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 세례와 성결교회
작성일: 2001/11/29 22:39:10
글쓴이: 조기연
들어가는 말
기독교 대한성결교회는 1996년에 개정한 헌법에서 유아세례를 인정하였다. 물론 이는 미주성결교회와의 통합에서 파생된 결정이었으며, 신학적 논의에 의한 산물이 아니었다. 그후 {활천}에서 한번 이 문제를 다루었고, 성결교 역사 연구소에서 좀더 심도 있게 다룬 적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본 논문은 그 동안의 논의를 바탕으로 하여 예배학적 관점에서 그리고 에큐메니칼적 입장에서 유아세례를 조명하여 보고자 한다.
1. 논의의 현황
유아세례의 문제는 금세기 중반에 뜨겁게 논의된 바 있다. 칼 바르트에 의해 촉발된 이 논쟁은 그후 쿠르트 알란트, 요아킴 예레미야스, 그리고 오스카 쿨만 등에 의해 반응이 쏟아지면서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물론 이 논쟁은 일차적으로 신약학자들의 몫이지만 실천신학자나 예배학자들에게도 지대한 관심거리인 것이 사실이다. 이 논쟁을 통해서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입장이 정리된다: 첫째, 칼 바르트의 입장으로서, 신약의 교회가 유아에게 세례를 준 기록이 없으므로 현대교회도 유아에게 세례를 주면 안 된다는 입장이다.
둘째, 요아킴 예레미아스의 입장으로서, 신약의 교회가 유아에게 세례를 주었으므로 현대교회도 유아세례를 시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들 유아 세례론자들은 그 근거로서 행11:14; 16:15; 18:8; 고전 1:16 등을 든다. 이들 구절들은 신약시대 당시에 온 집안이 세례를 받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온 집안은 그 집의 여자와 어린이, 유아는 물론이고 심지어 그 집의 노예와 나그네까지도 포함된다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추론이 개연성은 있지만 확실한 증거가 되지는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쿠르트 알란트의 견해는 이들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신약의 교회가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요아킴 예레미야스의 견해를 반대하면서, 유아세례에 관해 성서적으로 어떠한 명령이나 전례도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바르트의 견해에도 반대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비록 성서적으로는 유아세례에 관한 뚜렷한 증거가 없지만, 그래도 넓은 범주의 성서적 교리적 토대 위에서 현대교회는 유아세례를 시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아세례를 지지하는 진영에서는 유아세례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을 성서에서 찾지 못하므로 다른 여러 가지 전거를 제시하려는 시도를 한다. 예컨대 예수께서 어린이를 환영하고 축복하신 기록(마가 9:33-37; 마가 10:13-16)이라든가, 또는 유아세례를 구약의 할례의 연장선상에서 보려고 하는 시도 등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들은 하나같이 간접적인 추론일 뿐이며, 직접적인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유아세례의 근거를 신약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무리이며, 유아세례에 관한 현대교회의 고민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2. 역사적 조망
유아세례에 관한 신약의 기록이 뚜렷하지 않으므로, 역사적으로 교회가 유아세례에 관해 어떠한 입장을 지켜왔는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2세기의 자료들은 유아세례에 관해 별로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초대 변증가인 아리스티데스(Aristides)가 140년경에 쓴 글에 의하면, 회심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지나간 과거의 죄에 대해 용서함을 받는다고 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하나님을 찬송하며, 만일 아이가 어려서 죽는다면 더욱더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그 이유는 그 어린아이가 죄 없이 이 세상을 지나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진술을 근거로 판단해 본다면, 당시의 세례 대상자는 성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원죄 사상이 아직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러므로 유아는 세례 받을 이유가 없었다.
이보다 약 20여년 후에 기록된 {첫 번째 변증문} (I Apology)에서 순교자 져스틴은 세례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가 가르친 것을 확신하고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그 내용을 고백하며 그대로 살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는다." 이 말 대로라면 당시의 교회는 세례 후보자들에게 사전에 무엇인가를 가르쳤으며, 후보자들은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였고, 그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일종의 결의 같은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에 적합한 세례의 대상자는 분명 성인이었을 것이다. 또한 안디옥의 데오빌로(Theophilus of Antioch)는 세례를 칭하기를, 그것은 물을 통하여 회개와 사죄함을 얻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데오빌로의 이 말은 분명 성인을 마음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3세기는 유아세례에 관한 비교적 많은 자료를 남기고 있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은 카르타고의 터툴리안(Tertullian)과 히폴리투스(Hippolytus)가 남긴 작품들이다. 터툴리안은 유아세례를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물론 주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당신께 나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가르쳐질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 적어도 학생신분으로서 그리고 가능하다면 청년시기에 주님께로 나와야 한다고 하였다. "왜 순진무구한 나이에 죄의 용서함을 받아야 하는가?" 하고 질문하면서 세례를 늦추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였다. 미루어보건대 터툴리안은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 개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아는 아직 용서받을 만한 죄가 없으므로 세례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터툴리안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오염이나 감염에 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세례와 관련하여 원죄의 교리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편, 터툴리안이 유아세례를 반대하였다는 이야기는 역으로 당시에 유아세례가 실시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된다. 3세기의 다른 문서인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이 이를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다. 이 문헌에 의하면, 기독교 입교를 원하는 후보자들은 명백히 성인이었다. 당시의 세례후보자들은 일정 기간의 교육을 받아야만 했는데, 그 과정에 들어가기 이전에 먼저 개종하려는 이유에 관해 심사를 받아야만 했다. 그 다음에 준비과정에 들어가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이 준비과정은 3년이었으며, 개인의 믿음이나 도덕적 진보에 따라서 단축될 수 있었다. 이 과정이 마쳐진 후에 그들은 세례를 받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러한 과정과 절차를 충족시킬만한 대상은 당연히 성인이 된다. 그러나 모든 준비과정이 끝나고 정작 세례를 주는 장면에 이르면, {사도전승}은 "어린이들을 먼저 세례 주라.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대답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게 하고, 그렇지 못하면 부모나 혹은 가족 중에서 다른 사람이 대신 대답하게 하라"고 함으로써 스스로 대답할 수 없는 어린이도 세례를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터툴리안과 히폴리투스의 글들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3세기에는 세례를 위한 교육과 훈련을 위주로 하는 준비기간이 매우 발달하였으며, 따라서 세례의 대상자는 당연히 성인이었다. 그러나 어린이나 유아도 세례에서 배제되지는 않았으며 장년세례와 함께 유아세례도 병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거의 동시대인 교부 오리겐의 증언도 매우 중요하다. 주후 231년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에서 씌여진 오리겐의 논문은 유아세례에 관한 그의 견해를 보여준다. 그는 세례의 주요 의미는 죄의 용서라고 인식하였다. 그렇다면 유아 세례에 관해 문제가 제기된다. 왜 유아들이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그들은 언제 죄를 범하였는가?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 신학적으로 사색한 결과 그는 70인역의 욥기 14:4절, "정결하지 못함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라는 말씀에서 해답을 찾았고, 이 말씀이야말로 어린이들이 세례 받아야 되는 이유라고 결론을 내렸다. 오리겐보다 약 수 십 년 후인 253년경 교부 씨프리안은 유아에게 세례가 금해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그는 세례가 할례와 유사하므로 유아가 생후 8일만에 세례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하고 생후 2-3일만에 받을 것을 주장했다.
어쨋튼 4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예루살렘을 위시한 동방에서 여전히 성인세례가 표준적으로 시행되고 있었으며, 유아세례는 부차적인 세례의 형태이었다. 그러다가 4세기말에서 5, 6세기에 유아세례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부분적인 이유로서는 무엇보다도 어거스틴의 원죄이론을 들 수 있다. 그는 세례가 원죄의 사함을 가져다준다고 주장하였고, 그 결과 유아세례에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당시 기독교회를 괴롭혔던 이교도의 침입이 또한 유아세례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기독교권은 이교도의 침략 앞에서 공동체 집단의 연대성을 증진시켜야만 했고, 이 일에 유아세례가 적격이었을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대체로 유아세례를 지지하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세례의 초점은 믿고 세례 받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 약속은 모든 외적인 모양 즉 인간의 공로나, 서약이나, 명령이나 질서,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들보다 우선한다. 그러므로 온전한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하며, 인간은 그 안에서 신앙을 지켜야 하고, 세례 받았으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주저함 없이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물론 루터는 수세자의 신앙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수세자의 신앙이 없이 단순히 예식만으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앙을 중시하는 루터의 이러한 입장이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유아세례를 긍정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 유아가 대리적인 신앙 즉 그들을 세례에로 이끄는 사람들의 신앙에 의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나는 모든 사람과 함께 동의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언급될 때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심지어는 유아 못지 않게 비 응답적인, 그래서 유아보다도 더 세례 받기에 불가능하게 보이는 불신자들의 마음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다. 더욱이 교회가 믿음으로 유아를 하나님께 드릴 때 교회의 그 기도의 응답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며, 그 주입된 믿음에 의해서 유아는 변화되고 깨끗케 되며 새롭게 된다."
또한 루터는 {대 요리문답}에서 유아세례를 방어하였다: "수세자가 신앙을 가졌는가 아닌가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세례를 잘못되게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나의 믿음이 세례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신앙은 단지 세례를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과 희망으로 아이를 세례에로 데려오며, 아이에게 믿음을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견해 위에서 세례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에 세례를 준다." 물론 루터의 견해가 일관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으며, 또한 일면 상충되는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루터가 유아세례를 지지한 것은 분명하다.
칼빈은 1542년에 {기도의 형식}(The Form of Prayers and Ecclesiastical Chants with the Manner of Administering the Sacraments and Solemnizing Marriage According to the Custom of the Ancient Church)을 출판하였다. 물론 이 예식은 스트라스버그의 부처(Bucer)에게서 온 것도 아니고 다른 개혁교회(Reformed) 의식으로부터 온 것도 아닌, 칼빈 자신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의식은 영국 국교회나 루터교회의 의식과도 다른 것이었다. 이 의식에 나타난 칼빈의 입장은 역시 유아세례를 지지하는 것이었다. 예식문은 이렇게 말한다: "세례 받을 어린이는 주일날 교리문답시간이나 또는 다른 날 설교 시간에 데려와야 한다. 그래서 세례가 회중이 모인 가운데서 거행됨으로써 어린이를 교회로 받아들이는 장엄한 의식이 되어야 한다... 세례에 의해 우리를 주님의 교회로 편입시킬 때 이 모든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천국이 어린이들에게 속했다고 주님께서 선포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의 손을 그들 위에 얹고 당신의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떠한 이유로도 어린이들을 당신의 교회로부터 몰아내서는 안 된다고 충분하게 가르치신다. 그리고 이 원리를 따라서 우리는 이 유아들이 주님께서 당신의 신실한 자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혜택들의 수혜자가 되도록 그들을 교회로 받아들일 것이다." 칼빈의 예식문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그러나, 비록 신자의 유아 자녀가 아담의 타락한 자손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주님은 당신의 언약을 위하여 그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지 않으시며, 그를 당신의 자녀로 헤아리신다. 이 이유 때문에 주님은 태초부터 당신의 교회 안에서 유아들이 할례의 표를 받게 하셨으며, 이러한 제도로서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세례에 의해 표징되는 것을 그 때에 표현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할례 받아야 한다고 명령하신 것처럼, 그렇게 그들을 당신의 자녀들로 소유하신다. 그리고 당신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아버지가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재 세례파를 제외하고 종교개혁자 중에서 유아세례를 반대한 사람으로는 쯔빙글리를 꼽을 수 있다. 쯔빙글리는 세례를 하나의 공적인 서약으로 본다. 세례는 일종의 공식적인 배지나 표징과 같은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그것을 받는 사람을 위하여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의 보증이 된다. 그에 의하면 세례의 목적은 성령의 세례에 의하여 내적으로 작용하게 된 신앙을 수세자 개인에게가 아니라 교회 전체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신앙은 성령의 선물이며 물세례와는 아무런 내적 연관성이 없다. 그러므로 세례는 유아에게 신앙을 확인시켜 주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유아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신학적 고찰
유아세례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세례의 의미와 신학을 파악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제이다. 과연 세례는 무엇이며, 여기에 대한 성서의 증언은 무엇인가? 비록 세례의 의식에 관한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 신약성서는 세례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기독교 세례의 직접적인 기원은 세례요한의 세례가 아니라 예수의 메시야적 사역과 명령이다. 그 이유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세례가 요한의 세례와 다른 점은 요한의 세례가 단순히 회개와 종말론적 준비를 위한 세례이었지만, 예수의 세례는 성령의 임재가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예수께서 받으신 세례를 그리스도인들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공적인 사역에 대한 시취의 의미로 세례를 받았으며, 그러므로 예수가 받으신 세례는 그가 메시야임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와 달리 기독교인들이 받는 세례는 예수의 독특한 세례로 말미암아 시작된 구원의 충만함으로 들어가는 방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례의 내용은 요한의 세례보다 훨씬 더 풍부하다. 신약의 기록들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바울에 의하면 세례는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롬 6:3; 갈 3:27)이면서 동시에 성령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고전 12:13). 그리스도의 삶이란 세례를 통하여 들어가게 된 성령 안에서의 삶이며,(고후 1:22 참조) 이러한 세례는 수세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편입시킨다. 세례는 성령의 선물이며 새로운 언약에의 참여를 의미한다(고후3:6).
에베소서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구속의 날을 위해 약속된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들로 묘사된다(1:13; 4:30). 물론 이 인침은 세례를 통하여 입교할 때에 즉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 들어올 때 발생한다. 에베소서 5:25-27절,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the washing of water with the word) 거룩하게 하시고"라는 말에서 보듯이, 세례는 깨끗케 하고 거룩하게 하는 행위인데, 이 말은 디도서 3:5절 이하에서 중생과 갱신으로서의 입교를 설명하기 위해 또 다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그는 우리를 "중생의 씻음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주신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하셨다.
베드로전서는 그 내용상 세례전후에 행해진 설교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기에 기록된 내용이 그리스도인 삶의 풍성함에 대한 설명이라는 데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이 글에 의하면 수세자는 "새로 태어난"(1:3, 23) "갓난 아이"(2:2)로 여겨진다. 베드로전서에서 직접적으로 세례를 언급하는 곳은 3장 21절인데, 여기에서 세례의 물은 홍수의 물과 유비관계에 있다. 다시 말하여 "홍수에 비견되는 세례는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요, 육체의 더러움을 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선한 양심을 위해 하나님을 향한 호소이다."
사도행전 역시 세례에 관한 많은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당시 교회의 세례에 관해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은 2:38절에 나오는 사도 베드로의 명령이다: "회개하라, 그리고 너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의 세례를 받으라, 그러면 너희가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이 말을 토대로 하여 당시의 세례에는 세 가지의 요소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회개요, 둘째는 물세례이며, 셋째는 성령을 받는 것이었다.
사도 행전은 물세례를 언제나 성령과의 관계 안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19:5이하에 나오는 에베소 사람의 경우에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안수를 받을 때에 성령을 받았다. 여기에 나오는 도식은 물세례 ->성령받음의 순서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 순서가 뒤바뀐 경우도 있었다. 고넬료의 경우는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벌써 성령을 받았고 그리고 나서 물세례를 받았다. 이 경우에는 성령받음 -> 물세례의 순서가 된다.
이러한 경우들을 종합해 볼 때에,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물세례는 성령의 선물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결정적 표시는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의 경우는(8:4절 이하) 사도들이 손을 얹고 안수하여 성령을 받을 때까지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빌립의 설교를 들은 후에 그들이 보인 반응은 그들이 마술사 시므온에게 보였던 반응과 같은 것이었다. 마술사 시몬 역시 빌립의 전도를 받고 믿었으며, 세례를 받았고,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녔다. 그 역시 사마리아의 다른 사람들처럼 믿고, 세례를 받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물세례를 통하여 신앙의 외적인 형식은 갖추었지만 영적인 실재를 경험하지는 못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베소에 있는 12명의 제자들도 그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제자가 되었다(19:1-7).
이상에서 보듯이, 세례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가장 기본적으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에로 들어가는 표징이다. 일반적으로 세례의 의미는 다음의 다섯 가지 범주로 요약된다: 첫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롬 6:3-11; 골 2:13; 3:1; 엡 2:5-6). 둘째, 회심과 용서함 받음과 깨끗케 됨(막 1:4; 히10:22; 벧전 3:21; 행 22:16; 고전 6:11). 셋째, 성령의 선물(행 고후 1:21-22; 엡 1:13-14). 넷째, 그리스도의 몸에 편입됨(엡 4:4-6). 다섯째, 하나님 나라의 표징: 세례는 세상의 삶의 한복판에서 주어진 새로운 생명의 실재를 시작하게 하는 사건이다. 세례는 수세자를 성령의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다가올 세상의 표징이다.
니싸의 그레고리는 "그리스도의 세례에 관한 설교"(Homily on the Baptism of Christ)에서 말하기를, 수세자를 받아들이는 물은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들인 땅과 같이 일종의 무덤이며, 또한 그리스도와 새로이 세례 받는 사람이 새로 태어나는 모태의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초대교회의 세례의식에 의하면 수세자는 알몸으로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침례를 받는데, 이는 어머니의 모태에서 새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상징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이제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는 새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하고 풍부한 세례의 의미는 유아세례 논의에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유아세례 반대론자들의 주장의 핵심은 유아가 복음을 듣지도 못하며, 회개하지도 못하고, 예수를 믿기로 결단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세례가 단지 회개와 죄사함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이 주장은 언제나 옳다. 그러나 세례는 그것 외에 더 많은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에 편입되는 것이라든지, 교회 공동체로 들어가는 것이라든지, 또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든지, 하나님 나라에서 태어남 등이다. 이러한 의미들은 결코 유아세례를 배척하지 않으며, 오히려 유아와 잘 어울린다.
4. 예배학적 관점
예배학적 관점에서 볼 때에 세례는 다음 네 가지의 원리 위에 굳건히 서야 한다. 첫째, 세례는 예비과정(catehumenate)이 중요하다. 신약의 기록을 보면 세례에는 반드시 두 개의 단계 혹은 두 순간이 있다. 첫 단계는 바로 케리그마적인 선포의 순간이고, 두 번째 단계는 가르침이다. 첫 번째 단계는 행 2:14-36절에 잘 나타나 있다. 사람들은 선포를 들었으며 "형제들아 내가 어찌해야 할꼬?" 하고 물었다. 이것을 회심의 초기단계로 볼 수 있다. 이 때에 사도들은 "여러 말로" 설명을 더 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단계이다. 행 2:38-41절에 보면 이러한 단계가 잘 나타나는데, 이 때에 가르침(teaching)이 주어지고, 그 가르침을 듣는 사람은 들은 바 말씀을 자기의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여 삶을 재형성(reform)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에 그들은 비로소 세례를 받게 된다. 이러한 두 단계는 초기 시대부터 있었으며, 2세기에 접어들면 벌써 이 과정이 상당히 발달하게 된다. 이렇게 발달한 세례예비과정을 통해서 입교자들의 삶을 철저하게 변화시켰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강력한 군대를 가진 로마제국의 치하에서도 살아남고 오히려 로마를 정복하여 오늘에 이르는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다.
둘째, 세례는 공동체적 사건이지 결코 수세자 개인만의 사건이 아니다. 세례는 철두철미 신앙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세례에 관한 가장 초기의 문서인 {디다케}는 세례를 받기 전에 수세자가 금식하도록 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수세자만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주는 사람, 즉 집례자도 금식해야 하고, 회중도 금식해야 한다고 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세례 전에 수세자와 집례자는 금식하라. 그리고 할수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금식하라; 그리고 너는 수세자에게 하루나 이틀 전부터 금식하도록 명하라."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에 초대교회 당시는 세례가 있을 때마다 교회 공동체 전체가 금식하며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였다. 이는 세례가 단지 수세자 개인의 인생에 일어나는 사건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사건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누구든지 세례 받는 사람은 공동체에 들어와서 공동체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고, 공동체 또한 그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세례가 공동체의 사건인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세례가 곧바로 성만찬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세례의 주된 의미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편입되는 것이라고 이미 언급하였다. 세례를 받기 전까지 세례예비자들은 신자들(the faithful)과 함께 기도할 수 없었으며, 서로 평화의 인사(peace)를 나눌 수도 없었고, 또한 성만찬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세례를 받은 직후에 수세자들은 회중이 있는 곳으로 인도되며, 그 순간 이 모든 제약들이 풀리고 이제는 신자들의 무리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만찬에 참가할 권리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은 새 수세자가 이제 교회 공동체의 정규구성원(full membership)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초대교회에서는 세례식이 있은 후 다음 한 주간 동안 교회의 모든 예배에서 새 수세자가 중심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감독은 수 주 동안의 설교를 통해서 그들이 이제 막 경험한 세례와 성만찬의 의미에 관해 새 수세자들에게 설명을 해 주게 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수세자 뿐만 아니라 회중 전체가 이 설교를 다시 들음으로써 예전에 자기들이 받았던 세례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그럼으로써 공동체 전체가 다시 새로워지고 갱신되는 계기로 삼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공동체는 세례의식을 거행할 때마다 언제나 새로워지고 거듭나는 공동체가 되었다.
셋째, 세례는 한 개인의 신앙 여정에 있어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특히 베드로전서의 사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듯이, 세례의 의미는 영적 출생이다. 그렇다면 수세자는 이제부터 계속해서 영적 자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자라가야 한다. 3세기 문서인 {사도전승}에 의하면, 당시의 수세자는 세례를 받은 직후에 회중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되어 환영을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였는데, 이 때에 수세자에게는 우유와 꿀이 먼저 주어졌다. 이는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이제 수세자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왔다는 의미이며, 둘째는, 수세자가 이제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유아이므로 계속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령한 젖을 사모하며 자라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수세자는 영적으로 유아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공동체 안에서 계속해서 자라가야 한다.
넷째로, 세례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위이다. 유아세례 반대론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오류가 바로 이 점이다. 세례자의 자격을 논함에 있어서,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결단하는 사람만 세례 받아야 한다면, 이는 주도권을 온전히 인간이 쥐겠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다시 말해서 세례자의 자격을 인간이 결정하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하나님의 자리는 어디인가? 세례는 어디까지나 성례전이며, 성례전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미 연합 감리교 예배학자인 스투키(Laurence Hull Stooky)는 이 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례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하나님의 편에서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말씀하신다. 그 이야기들은 바로 창조와 언약과 그리스도와 교회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구속사의 이야기가 세례에서 다시 말해지고 재현되며 다시 경험된다." 그래서 동방교회에서는 세례를 줄 때에 서방교회처럼,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000에게 세례를 주노라" 라고 하지 않고, "000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노라." 또는 "000은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세례를 받노라."라고 말한다. 이는 세례를 주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형식이다.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주도권이 살아있는 공동체여야 하며, 세례는 이것이 분명하게 표현되는 사건이다.
5. 성결교회가 나아갈 길
그렇다면 성결교회는 과연 유아세례에 관해 어떠한 입장을 가져야 할 것인가? 과연 성서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볼 때에 어떠한 입장이 가장 바람직한가? 조심스럽게 결론에 접근해 보자.
유아세례에 관한 한 전통적으로 두 가지의 다소 극단적인 입장이 존재한다. 한쪽은 소위 "포괄적인 입장"(inclusive position)으로서, 연령에 상관없이 누구나 세례 받기 원하는 자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개혁 이전의 유럽이 이러한 입장에 있었으며, 현대에도 국가교회들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유지되고 있다. 또 다른 한쪽에는 소위 "배타적인 입장"(exclusive position)이 있는데, 이는 오직 의식적인 신앙의 고백이 있는 사람에게만 세례가 주어져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진영에서는 일정한 나이가 되지 않은 어린이나 유아에게는 세례를 베풀지 않으며, 물론 어른이라 할지라도 신앙을 명확하게 고백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세례를 주지 않는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재 세례파가, 그리고 현대에는 그 영적 후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 외 대부분의 교단들은 유아세례를 인정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은 {예식서} pp. 359-466에서 유아세례에 관한 예식을 포함하고 있으며, 미국 성공회는 {공동기도서} 299-314에서 유아세례를 아예 성인세례 속에 포함시켰다. 루터교회 역시 {루터교 예식서}에서 유아세례를 세례예식문에 포함하였으며, 미국 장로교회도 {공동예배집}에서 유아세례를 성인 세례예식 속에 포함시켰다. 미 연합감리교회는 {연합감리교 예배의식서}에서 어린이나 유아세례를 성인세례의식 속에 포함시켰으며, 이와는 별도로 어린이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예식문도 제공하고 있다. 한국의 교회들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장로교회(통합)는 새롭게 개정된 예배예식서 속에 유아세례 예식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 감리교회도 {예문} 속에 영아세례예문과 청소년 세례예문을 포함하고 있다.
포괄주의적 입장의 문제점은 세례의 성례전적 성격을 강조하다보니, 마치 의식을 통해서 자동적으로 은총을 받는다고 오해하기 쉽다는 점이다. 그래서 세례를 마술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모든 것은 하나님이 다 하시기 때문에 개인의 신앙이나 헌신 또는 성장을 향한 노력이 전혀 필요 없다고 여기게 될 위험성이 있다.
포괄주의적 입장의 이러한 문제점은 곧 배타주의적 입장의 장점이 된다. 배타주의적 입장에서는 세례 받을 사람이 어른이어야 하고 기독교 신앙에 헌신한 자여야 한다. 단순히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은혜가 기계적으로 주입되지도 않으며 아무에게나 무차별적으로 주어지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교회는 비록 소수지만 그래도 헌신되고 훈련되고 분명한 신앙의 고백이 있는 회중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입장 역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세례가 분명히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되었고, 그래서 순종해야 할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하나님의 행위로 인식하지 않게 된다. 여기에서 세례는 은총의 수단이라기 보다는 개인이 갖게 된 신앙에 대한 하나의 보상 성격이 짙다. 이들에게 있어서 교회란 그리스도의 창조물이라기 보다는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모임의 성격이 짙다. 이들이 볼 때에 신앙이란 교리를 입으로 말하는 것이거나 또는 자기의 회심체험 또는 종교적 경험을 간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개인이 헌신된 신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누가, 어떻게, 어떤 근거로 판단하느냐 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이다.
극단적 포괄주의 입장에서는, 세례에서 하나님의 행동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인간의 응답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거나 강조되지 않는다. 한편 극단적 배타주의 입장은 언제나 인간의 편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객관성은 다소 모호해지는 한편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지금 여기에서의 응답이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되고, 초점이 하나님보다는 인간에 그리고 공동체보다는 개인에게로 맞춰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양극단을 피하는 중도적 입장은 무엇인가? 두 입장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을 피하고 두 입장의 좋은 점만 받아들이는 건강한 해결책은 가능한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바로 한가지 명제에 들어있다: 세례는 기독교 신앙에 헌신된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유아가 자동으로 세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 또한 부모에 대한 선교적 제스쳐로서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어도 안 된다. 적어도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세례는 신앙의 공동체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일원이 되지 않고는 아무도 세례를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세례는 철저히 신앙공동체 안의 사건이다.
유아세례와 어린이 세례는 두 개의 큰 기둥 위에 기초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들보다 앞서 일하시며 믿음의 길을 준비하신다는 확신이다. 이는 "선행적 은총"이라고 불리운다. 사도 바울의 고백에 나타난 것처럼(롬 5:6-8. 요일 4:19)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사랑하셨다. 그러나 만일 이 기둥에만 의존한다면 교회는 세상으로 가서 아무에게나 모든 사람에게나 무조건 세례를 주어야 할 것이다. 이교도이건, 힌두교도의 자녀이건, 불교도의 자녀이건 심지어 무신론자에게도 말이다. 이는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는 또 하나의 기둥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바로 신앙의 공동체적 성격과 자녀를 돌보시고 양육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이다. 수세자의 나이가 얼마이든 세례는 자동적으로 효과를 발휘하는 마술이 아니다. 세례는 인간이 언약의 공동체에로 들어가는 입교(initiation)이다. 그 다음은 교회 안에서 성령의 권능과 인도하심 아래서 양육받고 훈련 받아 계속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유아세례에 관한 신약의 침묵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신약이 유아세례를 명령한 것은 아니지만 또한 금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자. 이에 관해 교회가 취할 수 있는 입장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성서가 명하지 않은 것을 교회가 금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서가 금하지 않은 것을 교회가 자유롭게 실천하는 것이다. 유아에게 세례를 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유아세례는 신약의 증언의 빛 아래서 더 광범위한 차원의 성서적 역사적 신학적 토대 위에서 결정될 일이다.
그러므로 성서적 증거와 성서시대 이후의 교회의 실천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양육 받을 수 있는 성인들의 신앙공동체가 존재하는 한, 어린이와 유아는 세례를 받을 수 있다. 보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어른들의 세례가 표준이며, 어린이들의 세례는 파생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어른들의 세례야말로 세례에 내포된 참된 의미를 가장 잘 선포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헌신된 신자들의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 한 어린이와 유아는 세례 받을 수 없다.
어른도 어린이도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그 순간 완전해 지는 것이 아니다. 세례는 이제 언약의 공동체 안에서 새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시작을 의미할 뿐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번 태어난 후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계속해서 자라가야 한다. 그 터전과 울타리가 비로 교회 공동체이다. 교회는 이들을 양육하고, 교육하고, 훈련하고, 인도해서 영적으로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맺는 말
지금까지 유아세례를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예배학적으로 고찰해 보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가장 초기의 교회 공동체는 성인세례를 주로 하였으나 유아세례가 예외적으로 존재하였고, 4세기 후반 이후로는 오히려 유아세례가 지배적인 세례실천이 되었다. 신학적으로 볼 때에 세례는 단순히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죄 용서함 받는 차원 이상의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에 편입되는 것이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며, 천국 백성 됨의 시작이다. 예배학적으로 볼 때에 세례는 성례전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주실 때에 인간이 받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와 결단만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리고 세례는 공동체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성서의 증거와 역사적 토대 위에서 성결교회는 유아세례를 전향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한다. 1996년의 헌법에서 유아세례를 인정하게 된 것은 이런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보여진다. 다만 충분한 신학적 논의 없이 이 일이 되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또한 현행 규정에 의하면 만 3세 이하의 경우 유아세례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3세 이상의 어린이들은 성년세례의 나이가 될 때까지 세례를 받을 수 없게 되는데 이는 불합리하다. 앞으로 본 교단 안에서 유아세례에 관한 좀더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유아세례의 논의가 있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