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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禪軒 독서일기 2026년 8월 1일 토요일]
《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부여 공주 파소와 박혁거세》 (65)
斯盧始王 仙桃山聖母之子也 昔有夫餘帝室之女婆蘇 不夫而孕 爲人所疑 自嫩水逃至東沃沮 又泛舟而南下 抵至辰韓奈乙村 時 有蘇伐都利者聞之 往收養於家 而及年十三 岐嶷夙成 有聖德 於是 辰韓六部共尊 爲居西干 立都徐羅伐 稱國辰韓 亦曰斯盧 夙
사로의 첫 왕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 제실의 딸 파소가 남편 없이 아이를 배어서 사람들이 의심을 하자 눈수로부터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가, 다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한 나을촌에 닿았다. 이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그 소식을 듣고 가서 거두어 집에 데려다 길렀다. 그리하여 나이 13세에 이르자 높은 지각이 일찍 이루어지고 성스러운 덕이 있으므로 진한 6부의 사람들이 존경하여 거서간으로 삼았다. 도읍을 서라벌에 세우고 나라 이름을 진한으로 하였는데 달리는 사로라고도 하였다.
[논주]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고사서들 중에서 박혁거세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합리적 사실인 것이 바로 이 글이다. 정사로 인정받은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에는 사실이 아니라 박혁거세 탄생 신화가 실려있다. 두 정사에서는 탄생 신화만 아니라 파소(婆蘇)가 아니라 ‘사소(娑蘇)가 중국 황실의 딸’이라 하며 중화사대주의의 재료로 이용하고, ‘선도성모수희불사’ 이야기에서는 선도산 성모를 불교 포교에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정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고구려본국기]에는 현대적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앞서 비판한 대로 [고구려본국기]에는 사실이 아닌 허위와 함께 사실이더라도 왜곡, 과장된 부분이 곳곳에 있다. 그러나 연개소문 시대 이야기 후의 소서노와 온조 백제, 파소 공주와 박혁거세 거서간의 진한 이야기에서는 합리성이 있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파소와 박혁거세 진한 이야기는 소서노와 온조 백제 이야기와 함께 진한과 백제의 뿌리가 부여임을, 즉 고구려와 같은 민족임을 강조하기 위해 붙인 것이다. 즉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한 뿌리 같은 민족임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 민족의 주류는 환인-환웅-단군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씨족과 부족들이 합류하면서 형성되었다. 서기전 425년 구물 단군이 즉위하여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고,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바꾸었다. 이 대부여를 마감시키고 서기전 239년 4월 8일에 해모수(解慕漱)가 새 나라 북부여를 건국하였다.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이 한(漢)나라에 망하자 졸본의 고두막(高豆莫)이 동명왕(東明王)이라 자칭하면서 고토를 회복하자는 명분으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한(漢)나라와 전쟁을 하였으며, 서기전 87년에 북부여 4세 단군 고우루가 붕하고 5세 단군이 된 해부루를 서기전 86년에 동부여후(東夫餘侯)로 강등시켜 봉하고 북부여 5세 단군이 되었다. 6세 단군 고무서가 서기전 58년에 붕하자 고주몽이 7세 단군이 되었다. 그러나 고주몽이 서기전 37년에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고구려로 바꾸고 새 나라를 건국하였다.
서기전 300년경 연나라 장군 진개의 침략 이후부터 고구려 건국기까지 요서-요동-만주-한반도 전체가 씨족 대이동기였다. 요서-요동의 번조선(번한)인들은 주로 한반도 남서부로 이동했고, 요동-만주의 진조선(진한)인들은 주로 동남부로 이동했다. 파소 공주와 박혁거세의 진국-사로는 진조선 유민들이 한반도 동남부 경주로 이동한 건국이고, 고주몽의 고구려는 진조선과 번조선의 잔류토착민 중심 건국이고, 온조의 백제는 번조선 영역이었던 패대지역의 유민들이 한강 하류로 이동한 건국인 것이다. 서기전 1세기경부터 한반도 본래의 마조선인들은 북부에는 최씨낙랑국, 동예, 옥저, 말갈 등의 소국들을 건국하여 자리 잡고, 중남부에는 진조선과 번조선 유민들이 마한. 진한, 변한으로 통칭되는 100여 개 소국들을 건국하여 곳곳에 자리 잡았다. 이들 소국들 중에서 북부여를 계승한 고구려, 진조선 황손을 계승한 진국, 번조선을 계승한 백제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인접 소국들부터 차차 병합하면서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4국 구조를 거쳐 치열한 3국 경쟁 구조가 되었다가 결국 신라 한 나라로 통합되었다.
마조선(마한)인들이 이미 살고 있는 한반도로 번조선과 진조선인들이 모여든 것이다.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에도 고조선인들의 한반도 이동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만, [단군세기]와 [북부여기] 등에는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기준으로 하여 우리 민족사의 영역이 뚜렷이 구분된다. 요서-요동-만주는 과거 영역이고 한반도는 현재 영역이다. 그럼에도 과거 영역에 집착하는 행태는 퇴영 현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파소 공주와 박혁거세 거서간의 진국-사로국 건국 과정을 살펴보자.
대대로 가전하는 『밀양박씨세보』에 다음과 같이 박혁거세의 탄생의 기사(記事)가 있다.
「漢宣帝地節元年壬子秋七月聖母自仙桃山降于楊山蘿井始祖誕降有神異祥. 한나라 선제 지절 원년(BC 69년) 임자년 가을 7월에 성모가 선도산에서 내려와 양산 나정에 이르러 시조가 태어났는데 신이하고 상서로움이 있었다.」
이 기사는 진한(辰韓) 건국과 함께 박혁거세의 족보에 등재되어 이천여 년 세월을 흐르고 흘러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기사의 실증으로 신라 초기 진한시대에 지어진 <선도산 성모 사당>이 지금도 경주 선도산에 있다. 그러므로 파소(婆蘇)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有神異祥’이라 하여 다른 사람과는 달리 무언가 신기하고 이상하고 상서러움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有神異祥’이라 할 뿐이지,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이 쏘이는 나정으로 사람들이 몰려가니까 말이 꿇어앉아 울다가 하늘로 올라가고 큰 자주빛 알이 하나 놓여있었다는 신화는 없다. ‘仙桃山降于楊山蘿井’은 하늘에서 내려온 게 아니라 선도산에서 내려와서 시오리 거리 평지인 나정에서 박혁거세를 출산했다는 사실 기록이다.
눈수(嫩水)는 대흥안령산맥과 소흥안령산맥 사이에서 발원하여 광활한 북만주평원을 누비며 남으로 흐르는 송화강의 지류로 치치하얼-하얼빈 지역이다. 그러므로 북부여의 땅이다. ‘帝’ 자이므로 작은 나라 왕의 딸이 아니라 큰 나라 황제의 딸이다. 그러므로 제후의 나라인 동부여가 아니라 황제국인 북부여 4세 고우루 단군의 딸이다.
기원전 86년에 북부여 4세 고우루 단군이 훙하고 난 후 동생인 해부루가 5세 단군이 됐으나 새로 일어난 고두막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해부루는 사정해서 동부여로 쫓겨가서 작은 나라 왕이 됐다.
혹자는 파소 공주가 무력으로 북부여 5세 단군이 된 고두막의 딸이라고 한다. 그러나 승자인 고두막 단군의 딸인 공주 신분이 남편 없는 아이를 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천 리 머나먼 객지로 떠난다는 것은 전혀 상식에 어긋난다. 남편을 찾아 혼인을 시키는 게 이치이다. 서기전 194년 위만이 번조선을 빼앗고, 준왕이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부로 도망하여 한왕을 칭했다. 이후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이 한나라에게 망하자 위만조선의 번조선인들이 대거 한반도 서남부로 이주했다. 한나라 군대의 요동 침략과 위만조선의 멸망은 장춘-하얼빈 지역의 진조선(진한)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더구나 서기전 106년에 요하 하류 지역에서 고두막이 일어나 동명국을 세우고 압박을 가해옴으로써 진조선이 쇠약해지고 민심이 불안해졌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다가 결국 서기전 86년에 북부여는 고두막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진조선과 동명국 간의 이러한 갈등과 전투가 벌어진 23년 동안에 진조선의 많은 백성들이 남부여대하여 새로운 땅을 찾아 이동했다. 그리하여 한반도 곳곳에 만주에서 이동한 많은 무리들이 정착하였다. 그들 중에서 사로6촌으로 대표되는 한 무리가 정착한 곳이 한반도 동남부 서라벌 지역이었다. 파소 공주가 나을촌 서라벌로 온 것은 그곳이 같은 부족이기 때문이다. 사로6촌민들은 한나라 군대와 고두막 군대를 피해서 멀리 이동해 온 진국 백성들이다. 그러므로 파소 공주는 고두막의 딸이 아니다.
파소 공주가 서기전 69년에 박혁거세를 낳았으므로 나이는 20세에서 30세 사이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출생이 서기전 90년에서 100년 사이이다. 서기전 120년에 등극한 고우루 단군이 서기전 87년에 붕하였으니 늦게 얻은 딸이 된다. 어릴 때 아버지 고우루 단군이 붕하고 고두막 단군 치세에서 성장했으나, 철이 들어서부터 아버지가 어떻게 붕하였는지를 알게 되면서 고두막 단군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고, 결국 진국 유민들이 정착한 서라벌로 가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또는 삼촌 해부루를 따라 동부여에서 성장했으나 불편한 점이 많아 서라벌로 갔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을 살펴보면 파소는 북부여 4세 단군 고우루의 공주가 된다. 고두막과 해부루는 아버지가 될 수 없다. 아버지 고우루 단군의 신하들과 백성들인 진조선 유민들이 이주한 한반도 동남부 서라벌로 향하여 눈수를 건너고 만주벌판을 지나고 개마고원을 넘어 원산 동옥저에 도착하여 쉰 다음에 배를 타고 해로로 서라벌 나을촌에 당도하였다. 진조선 유민들이 파소 공주를 반겨준 이유는 그들의 공주이기 때문이었다.
기사에서 “有蘇伐都利者聞之 往收養於家 而及年十三 이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그 소식을 듣고 가서 거두어 집에 데려다 길렀다. 그리하여 나이 13세에 이르자”라고 하여 아이가 태어나자 곧 소벌도리가 거두어 길렀다고 한다. 또한 밀양박씨 족보에는 “한나라 선제 지절 원년(BC 69년) 임자년 가을 7월에 성모가 선도산에서 내려와 양산 나정에 이르러 시조가 태어났는데 신이하고 상서로움이 있었다.”고 한다. 연도와 달까지 나와 있고, 파소가 선도산에서 내려와 나정까지 와서 낳았다고 한다. 선도산에서 낳으면 쉬울 텐데 왜 무거운 몸으로 시오리 먼 나정까지 와서 출산했을까. 나정은 당시 집단의 중심지였다. 분명 이유와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소벌도리가 아이를 거두어 기른 것과 이후에 파소가 선도산성모로 모셔져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을 보면 출산 시에 남편이 없었고, 파소가 아이를 낳고 죽었거나 양육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면 남편은 누구이겠는가. 파소가 나을촌에 당도하기 전에 임신 상태였고, 당도 후 곧 출산했음이 확실하다. 임신은 눈수를 건너기 전일 것이고, 이동에는 최소한 반 년은 걸렸을 것이다. 공주 신분으로 혼자 이동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므로 시종이 몇 명 함께 했을 것이다. 남편이 함께 하지 못한 걸 보면, 남편은 고우루 단군에 충성하는 장군으로 고두막에게 저항하다가 희생되고, 파소는 더이상 북부여에서 살 수 없어서 남쪽으로 피신한 것 같다. 현재 밀양박씨 대부분 남자들의 Y성염색체는 O1B2로 양자강계이다. 앞으로 Y성염색체 연구와 각종 사료 연구를 통해 부계가 드러날 것이다.
파소는 북쪽에서 내려온 북부여의 공주이고, 말을 타고 나정(蘿井)에 가서 해산했다. 공주님의 해산이니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구경하고 축하했을 것이다. 외세가 침략하자 북부여를 떠나 남으로 내려와 씨족 단위로 흩어져 살던 6촌 사람들에게 단군조선-북부여 공주가 낳은 남아는 6촌 사람들의 신분을 뛰어넘는 고귀한 신분이었다. 경쟁자들을 초월하여 나라를 이룰 수 있는 구심점이었다. 열세 살의 어린 박혁거세를 거서간으로 추대한 원동력은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 4세 구우루 단군의 핏줄을 이어받은 황손이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나 수천 리 머나먼 한반도 남동부 구석진 곳 서라벌에 살고 있지만, 광활한 만주 대륙은 조상들이 살던 그리운 고향이다. 그러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옛땅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정착한 이 땅에 고국의 황손을 모셔 왕으로 삼고 ’진한(辰韓])‘이란 이름으로 나라를 세움으로서 영원히 살아가야 한다고 신라사람들은 결심했다.
북쪽에서 기원전 58년에 고주몽이 북부여를 접수하여 단군이 됐다는 소문을 들은 서라벌 6촌 사람들은 아이가 열세 살이 되자 왕으로 추대하고 서기전 57년에 진한을 세웠다. 북부여 단군의 혈통이 파소 공주가 낳은 박혁거세 거서간에 의해 진한-신라 역사로 이어졌다.
이렇게 하여 세워진 진한이 단군조선-북부여 계승이라는 대의명분의 우위로 박씨왕조 아달라왕 대까지, 고조선 유민들이 남하해서 세운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여 신라로 발전하고, 그 힘으로 가야까지 정복하여 국력을 최대화한 결과 마침내 삼국통일을 했다. 삼국통일로 비로소 여러 줄기의 작은 민족들이 한민족이라는 굵은 줄기로 융합되기 시작했다.
신라 10대 고승 중 한 분인 안함로가 쓴 [삼성기전 상편] 말미의 ‘乙未漢昭時進據夫餘故都稱國東明是乃新羅故壤也’라는문장에서 만주의 부여가 신라의 옛땅이라고 한다. 신라사람들은 눈수가 흐르는 부여에서 왔다는 말이다. 안함로 스님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니라 웃대에서 쓴 국사를 보고 옮겨 썼다. 속유(俗儒)나 객사(客士)들은 허위를 말하는 자가 많아도 불교 승려는 진실만을 말하고 기록한다.
[고구려본기]는 일연의 『삼국유사』보다 143년 늦은 필사본이지만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게 아니라 편수관인 이맥이 세조 때 수거되어 궁궐에 비장된 고사서들을 보고 필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이다. 이 [태백일사] 중 [고구려본기]의 ‘稱國辰韓’과 일연의 <仙桃聖母随喜佛事>의 ‘泛海抵辰韓’에서 ‘辰韓’이란 말이 같다. 공주는 맞는데, 파소 공주가 북부여에서 왔느냐 중국에서 왔느냐이다. 경주 6촌 사람들이 파소 공주를 환영하고, 박혁거세 탄생을 기뻐했으며, 그를 거서간으로 모시고 나라 이름을 진한으로 한 것을 보면 파소가 북부여에서 온 공주이다.
그런데도 일연은 박혁거세 탄생을 신화로 만들고도 모자라 중국 황실의 딸로 둔갑시켰다. 둔갑도 허술하게 한 게 아니라 겹겹이 포장했다. 일연 김견명이 파소를 사소라 하며 중국 황실로 딸로 만든 작태는 앞에서 설명한 환인-환웅-단군 역사의 짜집기와 왜곡과 이어진다. 파소는 단군조선의 정통성을 이은 북부여의 의연한 공주이다. 일연은 그런 공주를 중국 황실의 딸로 둔갑시킴으로서 고려가 중국의 속국임을 천하에 광고했다.
나라 이름을 보면,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진한‘이란 국명은 안 쓰고 ’서나벌(徐那伐)이라고만 했고,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사라(斯羅), 사로(斯盧)라고 했다. 그러나 [삼성기]의 <북부여기>는 ‘진한(辰韓)이라 분명하게 밝히고 ’사로‘斯盧’는 ‘또는’으로 말한다. 김부식과 김견명이 의도적으로 ‘진한(辰韓)’ 국명을 기피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이겠는가.
‘진한(辰韓)’ 국명의 은폐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고려와 조선의 학자들과 관리들이 우리 문화와 역사를 지우고 중국 문화와 역사를 이식하는 데에서 신라를 진국이라 하는 것은 가장 금기할 개념이었다. 그자들이 ‘진한(辰韓)’을 부정하는 것은 신라의 뿌리가 북부여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소라 이름을 바꾸고 중국 황실의 딸이며 그 사당이 중국에 있다고 했는가? 그럼 박혁거세 거서간이 세운 진한은 중국왕조의 아류이고, 중간에 흉노 휴도왕자 김일제의 후예인 미추왕이 찬탈하여 세운 신라가 정통이란 말인가? 그런데 맞는 말이긴 하나 김부식이 잘못 들었다. 중국 산동성에는 선도산성모의 사당이 아니라 흉노족 김일제의 사당이 있다. 한나라에 포로가 된 김일제가 공을 세워 고관이 되어 출세한 나라가 한나라이다. 그 후손이 왕망의 신나라 건국에 개국공신이었다. 그러다가 신나라가 망하자 쫓겨서 한반도로 도망쳐왔다. 그러니 중국이 고국이다.
『환단고기』 중 [고구려국본기]는 전부는 아니지만 곳곳에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담고 있다. 김부식과 김견명의 후예가 왜 『환단고기』를 백안시하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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