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성시대/이대전
뒷골목의 건달도 화려했던 지난날을 생각하고, 몰락한 양반도 찬란했던 과거를 추억한다는데 나에게도 한때 날렸던 전성시대가 있었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얘기지만, 초등학교 때 나의 꿈은 판검사였다. 가난하고 못 배운 시골 사람들은 가장 출세하는 길은 그것밖에 없다고 굳게 믿던 시절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부모님과 형님의 뜻대로 법대에 들어가 판검사가 되겠다고 앵무새처럼 말하고 다녔다. 그런 탓인지 나도 판검사가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웅변은 고등학교 때 꽃을 피웠다. 각종 대회에 출전 유명세를 날리기 시작했다. 해마다 여러 종류의 대회가 있었지만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역시 반공 웅변이었다. 주로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타도하자는 내용이 많았다. 최우수로 뽑혔던 웅변은 요리사가 되어 김일성, 김정일을 곰탕 만들어 헐벗고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아주 엽기적인 내용이었다. 돌이켜보니 6월이 가장 바빴던 것 같다. 웅변대회. 수상도 수상이었지만 당시 6·25가 되면 북괴 규탄 궐기대회가 군청과 한국반공연맹 주관으로 광장에서 열리곤 했다.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결의문 낭독 같은 것이 있었는데, 내가 남자 대표로 차출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멋있는 나였다. 나는 신이 나서 목청껏 외쳤다.
“6.25 발발 33주년을 맞아 우리는 그때의 그 처절했던 역사의 비극을 잊을 수 없어 오늘 이 자리에 모였다. 하나, 북한 괴뢰 도당들은 주민의 배고픔은 무시한 채 전쟁 준비에만 광분하고 있는 것을 온 민족의 이름으로 규탄한다!”
"규탄한다! 규탄한다!"
남북분단 이래 연이어 발생한 사건들은 국민들을 경악케 했다. 1983년 10월 버마 아웅산 폭파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17명이나 사망하고 14명이 다쳤다. 전국적으로 국민들이 분개하여 규탄 대회가 이어졌다. 사람들이 가장 많은 장날, 군청 앞 극장 네거리에 연단을 설치하고 볏짚으로 혹 달린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인형을 만들었다. 검은색과 국방색 인민복을 입은 두 수괴는 커다란 나무기둥에 흰 포승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각 학교의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비롯하여 공무원과 장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고등학생 남녀 대표가 규탄 결의문을 외쳤다. 남자 대표로는 내가 뽑혔다. 멸공이란 머리띠를 동여매고 열렬한 반공 투사가 되어 철천지 원수를 규탄하듯 열변을 토해냈다. 곧바로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인형에 석유가 뿌려지고 화형식이 열렸다. 반공에 앞장섰던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그 자리에서 공로패도 받았다.
작은 체구였지만 큰 목소리 덕에 학도 호국단 대대장을 맡았다. 버스를 타고 등하교했던 나는 남들이 가장 싫어하는 교련 과목이 든 요일이 제일 좋았다. 완장처럼 붙은 이름표 옆에 달린 빨간 대대장 마크 때문이었다. 아침에 교련복 다림질은 필수였다. 드라이기가 없던 탓에 핑클 파마 한 머리를 전기다리미로 눌러 세워서 한껏 멋을 냈다. 수업도 빼먹고 각종 웅변대회에 학교 대표나 군 대표로 출전하였다. 학도 호국단 간부 교육으로 화랑 교육원과 육군 3 사관학교 입교를 비롯하여 땅굴 시찰도 좇아 다녔다. 교내 행사에서 신입생 환영사, 송사, 답사는 항상 내 몫이었다.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지만 우리 학교는 물론 이웃 여고 학생들까지도 내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남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든 탓에 성적이 떨어진 것은 당연했다.
그즈음 어떤 행사에서 지역 국회의원의 연설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정치인의 텔레비전 출연이나 방송 토론도 없던 시절, 그분의 연설을 직접 듣기는 처음이었다. 기대를 하고 봤는데 떠듬떠듬, 너무 실망이었다. 정미소를 운영하여 돈을 많이 벌어서 당선된 분이었다. 국회에서도 아는 것이 없어 입을 다물고 있다가 그가 한 유일한 발언이 “위원장, 식사하고 합시다.” 였다는 우스갯소리가 지역에 떠돌 정도였다. 국회의원, 아무것도 아닌 듯했다. 내가 국회의원이 된다면 쩌렁쩌렁 국회를 울리며 동료 의원은 물론 국민들의 마음까지도 사로잡을 자신이 생겼다. 그때부터 내 꿈이 판검사에서 국회의원으로 바뀌었다. 사실은 그것보다 성적이 내려 사법고시에 합격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정미소에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정신을 차려보니, 웅변에 미쳐 판 검사와 국회의원을 꿈꿨던 정치 지망생은 초라한 모습으로 저만치 밀려나 있었다. 그래도 꿈을 버리지 못해 국회의원이 도의원으로, 도의원이 군의원으로 풍선 바람 빠지듯 쪼그라들면서 그것조차 포기해 갈 때쯤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지방 선거에 군수로 나온 후보 부부가 우리 공장에 인사차 들렀다. 대화를 해보니 신선하고 코드가 딱 맞았다. 즉석에서 연설 참모가 되어 주기로 했다. 일을 마치고 밤마다 선거 사무실로 출근했다. 원고도 써주고 연설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내가 꿈꾸던 일이고 너무나도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일요일 아침, 방송 유세차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칠곡 군민 여러분…….” 으로 시작한 연설은 군 전역을 돌며 밤늦도록 이어졌다. 나의 연설은 성능 좋은 스피커 덕에 쾅쾅 울리며 물 만난 고기가 되었다. 유권자들을 지지로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30년 묵은 한을 풀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얼마 만에 잡아보는 마이크며 연설이던가. 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마치 내가 군수가 된 것 같았다. 애석하게도 그분은 낙선해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나는 그분 덕에 잠시나마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이제는 어떤 미련도 남아있지 않다. 정치가 어디 입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던가. 내 능력과 분수를 알기에 헛된 꿈은 접고 현업에 충실하려고 한다. 배달 독촉 전화를 받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쌀가마 가득 실린 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지난날 화려했던 나의 전성시대, 그 추억에 잠시 젖어있다 보니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그래, 내 물건에 목매는 거래처가 있고, 아빠를 응원해 주는 이쁜 딸들이 있고,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지금이 진정한 나의 전성시대가 아니겠는가? 힐끔 돌아보니 저만치서 내 아닌 내가 웃고 있다. 나도 웃어 본다.(2042.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