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들의 만주 이주(1860~1945)와 북간도 독립운동 2부
2. 조선 망국 양반 관료들의 이주와 종교 포교의 시대(1905~ 1925년)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국은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겼다. 일본 “간도문제”야기
1) 1906년 화룡현의 대교동에서 수전 시작. 1,308미터 수로 개간(33쌍)
2) 1907년 연변 일대 조선인 거주 마을 529개, 인구 1만 5,56세대. 7만2076명.
연변인구의 76%
*1907년 용정에 조선인 보호를 빌미로 조선통감부 산하의 간도파출소가 세워졌다.
*1907년 고종의 헤이그 밀사 파견(이상설, 용정에서 출발)
*1909년 9월, 청나라와 일본이 간도협약이라고 알려진 <두만강중한계무조항>을 체결.
간도협약으로 말미암아 일본은 도심 상가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의 통치권 장악,
혼합지역(잡거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에 대해서는 치외법권 획득. 조선 이주민은
청나라와 일본과 조선의 약탈의 대상이 됨.
3) 1910~12년 – 한일합병조약으로 인한 이주- 조선 이주민은 23만 8,403명
*1910~1918년 조선총독부의 토지 조사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1918~1919년, 3.1운동의 탄압을 피해 이주,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
*파리강화회의.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4) 1919년 – 3.1운동으로 인한 독립 열망으로 이주 - 43만 1198명.
5) 1920년 – 독립운동을 원하는 사람들, 월강 조선인들의 2,3세대. - 45만 9427명
6) 1921년 동북 조선인 인구수 – 488,656명
7) 1922년 동북 조선인 인구수 – 515,865명
8) 1923년 동북 조선인 인구수 – 528,027명
9) 1924년 동북 조선인 인구수 – 531,857명*
*황유복 <중국조선족사회와 문화의 재조명> 료녕출판사, 2002념, 48쪽
1912- 1926년 동북으로 이주한 조선이주민의 원적별 통계표*
원적지 | 두만강 이북(명) | 압록강 이북(명) | 기타 지구 | 합계 | 이주민 비율 |
경기도 | 4,238 | 517 | 2,187 | 6,942 | 2.39% |
충청북도 | 1,090 | 581 | 370 | 2,041 | 0.69 |
충청남도 | 165 | 22 | 523 | 710 | 0.25 |
전라북도 | 61 | 42 | 422 | 525 | 0.18 |
전라남도 | 363 | 40 | 678 | 1,081 | 0.37 |
경상북도 | 2,934 | 27,740 | 1,215 | 31,889 | 11.02 |
경상남도 | 780 | 11,876 | 1,656 | 14,312 | 4.94 |
황해도 | 6,136 | 1,790 | 2,203 | 10,129 | 3.5 |
평안북도 | 3,703 | 38,323 | 10,779 | 52,805 | 18.25 |
평안남도 | 7,391 | 5,896 | 4,659 | 17,946 | 6.2 |
강원도 | 9,828 | 5,337 | 1,316 | 16,481 | 5.69 |
함경북도 | 60,148 | 13,168 | 18,476 | 91,792 | 31.73 |
함경남도 | 20,135 | 5,931 | 16,558 | 42,624 | 14.73 |
합계 | 116,972 | 111,263 | 61,043 | 289,277 | 100.00 |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2)>, 민족출판사 1999년, 82쪽
3. 사회주의로 촉발된 민중 투쟁과 만주국 성립과 조선 농부와 빈민들의 집단이주 시대(1925 ~1945년)
1) 1925년 동북 조선인 인구수 – 531,973명
2) 1926년 동북 조선인 인구수 – 542, 185명
3) 1927년 동북 조선인 인구수 – 558,280명
4) 1928년 동북 조선인 인구수 – 577, 052명
5) 1929년 동북 조선인 인구수 – 597, 677명
6) 1930년 동북 조선인 인구수 – 607, 119명
7) 1931년 동북 조선인 인구수 – 630,982명
* 1929년, 1930년 동양척식회사의 조선 대토지 점유: 자작농 감소, 소작농 증가, 파 탄한 농부들 집단 대 이주 시작
*1931년 조선총독부 <선인이민회사설립계획안>기획, 매년 1만 세대 5만 명 씩 15년 동안 조선의 파산 농민들 이주 계획 – 일본관동군의 반대로 무산.
*1931년 - “9.18사변”으로 일본 관동군 남만철도 폭파. 일본 중국 동북 침략
*1932년 – 일본 “만주국 건립”
*조선총독부 <만선농사회사설립계획안>제정, 매년 2만 세대 10만 명씩 15년 동안 30만 세대 150만 명 이주 계획. 관동군의 반대로 무산.
8) 1933년 동북 조선인 인구수 – 68만여 명
9) 1934년 동북 조선인 인구수 – 73만 8,000명
10) 1935년 동북 조선인 인구수 – 82만 명
11) 1936년 동북 조선인 인구수 – 85만 4,111 명
12) 1937년 – 1941년 조선인 이주 인구수 – 2만 4,468호 10만 3,361명
*1937년 “7.7사변”(로구교 사변) - 중일전쟁 시작
*1939년 12월 <조선인농민처리요강> 제정, 전 동북지역을 조선인이주지역으로 확정.
13) 1944년 동북 조선인 인구수 – 165만 8,572명
14) 1945년 8월 – 동북 거주 조선인 인구수 –216만 명
(징용과 근로봉사로 끌려온 사람들 포함, 당시 조선인구의 10%)
15) 1945년 8월 이후 - 전 만주 조선인 인구 216만 명 60여만 명이 조선에로 귀환.
16) 1946~ 49년 – 국공 내전, 조선인에 대한 불평등과 차별 등의 이유로 66만여 명 귀환, 49년 만주 조선인 인구수 – 90만 명
17) 1953년 동북 조선인 인구수 – 111만 1천여 명
4. 망국 역사에 대한 질문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며 망국의 뼈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질문하며 자성해야 한다. 질문과 대답은 건강한 나라를 생각하는 여러분들의 몫이다.
1) 1860년대 조선인들은 왜 조선을 탈출하였는가? 왜 만주로 첨입하였는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생명을 걸고 두 강의 국경을 넘어 도망치게 만들었는가?
2) 당시 사회의 선비(양반과 관료들)은 북관사람들의 기아 문제에 관심을 가졌는가? 그들이 직면한 민생 문제 해 결을 위해 어떤 정책을 입안했는가?
3) 구명도생을 위해 만주로 들어간 조선인들이 겪는 고초(청나라 군인과 관리, 점산 호, 일제, 문화, 기후, 기타)를 누가 관심을 가졌는가?
4) 청국이 조선인들에게 개간지구를 허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5) 나라가 망했을 때 왕가와 조선 선비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
6) 조선 선비들의 자결은 누구를 위한 자결이며 그들의 중국 동북으로 이동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3) 조선인들이 만주로의 집단 이주는 왜 일어났는가?
5) 1945년 이후 만주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왜 남아 있게 되었는가?
6) 현재 중국 조선족과 우리의 관계는 무엇인가?
✔에필로그 : 아직도 우리는 조선후기 사회에 속해 있다.
현실적으로 조선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분명히 우리는 해방 이후 왕정의 제국주의 시대에서 민주 공화국의 사회로 옮겨왔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여전히 지식인들이 권력과 여론과 지식을 장악하고 있으며 부(富)마저도 그들의 정책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아직도 한국은 1~3%의 엘리트 지식인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에도 조선사회가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조선시대의 엘리트들은 중화사상과 주자학에 관한 해석의 대가인 붕당 영수를 중심으로 노론, 소론, 남인, 북인으로 나뉘었지만 지금의 엘리트들은 사상과 이념으로 진보와 보수, 학연과 지연 등으로 나뉘어 있는 것뿐이다. 자신들과 붕당의 기득권 옹호를 위해서 하는 음모와 암중모색, 거짓과 위선, 유언비어 날조와 여론 및 사건 조작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조선을 멸망으로 이르게 한 사람들은 기득권 지키기 위해 권력투쟁을 끊이지 않고 벌였던 조선의 엘리트 선비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그들의 책임을 거론하지 않는다. 그들의 위선과 기득권 고수의 잘못을 통박하지 않는다.
백성들의 삶을 철저하게 짓밟고 소외시키고 노예로 부리며 안빈낙도와 예와 도를 주장한 그들의 기만과 위선을을 밝혀야 한다. 그들의 악하고 이기적이고 음흉한 정책, 기득권 고수를 위해 세제 개혁을 끈질기게 반대한 그들의 탐욕과 사리사욕을 밝혀야 한다.
조선 500년 동안 정치와 백성의 삶을 마음껏 농락한 조선의 엘리트 선비들이 21세기 한국인들 속에서 계속 추앙을 받는 것이 용납되면 현재의 엘리트들이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우리는 언제까지 90%의 조선의 상민, 노비와 천민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10%의 선비, 양반 사대부 중심의 그들의 기득권 고수로 멸망해온 역사를 배워야 하는가?
누가 양반 사대부들의 이전투구의 역사를 미화시켜서 우리에게 강권하는가?
누가 수직사회를 집요하게 주장하던 조선의 양반들(심지어는 실학자들까지도)의 사유, 공맹의 철학을 지금도 서양의 물질주의와 대립하는 정신주의인 것처럼 기만하고 있는가?
양반, 학자, 사대부로서 자신들의 부귀와 영화를 위하여 조선의 상민들과 천민, 노비를 물화, 도구화, 비인간화시키고 조선을 멸망의 길로 이끈 그들의 책임은 준엄하게 물으며 민(民)과 민생(民生)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학대한 그들의 이름이 후세들에게 잘못된 존경과 추앙을 받는 일이 사라져야 한국의 역사가 엘리트들의 역사에서 민의 역사로 전환 될 것이다.
2023.2.23.목 에 쓰고
26일 주일 아침에
우담초라하니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