 관해서는 미지근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소욕에서는 아주 뜨겁습니다. (계 3:17a) [이는 네가 이르기를, 나는 부자라. 내가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 육신에 필요한 것이 부족하지 않으면 그는 영적으로는 형편없습니다. 육신적으로 부족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재물을 믿습니다. 주님은 부자들의 영적 상태를 [b, ........하면서 네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제가 살아보니까 풍요로운 것보다는 약간 부족한 듯해야 좋습니다.
제자신도 주님을 만난 첫사랑의 때를 돌아보면 지금은 많이 타락하고 게을러지고 미지근해졌음을 고백합니다. 처음엔 뜨겁게 기도하고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로 시간들을 보냈는데 오늘날은 첫사랑의 믿음에서 너무 멀리 떠나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책망이 임하기 전에, 징계를 당하기 전에 회개하고 열심을 내야하겠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에는 주님이 계기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적인 권력과 부와 명예와 영화만이 있을 뿐입니다. 성도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다시 주님을 받아들여야합니다. (계 3:20)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하셨습니다.
교회가 이처럼 믿음이 미지근해 졌으니 세상은 어떠하겠습니까? 이방인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주님은 이방인들의 때가 차면 주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의 때라함은 이방인들의 구원 받은 수를 말함이 아니라 그들의 죄가 가득 참을 말씀하십니다.
만약 교회가 종말론으로 뜨거운 때라면 요즈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들의 분쟁을 보면서 그 전쟁이 확대되면 환란의 때가 임박하지 않았는가? 신경을 곤두세웠을 것입니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아니했는지 다시 휴전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이래로 그곳은 항상 전쟁이 끝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 가나안 땅에 입성했을 때에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들을 모조리 멸망시켰더라면 지금과 같은 분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남겨 두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앞으로도 주께서 심판하시기 까지는 그들의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누가가 기록한 큰 환란의 시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눅 21:20-23)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것의 황폐함이 가까이 이른 줄 알라. 21)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고 그것의 한가운데 있는 자들은 밖으로 떠나가며 시골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22)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성취하기 위한 원수 갚는 날들이니라. 23) 오직 그 날들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그 땅에 큰 고난이 있고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으리라.]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으로 그들의 성지인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이방신들을 섬기며 타락하여 아름다운 황금성전은 허물어지고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지금은 요르단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경계에 있으므로 분쟁이 끝일 날이 없습니다. 이런 분쟁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전쟁의 화약고가 되는 곳이 바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보든지 간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으로 볼 때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것의 황폐함이 가까이 이른 줄 알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전쟁으로 확산되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가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박정대 형제 부부와 만나 교제를 했습니다.
박정대형제는 타일 기술을 배워 독립하려고 더불캡 트럭을 사고 장비를 구입하고 영업을 시작했는데 명함을 돌린 곳으로부터 연락이 왔다면서 아주 좋아했습니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을 하고 열심을 내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항상 기도하며 주님의 인도를 구하는 모습에서 기쁨을 얻고 믿음으로 세상에 맞서는 모습에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성경의 궁금한 것들과 세상 죄악의 극에 달한 슬픔과 마지막 때의 심판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사실상 코로나 19로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들은 흉악한 범죄들로 안한 살인사건들입니다. 어쩌면 같은 사람들끼리 죽이는 것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슬프고도 무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지금이 바로 이방인들의 죄악이 극에 달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이 주께서 말씀하시는 노아의 때가 아닌가? 할 정도입니다. 사람들의 사악함이 땅에서 크고 또 그의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창6:5)이므로 주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명령이나 사람들의 윤리 도덕 같은 것들은 간 곳이 없고 인권만이 살아서 그것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성소수자 차별금지 법이란 무엇입니까?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욕하거나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인권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남자가 함께 눕고 여자와 여자가 함께 눕는 성적인 타락으로 충만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하셨습니다. 주께서 마지막 날들이 노아의 날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눅17:26). 그렇다면 노아의 날들이 어떠했는지 오늘날과 비교해 보면 주님의 재림의 징조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노아의 날들의 특징은,
첫째,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에녹과 노아와 같은 선포자가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 선포했지만 사람들은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소수의 기독교 광신자들이 믿는 교리로 치부해 버리고 맙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노아홍수의 심판이나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 심판도 흘러간 옛 이야기 정도로 여기고 물질문명의 발달과 과학이라는 우상을 따르며 예언된 하나님의 심판에는 관심이 없는듯합니다. 그러니 이방인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요구하는 희생 제물 대신 자기들이 정한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는 가인과 아벨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피의 속죄를 드린 아벨보다 인간의 땀과 노력의 결실을 하나님께 들고 나온 가인의 후예들은 ‘피의 속죄’를 거부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믿음으로 구원 받는 참된 교리는 간데없고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자신들이 정한 교리를 따르며 지극정성의 행위로 무엇인가를 얻어 내려는 종교만 남은듯합니다. 주일성수를 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 온전한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 하나님의 종을 섬기지 않으면 매를 맞는다는 이상한 교리들이 하나의 율법으로 성도들을 구속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종교는 많지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경배, 하나님이 정한 법대로 드리는 희생은 없는 세대입니다. 고등종교는 원시적인 ‘피의 속죄’를 거부한다는 식입니다. 이런 점에서 노아의 날들과 현 세대는 거의 일치합니다.
셋째, 급속한 도시 문명의 발달입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떠나 한 일은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시 문명은 건축, 문화, 예술, 사치, 방탕을 조장합니다. 오늘날 각국은 경쟁적으로 대도시를 건설하고, 높은 빌딩을 세우고, 도시 확장을 위해 노력합니다. 도시 인구의 폭증은 모든 악과 부패의 원인이 됩니다. 부패한 죄성을 가진 죄인들이 함께 모임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은 범죄뿐이며 현대 건축물을 자랑하는 바벨탑 문화뿐입니다. 어느 나라가 가장 높은 건물을 세우느냐? 그것이 국력이나 된 듯이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바벨탑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허상이요, 멸망입니다. 중국의 75층의 한 건물이 지진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흔들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비단 중국만이 아니라 이런 일들은 세계 각국에서 수시로 일어날 일들이며 시스템 오류로 물이 끊기거나 전기가 끊어지면 당장 생지옥으로 변할 것이 고층빌딩입니다.
특히 오늘날의 지식의 발달은 살기 좋은 세상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멸망을 초래하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단 12:4) [그러나, 오 다니엘아, 너는 끝이 임하는 때까지 그 말씀들을 닫아 두고 그 책을 봉인하라.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달음질하고 지식이 증가하리라.]
넷째, 여권(女權) 신장입니다.
오늘날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따라 세상에 진리를 말하면 뭇매를 맞을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 남녀평등사회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을 일들로 여성 폄하 죄에 해당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돕는 자로 여성을 창조하셨습니다. (창 2:18)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조력자를 만들리라, 하시니라.] 조력자는 주권자가 아닙니다.
노아의 날들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지위가 오늘날 어떤 민주주의 국가보다 발달해 있었습니다. 주님은 여인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창3:16)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명령을 주셨지만 노아의 홍수 이전에 여인들은 집에서 나와 공적인 일을 하였을 뿐 아니라 자유연애를 즐겼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 비가 내리기 전까지 이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웠던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여권 신장, 여성의 지위 향상을 빌미로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것과 같습니다.
다섯째, 공중의 영적 존재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했습니다(창6:2-4).
성경은 마지막 때에 바빌론이 ‘더러운 영의 소굴’(계18:2)이 될 것임을 말해 줍니다. 오늘날 강신술, 접신, 영매, 점성술, 마술 등 갖가지 더러운 영들과의 접촉을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마지막 날들의 표적 중에 하나입니다.
(딤전4:1-2)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시는데 2) 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이젠 양심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학의 발전과 지성의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이 유독 영들, 외계인들의 존재에 대해서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그들과 접촉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한강에서 죽은 의대생이 타살이냐? 자살이냐를 점쟁이를 찾아가 물어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적인 타락은 극에 달하여 여자와 남자의 분륜 관계는 죄로 여기지도 않을뿐더러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부끄러운 짓을 하면서 동성연애를 합법적인 부부로 인정해 달라고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세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소돔 사람들이 낮선 육체를 원했던 것같이 오늘날 세계는 외계인을 받아들이려고 외계인 대사까지 임명해 놓은 상태입니다.
여섯째, 주님의 오심이란 재림의 가르침이 거부됩니다.
에녹은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전파했습니다(유1:14-15). 노아 역시 의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교리는 비웃음을 샀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나름대로 만든 이론과 학설로 세상의 앞날을 예측하고 그것을 믿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조차도 주님의 재림이란 진리는 분쟁과 논쟁의 대상이 될 뿐 아무도 제대로 믿는 이가 없는 실정입니다. 주님 재림의 교리는 이단 교리처럼 들리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노아의 날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순수한 복음은 한 혼을 주님께로 인도해 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복음 선포를 통해 세상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비대화와 하나님 없는 왕국, 하나님 없는 세계 건설이란 목표를 향해 뭉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증가 수는 시대적 인구 증가 수를 따라 잡은 적이 없고, 그나마 이미 믿고 있던 나라들의 교회와 성도들의 믿음은 급격히 무너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시간 마지막 시대에 우리가 볼 수 있는 주님 재림의 징조들에 대해서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비웃는 자들.
[먼저 이것을 알라. 곧 마지막 날들에 비웃는 자들이 와서 자기들의 정욕을 따라 걸으며 이르되,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부터 있었던 것 같이 그대로 계속되느니라, 하리니](벧후3:3-4). 이 시대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건전한 교리가 조롱받는 시대입니다. 특히 휴거, 부활, 주의 재림과 같은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는 이들이 매우 적습니다. 재림에 대해 비웃는 자들이 속출하는 것이 바로 재림의 징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믿는다든가 진리를 설교한다든가 주님의 오심을 믿거나 설교하는 자체가 시대적으로 뒤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배교.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지 아니하면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라.](살후2:3). 마지막 시대의 특징은 복음의 확산이 아니라 배교의 확산입니다. 기독교의 문화, 기독교의 전통은 남아 있을지 몰라도 주님을 믿는 믿음, 성경을 믿는 신앙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일어나는 거듭남, 순결, 영적 능력 등을 믿지 않고 부인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셋째, 거짓 교사들.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 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니 그들은 정죄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리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악독한 길들을 따를 터인즉 그들로 인해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을 것이요,](벧후2:1-2).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비통할 일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다면 신약의 교회에는 거짓 교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오는 것입니다. 목적은 ‘주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회가 그런 거짓 교사들을 분별하고 그들의 이단적 가르침을 척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악독한 길들’을 따른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현대의 성도들은 영적 분별력이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신학교의 강단은 거의 90% 이상이 거짓 교사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거짓 교사들을 따르는 이들이 교회의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무오성, 성경의 오류 없는 보존, 성경 예언의 문자적 성취 등을 부정하는 것은 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심령술.
인간의 지성과 학벌과 권력과 종교성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역시 영적 지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교수들, 과학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부적을 지니고 다니고 정치인 권력자들, 대기업의 부자들이 점쟁이를 찾고 한 나라의 대통령이 무당을 찾아 굿을 하는 일은 이를 잘 입증해 줍니다.
며칠 전 어떤 사람이 4천만 원을 주고 점쟁이에게 몸에 지니면 좋다는 부적을 샀다는데 알고 보니 중국에서 수입된 4백 원짜리 싸구려 부적으로 속았다고 그것을 인터넷에 올린 정신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시는데](딤전4:1).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심령술, 접신, 마술, 점술이 성행할수록 우리는 마지막 때가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문화 관광부에서 민속 신앙이니 토속 신앙이란 이름으로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를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해마다 엄청난 예산을 지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정부가 미신을 타파하고 점쟁이들과 무당들을 없애야 할 것 같은데 반대로 예산을 지원하고 인간 무형문화인으로 지정하고 활성화시키는 것입니다.
다섯째, 위험한 때-
[또한 이것을 알라. 즉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르리라.](딤후3:1).
위험한 때로 핵전쟁이나 화학무기, 석유나 개스와 같은 연료의 부족, 지구 온난화와 같은 기상 이변 등으로 ‘위험한 때’가 이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점점 짐승 같아지는 인간성 상실, 믿음과 사랑과 같은 영적 상태의 황폐화 등으로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친구 사이에, 부부사이에, 부자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예절, 애정, 감사, 순종 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위험합니까? 병든 사람을 살려야 할 의사라는 사람이 만삭의 아내를 죽이고도 양심의 가책은커녕 범행을 결사부인하고 있습니다. 양심과 상관없이 자기는 살아야겠다는 뜻입니다.
(딤후3:2-4),[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신성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본성의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자들을 멸시하며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악한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세상이 말세라고 한탄한 적이 많지만 지금 신문, T.V에 보도되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일들의 1/100도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여섯째, 재물의 축적.
어느 시대나 재물의 축적이 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이 재물의 축적이 모든 것이 되는 시대는 없었습니다. 지금은 재물을 축적하는 것이 능력이고, 인격이고, 권력이고, 명예가 되어 버린 세대입니다. 재물을 모으지 못하면 무능력자에 현실을 살 수 없는 허무한 자로 여겨집니다. *약5:1-6 참조.
청문회 때 장관마다 재물의 축척과 투기의혹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대통령들이 임기를 마칠 때마다 불거지는 것들이 비자금 축적입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의 목적도 재물의 축적입니다.
일곱째, 라오디케아 사람들의 교회(계3:14-22).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지금은 주님이 문 밖에 서 있는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시대입니다.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3:20).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은 경배 받지 못하고 그분의 말씀은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 교회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5). 뜨겁게 기도하거나 말씀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그저 복 받고 사업이 잘되어 부자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재물이 많은 부요한 교회입니다. [이는 네가 이르기를, 나는 부자라. 내가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면서 네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계3:17) 아름다운 교회의 건물, 즉 그들이 말하는 자체 건물인 성전이 없는 교회는 교회 대열에 들지도 못합니다. 부동산이 없는 교회는 거지집단일 뿐입니다.
여덟째, 무화과나무의 표적.
이스라엘의 회복(마24:1-3).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온 세상을 떠돌던 이스라엘은 1948년 전쟁 없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나라를 건국했습니다. 2000년 간 나라 없이 방황하던 민족이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예언의 시계요, 표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아직도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본국으로 돌아오는 일들이 곧 마지막 때의 표적입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반복되는 분쟁은 본국으로 돌아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가자지역에 계속 정착촌을 늘려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홉째, 노아의 날들과 롯의 날들.
주님이 주신 마지막 날들에 대한 표적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시대의 표적들, 재림의 징조들을 유념해서 보아야 합니다. 기다림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동시에 주님께서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데려 가시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은 나팔 소리가 나기를 기다립니다. 살아 있는 성도들은 들림 받기를 기다립니다. 낙원에 있는 의인들의 혼들은 부활의 새 몸 입기를 기다립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는 것과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기다립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창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롬8:19).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주님이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우리 눈에 보이도록 영광 가운데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며,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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