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생 1417년 조선 충청도 회덕현 흥농천 왕대벌
사망 1456년 (향년 40세) 조선 한성부
묘소 사육신묘
시호 충정(忠正)
본관 순천 박씨
자 인수(仁叟)
호 취금헌(醉琴軒)
부모 부친 - 박중림(朴仲林, ? ~ 1456), 모친 - 안동 김씨 김익생(金益生)의 딸
형제자매
남동생 - 박인년(朴引年, ? ~ 1456),
박기년(朴耆年, ? ~ 1456),
박대년(朴大年, ? ~ 1456),
박영년(朴永年, ? ~ 1456)
부인
초배낙안 김씨 - 김미(金彌)의 딸
계배천안 전씨 - 전념(全念)의 딸
자녀 슬하 3남 3녀
장남 - 박헌(朴憲, ? ~ 1456)
차남 - 박순(朴珣, ? ~ 1456)
3남 - 박분(朴奮, ? ~ 1456)
장녀 - 김자무(金自茂)의 처
차녀 - 이공린(李公麟)의 처
3녀 - 군부인 순천 박씨: 영풍군의 처
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사육신의 1명. 본관은 순천, 자는 인수(仁叟).
박팽년의 행적은 <육신전>과 민담, 후대의 윤색과 미화를 걷어내기가 매우 어렵다.
2. 생애
충청도 회덕현 출신으로 박팽년의 증조부는 공조전서를 지낸 박원상(朴元象)이고 할아버지는 박안생(朴安生)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박중림(朴仲林), 어머니는 안동 김씨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1432년 생원이 된 박팽년은 1434년 알성문과(謁聖文科)의 을과로 급제했다. 그는 18년간 집현전에서 근무했는데 1444년 집현전 부수찬, 1446년 집현전 부교리, 1446년 집현전 교리, 1448년 집현전 직제학, 1449년 집현전 부제학으로 승진한다. 이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왕이 된 후 집현적 직제학으로 승진했으나 문종이 승려 신미에게 호를 내리자 이에 강력하게 반발했기 때문에 문종에 의해 보직 해임되었다가 주위의 집단 반발로 다시 복직한다. 이후 사헌부 집의로 임명된다.
이후 문종이 쇠약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세자의 안위를 걱정할 처지에 놓이자 성삼문, 신숙주와 함께 세자를 부탁받는다. 1453년 우승지를 거쳐 1454년 형조참판이 되었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해 경복궁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으나 성삼문이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고 만류해 단념했다. 이 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부분이 <육신전> 창작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55년 4월 4일 충청도 관찰사 박팽년의 장계가 존재한다. 정확하게 박팽년이 언제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기에는 이미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으니 충청도의 그 많은 강물들 다 버려두고 한양의 경복궁 경회루에 빠져죽을 이유는 없다. 1455년 6월 11일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데 세조 1년이 된 충청도 관찰사 박팽년이 기우제를 권한 기록까지 등장한다. 박팽년은 1455년 8월 예문관 제학으로 임명되면서 한양에 올라오게 된다.
1456년 성삼문 등을 포함한 사육신들과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으나 김질이 세조에게 밀고하여 혹독한 국문을 받았다. 세조는 박팽년의 재주를 사모해 조용히 사람을 시켜서 “네가 내게 항복하고 같이 역모를 안 했다고 숨기면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했으나 박팽년 역시 성삼문처럼 세조를 "전하"가 아니라 "나리"라 칭하며 거절했다. 이에 세조가 “네가 이미 나에게 신(臣)이라 일컬었고 내게서 녹을 먹었으니 지금 비록 신(臣)이라 일컫지 아니해도 소용없다”고 하자 박팽년은 “나는 상왕의 신하로 충청 감사가 됐고 장계(狀啓)[4]에도 나리에게 한 번도 신이라 일컫지 아니했으며 녹도 먹지 않았소”라고 대답했다. 이에 세조는 박팽년이 자신에게 올린 장계를 살펴보니 과연 '신(臣)'자는 하나도 없었고 모두 '거(巨)'자로 쓰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자세히 보지 않아 모르고 있었고 또한 녹도 먹지 아니하고 창고에 봉하여 두었음을 알았다. 단, 상기 내용은 사건 수십 년 후에 쓰인 소설 <육신전>에 나온 내용이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오히려 곤장을 맞자 아버지를 포함해 가장 많은 인원을 자백하고 "더 대지 않냐"고 하니 "아버지까지 대었는데 더 댈게 있느냐"면서 운검을 통해 거사하려고 했다는 것까지 다 고백했다고 정반대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김질의 밀고로 박팽년은 심한 고문을 당해 옥사했는데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있으랴’라는 시조를 읊고 눈을 감았다. 죽기 전에 읊었다는 시조는 조선 초기까지는 작자 미상의 시조로 알려졌으며 시조 저자가 박팽년으로 붙여진 것은 사육신이 복권된 숙종 이후의 서적에서만 보인다. 당시 역적의 기록이나 문집은 전혀 전하지 않던 시기를 거친 이후에 수백 년이 지나서 누가 박팽년이 고문당하다 죽는 순간의 시조를 기록했을까를 생각하면 이상하다.
이후 박팽년의 시신은 거열되어 목은 효수되고, 나머지 부분은 8도 전역에 전시되었다.
박팽년의 가문은 가담자들 중에서 가장 융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좌되어 극형에 처해진 사람도 가장 많았고 대신에게 나누어진 처첩도 가장 많았으며 종친과 대신들에게 나누어 진 전토도 제일 많았다. 이걸 주도자라서 가장 가혹하게 처벌받았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어차피 역적으로 연루되면 누구는 100% 털고 누구는 80% 털고 누구는 가족들만 털고 누구는 친척까지 털고 하는 식으로 걸리는게 아니라서 큰 의미는 없다. 박팽년이 가장 많은 인원을 자백하면서 일가 친척을 다 언급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과 박팽년 본인, 형제로 박인년(朴引年)·박기년(朴耆年)·박대년(朴大年)·박영년(朴永年)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고 박팽년의 아들 박헌(朴憲)·박순(朴詢)도 죽임을 당하였고 박분(朴苯)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노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박팽년과 그의 형제들의 아내와 딸들은 종친과 대신들의 노비로 보내졌다. 박팽년의 아내 옥금(玉今)은 정인지, 박인년(朴引年)의 아내 내은비(內隱非)는 화천군 권공에게 노비로 보내졌다. 박기년(朴耆年)의 아내 무작지(無作只)는 익현군 이곤, 박대년(朴大年)의 아내 정수(貞守)는 동지중추원사 봉석주에게 노비로 보내졌다. 박헌(朴憲)의 아내 경비(敬非)와 박순(朴詢)의 아내 옥덕(玉德)은 이조참판 구치관에게 노비로 보내졌다.
박팽년의 차남 박순은 그의 부인 이씨가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이씨가 대구 관아에서 아들을 낳고 때마침 딸을 낳은 여종이 둘을 바꿔치기한 덕분에 아이는 외할아버지의 손에 길러져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성장하고 후에 17세가 되었을 때 그의 이모부이자 경상도 관찰사인 이극균의 제안으로 자수를 권고받는다. 결국 박팽년의 손자임을 밝힌 박비는 성종에 의해 박일산(朴壹珊)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면받았고 이로써 사육신 중 박팽년의 가문은 명맥을 이어나가게 된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지만 이것도 거짓. 무엇보다 저런 복중 태아는 남자아이라도 죽이지 않았으며 일정 나이까지는 보증인이 키우다가 당시 기준 성년인 15세가 되면 위리안치하거나 공노비가 되었다. 당시 절차에 따라서 외가에서 보증하고 기르고 당시 외가였던 광주 이씨가 잘 나갔기 때문에 면천만 시킨 것이다. 성종이 이름을 줬다거나 사면을 했다거나 하는 것도 전혀 근거가 없다. 이 기록들은 모두 <연려실기술>에 남아있는데 박순의 아내 옥덕이 자처해서 대구 관아의 관노로 내려가서 수절했다 같은 드립을 치고 있는 것을 봐서는 신빙성이 있는 기록을 근거로 삼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실록>에는 사관의 말을 빌려서
【박충후는 문종조(文宗朝)의 충신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이다. 세조(世祖)가 육신(六臣)을 모두 주살(誅殺)한 뒤에, 박팽년의 손자 박비(朴斐)는 유복자(遺腹子)이었기에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이다. 갓 낳았을 적에 당시의 현명한 사람을 힘입어 딸을 낳았다고 속여서 말을 하고 이름을 비(斐)라고 했으며, 죄인들을 점검할 때마다 슬쩍 계집종으로 대신하곤 함으로써 홀로 화를 모면하여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 박충후는 곧 그의 증손으로서 육신(六臣)들 중에 유독 박팽년만 후손이 있게 된 것이다. 】
사헌부에서 산음 현감 김응성과 태안 군수 박충후를 탄핵하다
라는 글이 있다. 사육신 복권은 한참 후대의 일인데 '충신 박팽년'과 '육신'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당시 사림들에게 돌고 있던 <육신전>과 기저 일화가 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일화가 완성되지 않아서 여종이 등장하거나 외가가 등장하는 등의 디테일은 없다. 사육신이 복권된 다음인 영조와 정조 시기의 인물들인 이긍익이나 이덕무의 책들에서 기록된 일화에서 이극균과 외가가 강조되는 것은 해당 일화가 광주 이씨 가문이 주도해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 전설과 조씨고아를 바탕으로 오태석이 지은 희곡 태(胎)가 있는데 나온 시기가 시기다 보니 박정희 미화 논란이 있다.
박팽년 일가의 토지도 모두 분할되어 종친과 대신들에게 나누어졌다. 박팽년의 소유 땅은 충청도 천안, 신창, 온양, 경기도 삭녕에 있었다. 박팽년 일가가 보유하고 있던 토지를 받은 사람들은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운 측근들과 종친이었다. 박팽년 일가의 토지는 지역을 중심으로 1명의 대신에게 집중해서 배당되었다. 경기도 과천 땅은 황수신에게 주어졌는데 황수신은 황희의 아들이다. 1691년(숙종 17년)에 신원되었다.
3. 기타
묘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사육신묘(사육신 공원) 내에 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는 그를 포함한 사육신들의 위패가 봉안된 '육신사'라는 사당이 있다.
순천 박씨인데 박준규 전 국회의장과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의 아내 박두을이 그의 직계 후손이다.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에 취금헌로가 있는데 아래에 적은 것처럼 박팽년의 호로 잘못 알려진 '취금헌'을 딴 것이다.
박팽년은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바로 세종과 혜빈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인 영풍군 이전이 박팽년의 사위였던 것. 영풍군 또한 훗날에 금성대군, 혜빈 양씨, 사육신 등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나섰다가 세조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이러한 혼인 관계로 보아 박팽년은 혜빈 양씨와 금성대군을 대표로 하는 반수양대군 종친 세력과 연결되었음을 볼 수 있다. 다만 세조의 후궁 근빈 박씨가 박팽년의 누이라는 말이 있는데 박팽년의 본관은 순천, 근빈 박씨의 본관은 선산이다. 따라서 박팽년과 근빈 박씨가 남매간이라는 것은 후세에 누군가 창작한 이야기로 보인다.
먼저 박팽년의 호로 잘못 알려진 '취금헌(醉琴軒)'. 박팽년의 친설로 알려진 것은 딱 하나가 있는데 초서 천자문으로 박팽년이 자신의 사위인 영풍군에게 준 책이다. 이 초서 천자문에 찍혀 있는 낙관이 '취금지헌영풍'인데 박팽년의 후손들마저도 낙관의 '취금지헌'과 '영풍'은 모두 영풍군을 의미한다고 인정한다. 박팽년의 이전 행적을 모두 뒤져봐도 저 표현을 달리 쓴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저 낙관은 책을 받은 영풍군이 자기 책이라고 낙관을 찍었는데 그 책을 박팽년 친필이라고 후대에 목판까지 찍어대면서 착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취금지헌'은 영풍군의 호이다. 관련 글 다음은 '집대성'. 이에 대해서는 세종이 내린 칭호라느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집대성'이라는 표현은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전혀 없고 후대의 야담집 <용재총화>에 나온다. <용재총화>를 쓴 용재 성현은 세조 8년에 출사해서 연산군 대까지 관료 생활을 한 인물로 남효온보다는 이른 시기의 인물이지만 박팽년이 죽은지 6년 후에야 문과 급제를 하게 된 인물이다. 순수하게 당대 기록이라고 보기에는 아쉬움이 있으며 저 내용으로는 '집대성'이 박팽년의 호칭 혹은 별명이라는 근거가 전혀 없다. 말 그대로 '박팽년은 이를 모두 집대성했다고 인정했다'라는 식의 단순 문장을 오독한 것일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세종이 처음 집현전을 설치하고 글 잘하고 공부 잘하는 선비들을 이끌어 들이니 박인수(박팽년), 성근보(성삼문), 유태초(유성원), 이백고(이개), 하중장(하위지)이 모두 일시에 이름을 떨치었다. 그런데 근보는 글이 난만하고 호방종일하였으나 시에서 부족하고, 중장은 대책과 소장에서 뛰어났으나 시를 알지 못했으며, 태초는 천재를 타고 났었지만 본 것이 넓지 않았고, 백고는 맑은 재주가 아름답게 피어나고 시도 또한 빼어났다. 그러나 동료들은 모두 박인수를 추천하여 집대성으로 삼고, 그 경술과 문장과 필법이 모두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모두 죽임을 당하여 그 저술한 바가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였다
<용재총화>
4. 대중매체에서
1980년 드라마 파천무 - 김인태
1998년 드라마 왕과 비 - 김하균: 사육신의 단종 복위 시도가 발각된 후, 세조가 단종이 시킨 게 아니냐고 물어봤을 때 자신의 동료들과 아버지의 이름까지 전부 토설한 다음 "아버지의 이름까지 숨기지 않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지 않았겠느냐"며 단종과의 연계성을 부정한다. 즉, 동료들 전체를 팔아서라도 단종을 지키겠다는 무시무시한 충성심을 보이는 인물로 묘사된다. 한편으로는 세조를 까는 아가리 파이터 캐릭터도 받아서 연회에서 거하게 노는 세조를 까기도 하고, 나중에 단종복위운동이 걸려서 국문을 받을 때에도 말투와 단어 하나하나에도 깐족거림을 담아 조롱한다.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 - 윤원석
2011년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 김기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