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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가 길은 것은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뜻이죠. 오늘 귀한 찬양 불러주신 기드온 찬양대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루에 세 끼 밥을 먹으면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늘 먹는 것도 먹어야 되나 그렇게 생각하면 건강을 잃게 돼요.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도 주일날마다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도 하나님 나라 가는 날까지 쉬지 말고 계속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힘을 얻고 또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능력도 얻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찾아 누리는 역사도 일어나고 또 하나님이 주신 사명도 감당하게 됩니다. 우리 예배가 이번 하반기에는 더 은혜롭고 더 능력 있는 회복과 구원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예배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사도바울이 드로아에서 에베소까지 가는 여행 여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영성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자발적 고독을 선택했습니다. 13절에 보면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아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승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바울이 먼저 일행을 보내고 본인은 아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드로에서 아소까지를 걸어가기로 홀로 걸어가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그 거리는 약 40km. 이 40km는 만만치 않은 거리예요. 혼자 해변길을 따라 걸어가는 그 거리가 40km였습니다.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사도바울이 홀로 걸어가면서 무엇을 했을까 우리는 한번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이렇게 선택한 이유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바울에게도 혼자 걸어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또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해야 되는 일이 있었어요.
첫째는 그동안의 자신의 사역을 돌아보면서 정리하는 일입니다. 내가 잘 왔는지 지금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왔는지, 방향은 잘 정하고 왔는지, 또 예루살렘에서 당하게 될 환란, 앞으로 이어지게 될 환란 성령께서 바울에게 이미 말씀을 주고 계세요.
니가 예루살렘 가면 체포될 것이다. 그리고 환란과 죽음이 너를 기다린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순교의 재물이 될 것에 대해서 암시를 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 일에 대비해서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해요. 막 여러 사람하고 다니면서 위로는 될지 모르지만 이런 얘기하고 저런 얘기하고 정신없이 지나면 위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중대한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는 홀로 있으면서 자신과 하나님만이 만나는 시간이 필요한 거예요. 그 사람만이 순교라고 하는 체포돼서 또 환란을 당하는 굉장히 어려운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주님과 영적으로 깊고 내밀한 교제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 없이는 앞으로 바울이 감당해야 될 사명, 그리고 바울에게 주어진 그 험난한 시간을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바울은 이때 홀로 있는 시간을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홀로 40km를 걸어가면서 그 시간을 보내기로 한 거예요.
예수님도 보면 이런 시간을 종종 가지셨습니다. 식사할 시간도 없고 주무실 시간도 없이 그 3년 동안 얼마나 바쁘게 지내셨어요 그렇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예수님은 혼자만의 시간을 자주 가지셨어요.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 자신만 홀로 남으셨어요. 제자들이 잘 때 주님은 다시 일어나서 감람산에 가셨어요.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산으로도 가셨습니다.
성경은 이걸 습관과 같이 했다. 몸에 밴 습관처럼 주님은 정기적으로 이런 시간을 가졌습니다. 예수님도 하늘 아버지가 본인에게 주신 그 사명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어요. 사명을 새롭게 했어요.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늘로부터 오는 힘을 얻었어요. 예수님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처럼 연약한 성경 두려운 일은 우리가 두려운 일은 예수님에게도 두려운 거예요. 그 교제를 통해서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용기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타의에 의해서든지 자의에 의해서든지 이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런 시간을 가질 때 여러분 우리가 깊어집니다. 그리고 밝아져요. 혼탁한 내 생각이 밝아집니다. 그리고 더 멀리 갈 수 있고 더 오래 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헬리나웨이라고 하는 예수 외에 신부가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도 이분의 저작을 많이 읽고 또 인용을 합니다. 그중에 상처받은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이 있어요. 이분은 고독과 외로움에 대해서 이렇게 구별을 했습니다. 고독 솔리튜드 외로움 로온니니스 다르다는 거예요.
세상에는 외로움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요. 로오니니스 육체적인 사람들이 자연인의 모습이에요.
누구나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영적 요소는 없다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홀로 있지 못합니다. 늘 외롭습니다. 같이 있어도 외롭습니다. 그래서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자꾸 만나려고 하고 어떤 사람들 군중 속에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럴수록 더 깊은 외로움에 빠져요. 그리고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부담스럽게 해요.
막 외로운 사람 있잖아요. 얼굴에 나 외로워 이렇게 쓰여져 있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함께하는 사람도 힘들어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그럴수록 더 많이 만나고 많은 시간을 일에 투자하고 그것을 한번 메꿔보기 위해서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갈증만 더할 뿐입니다.
이 외로움은 마약과 같습니다. 중독된 것 같아요.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깊은 외로움에 빠져요. 이런 사람은 내 속에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다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상대방도 다 털어놓으라고 합니다. 서로의 비밀을 다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금방 후회합니다. 또 상대가 털어놓지 않으면 나는 털어놨는데 너는 왜 안 털어놓느냐 불쾌하고 불안해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만나면 인생이 얽혀 나무뿌리가 얽히듯이 얽혀버려요. 그래서 인간관계가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다고 외로움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럴수록 더 힘들어져요.
고독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요.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거듭난 사람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이 고독을 즐기고 누립니다.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시간도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또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어요. 함께 있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은 사람 그게 바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은 늘 고요합니다. 불산하지 않습니다. 말을 많이 하지도 않습니다.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불안하지 않아요.
근데 어떤 사람은 한 10초만 말을 쉬면 막 불안해 가지고 어찌할 바를 몰라. 그래서 없는 말도 막 별로 마음에 없는 말도 막 지어내고 얘기하고 그래야만 될 것 같은 그러나 이 진정한 고독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불안하지 않아요.
꼭 필요한 말만 합니다. 이런 사람은 공허한 잡담 속이 텅 빈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어떤 모임에 가면 마음은 나누지 않고 속에 없는 얘기 그냥 그냥 모여야 되니까 모여 회의에 모여야 되니까 모여 그런데 진정성 있는 말을 나누지 못해요. 그냥 1시간을 밥 먹고 그냥 때우는 거예요. 대화가 아무 의미 없는 대화만 그냥 던지고 맙니다.
이런 모임에 가는 것은 시간 낭비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의미 없는 아첨, 거짓된 칭찬, 고독을 아는 사람 영적인 사람들은 이런 일에 빠지지 않습니다. 의미 없는 아청, 거짓된 칭찬, 과도하고 과분한 말에 속으면 안 돼요. 가끔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은 좋아 힘도 납니다.
그런데 그걸 반복해서 들으면서 거기에 빠지면 바보가 되는 거예요. 왜 상대방은 그런 마음이 없어요? 과도하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할 뿐입니다. 따분한 비밀 이야기, 거짓말을 살짝 가미한 험담 특별히 무슨 얘기하다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뭔가 있는 것처럼 그런데 얘기할 수 없는 그런 사람하고 얘기하면 진짜 짜증 나 얘기하다가 갑자기 뭔가 분명히 얘기하려고 했는데 있는 것처럼 나중에 보면 없어 사실은 별것도 아닌데 그걸 쉽게 감추고 그런 대화 이런 걸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고독을 아는 사람은요. 이런 것을 빨리 분별해서 정리합니다. 이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의 필요를 생각하고 하나님과 깊고 내밀한 교재로 들어가는 능력을 가진 사람. 우리 인간관계가 이렇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면서도 서로에게 얽매이지 않는 삶, 내가 상대방을 위해서 뭔가를 기꺼이 해주면서도 상대방에게 또 뭔가 보상을 요구하면서 부담을 주는 삶 그러면 안 돼요.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그냥 내가 해야 될 일을 할 뿐이에요. 그래야만 진정한 봉사와 헌신이 되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천국이에요. 이런 사람이 모인 공동체에서 우리는 진정한 천국을 누릴 수가 있어요.
가릴 지브라는 이런 시를 썼어요.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또 즐거워하되 서로 홀로 읽게 홀로 이길 수 있게 하십시오. 마치 수금이 줄이 따로 떨어져 있으나 같은 음악으로 함께 어울리듯이 함께 서 있는 서있대 너무 가까이 머물러 있지는 마십시오. 이분은 시인이면서 진정한 예언자예요. 그 인생 인생의 인간관계에 그 정석을 말하고 있어 성전의 기둥은 떨어져 있으며, 떡갈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함께 있지만 홀로 있는 것을 존중해주고 또 홀로 있지만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정말 영적인 그런 삶입니다.
바울은 좀 우리가 길게 나갔는데 다시 돌아가서 바울은 그 제자들과 함께 사역을 하면서 같이 동고동락하면서 지냈지만 지금 이 시간은 이 시간만큼은 모두를 물리치고 하나님 앞에서 또 자신 앞에 홀로 서서 중요한 결단을 내리는 빨리 빨리 뛰어 올라가셔서 정리를 하시기 바랍니다. 어제 은혜를 많이 받은 어린이가 있나 봐요.
바울이 이걸 잘한 거예요. 그래서 끝까지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어서 자신의 목적을 저버리지 않는 목적에 이끌리는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16절에 보면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떠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로라.
지금 바울은 헌금을 걷어서 성도들의 헌금을 거둬서 오순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져가서 예루살렘 교회에 드리고, 그래서 구약의 예언 마지막 날에 열이 열방의 왕들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오는 그 예언을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40km 잠깐 걸어가는 이 영적인 시간, 이 고독한 시간을 가진 후에 곧바로 현실 치열한 현실로 복귀했습니다.
영성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영성 맨날 기도는 하는데 하는 일이 없어요. 맨날 기도만 해요. 기도가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주님과 깊은 관계를 갖는 거 좋아요. 이게 목적이 뭐냐 이거예요. 거기서 받은 은혜와 힘을 가지고 빨리 현실로 돌아와서 비록 그 현실이 힘들고 치열한 현장이지만 그곳에서 주님이 주신 사명에 복귀해야 됩니다.
영성만 추구하다 보면 해야 될 일, 감당해야 될 목적을 상실할 때가 있어요. 또 사실 기도만 하다 보면 여러분 처음에는 기도가 굉장히 힘든데 기도하고 그 고독한 시간을 갖고 주님과 교제하다 보면 자꾸 그게 좋아지고 그게 편해지고 익숙해집니다. 신비롭고 좋습니다. 거기에 머무르고 싶은 욕망이 생겨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갔다. 변화산에 예수님 사건을 경험해요. 탁 올라갔는데 밑에서는 막 욕 먹고 막 구질구질한 여러 가지 일들, 병자들 고쳐주고 뭐 이런저런 비난도 받고 그렇게 살다가 산에 새 제자와 예수님 4명이 올라가는데 갑자기 막 산에 신비로운 현상이 벌어지면서 예수님이 가운데 서시고 엘리아와 모세가 다 나타나가지고 어떤 대화를 나누시 얼마나 신비롭고 놀랍습니까?
신령한 시간이었어요. 베드로가 거기에 취했어요.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여기 있는 게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베드로에게 이 변화산 사건은 일생일대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고 가장 행복한 사건이었어요. 세상의 모든 것들을 초월해서 지금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하늘의 영광만 바라보고 느끼는 그런 시간이었어요. 천국이 따로 없었어요. 꿈 같은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어요. 기도만 하고 싶었어요. 자기 집은 없어도 괜찮아 그 곁에만 있고 싶었어요. 계속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6절에서 18절에 보면 그때 일들을 얘기해요.
그때 그 순간을 몇 단어로 표현하는데 크신 위험, 큰 영광이 있었다.
그 사건을 표현, 크신 위험이 있고 큰 영광의 사건이었다.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에요.
세상에 나가서 복잡한 인간관계의 과중한 업무, 사람들의 공격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 그냥 여기만 머무르면 좋겠어. 그게 베드로의 심정이에요. 그 신비한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하면 우리가 거기에 빠져들어요.
하지만 주님은 즉시 말씀하셨습니다. 내려가자. 야 이렇게 분위기 깨는 판을 깨고 계시는 거예요. 여기가 좋은데 여기가 천국인데 야 내가 주님 따라오기 너무 잘했어.
예수님의 제자 되기 너무 잘했어 했는데 주님이 판을 팍 깨시는 거예요. 내려가자.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현실 속으로 인도하셨어요. 변화산에서 내려오자.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귀신 들린 어떤 아이가 불속에도 엎어지고 물속에도 엎어지고, 막 다른 제자들이 그 애를 위해서 막 그 귀신을 내쫓으려고 막 막 누르고 소리 지르고 난리 난장판인 거예요. 옆에 있는 사람들은 또 비난하고 어쩌나 보느라 하고 또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아주 복잡한 현실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러나 주님은 그곳으로 제자들을 인도하셨어요. 그들이 만난 현실은 치열한 곳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도피처가 아니에요. 기독교 신앙은 잠시 하나님과 독대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능력과 지혜를 받되, 그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치열한 세상으로 나와서 거기서 상처받으면서 울면서 땀 흘리면서 피 흘리면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게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들어가는 곳마다 세상이 바뀌는 거예요. 천국만 바라보는 신앙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천국을 이루는 신앙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아수에서 제자들을 만나서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재촉했어요. 에베소의 가야 되지만 그곳으로 깊이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오순절까지 어서 도착해서 헌금을 전하고 선교 보고를 하고 예루살렘 교인들을 만나야 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적대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입니다. 바울 나타나기만 해봐라. 내가 가만두질 않겠다 그런 사람들이 쫙 포진돼 있는 곳이에요.
성령께서는 자꾸 말씀하셔 너 그 하면 체포된다. 너 거기서 죽을 수 있다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이 체포되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끌려가고 로마에서 순교당할 것을 직감합니다. 그것이 바울이 바울을 기다리는 현실이었어요. 누구나 피하고 싶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머뭇거리거나 주체하지 않고 그 현실 속으로 뛰어들었어요.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건강한 영적 삶은 균형이에요. 하나님과 아주 달콤하고 긴밀한 교제의 시간도 가져야 되고, 그리고 빨리 현실로 돌아와서 치열함, 땀 흘리는 피 흘리는 그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홀로 있는 고독한 시간도 필요합니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서 자신을 돌아보고 큐티하고 주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러나 빨리 현실로 돌아와서 하나님 내게 주신 삶을 살아내야 돼요.
어떤 사람은 막 기도 많이 하고 기도를 하면 할수록 현실과 멀어져 교회 생활도 멀어져 그래가지고 자꾸 이제 혼자만 있으려고 그러고 그러고 야 지금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선교도 해야 됩니다.
교회 생활도 해야 됩니다. 봉사도 해야 됩니다. 나가서 우리가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러면 자꾸 숨어요. 주님께 여쭤보고요. 뭘 좀 합시다 여쭤보고요. 그래서 자꾸 현실에서 떠나서 자꾸 여쭤본다고 하는데 그래 잘 믿어지지 않아요. 주님이 야 계속 나하고만 있자.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니까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거예요.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룰 때 여러분 건강한 영적 생활이 되고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자발적 고독 그리고 치열한 삶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 멋지게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