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광원 영성과 독립 신앙(무교회)의 만남
이현필 선생의 얼굴을 최초로 만난 광주 양림교회 유치원에서 찍은 사진에 박석현 선생이 있다. 이현필 선생 다음 다음분이다. 그분은 제가 아는 분으로 화순군 남면 절산리에서 1908년 2월 26일 아버지 박재규씨와 어머니 김보덕씨의 아들로 태어나 1938년 5월 초 화순 공의 안학수 선생을 방문하여 김교신 선생의 ‘성서조선’(111호)를 소개 받고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이찬갑 노평구 주옥로 유희세등과 함께 조선 무교회 1세대로 사시다가 1984년 12월 30일 향년 76세로 돌아가셨다.
이현필 선생은 1913년 1월 23일 화순군 도암면 용하리에서 아버지 이승노씨 어머니 김오산씨 아들로 태어나 1925년에 일본인 관파(管波)무교회(대서업 독립전도)를 받았다. 그리고 도암면 등광리 숨은 성자 이세종 어른을 알게 되어 그 가르침을 받고 그에게 성경을 배우며 그의 생활에서 큰 감화를 받아 일생의 신앙의 노선이 결정 되었다. 그때 광주 최흥종 목사 강순명 전도사 등을 알게 된다.
‘호세아를 닮은 성자 이세종’에서 안학수 의사와 그분 어머니 이철선에 대해서 엄두섭 목사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이 철선은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기내미에서 출생했다. 친정 가문은 양녕대군의 후손이었다.
그녀는 같은 백석면 연곡리에 사는 안종철씨에게 출가해서 1남 1녀를 낳아 길렀다. 남편은 광양 장흥 나주 군수를 지냈고 참사관 노릇도 했고 일본 시대에 중국에 촉탁으로 가 있기도 한 고관이었던 분이고 아들 안학수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이곳저곳에서 개업하다가 한 동안 전남 화순의 공의로 있었다. 그는 그당시 선교사 노나복 목사 밑에서 오복희가 순회 전도사로 화순지방에 드나들 때 서로 알게 되어 그의 소개로 등광리 이 세종을 만나보게 되었다.
어머님 이철선도 훌륭한 신앙인이었지만 아들 안학수도 의사이면서 지조굳은 크리스챤으로써 일본의 우찌무라의 신앙에 공감하여 일생 무교회 신앙으로 일관했고 본업인 의사보다 연구와 신앙에 더 전념했다.
이철선이 이 세종을 알게 되어 그의 교훈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의 생활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이세종이 사는 대로 본받고 그의 교훈대로 실천하려고 했다. 오복희를 자기 딸같이 생각하여 일본시대 말기에 신사참배 문제로 오복희가 숨어 있으면서 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갈 때에도 오복희가 거지같이 헐벗은 꼴로 다니면 이철선은 자기 아들이나 며느리 몰래 오복희의 옷을 빨아 입히고 밥 먹을 때도 식모가 오복희의 밥을 적게 담을까 염려하여 자기가 손수 그릇에 꽉꽉 채워 주어 먹고 어디서 과자가 생겨도 편지를 써서 함께 보내주었다.
이철선은 어떻게 예수를 믿어야 바로 믿는 것인가 하고 번민하던 중에 이세종을 만나 자주 사귀면서 자기는 호강스럽게 살 수 있는 처지이지만 세상적인 모든 것을 사양하고 살기로 했다. 불쌍한 거지를 보면 자기의 좋은 옷과 바꿔 입고 좋은 음식도 먹지 않았으며 식구들 사이에서도 고기는 안 먹었다. 병이 나도 약도 쓰지 않았다.
그의 환갑이 되어 자녀들이 잔치를 차리려 하자 그는 거절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의 종노릇 하려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갈4:9~11) 이 성경 말씀을 보고 그 정신대로 실천하려고 환갑날에는 이세종이 사는 등광리로 피신하여 버렸다. 사위와 딸들이 환갑 기념으로 금강산 구경을 가자는 것도 사양하였다.
또한 자녀들의 집에서 호강하며 식모에게 대접받고 살지 않으려고 따로 셋방을 얻어나가 살았다. 그가 얻은 셋방은 수레기 어머니가 닭을 치던 곳이어서 닭의 이가 많았는지 이철선은 온 몸이 가려워서 헐도록 긁으면서도 ‘예수님 감사합니다. 주님도 저를 위해 ㅅㅂ자가를 지셨으니 저도 져야죠.’하면서 <예수 사랑 하심은> 찬송만 부르며 ‘오! 기쁘다.’했다. 사람들이 방에 들어오려 하면 닭의 이가 옮는다고 못 들어오게 했다.
이세종은 고기는 생명이기 때문에 먹지 않은 것이 옳다고 가르쳤다. 이철선은 질문하기를 ‘다른 사람이 잡아와서 이미 죽은 고기라면 먹어도 괜찮지 않습니까?’하니 이공은 ‘그 말씀도 맞습니다. 그러나 먹던 사람들이 안 먹으면 안 먹는 만큼 덜 잡을 것 아닙니까?’ 했다. 이철선은 ‘아멘’ 하고 그대로 실천했다. 자기가 젊었을 시절 아직 목숨이 살아있는 고기를 요리하다가 고기가 푸닥거리고 뛰어 놀랐던 일이 생각났다. 아들 안학수 의사는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고기를 안 잡수시니 걱정해서 기색을 살폈으나 도리어 평화스럽고 기쁨에 가득 차 있는 모양을 보고 감동하여 말리지 않았다.
이세종은 ‘약을 풀 잎사귀로 알고 먹어도 좋지만 하나님 은혜로 병이 나았는데 약으로 나은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 하지 않으니 신자는 약을 먹지 않아야 한다. 성경을 <신약 구약>이라 부르듯 우리에게 말씀이 곧 약이다. 세상 약을 먹으려 말고 말씀을 먹으라고 가르쳤다. 이철선은 그 후로 약을 먹지 않았다.
어느 해 7월 달 모두다 점심을 먹는데 이세종의 부인은 본래 위생 관념이 없어서 무 잎을 되는 대로 대강 씻어서 먼지가 뿌연 마루에다 던져 주면서 먹기를 권하였으나 이철선은 거리낌 없이 먼지 묻은 것을 그대로 먹으면서 감사했다. 때때로 오복희나 수레기 어머니가 찾아가 보면 여름 김치에 구더기가 기어 다녀도 그대로 먹으면서 ’여름에 벌레가 나는 거지 뭐?‘하였다.
이철선은 본래 호강하던 분이라 몸이 매우 약했다. 그래도 몸소 산에 나무하러 가서 산 나무엔 손대지 않고 마른 나무 가지들만 모아 묶어왔다. 어느 날 바람이 몹시 불어 머리에 이은 나무 짐이 흔들려 잘 걷질 못했다. 이 모양을 오복희가 보고 민망히 여겨 그의 나뭇짐을 받아서 대신 운반해 주려하자 사양하면서 ‘성경에 웃사가 어찌하여 죽었오? 손대면 죽어, 내가 그대로 이고 가야지.’ 했다.
그 후 화순읍 공의로 있던 아들 안학수씨가 서울로 옮기게 되었는데도 이철선은 아들을 따라가지 않고 이세종 곁에서 그의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집안에서 하도 오라고 재촉하고 사위인 신석호가 모시려 내려오고 이세종도 따라 가라고 권해서 여러 달 후에 서울로 갔다. 그 후 이세종도 서울의 이철선의 집을 찾아간 일도 있었다.
이세종은 ’한국의 여성 중에서 이철선씨 처럼 잘 믿는 이는 못 보았다.‘고 칭찬했다. 이공의 칭찬을 받은 이는 그밖에 없었던 것 같다.
호세아를 닮은 성자 p149~151
안학수 의사 아들 안병훈의사가 서울가야병원을 했으며 오복희 전도사님도 왕래를 했고 박석현 선생도 1982년 위암 수술을 받기도 했다. 반세기 이상 교제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