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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숲이 마을 입구 → 고헌사 갈림길 → 고헌산 → 외항재 → 외항 삼거리 → 신원봉(낙동정맥 분기봉) → 학대산 → 문복산 → 드린바위 → 중리마을(문복산 등산로 입구) ' 16km, 7시간 코스를 탐방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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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복산[文福山]
높이: 1,014m
위치: 경북 경주시 산내면
문복산은 경주시 산내면과 청도군 운문면의 경계에 자리한 해발 1,014m의 산이다. 세칭 영남알프스라고 불리는 경상남도와 북도의 경계 어름에는 해발 천 미터가 넘는 산이 무려 아홉이나 되는데 그 중의 막내가 문복산이다.
문복산 턱밑에 자리 잡은 운문산자연휴양림과 남쪽으로 가지산 운문산 천왕산 등등 명함을 많이 돌린 산들 덕분에 휴일에도 낮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문복산은 속으로 큰 웃음을 지금도 짓고 있다.
서쪽 자락에 터를 잡은 종말에는 장승 30여 기가 문복산과 마을을 지키고 있고, 두름방구(두름바위 혹은 일명 코끼리바위)까지 길목을 지키고 있으니 한낮에도 낮잠을 잘 여유가 있는 것이다. 계곡을 들어서면 누가 깎아놓았는지 사람 얼굴을 닮은 코바위가 우선 검문을 하면 곧바로 코끼리 바위가 확인한다.
코끼리바위 바로 옆에는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유치장인 동굴이 있다. 이 동굴을 무사히 갈 수 있는 사람들한테 코끼리바우가 문복산을 올라가는 길을 열어주는 데 그리 어려운 길은 아니고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 한국의 산하
이번 주 토요산행은 영남알프스 문복산, 고헌산 연계 산행이다. 소위 안내 산악회에서 진행하는 영남알프스 종주만 하면 영남알프스 산행은 끝나는 거로 알던 중 문복산과 고헌산, 운문산이라는 생소한 산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정확히는 영남알프스에 해발 1,000m가 넘는 아홉 개의 산이 있다는 걸! 높이 순으로 가지산(1,241m), 운문산(1,188m), 천왕산(1,189m), 재약산(1,108m), 신불산(1,159m), 영축산(1,081m), 고헌산(1,034m), 간월산(1,069m), 문복산(1,015m)의 아홉 봉우리 중 가지산은 2016년 5월 대학 친구 넷과 올랐고, 신불산, 영축산, 간월산은 영남알프스 하프 종주를 진행하는 산악회를 따라 2020년 10월에 올랐었다[산행기]. 고로 아홉 산 중 네 개를 올랐으니, 아직 다섯 봉우리가 남았다.
해서 남은 다섯 봉우리에 오르기 위해 몇 번 시도했으나, 다른 산행에 밀려 오르지 못했다. 워낙 유명해 등산객이나 관광객이 많이 찾는 산이라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언제든 갈 수 있다는 것에, 드물게 생기는 오지 산행 계획을 발견하면 영알 관련 산행을 취소해서다. 그런데 이번 토는 갈만한 산이 없어 영알의 일부인 문복과 고헌 연계 산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다만 산악회 계획에 따르면 문복산에서 "외항마을 휴게소"로 하산 후 고헌산에 올랐다가 다시 "외항마을 휴게소"로 내려가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왔던 길 돌아가는 코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반대편으로 하산하지 않고 다시 돌아가는 중요한 이유가 하산주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수용하기로 했다. 내 생각에는 반대편에는 없으나, 외항마을 휴게소에는 있는 식당!
해서 식당에서 하산주를 마실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달릴 수 있는 채비를 하기로 했다. 얼음물 한 통과 간편식 그리고 가벼운 카메라! 혹시 동행하겠다는 친구가 있다면 문복산행 후 외항마을 휴게소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고헌산을 다녀오는 날 기다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산행계획을 세우다 보니 2주 만의 산행이라는 걸 알았다. 지난주는 제주도로 2박 3일 가족여행을 다녀오는 바람에 산에 못 갔다. 제주도라면 한라산 외에는 관심이 없던 내가 모친 덕에 유명관광지를 둘러볼 수 있었던 기회였고, 우도에서 우도봉이라는 봉우리를 오르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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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까지의 거리가 멀어 평소보다 10분 이른 시간에 양재 국립외교원에서 버스가 출발하는 만큼 기상부터 모든 걸 10분 일찍 해야 했다. 기상해 날씨를 확인하고 간편식과 사과 하나를 디팩에 담고 그 디팩을 넣는 거로 배낭을 싸는 걸 마친 후 누룽지를 끓여 아침을 먹고 5시 57분 지하철을 타기 위해 5시 40분에 집을 나섰다. 대조 시장을 통과해 5시 54분경 불광역에 도착해 승차장으로 내려가 주변을 둘러보고 놀랐다. 아니, 이 시간에 전철을 기다리는 승객이 이렇게 많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토요일 새벽에. 토요 휴무를 누구나 즐기는 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는 순간이다.
다행히 5시 57분 차는 대화가 아니라 구파발에서 출발하는 차라 빈자리가 많아 그나마 앉아 갈 수는 있었다. 책을 읽고 있는 사이 양재역에 도착한 시각이 6시 38분으로 이것저것 볼 거 없이 바로 12번 출구로 나가 국립외교원 앞으로 갔다. 그런데, 생각보다 등산객이 많다. 내가 알기로 6시 50분에 출발하는 차는 우리가 타고 갈 영남알프스 문복산행 버스가 유일한데, 그럼 다른 산악회도 이렇게 일찍 출발하는 산행이 있다는 건가? 궁금해하며 어떤 산악회가 이렇게 일찍 출발하나 확인하기 위해 버스가 도착하기를 기다렸으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버스가 먼저 도착하는 바람에 다른 산악회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버스에 타서 내 자리로 가 배낭을 한쪽 구석에 두고 등산화를 벗고 편한 자세로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마저 읽기 시작하니, 예정보다 1분 빠른 6시 49분 버스가 출발했다. 죽전에서 등산객을 마저 태우고 신나게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에서 책을 읽다 지쳐 잠이 들었다. 멀긴 멀다. 차가 느려지는 느낌에 눈을 떠 밖을 보니 휴게소로 들어가고 있었다. 휴게소에 볼일은 없으나, 차에 앉아서 기다리는 것도 지겨워 차에서 내려 화장실을 향해 가는데, 앞에 눈에 익은 모습이 보인다. 흥수다! 해서 다른 산악회 차량도 있나 주변을 둘러봤다. 없다! 그럼 같은 차를 타고 왔다는 건데, 분명 어제저녁 신청자를 확인했을 때 흥수는 없었다. 실수할까 봐 부르지는 못하고 흥수라 생각되는 등산객을 따라 화장실까지 갔으나, 문을 닫고 들어가는 바람에 확인을 못 했다. 밖에서 기다릴까 하다가 버스에 타서 산행 신청자를 확인하면 된다는 생각에 바로 버스에 탔다.
버스에 타서 내 자리로 가며 의자나 바닥에 놓여 있는 배낭을 유심히 살폈다. 흥수 배낭은 찾기 위해서다. 내 자리에 도착할 때까지는 없었다. 해서 뒷자리까지 찾아볼까 하다가 귀찮아서 자리에 앉아 패드를 들고 이번 산행을 계획한 산악회 신청 사이트로 들어가 신청자를 확인했다. 분명 어제저녁 빈자리는 5명이었는데, 지금 확인하니 4명이다. 그럼 늦게 신청한 사람이 흥수일 확률이 100%다. 그래도 혹시 몰라, 신청자의 아이디를 확인하니 제일 뒷자리에 "좋은바람"이 있다. 이 친구가 새벽에 신청한 모양이다. 그런데 사당에서 탄 흥수가 양재에서 타는 나를 봤으면 인사를 했을 텐데, 인사가 없었다는 게 궁금했다. 그리고 제일 뒷자리 높이 앉아 있는 흥수를 못 본 것도 이상하고.
흥수가 버스에 타기를 기다리며 장 밖을 보고 있는데, 버스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런데 일행이 있다. 산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흥수 중학교 동창이다. 둘도 우연히 만났을 거다. 물론 마지막에 신청한 흥수는 동창과 내가 신청한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만. 둘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인솔 대장이 이번 산행 지도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나, 혹시 그사이에 변동이 있나, 마감 시간과 코스를 다시 확인했다. 변함이 없었다. 그러고 있는데, 흥수가 들어와 서로 인사를 나눴다. 버스가 다시 들머리를 향해 출발하자 인솔 대장이 마이크를 잡고 이번 산행 코스와 주의 사항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다.
소위 얘기하는 영남알프스에 있는 해발 1,000m가 넘는 아홉 개의 봉우리를 다 올라 인증을 남기면 울주군청에서 "영알 9봉 완등 인증서"와 "기념 은화"를 준다고 하니[기사], 대부분 인증꾼이 그 아홉 개의 봉우리에 몰려서, 아주 당연하게 등산로는 탄탄대로일 테니 길을 잃을 걱정은 없고. 다만, 주어진 6시간 내 14km를 주파할 수 있을까가 걱정이었다. 그런데 인솔 대장의 말에 의하면 본인은 빠르지는 않으나, 쉬지 않고 가는 스타일인데, 작년 11월 같은 코스에 4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산행 스타일이 나와 같은데, 그럼 4시간이면 주파가 가능하다는 얘기나, 우리는 좀 여유를 둬 4시간 30분 주파를 목표로 하기로 했다. 그래야 1시간 하산주와 30분 일찍 서울로 출발할 수 있을 테니. 물론 개인적인 목표다! 설명이 끝나고 다시 잠을 청해 버스의 덜컥거림에 눈을 떠 보니, 10시 30분경이다. 들머리가 멀지 않았으니, 등산 준비를 하며 앞을 보니 버스의 와이퍼가 움직이고 있었다. 비다!
인솔 대장의 말에 의하면 10시 50분경 들머리에 도착할 예정이고 마감은 예정대로 17시 정각이라고 했다. 그리고 산행 안내 코스에는 드린바위가 있으나, 드린바위로 가기 위해서는 정상 직전에서 200여 미터를 떨어진 암봉을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그럼 왕복 400m! 그리고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에 드린바위 갈림길이 있고, 그 갈림길에서 드린바위를 거쳐 문복산 정상에 올라도 된다고 했다. 직진이 아니라 돌아가는 거니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나, 아주 당연히 갈림길에서 드린바위를 거쳐 정상에 오르는 코스로 갈 생각이었다. 인솔 대장의 말이 끝나자 버스 안의 인증꾼, 등산객 등이 내리는 비를 보고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는 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산에 하루 이틀 다닌 사람들이 아니라 비상용 우의와 우산을 꺼냈다. 나도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우산을 꺼내 배낭 옆 주머니에 꽂는 거로 산행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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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10시 50분에 버스는 이번 영남알프스 문복산, 고헌산 연계산행 들머리인 산내영성병원 앞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에는 없던 비다! 해서 조금 내리다 말 거라고 생각하고, 이미 산행 준비를 끝낸 나는 흥수가 준비를 마치기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알 9봉 인증 때문에 요즘 등산객이 많이 찾는 가게도 하나 없는 작은 산간 마을이다. 당연히 주차장이 없어 차가 대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어서 날머리로 이용하기에는 애로가 많아 보였다. 흥수의 산행 준비가 끝난 10시 54분 마을을 관통하는 포장도로를 따라 문복산 정상을 향해 오르며 산행을 시작했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본격적인 등산로가 나타나고 처음부터 급경사의 깔딱이었다. 해서 폰을 꺼내 고도를 확인하니 해발 435m, 그리고 등산로 갈림길 이정표에는 문복산 정상까지는 1.7km, 드린바위까지는 1.5km라고 표기되어있다. 그런데 산은 전형적인 흙산으로 이대로 비가 내린다면 산행이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 600m 이상을 올라야 하는 급경사라 미끄러운데, 미끄러지는 순간 대형 사고다. 급경사의 흙길을 헉헉대고 30분가량 올라가자 갈림길이 나타났다. 드린바위 갈림길이다. 그런데 앞서간 누구도 드린바위 쪽으로 방향을 튼 거 같지는 않았다. 사실 인증이 목표라면 굳이 드린바위에 갈 필요가 없다. 우리야 인증과는 상관없는 인간들이라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 드린바위 쪽으로 향했다.
갈림길에서 드린바위 쪽으로 걸어가다 보니 앞에 등산객이 보였다. 우리를 제외하고 이번 산행에 동행한 일행 중 이 길을 선택한 유일한 산꾼이다. 그 산꾼의 뒤를 따라가는데, 산꾼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위로 향한다. 지금까지는 조금씩 상승하면 전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산꾼이 방향을 튼 지점에 도착해 유심히 보니 위로 향하는 길도 있었지만, 전진하는 길도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전진하는 방향이 정상적인 길로 보여 그 산꾼에게 혹시 그쪽에 리본이 있나 물어봤다. 당연히 없다는 답이다. 해서 앞장서 10여 미터를 가자 앞에 이정표가 보였다. 예상대로 전진하는 방향이 길이었다. 드린바위 갈림길에서 10분 정도 걸린 지점이다. 그 이정표에는 "드린바위 200m", "문복산 500m"라 표기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이정표 뒤에는 거대한 암벽이 있었고, 그 암벽 정상에서 내려진 줄이 보였다. 물론 암벽을 우회하는 길도 보였다.
그 산꾼은 우회하는 길을 선택했고, 흥수와 나는 암벽을 기어올랐다. 물론 밧줄이 있었으나, 왜 여기다 밧줄을 설치했을까 싶을 정도로 오히려 오르는 데 방해만 될 뿐이었다. 앞장서 암벽을 올라가자 우회했던 산꾼이 위로 지나가는 게 보였다. 산사태로 무너진 위험한 구간을 통과해 기다시피 능선으로 올라가자 잘 닦여진 등산로가 나타났다. 문복산 정상 직전 갈림길에서 오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조금 가자 비구름 사이로 암봉이 나타났다. 드린바위다! 그런데 "드린"의 뜻이 뭘까? 정상에는 주변의 돌을 주워 만든 석탑이 있었고, 그 탑 위에 누군가 넓적한 돌에 "드린봉"이라고 써서 세운 정상석이 있었다. 조망처로는 최고의 위치였으나, 비구름이 깔려 있어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아쉬워하며 그나마 주변을 사진으로 남기고 있는데, 등산객 한 명이 또 도착했다. 잘 보니 인솔 대장이다. 출발 전 대장이 제일 뒤에서 따라오겠다고 했으니, 이번 산행 일행 중 이 드린봉에 오른 산꾼은 대장 포함 4명이란 얘기다. 인증을 위한 산행이라, 하루에 두 산에 올라 인증을 남겨야 하니, 도움이 안 되는 곳은 들리지 않는 게 맞을 수도. 영남알프스의 전경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드린봉을 떠나 문복산 정상으로 향했다. 길은 거의 암벽으로 나 있었고, 물론 암벽을 무서워하는 등산객을 위해 우회로도 있었다. 몇 개의 암벽을 기어오르며 정상을 향해 가자 등산객의 말소리가 들렸다. 정상이 멀지 않다는 얘기다.
드린봉을 떠난 지 15분가량 지나자 이정표가 있는 문복산 갈림길에 도착했다. 정상까지 남은 거리는 100m! 그 갈림길에서 우리가 지나온 드린봉까지의 코스를 복기해 보니 애초 우리처럼 드린봉 갈림길에서 방향을 틀어 드린바위로 향하지 않고 이 갈림길에서 드린봉을 다녀온다면 하루 두 산 인증이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인솔 대장이 버스 안에서 설명했던 드린바위까지의 거리가 200m가 아니라 이정표에 의하면 700m다. 왕복 1.4km! 나라도 처음에 만난 갈림길이 아니라 거의 정상에 도착해 드린바위를 다녀오라면 안 간다! 어쨌든 정상을 향해 접근해 갈수록 등산객의 소음으로 시끄러웠고, 정상 주변 숲에는 여기저기에는 가랑비를 피해 나무 아래 두세 명씩 모여 점심을 먹고 있는 등산객이 보였다.
평지나 다름없는 정상에 도착해 보니 이미 정상석을 배경으로 인증을 남기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인증을 찍기 위해 모여 있는 정상석 외에 한쪽 구석에 자그마한 정상석이 하나 더 있었다. 접경 지역의 산 정상에는 각 시군별로 세운 정상석이 위용을 자랑하는 봉우리가 많아 이것도 그럴 거라 생각하고 말았다. 아마 울주군과 경주시겠지! 그런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각 시와 군이 별도로 세운 정상석이 아니라 울주군이 영남알프스 9봉 인증을 위해 기존 정상석을 무시하고 다시 정상석을 세운 거였다. 정상석이 몇 개든 우리가 그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면 30분 이상 걸릴 거 같아, 인증이 중요하지 않은 우리는 "문복산"이라 표기된 이정목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문복산을 떠나 고헌산으로 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새로 세운 정상석 쪽을 보니 그사이 인증꾼이 늘었다.
정상을 떠나 잘 다듬어진 길을 따라가는데 갈림길이 나타났다. 운문령과 청도 갈림길이다. 어느 게 우리가 가야 할 길인지 확실치 않아 폰을 꺼내 지도를 확인했으나, 그 지도로도 명확하지 않았다. 해서 망설이고 있는데, 우리와 같이 드린바위에 올랐던 산꾼이 인증을 찍고 오면서 산행 대장이 계속 왼쪽으로 가라는 말을 했다며 왼쪽의 운문령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산행 대장이 비슷한 말을 했던 게 기억났다. 해서 미련 없이 운문령 쪽으로 방향을 틀어 하산을 시작했다. 외항재라는 고개로 내려갔다가 다시 고헌산으로 올라가야 하니 당연히 하산이다. 그런데 그 하산길이 급경사가 아니라 거의 평지나 다름없었다. 그럼 마지막이 힘들다는 얘긴데.
높지는 않으나 그래도 봉우리인 몇개의 암봉을 지나며 외항재를 향하는데 갑자기 빗줄기가 굵어졌다. 오솔비가 오락가락하다가 그칠거라고 예상했는데, 예상외이자, 기상청을 조롱하는 비다! 비록 배낭 옆 주머니에 우산이 있으나, 꺼내기가 귀찮아 그냥 비를 맞고 가며 이 산행을 계속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다시 고헌산에 오려면 시간이 걸리니, 산행을 계속하기로 하고 전진하고 있는데, 등산 앱이 봉우리에 도착했다고 알려준다. 봉우리? 해서 보니 이정목에 963봉이라고 적혀 있는 게 보였다. 문복산에서는 2.3km거리다. 뒤를 따라오던 흥수가 뭐냐? 하고 물어 963봉이라는데 하고 조금 더 나가자 정상석이 있었다. "학대봉"이다! 아니 봉이아니라 산이다. 학대산!
학대산에 도착한 시각이 12시 50분인다. 평소라면 점심을 먹은 후였을 시간인데, 비 때문에 먹지 못해 배가 고팠다. 밥을 먹을 상황도 아니라 그냥 길을 따라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런데 울주군청이 열심히 키우고 있는 영남알프스 9봉 완등 인증사업답게 등산로 중간중간에는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가 설치되어 있었다. 평소라면 거기 앉아 라면을 끓이고 있었을 터라는 생각을 하며 계속 가는데, 비는 더욱 굵어진다. 해서 뒤따라오는 흥수를 돌아보니 거의 물에 빠진 생쥐 꼴이다. 물론 내 모양도 다르지 않을 거다. 해서 이 상태로 계속 산행했다가는 속옷까지 젖는 게 시간 문제니, 산행을 중지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중지여부는 외항재에 도착해 결정짓기로 하고 계속 하산했다. 그렇게 조금 더 가자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이 나타나고 정상석도 있다. 그것도 두 개나! 낙동정맥 위에 있는 신원봉이란다!
운문령에서 올라오는 낙동정맥이 여기를 거쳐 외항재로 향하고 이후 고헌산을 넘어 면산, 백병산을 거쳐 피재까지 달린다. 이 글을 쓰면 궁금해서 낙동정맥 지도와 코스를 살펴보니 내가 생각보다 많은 코스를 달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목표에 낙동정맥도 넣을까? 어쨌든 미래의 어느 날"면산"을 가기 위해 낙동정맥의 한 코스를 달려야 한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길을 가다 보니, 앞에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밧줄로 가이드를 설치한 길이 나타났다. 이제부터 급경사란 얘기다. 전형적인 흙산에 비가 내려 미끄러운 급경사를 내려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미끈하는 순간 대형 사고라. 해서 길을 버리고 그 옆 낙엽 쌓인 곳으로 조심조심 내려가자 개 짖는 소리와 차량 소리가 들린다. 다 왔다.
1시 33분 아래로 주차한 차와 요란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곳에 도착했다. 처음 든 생각은 주차한 차가 보이는 곳이 외항재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아니었다. 그리고 개라고 생각했던 건 개가 아니라 하이에나였다. 하이에나가 사는 집 옆으로 난 길을 따라 5분 정도 내려가자 아마 과거에 국도로 사용했던 거 같은 포장도로가 나타났고 그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자 애초 목적은 햇볕을 가리기 위해 쳤으나 현재는 비를 막고 있는 천막 군락이 보였다. 천막 지붕에는 "도시락 뷔페"라고 적혀 있었다. 기상청을 믿고 행사를 추진했다가 망한 사람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우리 저기 가서 도시락이나 얻어먹고 갈까?" 하고 흥수에게 던지니, 흥수도 "어쨌든 도시락은 배달했을 테니, 먹어볼까?" 했다. 둘이 이런저런 농담을 나누며 비구름에 가려 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고헌산을 바라보며, 좌우의 전원주택 단지를 통과해 1시 54분에 외항재 정상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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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도착하는 시점에 같이 온 일행도 속속 도착해 비를 피하고자 편의점 지붕 아래 삼삼오오 모여 점심을 먹고 있었다. 물론 다음 산행지인 고헌산으로 가기 위함이다. 일단 우리도 GoStop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나는 Go와 Stop이 반반이었다. Go를 했다가는 흠뻑 젖을 건 불을 보듯 뻔하나, 그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고, Stop을 했다간 고헌산에 오르기 위해 다시 와야 한다는 게 문제다. 그럼 문복산에 다시 올라야 하고. 그 때문에 흥수에게 의견을 묻자 의외로 흥수가 Stop 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오늘 산행하는 모습이 평소와 달랐는데, 아무래도 지난밤 폭음한 거 같다. 문제는 버스 귀경 시간이 5시고, 현 시각이 2시다 3시간 동안 술을 마셔야 한다는 거. 그래서 2시간 술 마시고 1시간 먼저 차에 가 잠을 자기로 했다. 결론이 났으니 주변의 식당을 둘러보다 비빔밥 전문이라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먼저 주인장에게 우리의 목적은 밥이 아니라 술이라고 얘기하고 뭘 먹는 게 좋을까 하고 물어보니, 황태구이와 두루치기가 있는 "정식 I"을 시키라고 했다. 당연히 주인장 추천대로 정식 I 두 개를 주문하고 술은 뭐가 있는지 묻자 "좋은데이"와 "하이트"가 있다고 해 뭐가 경주 술인지 묻자 어느 게 경주 술인지는 모르겠고, 도수는 하이트가 높다고 해 도수가 높은 하이트를 주문했다. 아니 19도 술이 언제부터 도수 높은 소주가 된 건가? 5분 정도 지나자 먼저 빈 밥그릇과 반찬이 쫙 깔렸다. 경주라기보다는 전주식이다. 그래서 전주비빔밥이 전문인 식당이겠지만. 그런데 빈 밥그릇은 용도가 뭔지 궁금해 물어보니, 돌솥밥이 나오면 사용하라고 했다. 돌솔밥까지. 2만 원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상차림이다. 밥이 나오기 전에 먼저 황태와 두루치기 밑반찬으로 무사 산행과 산행 중지를 축하하며 소주를 마셨다.
이 집의 음식이 경북 같지 않게 의외로 맛이 좋았으나, 그중 된장찌개는 예술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도착했을 때 다른 식당은 파리를 날리고 있는데, 대가족 두 팀이 점심을 먹고 있었겠지만. 거기에 흥수가 맥주를 하나 더 주문해 둘이 소맥 한 잔씩 나눠 마시며 흥수가 이번 산행에 동행한 동창에게 계속 전화했다. 통화가 되고 우리의 위치를 알려주자 우리는 포기한 고헌산을 다녀온 동창이 산에서 만난 등산객 한 명과 나타난 시각이 3시 25분이다. 두 사람이 합류해 늦은 점심을 먹는 동안 우리는 소주를 마셨다. 그렇게 초면의 등산객과 주거니 받거니 소주를 마신 후 버스 떠날 시간이 가까워 돌게장을 포장해 식당을 나선 시각이 4시 46분이다.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고민이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잘 가 오히려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모든 등산객이 도착해 출발 준비가 끝났다고 믿고 식당을 나와 버스로 갔는데, 인솔 대장 왈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등산객이 있어 정시에 출발하겠다고 했다. 왜인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마지막으로 흥수가 차에 타고 버스는 정시에 외항재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속리산 휴게소다! 주차장에는 서울에서 온 "나라지키미봉사단" 버스가 있어 단체의 성격이 궁금해. 죽 지켜보니, 봉사단원이 다 노인네다. 봉사하는 단체라기보다는 봉사 받는 단체의 성격이 강한 거 같았다. 어쨌든 그 버스의 정체를 확인하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고 놀랐다. 나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이, 휴게소 주변을 둘러싼 산줄기를 보고 있었다. 수많은 휴게소를 다녔으나, 이런 휴게소는 처음이다. 휴게소를 나가 바로 산행에 올라도 될 거 같은. 영남알프스에서 못 번 절경을 휴게소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휴게소를 출발한 버스는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려 1차로 죽전에서 등산객을 내려주고 8시 59분에 양재 국립외교원 앞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 흥수에게 인사를 하려고 뒤를 보니, 뭔가를 열심히 하느라 정신이 없는 거 같아 방해하지 않게 조용히 내렸다. 이후 바로 양재역으로 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하다가, 불광역이나 구산역에서 집에까지 걸어서 갈 상황이 아니라는 판단에 녹번역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그리고 메밀국수로 저녁을 먹는 거로 문복산을 다녀온 토요일 하루를 마감했다.
비가 내려 처음 계획이나 산악회 계획과 달리 '산내영성병원 → 드린바위 → 문복산 → 학대산 → 신원봉(문복산 갈림길) → 외항마을 정상휴게소'의 8.36km(트랭글 기준), 3시간 3분의 우중산행이었다. 이동 3시간 2분, 휴식 1분!
애초 고헌산이 목표였는데, 비 때문에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날씨만 좋다면 조망은 최고의 산이었을 텐데, 비구름에 갇혀 보이는 게 전혀 없었다.
알프스라는 용어는 아시아 서쪽 끝에 있으면서도 유럽이 되고 싶어 하는 일제의 잔재일까, 아니면 산악인 사대주의의 발로일까?
첫댓글 비맞고 산행하고 친구랑 술마시고
최고의 하루
불쌍했던 거 아니고?
전혀 즐거운 하루
비를 핑계로 즐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