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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에서 나지막한 시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영숙 | 시인ㆍ문학평론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자각의 뿌리는 겸손이다. 계단 한 칸씩을 차근차근 오르듯, 반성적 자아의 내면 성찰이 더 나아가 밖의 세계에 의연해질 때 선물처럼 그것은 온다. 기쁨과 보람과 자부심이 감각적으로 동행한다. 겸손이 현재에서 출발해 미래를 지향한다면 상대적으로 교만은 현재에서 출발해 과거로 회귀한다. 이때 현재는 결핍되고 과거는 충만해진다. 기쁨과 보람과 자부심이 관념적으로 동행한다. 감각과 관념의 거리는 겸손과 교만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든 가야 하고, 또한 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사, 인간사를 반영하는 시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생과 시의 방향성은 같다. 시는 생의 궤적을 압축해 보여주면서 그 행간에 보편적인 삶의 양태들을 매설해 놓곤 하는데, 시의 어떤 단서들은 한 생을 통째로 이끌어 올리는 미늘이다. 한재희의 첫 시집 첫 페이지에 놓인 시가 그것이다.
나비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꽃이
혼자라는 사실은
조용한 슬픔이다
소리치지 못하는 아픔이다
시냇물은 어떻게 우나
개미가 더듬는 소리까지
듣고 싶은 소원이
귀의 모양을 닮아가고
피어날수록 나를 주름지게 했다
입술의 움직임을 읽어내야 하는
나날들
모두가 바람에 흔들리며 웃을 때
이유 모를 웃음을
애써 지어야 했던
외로운 비명이다
―「맨드라미의 소원」 전문
저 낮은 곳에서 나지막한 시가 올라온다. “맨드라미”의 눈높이에서 시작되는 세계. “나비”와 “꽃”은 공생 관계이지만 ‘어느 꽃’은 다른 차원을 산다. 날개를 팔랑이고, 꿀을 빨아 먹고, 앞발로 번갈아 입을 닦으며 내는 “나비”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상상하지도 못한다. “세상 사람들이 다들 조용한 세상에/ 사는 줄 알았던 초등학교 일 학년” 무렵에서야 “방문 너머에 소리가 있는 세상을/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걸음에도/ 소리가 있다는 것을”(「받아쓰기」) “나”는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다. 움직임이 있으면 “소리”가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발견인가.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개미가 더듬는 소리”까지도 듣고 싶어 “귀의 모양”이 “꽃”의 전부를 이룬 “맨드라미”는 한재희의 시적 자아이다. 그렇다. 그녀는 시를 쓰는 농인이다.
소리로 사는 사람(청인)과 눈으로 사는 사람(농인)의 세계가 있다. 청인은 어둠 속에서도 소리를 내서 사람 간에 소통할 수 있지만, “입술의 움직임을 읽어내야 하는/ 나날”을 사는 농인들은 다르다. 몇 겹의 유리 방음막을 사이에 두고 서로 격리된 상황에서도 수어手語와 비수지非手指기호(표정과 몸짓-필자 注)로 활발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와는 달리, 빛이 사라지면 그들은 각자가 고립무원의 외톨이가 된다. “오백 원짜리 스티커를 많이 갖고 싶었던 밤/ (중략) 엄마, 아빠 보청기 빼면 하나도 안 들려?/ 응/ 진짜 하나도? (중략) 내 책상 서랍에는/ 바스락바스락 아빠의 지갑에서 돈 꺼내는 소리와 함께/ 스티커가 차곡차곡 쌓여간다”(「도둑질」)에서의 “아빠”와 같이 기척이라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완전무결한 침묵에 빠져 있는 것이다. “영화는 꼭 자막이 있어야 하니/ 한국 영화는 못”(「이별을 극복할 때」)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빛이 있다 해도 청인들과 섞여 있을 때 역시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웃을 때”, ‘어느 꽃’은 그들이 왜 웃는지 몰라 “이유 모를 웃음을/ 애써 지어야” 한다. 이 가공의 “웃음”은 농인에게 “조용한 슬픔”이며, “소리치지 못하는 아픔”이고, “외로운 비명”이다. 사회적 제스처이기도 한 그 “웃음”을 수행하지 못할 때 농인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오산천 다리 위에
발송인 없이 수취인만 있던 낙서를 보았다
왜 사냐, 나가 죽어라
손이 떨려 지우지 못한 내 이름
왜 그랬어, 소리만 허공에 머물던 열일곱의 등굣길
정다웠던 오산천 시냇물도 입을 닫고
발끝에 차인 돌멩이들도 눈을 감았다
―「삼만 원」 부분
왕따였던 열여덟
몸도, 마음도 타버릴 것 같던 지푸라기
절벽 끝
발바닥에 죽음을 절반 걸쳐놓고
생명줄 하나만 믿고 서서
살자 체험, 했습니다
―「살자 체험」 부분
점심 굶기 일쑤이던
열아홉 살 왕따의 빈 위장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 부분
흔히 불법적인 물리적 강제력을 폭력이라 일컫지만, 이는 협의의 개념이다. 신체뿐 아니라, “왕따”의 경우 심리적 위해에 의한 고통의 파장 또한 극심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나”가 겪은 왕따의 양상들은 다양할 것이다. 그중 몇 가지가 위에 인용된 시에 나타난다. “열일곱”의 등하굣길에 매일 지나다니는 “오산천 다리”는 “정다웠”고, “발끝에 차인 돌멩이들도” 살가웠다. 그러나 어느 날, “내 이름”을 호명하며 “왜 사냐, 나가 죽어라”라고 폭언한 같은 반 아이들의 “낙서” 사건 직후부터 상황은 달라진다. “손이 떨려 지우지 못”하던 “나”는 아무에게서도 위로받지 못한다. “오산천 시냇물도 입을 닫고” “돌멩이들도 눈을 감”듯 1:다 多의 구조로 “왕따”가 되는 것이다. 불붙으면 후르르 타오를 “지푸라기” 같던 “열여덟”. 이제 “친구라곤” “그림자”(「그림자」)뿐인 “나”는 분노와 저항 대신 자학과 체념에 잠겨 “발바닥에 죽음을 절반 걸쳐놓고” “절벽 끝”에 자신을 세운다. 다행히 “생명줄”을 잡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 “살자 체험”을 했으나 같이 밥 먹으러 갈 친구도, 식당에서 뭇 시선을 견디며 혼자 밥 먹을 용기도 없어 “점심 굵기 일쑤”여서 “열아홉 살”의 대부분을 “빈 위장”으로 지내야 했다. 고등학생 때만의 문제가 아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모니터 뒤에서 고갤 숙인 채/ 꽃과 옷과 못을 받아쓰”기 시키는 교사의 입 모양을 읽을 수 없는 “나”는 메모장을 보려다 걸려 손바닥을 맞는다. “교탁 바로 앞에 앉아 있다는 이유로” “채점된 시험지를 나눠주라고” 하지만 친구들의 이름을 부를 수 없으니 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 그에 대해 해명할 수도 없다 (「이 노란 꽃은 이름이 뭐예요?」). 농인이라는 약한 고리는 자주 세상과 연결되지 못한 채 미끄러지고, 실수와 오해는 누적되었다. 그 결과가 “왕따”였던 셈이다.
잠시 한재희에 대한 소개 글을 살펴보자.
1999년 경기도 오산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폭력의 상처와 후유증을 혼자 글을 쓰며 달랬다. 뷰티 디자인을
전공하고 네일샵 '네일고푸다'를 운영하고 있다.
20대의 요약된 생으로, 출생 정보와 함께 고교 시절의 현황, 현재 직업이 같은 비중으로 소개되고 있다. “왕따”의 후유증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녀는 ‘장애’라는 과거에 자신을 은둔시키지 않고 “혼자 글을 쓰며” 그 상황을 돌파하였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더는 “복지 카드가 없는 동기들[청인 그룹 동기들-필자 注]”을 “부러워하”(「면접 결과」)지 않고, 상처 입은 짐승이 혀로 핥아 상처를 치유하듯 자신의 내면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응시하기 시작한다.
내 터는 무늬가 없다
아무리 애를 써도 무늬가 그려지지 않는다
남들 하는 만큼 열심히 하는 게 힘에 부쳐
노력으로 잡힌 결괏값이 마음에 들지 않아
빈터를 메우려 다른 곳의 허세 같은 걸 떼어다 내게 붙이곤 했다
마구잡이로 붙여놓은 거짓, 무늬 없는 내 터에 질서는 애초에 무의미하다
직선을 그려도 비뚤다
별과 하트 따위의 모양을 그려도 비대칭이다
없는 터에서 발버둥 치며 살아왔던 그동안
채웠던 법칙을 다시 내다 버린다
빈터만 남겨 놓는다
터무니없다는 말은 어쩌면 자유일 수도 있어
아무런 무늬가 없는 것도 무늬가 될 수 있음을
나를 포장한 거짓말들을 탈피한다
―「터무니없는」 전문
이 시는 “터무니없다”와 “내 터는 무늬가 없다”라는 두 문장의 어휘와 의미를 겹쳐놓고 있는데, 이때 생기는 언어유희의 파문을 시적 논리로 활용하는 전략이 엿보인다. ‘터/무니/없다’의 근거 없는 허황함이라는 내포는 ‘터/무늬/없다’라는 결여의 뉘앙스와 맞물리면서 잠시 복잡한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동음이의어가 대체로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파생하면서 시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과는 달리 음성언어의 유사함이 의미까지를 늘 포괄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무니’와 ‘무늬’는 유사 발음이지만, ‘무니’는 독립된 어휘가 아니어서 “터무니없다”의 자장 안에서만 유효하게 기능한다. 두 문장은 “내 터는 무늬가 없다”와 “빈터를 메우려 다른 곳의 허세 같은 걸 떼어다 내게 붙이곤 했다”의 사이, 그리고 “그동안/ 채웠던 법칙을 다시 내다 버린다/ 빈터만 남겨 놓는다”와 “터무니없다는 말은 어쩌면 자유일 수도 있어”의 사이를 왕래한다. 부정적 어휘인 “터무니없다”가 “자유”에 잇닿으려면, 앞의 “허세”를 부정해야만 한다. 곧 “허세”를 “터무니없”어 함으로써 “나를 포장한 거짓말들을 탈피”하는 결과에 이르러야 시적 논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 순간 “내 터는 무늬가 없다”와 “터무니없다”의 의미는 “빈터”로서의 “자유”에 모아질 수 있다.
까마귀가 온갖 새들의 깃털을 주워 자신을 형형색색 꾸미는 이솝 우화가 생각난다. 우화의 구조는 단순하지만, 한 개인의 생과 내면을 경유하며 시적 필터를 거치는 과정을 심도 있게 보여주는 이 시는 한재희가 다른 시에서 보여준 가볍고 경쾌한 터치와 다른 결을 지닌다. 성인식의 시적 통과의례가 아니었을까. “저에게도 피어날/ 씨앗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면접 결과」)라고 고백하며, “책상 밑/ 지구본 하나와 나 하나 들어갈 공간/ 책상 윗벽엔 천왕성, 목성 숱한 야광 별들이 빛난다/ 하늘색 이불을 펼쳐 놓으니/ 아무도 모르는 해저 기지”(「은신처」)가 된 혼자만의 “은신처”에서 빠져나와 비로소 날것 그대로의 세계와 대면하게 된 것이다.
태어나서 숨만 쉰 것 같은데 성인
어른, 어른.
입에서 둥글게 갈라지고 혓바닥은 윗니의 오래된 내부장치를 건드린다
몇 년 동안 함께 했다고 이젠 익숙하면서 여전히 낯선 기찻길
교정 철사가 혓바닥을 날카롭게 자극해 입안에 비릿한 맛이 퍼진다
씁, 씁, 아 그래 어른의 맛이야 비리고 쉰내 나는 맛 아픔은 입안에서 혼자 씁, 씁, 삼켜야 해 동전을 양껏 손에 쥐었던 손바닥 을 핥는 쇠 맛같이 누구에게 공유할 수 없는 맛
헛구역질이 목구멍에서 올라와 위가 요동치며 힘들다고 말하고 싶은데 붉은 물과 섞인 침을 밖으로 퉤 뱉는다
굶주려 있는 개미조차 주워가지 않는 침은 흙길 위에서 말라가겠지
나를 위한 쓰레기통은 길 위에 어디도 마련되어있지 않고
뭘 겨우 이런 걸 가지고 힘들어? 불금에 다 같이 모여 아직 낫지 않은 혓바닥을 알코올로 푹, 푹 적셔 소독하면 월요일에는
괜찮겠지 하는 어른
고민은 씁, 씁, 감추거나 퉤, 퉤, 뱉어버리면서 입술로는 행복 하라고 한다, 우리 그래서 언제?
―「어른의 맛」 전문
시적 과장이겠지만, “태어나서 숨만 쉰 것 같은데 성인”이 될 수는 없다. 성인식을 치렀다고 절로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성인”이나 “어른”은 ‘다 자란 사람’이나 ‘만 19세 이상’을 가리키는 명사이지만, 시에서 드러난 바에 의하면 “어른”이 된 지 “몇 년”이 지났어도 그것은 “익숙하면서 여전히 낯선 기찻길”처럼 시적 화자와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입속의 “교정 철사” 같은 이물감, “비릿한” 피 맛, “동전을” 쥐었던 “손바닥을 핥는 쇠 맛”, 피와 “섞인 침”으로 표현된 “어른의 맛” 등은 비호감 일색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른”이 말하는 방식은 “헛구역질이 목구멍에서 올라와 위가 요동치며 힘들다고 말하고 싶은” 화자에게 인정과 배려가 아니라 “뭘 겨우 이런 걸 가지고 힘들어?”라는 질타이거나, “불금에 다 같이 모여 아직 낫지 않은 혓바닥을 알코올로 푹, 푹 적셔 소독하면 월요일에는 괜찮겠지”와 같이 맹목에 불과하다. “고민은 씁, 씁, 감추거나 퉤, 퉤, 뱉어버리면서 입술로는 행복 하라고” 말하는 “어른”을 신뢰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 그래서 언제?” 어른다운 어른이 될 수 있기는 한 건가.
받은 상처들에 급급해 티 내기 바빴던 날
바쁜 안주를 불러 앉히고 나는 토로했네
말로 덜어질 무게가 맞을까 머리로 의심하는 중
되새김, 또 되새김질 같은 고백
그래 잊을 수 없겠구나
지우지 못하리란 것을 깨달았을 때
보이지 않던 무표정의 안주가 눈에 환했다
내가 말이 많았네, 목으로 넘어가는 술이 멋적게 쓰다
귓등으로 내려앉을 안주의 이야기를 묻는다
그래서 요즘 하는 일은 잘 되고? 별일 없지?
내 머릿속은 아직 내 상처에 진단을 내리는 중
사실 안주의 이야기는 궁금하지 않아
경청은 상대에게 바라는 역할 놀이
어쩌면 우리는 똑같다
서로의 이야기에 배부르지 않은 배우
―「배우」 전문
하지만 세계에 만연한 “어른의 맛”은 기성세대를 거부하는 “우리”에게도 어느새 배어 있다. 친구 혹은 동료를 “안주” 정도로 치부하는 인식이 그것이다. “안주”라면 술에 곁들여 먹는 음식들을 통칭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술이고 상대는 “안주”라고 간주했을 때, 동등하거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될 여지는 거의 없다. “바쁜 안주를 불러 앉히고” “말로 덜어질 무게가 맞을까” 스스로 “의심하”면서도 “되새김질 같은 고백”을 하는 이유는 “받은 상처들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문 속에 답이 있다는 세간의 진실처럼, 그 와중에 “나”는 “그래 잊을 수 없겠구나/ 지우지 못하리란 것을” 깨닫는다. 이별에 대한 “토로”였던 듯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너무 몰두했던 탓에 몰랐던 상대의 “보이지 않던 무표정”이 “눈에 환”하게 들어온다. “나”를 “안주” 정도로 여기는 상대 역시 “나”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말이 많았네, 목으로 넘어가는 술이 멋쩍게 쓰”게 느끼면서 시쳇말로 ‘현타’가 온 “나”도 상대에게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묻는다”. “그래서 요즘 하는 일은 잘 되고? 별일 없지?”.
우정이나 동료애 대신 서로를 “안주”거리로 여기거나 “역할 놀이” 정도로 인식하는 사회적 관계의 상투성을 이 시는 예리하고 비판적으로 짚어냈다. “배우”로 살아가는 현대인이 눈을 돌릴 곳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내 이름으로 된 재산은 없다/ 그러나 나는 가난하지 않다/ 등에는 꿈이 항상 무겁게 짊어져/ 키가 자라지 못했을 뿐”(「가난한 난쟁이」)이라는 현실 인식은 자기비하나 자기애가 아니라 오히려 “꿈”에 방점을 찍는다. 자기 자신에게서만은 “배우”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자유”(「터무니없는」)를 찾고자 하는 행보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인생은 희극이란 말은 지루하다
삶은 가장 예쁜 작품을 완성해내기 위해
날카로운 커터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예술
이따금 종이를 끊어먹고 지문을 가로지르는 상처에도 멈출 수 없는 줄타기
떨어져 매트에 지워지지 않는 칼집이 생겨도 매일 움직여야 하는 행위
무딘 날은 스스로 고통을 참아내며 한 칸씩 부러진다
다시 예리하고 위태로운 춤을 추면서 깎여가는 젊음
비로소 완성되는 작품
부러지고 테이프에 꽁꽁 싸인 채 버려지는 몸이라도
젊음이 남겨온 모든 일이 헛되지 않은 줄타기
―「페이퍼 커팅 아트」 전문
예술작품은 예술가가 이룬 성취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젊음과 삶 그 자체라고 이 시는 강변하는 듯하다. “삶”과 “예술”이 “위태로운” 건 마찬가지 상황이어서, “날카로운 커터”에 의해 “종이를 끊어먹고 지문을 가로지르는 상처”를 입거나 “칼집이 생”기는 일은 다반사다. 특이한 점은 “무딘 날은 스스로 고통을 참아내며 한 칸씩 부러”지고 “테이프에 꽁꽁 싸인 채 버려지는 몸”을 예술가 자신으로 치환한다는 사실이다. “삶은 가장 예쁜 작품을 완성해내기 위해/ 날카로운 커터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예술”이란 문장에서 목적어와 보어 등을 생략하면 ‘삶은 예술’로 압축된다. 이 연장선에서 “다소 예리하고 위태로운 춤을 추면서 깎여” “비로소 완성되는 작품”을 “젊음”이라고 했을 때, 곧 예술작품은 “삶”과 “젊음”, “페이퍼 커팅 아트”를 가리킨다. 예술작품과 자신의 젊음과 삶을 동시에 창조할 때 비로소 예술가는 완성되는 것이다.
새벽 네 시
내가 좋아하는 시간이다
온 세상이 잠들어 너만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중략)
지금은 너의 시간이다
내 숨결이 너에게 닿을 것 같은 차분함이
은밀하게 연결된 끈처럼
언젠가 종이 벌레가 달콤한 사랑을 훔쳐 먹으러
아무도 몰래 기어 다니고 있을지도
그땐 그랬지, 하고 꺼내 보는 미래에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너였으면 좋겠다고 쓴다
마음을 새기려고 너의 시간까지 기다린다
―「연애편지」 부분
“연애”는 또 하나의 예술작품이며, 공들여 깎아내는 “젊음”이고, 현재를 미래로 잇는 “삶”이다. 모든 “연애”는 개인사적이라기보다 인류사적이고, 개별적이라기보다는 총체적 사건이며, 정체되지 않고 살아 있는 운동체이다. “연애”에 의해 인간의 서사는 이끼 끼지 않고 정서는 녹슬지 않으며, “연애”로 인해 인간은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성숙해간다. 아, 연애편지! 시간을 매개로 한 이 유대에 의해 “나”의 것인 “새벽 네 시”는 “너의 시간”으로 “은밀하게 연결”되며, “내 숨결이 너에게 닿을 것 같은” 공간적 유대로까지 이어진다. “연애”는 만인 공통의 언어이지만,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모두 다른 표정을 가진다는 점에서 다시 개인사적이고, 개별적이고, 특수한, 파란만장이다. “그땐 그랬지, 하고 꺼내 보는 미래에/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너였으면 좋겠다”는 지순한 열망이 그 동력이다.
왜 항상 예고도 없이 쏟아지나요?
(중략)
이미 물웅덩이 한가운데 떠 있는 소금쟁이는
난생처음 웅덩이 속이 궁금합니다
더 깊이, 풍덩 빠지고 싶어서
―「소나기」 부분
금요일 오후 여덟 시 삼십 분
성남에서 오산까지
오십 킬로미터나 자전거로 배달된 음식들
마카롱 롤케이크 생강청 팥빵 더치커피
―「금요일 오후 여덟 시 삼십 분」 부분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이별에는 원래 약도 없다 스스로 주고받는 동정의 말
시간이 약이라는 뻔한 위로가 죽처럼 뭉개진다
―「감기」 부분
익숙하게 함께 걸었던 산책로
곳곳에 있는 돌멩이
아니다, 네가 숨어 있다
―「통각」 부분
그리하여 온갖 사물에 “연애”가 투사되는 나날들이 펼쳐진다. “예고도 없이 쏟아”지는 게 사랑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시작될지 알 수 없는 사건이다. 그 속성은 능동적이다. “소금쟁이”는 “물웅덩이 한가운데 떠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웅덩이 속이 궁금”하여 “더 깊이, 풍덩 빠지고 싶어”하고, “자전거”는 달달한 “음식들”을 싣고 “금요일 오후”에 “오십 킬로미터“를 오 킬로미터 인양 달려온다. 한편, 만남뿐 아니라 “이별”도 “연애”의 일부라서 혼자 견뎌내야 하는 나날들이 펼쳐지기도 한다. 앓아누울 수밖에 도리가 없으며, 무엇보다 “약도 없는” 걸 알면서도 “시간이 약이라는 뻔한 위로가 죽처럼 뭉개”지는 열병 속에 대책 없이 놓이게 된다. “함께 걸었던 산책로”에 ‘너’는 “돌멩이”처럼 “숨어 있”을 뿐 지금 여기에 부재한다. ‘내가 이별을 했는데’ 그래도 “오늘의 세상은 돌아”가고 “정동진에서 일출 보려고 사람들이 얼굴 발갛게 물들이고 한 곳만 쳐다”볼 때 “나”는 “태양은 참 쉽게도 도”는 게 이상하고, 어떻게 “지구는 자전 시스템이 한 번도 고장 난 적이 없는 걸까” 의아스럽기만 하다. “지금 태양은 걷잡을 수 없습니다”(「자전」)라고 했을 때, 더 ‘걷잡을 수 없’는 건 아마도 자신 내부의 격정적 소용돌이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태양이 “자전”하듯 “연애”도 “자전”한다. 저물었다가 새로 떠오르면서 그 갈피에 무수한 추억과 사유, 고통을 이겨내는 힘과 지혜를 내장한다. 생의 리듬에서 예술이 탄생하듯 인간은 순화되고 세계는 다채롭고 풍요해진다.
나는 솜인형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나를 만든 손과 이별해
따뜻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네모난 곳에 먼지만 수북하게 쌓여가던 날
우연하게 나를 안아준 온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이름을 부르는 너의 모습
단잠을 자는 너의 모습
비뚤어진 한글을 쓰는 너의 모습
조금이라도 두 눈에 너를 품다 가려고
까만 눈은 너를 담아내기 바쁘다
오늘 너는 울상을 지으며 나를 안는다
내 속에 가득 찬 솜은
너의 외로움과 눈물을 다 받아낼 마음이었나
괜찮아, 괜찮아
네가 슬퍼서 참 다행이다
내가 아직 너에게 필요해서
―「애착 인형」 전문
시를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방식과 함께 사물에 자신을 투사하는 장치는 한재희 시의 중요한 개성이다. 전자에 「피아노」, 「버들치 계곡」, 「창작의 고통」, 「경기도 오산시」, 「라벤더」, 「매년 시월에」, 「놀이터 풍경」 등이 있다면, 후자에는 이 글에 인용된 시들을 포함하여 「달고나」, 「모기 1」, 「모기 2」, 「어항」 등이 있다. 역시 후자에 속하는 「애착 인형」의 시적 화자는 “솜인형”이다. 부모가 아니라 “만든 손”이 있을 뿐이어서 “솜인형”은 “세상에 태어나”서 “따뜻함을 느껴본 적이 없”는 존재이다. 어린 “너”가 “나를 안아준” 첫 만남 이후 “나”는 “너”와 “사랑”에 빠진다. “내 이름”을 불러 주고, “단잠을 자”며, “비뚤어진 한글을 쓰”는 “너의 모습”은 “나”의 “까만 눈”을 통해 각인된다. 너는 밖에서의 환희와 고독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무럭무럭 자라 좋은 ‘어른’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 너는 울상을 지으며 나를 안는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내 속에 가득 찬 솜은/ 너의 외로움과 눈물을 다 받아낼”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그림자’도 아니고 ‘배우’도 아닌 너의 분신이다. 사랑하는 “너”여, 그러니 “괜찮아, 괜찮아”.
이 시에서 마음을 오래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문장이 있다. 시집의 표제로 쓰인 “네가 슬퍼서 참 다행이다”가 그것이다. 뒤따라 나오는 “내가 아직 너에게 필요해서”란 어구에 의하면, “솜인형”은 마치 슬픔이 “너”를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야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므로. 사랑하는데, 설마 그럴 리야! “솜인형”은 “나”이면서 동시에 “너”이다. “너”는 다시 세계에서 “너”와 연결된 그 누구에게 “솜인형”이다. 인생은 유한하고, 모든 이는 슬픔을 생의 지분처럼 나눠 갖고 살아간다.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 “네가 슬퍼서 참 다행이다/ 내가 아직 너에게 필요해서”. 이는 한재희 시인이 세상의 뭇 슬픔들과 손잡는 방식이다.
이 시집은 여전히 농인의 삶을 사는 한 건강한 젊음이 과거에 귀속되지 않고 세상과 의연하게 마주하며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기 위한 다짐으로 여기 놓였다. 낮은 곳에서 나지막한 시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겸손하고 다정하다. 그리고 시의 안과 밖에서 생은 경이롭다.
―『네가 슬퍼서 참 다행이다』 시집 해설, 출판사 핌,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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