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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 호서유학 변천의 자취를 찾아 (3)—② 최종회
— [국제퇴계학연구회] 제5회 유교문화 유적답사
2022.08.25.(목)~08.27.(토) (3일간)
* [호서유학의 유적 답사] (제3일) 8월 27일(토요일) 오후
○ 제천 황강영당(黃江影堂) 및 수암사(遂庵祠)
충주시 대소원면 문주리 식당 ‘팔봉공밭’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의 황강영당을 찾았다. 황강영당(黃江影堂)·수암사(遂庵祠)는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월악한 영봉이 마주 올려다 보이는 산록에 있다. 송계계곡이 남한강(황강)에 유입되는 곳이다. 영당은 송시열(1607∼1689)과 그의 제자인 권상하(1641∼1721)와 권상하의 제자 한원진(1682∼1751)과 윤봉구(1681∼1767) 그리고 권상하의 아들 권욱(權煜, 1658~1717)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으며, 수암사는 수암 권상하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기와담장이 둘러쳐진 황강영당(黃江影堂)은 앞면 2칸, 옆면 2칸 규모의 단아한 건물로 팔작지붕이다. 계단 위의 수암사(遂庵祠)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맞배지붕 건물이다.
권상하(權尙夏)는 1675년 송시열의 신변소(伸辨疏)에 참가하고 난 후 송시열이 유배를 가게 되자, 남한강과 월악산이 어우러진 황강(黃江)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그 후, 1686년 10월에 한수재(寒水齋)를 지었으며 11월에는 열락재(悅樂齋)를 지어 강학했다. 대표적인 후학으로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 불리는 윤봉구, 한원진, 이간, 채지홍, 이이근, 현상벽, 최징후, 성만징이 있다.
권상하(權尙夏)는 1689년 6월 스승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자 그의 유품을 거두고 유언에 따라 화양동 계곡에 ‘만동묘’와 창덕궁 안에 ‘대보단’을 세웠다. 그 뒤 숙종이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우의정과 좌의정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는 16세기 율곡과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계보를 이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권상하는 이곳 제천군 한수면 황강리 한수재(寒水齋)에 은거하다가 1721년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 2년(1726)에 황강서원(黃江書院)이 세워져, 다음해에 사액을 받았다.
원래 황강서원은 권상하의 거주 공간인 한수재로부터 황강 상류 지역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면서 한수재의 서재로 사용하던 현재의 건물에 영정을 봉안하면서 황강영당(黃江影堂)이라 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83년 옮긴 것이다.
높은 계단 위의 정문에 들어서면 좌측에 고택 한수재(寒水齋), 우측에 황강영당 그리고 정면의 계단 위에 수암사(遂庵祠)가 자리하고 있다. 문 안의 오른편 담장 앞에, 권상하가 1797년에 황강서원에 세웠던 묘정비(廟庭碑)와 ‘수암선생구택지비(遂庵先生舊宅之碑)’가 있다. ‘수암선생구택지비’는 옥소(玉所) 권섭(權攝)이 쓴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수암의 집에 세워진[1727년] 것을 이곳에 옮겨왔다고 한다. ‘한수재(寒水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고택은 원래 수암이 거주했던 집이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정치적 영향에 따라 황강서원으로 사액(賜額)까지 받았으나 영당으로 바뀌게 된 사례로서, 서원 철폐령 이후 서원 건축의 잔존 양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 다음은 현지혜 선생이 정리한 수암 권상하에 대한 글이다.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의 생애와 저술
권상하(權尙夏, 1641~1721)는 인조 19년에 한양 구리개[銅峴]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치도(致道)이고,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 水齋)이며, 관향은 안동(安東)으로 고려태사(高麗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이다. 조부는 선산부사 권성원(權聖源)이며, 부친은 사헌부집의 권격(權格)이다.
권상하는 어린 시절 조부의 임지인 여산(礪山)에서 조부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는데, 조부가 시전(詩傳)을 읊어주면 다음날 아침에 다 외울 만큼 총명했다고 한다. 당시 조부가 시남(市南) 유계(兪棨, 1607~1664)와 깊이 교유하였는데, 어린 시절(1651) 권상하는 * 유계 문하에 출입하여 공부했다. * 권상하는 후에(1713) 유계가 편집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서문을 지었다.
* 시남(市南) 유계(兪棨, 1607-1664)는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예학과 사학에 정통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이유태(李惟泰) 등과 더불어 충청도 유림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졌다. 저서로는 《가례집해(家禮集解)》를 개작한 《가례원류(家禮源流)》,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본받아 노론 정권하의 고려사에 대한 역사관을 대변해 주는 강목체(綱目體)의 《여사제강(麗史提綱)》등이 있다. 유계는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임천의 칠산서원(七山書院), 무안의 송림서원(松林書院),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권상하는 21세(1661)에 진사 회시(會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유학하였다. 22세(1662)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처음 만나게 되었고, 부친상을 마친 34세(1674)부터 화양동(華陽洞)에 은거하던 송시열을 찾아가 정식으로 문인이 되었다. 1675년(숙종1)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문제로 송시열이 유배되고 남인(南人)이 득세하자 여러 문인들과 함께 상소[伸辨疏]하여 변호하였고, 가족을 이끌어 청풍의 황강(黃江, 지금은 청풍호에 수몰)에 정착하여 청풍(淸風, 충북 제천시 한수면)에 은거하면서 독서와 사색, 강학에만 전념했다.
송시열은, 제자 권상하의 거실을 ‘수암(修巖)’과 ‘한수재(寒水齋)’라고 이름 지어 주었는데, 수암(遂菴)은 설선(薛瑄, 1389~1464)의 《독서록(讀書錄)》에 “내 마음이 진실로 배움에 뜻을 두면 하늘이 내 소원을 이루어준다.”라는 구절에서 뜻을 취하였고, 한수재(寒水齋)는 주자(朱子)의 시에서 “가을 달이 차가운 물위에 비치네(秋月照寒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도(道)를 깨우친 사람의 모습, 도를 깨달은 사람의 밝은 마음을 의미한다.
권상하가 40세 되던 해(1680)에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 남인이 실각(失脚)하고 송시열이 귀양에서 돌아오자, 다시 화양으로 찾아 가서 이후 10년 동안 송시열과 함께 정이(程頤, 1033-1107)와 주자(朱子, 1130~ 1200)의 저술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1689(숙종 15))으로 송시열이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국문(鞠問)을 받으러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사사당할 것을 안 송시열은 1689년 2월, 권상하에게 《석담일기(石潭日記)》등 이이(李珥, 1536~1584)의 수적(手迹)과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산정한 율곡의 비문과 행장 초본(草本) 등 자신이 지니고 다니던 유품을 전수했다. 송시열은 자신이 마치지 못한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이정전서분류(二程全書分類)》 수정 등을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이희조(李喜朝, 1655~1724)⋅이기홍(李箕洪, 1641~1708) 등과 마무리해 달라고 권상하에게 부탁했고, 임종에 이르러 권상하의 손을 잡고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종주로 삼고, 사업은 마땅히 효묘의 대의를 종주로 삼으라.”고 유언했다.
이후로 권상하는 자신의 학문과 사업을 철저히 송시열의 학문과 사업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 도학사상의 전통과 도통(道統)을 계승하고 실행하고자 헌신했다. 여기서 말하는 도통이란 성현(聖賢)이 서로 주고받아 계승해 간 통서(統緖), 곧 성통(聖統)을 의미하며, 성현이란 인극(人極)을 세워 인간 도리(道里)의 표준을 세우고 인륜을 행하게 한 자라는 의미인데, 송시열과 권상하는 이이와 김장생을 잇는 율곡학파의 학문과 사상을 그 적통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권상하는 율곡학파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고, 특히 송시열의 학문과 정신, 사상을 계승하여 후대에 전수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는 송시열을 따라 화양(華陽)에서 사서(四書)와 《주자대전(朱子大全)》⋅《율곡집(栗谷集)》⋅《퇴계집(退溪集)》 등 여러 과목을 강론하였고,《심경석의(心經釋疑)》와 《주자대전차의》를 교정하는 일도 하였다. 수암은 스승이 떠난 후 사문(斯文)의 맹주가 되었고, 본격적으로 강학을 시작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과 외암(巍巖) 이간(李柬, 1677-1727)이 있는데, 권상하가 71세(1712)가 되던 해에 그들 사이에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에 대한 논쟁(세칭 湖洛論爭)이 일어났다. 호서(湖西)지역에서 한원진(韓元震)을 중심으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하였고, 낙하(洛河)지역에서는 이간(李柬)을 중심으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였다. 권상하는 이간에게 * “율곡선생이 말하기를, ‘사람의 성(性)이 물(物)의 성이 아닌 것은 기(氣)가 국한되어서이고, 사람의 리(理)가 물(物)의 리인 것은 리가 통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라고 하며 한원진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 ☞ “栗谷先生曰: ‘人之性, 非物之性者, 氣之局也, 人之理, 卽物之理者, 理之通也.” ―《한수재집》 〈연보〉
권상하는 나이가 들어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스승의 책을 정리하였다. 75세(1715)에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의 수정을 마무리하였는데, 이 책은 《주자대전》 중에서 난해한 구절을 뽑아 주석을 붙인 책이다. 79세(1719)에는 우암이 《이정전서(二程全書)》에서 중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엮은 《이정전서분류(二程全書分類)》를 정리하고 발문을 썼으며, 병중에도 * 황간(黃幹, 1152-1221)의 《면재집(勉齋集)》에 대한 변설을 지었다. 2년 후, 권상하는 81세(1721)로 병세가 위중해져 8월 한수재(寒水齋)에서 고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 황간(黃榦, 1152-1221)은 송나라 민현(閩縣) 사람으로 자는 직경(直卿)이고, 호는 면재(勉齋)이다. 주희(朱熹)의 제자이며, 저서로는 《주희행장(朱熹行狀)》, 《면재집(勉齋集)》, 《서전(書傳)》, 《역해(易解)》, 《효경본지(孝經本旨)》, 《사서통석(四書通釋)》, 《의례통해(儀禮通解)》 등이 있다.
권상하가 별세한 후 1723년(景宗3년)에 왕통(王統) 문제와 관련하여 소론(少論)이 노론(老論)을 숙청한 신임사화(辛壬士禍, 1721-1722)가 일어나 관작을 추탈 당하게 되었는데, 영조대왕 원년(1725)이 되어서야 관작이 회복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권상하는 스승의 유언에 따라 만동묘(萬東廟)를 화양동(華陽洞)에 세우고, 1704년에는 임금의 명으로 창덕궁(昌德宮) 옆 금원(禁苑)에 명나라 태조 등을 제사하는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는 등 송시열의 유지를 받들어 정치적으로 그 뜻을 실현시켰으며, 스승 송시열이 유배된 후 35세(1675)부터 죽을 때까지 44년간 충북 제천군 한수면 황강에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한 평생 학문에 힘쓰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삶을 살았다. 그의 유문(遺文)인 《한수재집(寒水齋集)》은 1761년에 손자인 권정성(權定性)과 고제(高弟)인 한원진과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3-1767)가 정리하여 간행하였다. 권상하는 평생을 학문을 중단하지 않으면서도 저술을 많이 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스승 송시열의 뜻에 따라 주자와 관련된 글을 정리하는 것에 매진하여 ‘주자-율곡-우암’으로 이어지는 주자학의 정통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할과 활동은 한원진과 이간을 비롯하여, 여러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여 우리나라 경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권상하가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5년 후, 1726년(영조2)에 황강서원(黃岡書院)이 설립되었고, 다음해에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그 뒤 흥선 대원군이 1871년(고종8)에 폐쇄했다. 그 후로는 황강영당(黃江影堂)으로 이어 내려오고 있으며, 이곳에는 권상하와 송시열, 그리고 권상하의 적전(嫡傳)인 한원진과 윤봉구, 그리고 권상하의 아들 권욱(權煜, 1658-1717) 등을 봉향하고 있다. 청풍의 황강서원 외에도 충주의 누암서원(樓巖書院), 정읍(井邑)의 고암서원(考巖書院), 성주(星州)의 노강서원(老江書院), 보은의 산앙사(山仰祠), 예산의 집성사(集成祠), 송화(松禾)의 영당(影堂) 등에서 권상하를 제향(祭享)하고 있다.
월악산 송계계곡
월악산(1,095.3m)은 백두대간 포암산(布巖山, 962m)에서 북쪽으로 뻗어온 산줄기 끝에 우뚝 솟아있다. 월악산국립공원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산악지대 북쪽에 있다. 월악산의 남쪽 포암산에서 시작하는 달천이 월악산을 끼고 흐르면서 만든 계곡을 ‘송계계곡’이라 하는데, 암괴와 암반 사이를 흐르는 맑은 물과 울창한 송림과 어우러져 가히 절경을 이룬다. 약 7㎞에 달하는 계곡을 따라 또한 여러 사적지가 분포한다.
월악산에는 넓은 암반과 맑은 물로 유명한 ‘팔랑소’를 비롯하여 월광폭포(月光瀑布)·망폭대(望瀑臺)·학소대(鶴巢臺)·수경대(水境臺)·자연대(自然臺)·수렴대 등의 8경과 정상인 영봉(靈峰)에 올라서면 충주호를 비롯한 탁 트인 산수의 풍광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송계(松溪)의 중간쯤 월악산 아래 고찰 덕주사(德周寺)가 있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딸 덕주(德周) 공주가 새겼다는 마애불(磨崖佛, 보물 406호)이 있다. 덕주골을 지나 덕주산성과 망폭대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사자빈신사지(獅子頻迅寺址)가 있다. 절터에는 석탑(石塔, 보물 94호)이 있다.
송계의 상류에는 상모면 미륵사지(彌勒寺址)가 있다. 신라의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을 하자,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의 마의태자(麻衣太子)가 계립령[하늘재]을 넘어와 머무르며 세웠다는 곳이다. 당시 건물은 불타버렸지만 미륵불(彌勒佛, 보물 96호)과 5층 석탑(五層石塔, 보물 95호)이 남아 있다. 미륵부처는 드물게 북쪽을 향하고 있고, 덕주사 마애불과 마주보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망국의 한을 품고 신라를 떠나온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남매가, 월악산 송계에서 따로 자리를 잡아 수도하면서 애틋한 남매의 정을 나눈 것으로 해석된다.
송계의 상류 골짜기의 길을 따라가면 하늘재이다. 신라시대에는 계립령(溪立嶺)이라고 한 ‘하늘재’는 포암산과 주흘산 사이의 백두대간 안부로, 충주와 경북 문경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옥소(玉所) 권섭(權燮)
수암의 후손이 오늘 우리를 맞이하여 황강영당을 열어주었다. 우리 일행은 영정실의 옆방의 서재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서가에 수암의 조카인 권섭의 문집인 《玉所稿》(옥소고)가 서가에 꽂혀 있었다. 일찍이 필자는 옥소 권섭이 황강구곡가를 짓고 구곡원림을 경영한 내용을 탐구한 적이 있으므로 좌중의 회원들에게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했다.
권섭(權燮, 1671~1759)은 서울 출생으로, 자가 조원(調元)이며, 호는 옥소(玉所)·백취옹(百趣翁)이다. 할아버지는 집의 권격(權格),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권상명(權尙明), 어머니는 용인 이씨로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의 딸이다. 큰아버지는 학자 권상하(權尙夏), 작은아버지는 이조판서 권상유(權尙遊)이다. 아우는 대사간 권영(權瑩)이다. 1686(숙종 12)년 16세의 나이로 경주 이씨 이조참판 이세필(李世弼)의 딸과 혼인하였다.
14세인 1684(숙종 10)년에 아버지와 사별했기 때문에 큰아버지 권상하의 각별한 보살핌과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는 한편, 외숙인 영의정 이의현(李宜顯), 처남인 좌의정 이태좌(李台佐) 등과 함께 면학하기도 하였다. 1689(숙종 15)년 기사환국 때는 19세로 소두(疏頭)가 되어 소(疏)를 올리는 등 한때 시사에 관심을 갖기도 했으나, 송시열을 위시한 주변 인물들의 사사(賜死) 또는 유배의 참극을 겪은 뒤, 관계 진출의 길보다는 문필 쪽을 택하였다.
산천을 주유하다가 50세가 넘어 황강으로 돌아온 권섭은 이 공간에 ‘낙유당(樂有堂)’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그가 스승으로 모신 백부 권상하와 외조부 이세백(李世白, 1635~1703)의 영정을 중심에 모셨다. 그리고 종형인 권욱, 외숙인 이의현(李宜顯), 자신과 동생 권영(權瑩, 1678~1745)의 상을 벽에 걸어, 두 어른을 모시는 형국으로 배치하여 의지처로 삼았다.
일생을 전국 방방곡곡 명승지를 찾아 탐승(探勝) 여행을 하며 보고 겪은 바를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따라서 그의 작품 세계는 내용이 다양하고 사실적이며 깊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문필 유산 가운데에는 한시·시조·가사 작품 외에도 4권의 유행록(遊行錄)·기몽설(記夢說) 등이 있어 그 내용이 광범위하고 섬세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시(詩)만 해도 방대한 양을 남기고 있어 오늘날 전해진 것만도 한시 3,000여 수, 시조 75수, 가사 2편이 된다. 시조 75수 중에는 연시조가 많은 편이다.
〈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는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와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의 맥을 이은 작품으로, 시사적 의의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1704(숙종 30)년에 지은 기행 가사 〈영삼별곡(寧三別曲)〉과 1748(영조 24)년에 지은 〈도통가(道統歌)〉는 각기 나름대로 특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그의 시는 주제·소재·시어·기법 면에서 모두 파격적 참신함을 보여 준 점에서 그 특성을 찾아볼 수 있으며, 전통의 터전 위에서 새롭게 열리는 근대기를 내다보면서 새로운 시 세계를 창조해 낸 점이나, 시기적으로 정철·박인로·윤선도의 시의 주맥(主脈)을 이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말년에 가의대부(嘉義大夫)의 예우를 받았다. 저서로는 간행본 《玉所集(옥소집)》(13권 7책)과 필사본 《옥소고(玉所稿)》가 있다.
옥소 권섭의 문경 화지구곡(花枝九曲)
화지구곡(花枝九曲)은 옥소(玉所) 권섭(權燮, 1671∼1759)이 문경군 신북면 화지동을 중심으로 경영했던 구곡원림(九曲園林)이다. 권섭은 젊은 시절 인현왕후 폐출 사건에 소두(疏頭)의 죄를 받아 창성으로 유배를 당한 이후 관계 진출의 뜻을 접고, 오로지 탐승과 창작 활동의 길로 매진했다. 옥소는 25세에 초취 경주 이씨 부인이 별세하자, 중종의 4대손 중의대부 대원군 광윤의 따님을 아내[부실]로 맞아 60년을 함께 하였다.
30세 이후 경향 각처를 탐승(探勝)하며 유전하던 옥소는, 말년에 청풍, 황강, 제천 일대와 황강에서 70여 리 떨어진 전주 이씨 부인이 살고 있는 문경의 화지동(현 문경시 문경읍 당포리)을 오가며, 화지구곡(花枝九曲)을 경영하고 〈화지구곡가(花枝九曲歌)〉를 지었다. 송계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하늘재를 넘어 다녔다.
知是斯區有地靈 이 구역에 땅의 신령이 있음을 알겠으니
溪流九曲此澄淸 계곡물 아홉 굽이 이렇게 맑고 깨끗하네
幽深洞裏昭明界 그윽하고 깊은 골짜기에 밝고 환한 세계 열어
到處名村自舊聲 곳곳마다 이름난 마을 예부터 명성이 높았네
화지구곡(花枝九曲)은 문경의 신북천(身北川)과 조령의 초곡천(草谷川)이 합류하여 영강(潁江)으로 흘러드는 마원(馬院)에서 시작하여 신북천 상류인 하늘재[大院]에 이르는 아홉 굽이인데 제1곡이 마포(馬浦), 제2곡이 성교(聲校), 제3곡이 광수원(廣水院), 제4곡이 고요성(古要城), 제5곡이 화지동(花枝洞), 제6곡이 산문계(山門溪), 제7곡이 갈평(葛坪), 제8곡이 관음원(觀音院), 제9곡이 대원(大院)이다.
제1곡 마포(馬浦)는 신북천과 초곡천이 합류하여 넓은 시내를 형성하는 굽이에 자리한다. 마포는 행정구역 상 문경시 문경읍 마원리이다. 이 굽이의 특징은 지형이 확 트였다는 점이다. 넓은 들과 시내가 어우러져 한 굽이를 형성하는 이곳을 옥소는 제1곡으로 설정하였다.
一曲何無泛釣船 일곡이라 어찌하여 고깃배 띄움이 없겠는가
中間澄闊似江川 중간이 맑고 넓어 강이나 내와 같네
官居坐倚晨昏閣 관아의 신혼각에 기대 앉아 있노라니
野色村光靄靄烟 들판과 마을빛이 안개속에 아련하네
옥소는 문경 관아의 누각에 올라 마원의 넓은 들을 바라보며 강물에 배를 띄우는 광경을 상상하며 시를 읊었는데, 지금은 들판 가운데를 도로가 가로지르고 강물도 예전 같지 않아 그 옛날의 운치는 상상으로서 새겨볼 뿐이다.
제2곡 성교(聲校)는 마포에서 길을 따라 2km 정도 가면 문경시 문경읍 문경관광고등학교 뒤편으로 난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높다란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는 건물이 있는데 문경향교(聞慶鄕校)이다. 향교는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권섭은 학문을 통하여 유가의 도를 지향한다.
二曲高臨主屹峰 이곡이라, 그 뒤로 주흘봉이 높이 임해 있어
明宮揖遜好儀容 명궁(名宮)에 공손히 읍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네
元來七事瞻先後 예전에 일곱 가지 일 선후를 따져 보니
左海文風仰九重 동방의 문풍(文風)은 천자를 우러러 보았네
1392년(태조1)에 창건되고 1620년에 중건되었다. 중국 주나라의 5성, 송나라의 4현 그리고 우리나라의 18현을 배향하고 있는데 옥소가 ‘성교(聲校)’라 한 것은 ‘시서예악지당(詩書禮樂之堂)’이라는 표지석이 말해주 듯 문풍(文風)의 명성이 자자한 곳이다. 향교를 화지구곡의 한 굽이로 설정한 까닭은 옛 성인을 봉안하여, 학문과 윤리를 밝히는 모범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제3곡 광수원(廣水院)은 향교에서 길을 다라 3km 정도 가면 야트막한 야산 아래 자리한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문경읍 고요리이다. 광수원은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곳은 아니다. 옥소는 이 마을을 통해서 세월이 흐르면서 변해 가는 것들을 생각하였다. 그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무상감을 느낀다.
三曲如浮萬斛船 삼곡이라 만곡을 실은 배가 떠 있는 듯하니
村名廣水幾何年 광수(廣水)라는 마을 이름 얼마 되었나
然疑自古滄桑事 그 옛날 창해의 변화 있었는지 없었는지
葛畝鋤歌又可憐 칡 우거진 밭에 김매는 노래 애틋하다
고요리는 전주 이씨가 1,800년경 다른 동네보다 글방을 먼저 차려 강론하였다하여 ‘강선(講先)’이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들판 가운데 서있는 5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광수원’이란 지명은 신북천과 산리천이 합수하는 곳이기에 붙여진 이름인데, 이름처럼 시내가 별로 넓지는 않다. 그래서 옥소는 밭 매는 농부들에게 관심을 돌려 시상을 가다듬고 있다.
제4곡 고요성(古要城)은 문경시 문경읍 고요리이다.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집성촌인 고요리는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어서 마을이 오래 전부터 자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마을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피난처가 될 정도로 안전한 곳이었다.
四曲川橫臥立巖 사곡이라 시냇물이 바위들을 둘러 흐르니
亂松覃葛影毿毿 우거진 소나무와 칡 그림자 길고도 기네
幽村軋軋鳴前碓 조용한 마을 삐걱거리는 소리는 옛날 방아요
斷麓蒼蒼照下潭 가파른 산기슭의 푸른 빛 연못에 비쳐 있네
고요리는 광수원과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둔 마을이다. 느티나무가 성처럼 우거진 곳이라 하여 괴성(槐城)이라 하다가 변음되어 ‘기성’이 되고, 요순시대처럼 순박하게 사는 마을이라 하여 고요(古堯)라고 했다는 것이다. 옥소는 이 마을에 들어 방아 찧는 소리를 들으며 정중동(靜中動)의 평화로운 정경을 그리고 있다.
제5곡 화지동(花枝洞)은 고요성에서 마을길을 따라 걸어가면 시내에 놓인 다리를 건너 큰 도로에 이른다. 이 도로를 따라 2km 정도 가면 우뚝 솟은 ‘성주봉’을 만나는데 이 성주봉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면 산 아래에 마을이 나타난다. 이 마을이 화지동인데 행정구역상으로는 문경시 문경읍 당포리이다. 옥소가 초려를 짓고 거처하던 곳이다. 주자가 무이구곡 중의 제5곡에 ‘무이정사’를 건립했던 것처럼 옥소도 자신의 거처를 제5곡으로 설정한 것이다. 마을의 제일 위쪽에 있다.
五曲花枝洞壑深 오곡이라 골짜기 깊고 깊은 화지동
百籬千柿翳如林 감나무 울타리가 숲처럼 마을을 가리네
村耕雨露僧鍾月 밭에 이슬비 내리고 달밤 절간의 종소리 들리면
不盡斯翁詠讀心 늙은이의 솟아나는 시심(詩心) 다할 수 없네
옥소영각(玉所影閣)
옥소영각은 문경시 문경읍 당포리 223번지에 있다. 조선시대 대문장가인 옥소(玉所) 권섭(權燮, 1671~1759)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1895년에 건립된 건물이다. 옥소의 영정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9호로 지정되었다. 옥소 권섭은 옥소는 권상명(안동 권씨 시중공파(10세) 화천군파(20세) 연잠공파(27세))의 장남으로 안동권씨 28세손이다.
권섭은 조선 후기에 활동한 문인으로, 총 60여책에 달하는 문집에 방대한 양의 한시문과 국문시가를 남겼다. 특히 권섭의 친필 유고인 [옥소고(玉所稿)]는 18세기를 살다간 사대부 문인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로 역사, 예술, 문학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이 영각(影閣)은 앞면 3칸 옆면 1칸 반 규모의 맞배기와집으로 주위에는 토석 담장을 둘렀으며 앞면 담장 사이에는 사주문을 세웠다. 문경유림에는 매년 음력 10월 말정(末丁)에 옥소를 기리기 위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제6곡 산문계(山門溪)는 화지동에서 마을길을 따라 나오면 큰 도로를 만난다. 이 도로를 따라서 4km 정도 가면 시내가 한 굽이를 이루는 공간이 나타난다. 전설에 의하면 화지동에서 갈평으로 가다보면 강 건너에 ‘시루봉’이 있다, 시루봉에 우뚝 솟은 3개의 바위를 사람들은 삼문(三門)이라 하였다.
六曲孤亭出小灣 육곡이라 외로운 정자 여울가에 솟아있고
千峰回複作重關 수많은 산봉우리 겹겹이 둘러 있네
何時施設朝家議 언제일까 조정에서 의논을 마친 다음
目在幽人早夕閑 은거하여 조석으로 한가롭게 지낼 날은
옛날에는 기묘한 층암절벽과 흰 바위가 시냇물과 더불어 절경을 이루는 계곡이었다. 현재는 댐 건설로 주변의 산들이 파괴되어 지형이 크게 변하였는데 이전에는 시내 양편으로 바위가 솟아 산문(山門)을 이루었던 공간이다. 지금은 댐 조성으로 인하여 마구 파헤쳐져 옛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옥소가 이곳에 휘영각(輝映閣)을 짓고 석실에 암자를 만들어 화지동을 오고가며 유락했다.
제7곡 갈평(葛坪)은 산문계에서 길을 따라 3km 정도 가면 확 트인 굽이에 자그마한 마을이 나타난다. 이 마을이 갈평인데 평평한 공간에 자리하는 마을이다. 갈평은 관음동으로 가는 길과 동로면으로 가는 길이 나눠지는 교통의 요지이다.
七曲松風吼似灘 칠곡이라 솔바람이 여울소리 같으니
誰人來入是中看 그 누가 찾아와서 이곳을 보았을까
鷄鳴犬吠皆仙境 닭울음 개짓는 소리 모두가 선경인걸
白屋蕭疎分外寒 조촐한 초가에 분수 넘는 청빈함이네
갈평은 옥소가 청풍에 기거하면서 하늘재를 넘어 부실 이씨 부인이 살고 있는 화지동으로 올 때 늘 지나던 마을이다. 이 마을을 제7곡으로 설정한 것은 노래에서 ‘솔바람이 여울소리 같다(松風吼似灘)’고 한 것처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기 때문이다. 마을 앞으로 시내가 흐르고 마을의 뒤편에는 야트막한 야산이 자리하고 있고 이 산에는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고, 산 앞에는 용흥초등학교가 있다. 마을에서 동로 쪽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면 길목에 정갈한 정자가 있다. 진성 이씨 경송정이다.
제8곡 관음원(觀音院)은 갈평에서 길을 따라 3km 정도 가면 시내 오른쪽으로 30여 가구의 마을이 나타난다. 이 길을 지나 하늘재를 넘어 한양으로 가는 사람들이 날이 저물어 산을 넘지 못할 경우 이 마을에서 쉬어 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八曲山門一閉開 팔곡이라 산문이 한 번씩 열렸다 닫히고
倒碕殘咽水縈洄 여울목 굽이굽이 세차게 흐르며 요란하네
依崖小店棲生計 언덕 위의 작은 가게 생계가 처량하니
盡日行人斷去來 하루 종일 오고가는 행인 하나 없네
옛날에 관음사라는 절이 있어 관음리라 했다.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석불만 남았다. 산자락 아래의 평지 위에 집들이 드문드문 보였는데, ‘관음원(觀音院)’이라 하듯 하늘재를 오고가는 나그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살아가는 마을이었다. 지금은 규모가 비교적 큰 요(窯)도 들어서고 별장 같은 주택도 들어서 있다. 2009년 농촌진흥청에서 전국 100대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마을’을 선정하면서 문경에는 마성의 ‘못고개마을’과 동로의 ‘오미자마을’과 더불어 이 마을을 100대 마을의 하나로 뽑기도 했다.
제9곡 대원(大院)은 관음원에서 길을 따라 2km 정도 올라가면 ‘하늘재’에 이르는데 이곳이 대원이다. 이 재를 넘어가면 충청도 송계로 이어지고 그 오른쪽에 월악산이 있다. 여기에 오르면 다시 앞이 확 트인다. 위로는 하늘과 해, 달과 접하고 아래로는 온갖 산들,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곳이다.
九曲登高始豁然 구곡이라 높이 오르니 눈앞이 확 트여
不知斯處是窮川 모르겠네, 여기가 시냇물 시작하는 곳인지
千山在下千峰立 발아래 수많은 산들 봉우리가 즐비하니
日月雲烟是別天 해와 달, 구름과 이내 이곳이 별천지라
대원은 옥소가 ‘해와 달과 구름과 이내 이곳이 별천지(日月雲烟是別天)’라고 노래했던 곳으로 ‘하늘재’, ‘계립령’, ‘지릅재’라고도 부른다. 경북 문경시 관음리와 충북 충주시 미륵리와 경계를 이룬다. 이곳은 큰 원(院)을 두고 있던 곳이라 ‘대원’이라 한 것을 ‘大[한]’, 院[울]을 고유어로 ‘하늘재’라고 부른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옥소는 청풍에서 화지동을 오가는 길에 빈번히 오르내렸을 이 재에서 세상을 한 눈에 내려다보며 화지구곡을 정리하고 있다. 지금은 문경 쪽은 아스팔트로 말끔히 포장되어 있고 충주 쪽은 흙길을 그대로 남겨 놓고 있다. 하늘재를 지나면 미륵사지와 송계계곡으로 이어진다. ☞ [참고] : 김문기, 강정서. 『경북의 구곡문화(2)』.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2. 415∼422쪽.
○ 청풍문화재단지(淸風文化財團地 )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에 조성한 문화재마을이다. 청풍(淸風)은 자연 경관이 수려하고 문물이 번성했던 곳으로 많은 문화 유적을 갖고 있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청풍면 후산리, 황석리, 수산면 지곡리에 있던 마을이 문화재와 함께 수몰될 위기에 있었다. 충청북도에서는 1983년부터 3년간 수몰 지역의 문화재를 원형대로 현재 위치에 이전, 복원해 단지를 조성했다.
단지에는 청풍향교, 관아, 민가, 석물군 등 43점의 문화재를 옮겨 놓았는데 민가 4채 안에는 생활 유품 1,6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고려 때 관아의 연회 장소로 건축된 청풍 한벽루(보물 528)와 청풍 석조여래입상(보물 546) 등 보물 2점과 청풍부를 드나들던 관문인 팔영루(충북유형문화재 35), 조선시대 청풍부 아문인 금남루(충북유형문화재 20), 응청각(충북유형문화재 90), 청풍향교(충북유형문화재 64) 등 건축물 및 옛 도호부 시대의 부사나 군수의 송덕비, 선정비, 열녀문, 공덕비 등이 세워져 있다.
청풍 한벽루(寒碧樓)
한벽루(寒碧樓)는 원래 청풍 관아에 있던 건물로, 지금은 청풍호(충주호)가 내려다보이는 망월산(337m)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 충숙왕 4년(1317)에 청풍현 출신 승려 청공(淸恭)이 왕의 스승인 왕사가 되면서 청풍현이 청풍군으로 승격된 것을 기념하고자 세운 누각이다. 한벽루는 2층 다락형태의 누각이다. 누각(樓閣)은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문과 벽이 없이 다락처럼 높이 지은 집을 말한다. 본채 옆에 작은 부속채[翼廊]가 딸려 있는 형태로, 건물 안에는 송시열ㆍ김수증의 편액과 김정희가 쓴 현판(懸板)이 있고, 이준이 쓴 중수기가 있다. 보물 제528호로 정식 명칭은 ‘제천 청풍 한벽루(堤川 淸風 寒碧樓)’이다. 밀양 영남루(嶺南樓, 보물 제147호), 남원 광한루(廣寒樓, 보물 제281호)와 함께 조선시대 누각 건축 양식을 잘 보여 주는 건물로 꼽힌다.
◎ 퇴계 이황 선생은 1569년 음력 3월 11일, 벼슬을 그만두고 마지막 귀향길에 청풍 관아에 도착했다. … 이날 아침 충청감사 유홍(兪泓)의 배웅을 받으며 충주관아를 떠난 선생은 동쪽으로 길을 잡아 청풍군으로 향했다. 청풍 초입인 황강역에서 당시 청풍 군수 성암(省菴) 이지번(李之蕃, 1508~1575)이 퇴계 선생을 맞았다. 이지번은 오래전부터 선생과 마음을 주고받은 절친한 벗이다. 일찍이 그는 명종 때의 척신 윤원형을 피하여 단양(丹陽)에 은거하였는데, 퇴계 선생이 그에게 구담(龜潭)을 소개하여 그곳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남한강의 아름다운 절경을 지닌 청풍(淸風)은 퇴계에게는 인연과 유서가 깊은 곳이다. 선생 42세 때인 1542년에 충청도 재상어사로 충청도 각지를 시찰할 때 청풍 관아의 응청각에서 유숙한 일이 있고, 1548년 이웃 단양 군수로 재임할 때 이곳 한벽루과 구담봉 등 청풍의 절경을 돌아보기도 했다. 특히 1569년 마지막 귀향길에 청풍에 유숙한 것은 마음을 나누는 벗 이지번에 청풍 군수로 있었기 때문이다.
한벽루에는 퇴계 선생을 비롯한 서애 류성룡, 아계 이산해,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 등 여러 명사들이 충주호가 한눈에 들어오는 한벽루에 올라 시를 남겼다. 퇴계 선생 42세 때인 1542년에 충청도 재상어사로서 관내를 시찰하던 중 이곳을 찾아 〈청풍 한벽루에 묵다(宿淸風寒碧樓)〉를 지었다. —《退溪集(퇴계집)》
半生堪愧北山靈 반생감괴북산령 반평생 나의 마음 북산 신령 부끄러워라
一枕邯鄲久未醒 일침한단구미성 한단 베개 깊은 꿈이 상기 아니 깨었다네
薄暮客程催馹騎 박모객정최일기 황혼이라 타향 길에 역말을 달리다가
淸宵仙館對雲屛 청소선관대운병 맑은 밤 신선 집에 구름병풍 대하였네
重遊勝地如乘鶴 중유승지여승학 승지에 거듭 오니 나는 학을 탔던가
欲花佳篇類點螢 욕화가편류점형 꽃다운 시 화답하니 반딧불이 옷에 앉듯
杜宇聲聲何所訴 두우성성하소소 접동새 소리 소리 하소연이 무엇인고
梨花如雪暗空庭 이화여설암공정 배꽃이 눈[雪]인양 빈 뜨락에 떨어지네.
시(詩)에 담은 한벽루
한벽루(寒碧樓)의 풍광은 절경이다. 퇴계 선생이 한벽루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쓴 ‘살아 온 반평생 산수를 등진 게 부끄러워라(半生堪愧北山靈)’ 하고 토로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자연을 벗하여 인생을 경영하는 퇴계 선생은 단양군수 시절 ‘청산을 거닐 때는 구름에 깃든 학처럼 살고 싶다(在山願爲棲雲鶴)’고 노래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를 지냈던 서애 류성룡이 한벽루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임진왜란 당시 전란의 비통함을 노래한다.〈宿淸風寒碧樓〉(숙청풍한벽루) (청풍의 한벽루에 묵으면서)이다. —《西厓集(서애집)》〈宿淸風寒碧樓 幷序〉
落月微微下遠村 (낙월미미하원촌) 지는 달은 희미하게 먼 마을로 넘어 가는데
寒鴉飛盡秋江碧 (한아비진추강벽) 까마귀 다 날아가고 가을 강만 푸르네.
樓中宿客不成眠 (루중숙객불성면) 누각에 머무는 손 잠 이루지 못하는데
一夜霜風聞落木 (일야상풍문락목) 온 밤 서리 바람에 낙엽 소리만 들리네.
二年飄泊干戈際 (이년표박간과제) 두 해 동안 전란(戰亂) 속에 떠다니느라
萬計悠悠頭雪白 (만계유유두설백) 온갖 계책 지루하여 머리만 희었네.
衰淚無端數行下 (쇠루무단수행하) 서러운 두어 줄기 눈물 끝없이 흘리며
起向危欄瞻北極 (기향위란첨북극) 아스라한 난간 기대고 북극만 바라보네.
◎ 4월 23일, 나는 병이 나서 6월 중순까지 앓아누웠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 왜적은 남쪽의 해변에 주둔하면서, 바다를 건너 회군하려 들지 않고 진주를 다시 침범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다급하게 남하하여 성주의 안언역에 도달하였으나, 진주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날 저녁 나는 고령현에서 숙박하였는데, 왜적은 이미 초계현에 침입하여 고령현 30리 밖까지 진군해 왔다. 나는 곧 장병을 모집하여 우도 절반을 보전하려 하자, 총병 유정과 유격대장 오유충 등 모두가 병사들을 인솔하고 합천현에 집결하였다. 나 역시 그들을 따라 합천현에 도착하였는데, 며칠 안 되어서 조정의 소환령에 응하여, 행재소에 들러 대부인을 찾아뵙고 문안을 드린 다음, 죽령을 넘어 원주 신림원에 도달했다. 그런데 잠시 후 분부가 내리기를, 아직 본도에 머물러 제장들을 단속하라’는 성지를 받들 어서, 마침내 신림원에서 청풍현으로 돌아왔다. ― 한벽루에 올라 업무로 인하여 느낀 바가 있어 정감을 언사로 표현하였는데 이때, 어가는 해주에 머물고 계셨다.
(四月) 二十三日。余病卧。至六月中始起。時賊屯據海邊。不肎渡海。聞將復犯晉州。余力疾南下。至星州安彦驛。聞晉州已陷。是夕。余宿高靈縣。賊已入草溪。去高靈三十里。余將收召將士。欲保右道一半。而劉摠兵綎,吳遊擊惟忠皆率兵來會陜川。余亦隨至陜川。數日。召赴行在。道安東。省大夫人。踰竹嶺至原州新林院。又有旨姑留本道。約束諸將。遂自新林還抵淸風。登寒碧樓。感事興懷。情見于辭。時車駕駐海州。― 柳成龍 〈宿淸風寒碧樓 幷序〉
▶ 지난 2022년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행사에서 4월 12일 화요일, 귀향길 재현단은 이 청풍 한벽루에서 강담회을 가졌다.
응청각—관수당
▶ 한벽루 바로 옆에 ‘凝淸閣’(응청각, 정면 현판)이 자리하고 있는데, 청풍호 쪽 처마에는 ‘觀水堂’(관수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문을 열면 남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것이다. 한벽루가 단순한 누각이라면 관수당은 유숙을 할 수 있는 방을 갖추고 있는 정자이다.
관수정—망월산성 망월루에서 조망
▶ 응청각에서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계단을 타고 올라가 망월산 산록에 지은 ‘觀水亭’(관수정, 육각정)에 올랐다. 그야말로 남한강 청풍호수 주변이 한 눈에 들어오는 조망처이다. 관수정에서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망월산성이 있고 산정(337m)에 ‘望月樓’(망월루, 팔각정)가 있는데, 그곳에 올라보니 청풍호반의 일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군데군데 복사꽃이 피어있는 주변의 풍경과 하늘과 땅, 청풍호수가 아름다운 풍경화의 파노라마를 그리고 있다.
▶ 관수정(觀水亭)에 올라, 남한강 청풍호를 조망한다. 시원한 바람결이 가슴을 스며든다. 청풍호 동쪽에 2개 주탑으로 이루어진 현수교인 ‘청풍대교’가 보인다. 청풍대교는 이곳 청풍(면)과 제천(시)를 잇는 82번 도로와 단양군 매포읍을 잇는 532번 도로에 연결되는 교량이다. 청풍대교 뒤로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이 제천의 진산 ‘금수산(錦繡山)’이다. 치악산의 지맥인 금수산은 약 5백년 전까지는 백암산(白巖山)이라 불렸는데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그 경치가 비단에 수놓은 것처럼 아름답다 하여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강 건너 맞은편은 청풍레이크호텔, 팬션, 식당 그리고 유람선선착장 등을 갖춘 제천 청풍관광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금남루(錦南樓)→ 팔영루(八詠樓)
▶ 망월산성에서 내려와 옛날 청풍부 동헌이었던 ‘금병헌(錦屛軒)을 올려다보며, 아래로 내려와 ‘都護府節制衙門’(도호부절제아문)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 ‘금남루’(錦南樓)를 지나, ‘물태리 石造如來立像’(석조여래입상, 보물 546호)을 돌아보고, 우리가 처음 들어왔던 ‘팔영루(八詠樓)’에 이르렀다.
▶ 팔영루(八詠樓)는 옛 청풍부를 드나드는 성문 위에 지은 건물로, 조선 숙종 28년(1702)에 청풍부사 이기홍이 지으면서 현덕문(賢德門)이라 불렀다. 이후 고종 7년(1870)에 부사 이직현이 금남루와 함께 다시 지었고, 고종 때의 부사 민치상이 청풍팔경을 즐기기 위해 여덟 수의 팔영시(八詠詩)를 지은 뒤로 ‘八詠樓’(팔영루)라 하였다. 정면 3컨,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이 누각의 안에는 마루를 깔았고 난간을 둘렀다. 충주댐을 만들면서 1983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 제천 자양영당(紫陽影堂) 및 의병기념관
자양영당(紫陽影堂) — 숭의사(崇義祠)
충청북도 제천은 ‘의병(義兵)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이다. 유인석(柳麟錫) 의병대장을 중심으로 지방 유생과 농민이 외세의 침입에 항거하여 구국의 기치를 높인 의병항쟁의 발상지이다.
자양영당(紫陽影堂)은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장담마을, 제천천 앞에 위치해 있다. 자양영당(紫陽影堂)은 원래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유중교(柳重敎, 1832~1893)가 후진을 양성할 목적으로 1889년(고종 26)에 창주정사(滄州精舍)를 세운 강학처를 기반으로, 1906년 이소응(李昭應)의 주도하에 화서학파(華西學派)에서 존중하는 선현들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위패와 영정(影幀)을 봉안하면서 창건되었다.
현재 자양영당 영역에는, 주자(朱子)을 비롯하여 송시열(宋時烈)ㆍ이항로(李恒老)ㆍ유중교(柳重敎)ㆍ유인석(柳麟錫)ㆍ이소응(李昭應)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影堂)을 중심으로 전면에 유중교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강당인 자양서사(紫陽書舍)가 있다. 자양영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집으로 측면에 풍판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영역의 서쪽에는 제천 의병을 추모하기 위해 2001년에 세운 숭의사(崇義祠)가 위치하고 있다.
제천 자양영당 일원은 의병(義兵)의 성지(聖地)로 지정되어 1995~2001년에 제천 ‘자양영당(紫陽影堂)’을 보수하면서, 유중교와 유인석의 생가(生家)를 복원해 놓았으며, 제천 의병의 생생한 기록과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을 비롯하여 숭의사(崇義祠)와 의병기념탑(義兵記念塔)을 세우고, 화동강목 판본(華東綱目板本)을 보관하는 목판각(木板閣)을 다시 세웠다. 또한 주변 지역을 정비하여 주차장을 비롯한 넓은 공간을 마련하여 ‘의병의 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제천 자양영당 일곽 전면으로는 제천천이 흐르고 있으며, 그 옆으로 충북선 철로가 지나가고 있다.
제천 자양영당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유중교(柳重敎, 1821∼1893)가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요, 그의 제자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이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義兵) 봉기(蜂起)를 논의한 곳이며, 그들의 역사의식을 담은 목판이 전하는 곳이다. 따라서 구한말 쓰러져 가는 나라를 바라보며, 한 목숨 바쳐서 풍운을 막아보고자 분연히 일어섰던 조선 의병의 넋이 흐르는 곳으로서, 그들의 숭고한 의병 정신을 기리고 오늘날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는 곳이다.
화서학파(華西學派)—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1821∼1893)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와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의 제자였으며 그들의 영향을 받아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주장한 인물이다. 이항로(李恒老)는 화서학파(華西學派)를 형성하여 한말 위정척사론과 의병항쟁의 사상적 기초를 다져놓았다. 이항로(李恒老)의 본관은 벽진. 초명은 광로(光老).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이다. 1881년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을 다녀와 미국과 연합하고 서양기술 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자 척사위정(斥邪衛正)을 기반으로 척양(斥洋)·척왜(斥倭)를 주장하며 맞섰다. 또한 그는 한말의 사회적 동요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유학의 학문적 심화와 체계적 정립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886년 유중교는 스승 이항로의 ‘심설(心說)’에 대해 김평묵에게 〈논조보화서선생심설(論調補華西先生心說)〉을 보냄으로써 ‘퇴계와 고봉의 사칠논쟁(四七論爭)’이나 ‘외암과 남당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 버금가는 대논쟁이 이항로의 화서학파(華西學派)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즉 유중교는 심(心)을 기(氣)로 규정하고 이항로 및 김평묵은 심을 이(理)로 규정함으로써, 스승의 설과 정면충돌하게 되었다. 여기에 문인들이 두 갈래로 나누어져 논쟁은 더욱 확대되고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1888년 유중교는 두 설을 절충해 〈화서선생심설정안(華西先生心說正案)〉을 김평묵에게 보냄으로써 잠정적으로 ‘심설 논쟁’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유중교의 임종 직전에 문인들에게 정안(正案)의 문자(文字)는 ‘다시 생각해보니 사실과 도리에 모두 맞지 않는다.’ 하여 거두어들일 것을 명함으로써 결국 두 설은 합일을 보지 못한 과제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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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처음에는 이항로를 따라 주리설(主理說)을 주장했으나, 만년에는 한원진의 호론(湖論)을 지지, 주기파(主氣派)로 전향하였다. 그는 성명(性命)에 관한 것을 형이상(形而上)으로, 일반적 심리작용을 형이하(形而下)의 것으로 구분하여 이해하고, 심(心)을 둘로 나누어 본심(本心)·양심(良心)·도심(道心)·인의지심(仁義之心)은 형이상의 것으로 이(理)이나, 그 밖의 일반적인 심은 형이하의 것으로 곧 기(氣)라고 했다.
저서로는 〈태극도설대지(太極圖說大指)〉, 〈소대학설(小大學說〉, 〈역설(易說)〉, 〈인물성동이변(人物性同異辨)〉 문집 등 다수가 있다. 그리고〈현가궤범(絃歌軌範)〉을 저술하여 악률을 정리·해명하고 스스로 악곡을 지음으로써 예악(禮樂)이 사회 교화에 미치는 기능에 대해 관심을 두었다. 1882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가평의 옥계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했다.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은 강원도 춘천군(春川郡) 남면(南面) 가정리(柯亭里)에서 아버지 유중곤(柳重坤)과 어머니 고령 신씨(申氏)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이다.
14살 때 먼 족숙(族叔) 유중선(柳重善)의 양자로 들어간 후 양가(養家)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하였다. 양가의 증조부 유영오(柳榮五)가 저명한 유학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와 일찍이 교분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입양되던 그 해에 이항로 문하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당시 이항로 문하에는 임규직(任圭直), 이인구(李寅龜), 이준(李峻), 김평묵(金平黙), 유중교(柳重敎) 등 재사들이 운집해 있었기 때문에 최고의 교학 분위기에서 학문을 닦을 수 있었다. 여기에서 주로 김평묵(金平默)과 재당숙인 유중교(柳重敎)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공부하는 동안 화서학파 학문의 핵심인 춘추대의(春秋大義)의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위정척사(衛正斥邪), 존화양이(尊華攘夷) 정신을 철저히 몸으로 체득하였다. 1865년에는 흥선대원군이 숭명존화(崇明尊華)의 상징이던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했을 때 이를 맹렬히 비판하였다. 이듬해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침입한 병인양요(丙寅洋擾) 때에는 유림의 대변자로서 조정에 소환된 스승 이항로를 따라 한 달 가량 서울에 머물며 혼란한 시국상과 어지러운 민심을 직시하고 위정척사 사상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 1868년 이항로가 서거하자 이항로의 적통을 계승한 김평묵과 유중교를 연이어 스승으로 섬겼다.
1893년 고향인 춘천의 가정리를 떠나 충북 제천의 장담리(長潭里)로 이주했다. 이항로의 문인이자 대학자였던 유중교가 1888년 이곳으로 내려와 문인들을 양성하던 중 그해에 작고했기 때문에 그 기반을 이어받기 위한 것이었다. 스승이자 재당숙이던 유중교는 1891년 김평묵 사후에 김평묵의 적전(嫡傳)을 계승하여 화서학파의 제3대 수장(首長)이 된 인물이다.
이곳 제천의 장담리 이사 후 유중교의 학문적 기반을 승계함으로써 이항로-김평묵-유중교로 이어지는 적전학통을 계승하여 화서학파 제4대 수장으로서의 지위와 권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유중교의 학당이었던 자양서사(紫陽書社)의 강장(講長)이 되었고, 그 동안 유중교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서상렬, 정화용, 안승우, 박정수, 원용정, 이춘영 등을 자신의 문하에 거느리게 되었다.
▶ 제천은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의병대장을 중심으로 지방 유생과 농민이 외세의 침입에 항거하여 구국의 기치를 높인 의병항쟁의 발상지이다. 의병정신을 이어받기 위해서 의병전시관을 건립했다. 의병전시관에는 당시 의병장들의 활약도와 의병들의 희생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부조와 영상실, 자료검색실 등 유물을 전시하여 후손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유인석의 생애와 의병활동(義兵活動)
일제는 청일전쟁에 승리한 후, 군사적으로 조선을 압박하는 한편 김홍집을 총재로 하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여 조선의 행정, 제도 등 내정을 적극적으로 간섭함으로써 군사적, 정치적 양면에 걸쳐 전 방위로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켰다.
유인석은 1896년 1월 의병을 일으켜 항일전을 개시하였다. 지평, 원주 일원에 거주하던 이춘영(李春永)과 안승우(安勝宇) 등 그의 문인들이 김백선(金百善)의 포군을 주축으로 경기도 지평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충청도 제천으로 진격하여 군수 김익진(金益珍)을 축출하였다. 이것이 제천의병의 발단이었다.
이들은 제천에서 이필희(李弼熙)를 의병대장으로 삼고 서상렬(徐相烈)을 군사(軍師)로 임명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 직후에 관군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영월에 모인 이필희 이하 이춘영, 서상렬, 안승우 등의 요청을 받아 유인석은 의병대장(義兵隊長)에 취임함과 동시에 격문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을 발포하여 의병 봉기의 명분을 천명하고 전 국민이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제천을 근거지로 삼고 의병에 참여한 유인석은 1896년 2월 16일 충청도의 요지인 충주로 진출하였다. 충주에서는 먼저 친일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하는 한편, 개화정책을 추종하는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포고문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을 발포하였다. 또한 의병의 전력을 확충하기 위해 서상렬, 원용정, 이범직 등을 영남 및 호서 각지로 소모사(召募使)로 파견하여 민병을 모으게 하였다.
이때 영남으로 남하한 서상렬은 안동, 예천, 봉화, 영천 등지의 의병과 연합하여 상주 태봉(台峰)의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하였고, 호서지방으로 파견된 이범직은 단발을 심하게 강요하여 주민들의 원성을 크게 산 천안군수 김병숙을 처단하였다.
하지만, 관군의 압박을 심하게 받게 되자 1896년 3월 4일 충주를 포기한 채 근거지 제천으로 회군하였다. 제천으로 회군한 뒤에는 주변 각처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문경의 이강년(李康秊)을 비롯하여 영춘의 권호선(權灝善), 원주의 한동직(韓東直), 횡성의 이명로(李明魯) 등이 각기 휘하 의병을 거느리고 제천으로 합류해 왔다. 이후 3개월간 제천의병은 수안보, 음성, 단양 등지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격장에 임명된 이강년의 활약은 특히 두드러졌다.
그 뒤 제천의병이 근거지 제천성을 상실한 것은 5월에 중앙에서 파견된 선유사 장기렴(張基濂)이 이끄는 관군의 공격 때문이었다. 의진 해산을 종용하던 장기렴의 관군은 5월 26일 제천성을 일제히 공격하였다. 관군의 공격에 맞서 의병들은 중군장 안승우와 종사관(從士官) 홍사구(洪思九)가 전사하는 등 역전 분투하였으나 전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결국 제천성을 내주고 말았다.
최후의 거점 제천성을 상실한 뒤, 관군의 압박을 피해 황해도와 평안도 등 서북지방을 향해 북상하였다. 6월 10일 원주 강천(康川)에서 서북행의 장도에 오른 뒤 영월, 평창, 강릉을 지나 마침내 서북지방에 당도하여 양덕, 맹산 등지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서북지방에서도 관찰사, 군수가 의병을 압박하였기 때문에 재기항쟁을 도모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중국 서간도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북상을 계속한 끝에 8월 23일 압록강변의 초산(楚山)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다시 한번 친일개화파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재격백관문(再檄百官文)〉을 남긴 채 휘하 의병을 거느리고 아이성(阿夷城)에서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들어갔다. 이것이 제1차 서간도 망명으로 국외 망명활동의 시작이었다.
1898년(광무 2) 고종의 소환으로 일시 귀국했다가, 이듬해 다시 랴오둥[遼東]으로 들어가 1900년 다시 귀국할 때까지 랴오둥에서 강학(講學)과 저술에 전념했다. 귀국 후 황해도 평산과 평안도 태천·개천·용천 등지에서 문인들을 가르쳤다. 1904년 8월 〈칠실분담(漆室憤談)〉을 저술하였다.
또한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여 충청도·황해도·평안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향약을 조직하고 그 시행을 권장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 유림들에게 의병의 궐기는 못할지라도 의토(義討)·언토(言討)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이 강제 체결되고 군대 해산이 이루어지자 전 국민의 조직적인 성토대회로 적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국내의 의병운동은 외국으로부터 원조가 없는 한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국외인 노령에 항구적인 항쟁의 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십삼도의군은 전면적 항일전 계획을 바꾸어 거족적 형태의 병탄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8월 22일 병탄조약이 맺어졌다는 비보를 듣고, 국망을 저지하기 위해 이상설, 이범윤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한민학교(韓民學校)에서 한인대회를 개최하고 성명회(聲明會)를 결성하였다. 성명회라는 회명은 ‘적의 죄상을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는 뜻이었다.
1914년 3월에는 연해주를 떠나 중간 기착지인 중국 봉천성 서풍현(西豊縣)에 도착하였다. 서풍을 경유한 뒤 제함(濟咸), 제춘(濟春) 두 아들과 친척사우들이 모여 있던 서간도 흥경현(興京縣) 난천자(暖泉子)로 다시 내려갔다. 이것이 제3차 서간도 망명이었고, 최후의 귀착지였다.
난천자는 다음해 작고한 뒤 유해를 임시 안장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그해 8월 간도의 관전현 방취구(芳翠溝)로 들어가 의(義)를 지켰다. 방취구는 1896년 의병을 해산했던 사첨자의 혼강 부근으로, 최초의 망명지로 회귀한 것이었다. 1915년 3월 유인석은 방취구에서 74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