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영향력 / 최미숙
토요일 아침, 눈이 부시도록 청명하다. 글쓰기 야외 수업이 있는 날이다. 열한 시 30분 순천서 만나 점심 먹고, 광양 백운산 둘레길을 걷는 일정으로 오늘로 세 번째다. 광주, 목포에 사는 회원은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길을 나섰을 텐데, 약속 장소가 집 앞이라 느긋하게 파김치도 담고 집 청소까지 끝냈다. 동무들 만날 생각에 아침부터 설렌다. 날씨 참 좋다.
가을이 왔다고는 하지만 길거리 나무가 고운 색옷을 입으려면 아직은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약속 장소로 갔다. 식당 앞은 벌써 번호표 받고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으로 붐빈다. 예약해서 다행이다. 서울서 오신 교수님과 양 교장, 곽 선생님이 미리 와 계셨다. 조금 있으니 열한 명 모두가 도착한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매주 화요일 줌으로 본 탓인지 어제 만난 듯 어색하지 않다.
음식이 나왔다. 채소 샐러드를 비롯해 묵무침, 전, 비빔국수, 표고탕수육, 돼지고기 수육, 밥 등 많기도 하다. 배부르게 먹었다.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근처에 일이 있는 최 교장님은 저녁에 찻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일행은 차 두 대에 나눠 타고 포스코 수련원으로 출발했다.
예전에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과 백운산(1,228m) 등반할 때 수련원 뒤에서 출발한 기억이 새롭다. 경사가 심해 꽤나 힘들었는데 지자체에서 편평한 산책길로 만든 모양이다. 가까운 곳에 이런 좋은 둘레길이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한때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어 계곡이 바뀌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될 수 있으면 자연 그대로 모습을 간직하면 좋겠다. 안내문을 보니 3km(45분)와 6km(90분) 길로 구분해 놓았다. 먼 길을 택했다. 드디어 출발이다.
한낮이라 햇빛은 여전한데 숲으로 들어서니 에스 자 구불구불한 길 양옆으로 울창한 편백과 우거진 삼나무가 우리를 맞는다. 넓은 숲에는 일행과 간간이 산책 나온 탐방객뿐이다. 그나마 나무 사이사이 푸른색에서 주황, 빨강으로 서서히 변하는 단풍나무와 여기저기 떨어져 뒹구는 도토리, 바닥에 쌓인 갈색 낙엽이 가을을 알린다. 둘레길이라지만 널찍해 여러 명이 같이 걸어도 될 정도다. 산비탈 나무는 뿌리까지 드러내고, 앙증맞은 다람쥐는 뭐가 그리 바쁜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 대부분 식물은 한 해를 마무리하느라 조용히 잎을 떨구기 시작하는데 노란 털 머위꽃만이 유독 화사하다. 늘씬한 편백나무는 키를 가늠하기 어렵고, 고개를 들고 한참을 올려다보니 서로의 몸을 비킨 잎 사이로 언뜻언뜻 푸른 하늘이 보인다. 바깥과는 공기부터가 다르다. 숲속 가득 피톤치드로 채워진 느낌이다.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사계절 다른 모습으로 탐방객을 맞는 자연을 제대로 즐겼다.
산을 오르거나 걸을 때 빠르게 속력을 내는 편이다. 느린 일행과 보조를 맞추려면 좀 답답하다. 교수님, 곽 선생님과 선두에 섰다. 일행은 삼삼오오 무리 지어 글쓰기와 또 서로에게 궁금했던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한참을 걸어도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여름부터 이어진 가뭄으로 계곡에는 바짝 마른 크고 작은 바위만 보인다. 물까지 흐르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텐데 아쉽다. 봄바다 선생님은 그 돌길을 맨발로 걷는다. 발바닥이 아파 한발도 딛기 힘든데 대단하다. 코스가 갈려진 곳에서 쉬려는데 마침 양 교장에게 기다리라는 전화가 온다. 편평한 바위에 앉아 뻐근한 다리를 풀었다.
곽 선생님께 농작물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조금 있으니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다들 숲 기운을 받았는지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고맙게도 간식까지 준비해 온 회원 덕에 입가심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줌에서는 교수님 강의 듣기 바빴는데 직접 만나 한 사람 한 사람 소리에 귀기울이니 각자의 면면을 알 수 있었다. 글을 읽으며 회원의 성향과 하는 일, 가족을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점을 발견한 시간이었다.
다시 길을 나섰다. 한참을 이야기하며 걷다 보니 포스코 수련원이 보인다. 출발할 때보다 차가 더 많다. 아마 가을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이리라. 저녁을 먹으러 ‘하조 나라’에 갔다. 백운산 아래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자리해 풍광이 멋졌다. 입구에 들어서니 나무에 새긴 표지판과 시구가 먼저 눈에 띈다. 양옆으로 우거진 나무와 꽃, 자잘한 화분이 주인장의 감각을 짐작하게 한다. 맑은 날씨인데도 나무 의자와 바닥에 수북이 쌓인 이파리가 을씨년스럽다. 복향옥 선생님 부부와 아들이 우리를 반긴다. 실내로 가 자리를 잡았다. 맛있는 샐러드와 화덕 피자가 나온다. 조미숙 선생님이 준비한 케잌도 먹었다. 책 출간 이야기도 하며 화기애애했다.
전남 문화 재단에 낸 계획서가 탈락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지만 실력이 부족한 탓이라 생각했다. 더 노력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순천시 보조금과 사비 각 100만 원 총 200만원으로 300권을 주문했다. 나와 양 교장까지 ‘일상의 글쓰기’ 반에서 올해만 네 권의 수필집이 나온다. 서로를 격려한 덕이다.
마지막으로 카페 알록에서 최 교장님과 만났다. 혼자 기다리느라 짜증나고 외로웠을 텐데 미안했다. 차 한 잔을 끝으로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만나 마음을 나눈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한곳을 바라보기 때문에 가능하다. 글쓰기를 같이 하는 동무가 있어 든든하다. 또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오늘 함께 둘레길을 걸었던 것처럼 서로에게 선한 영향을 주며 뚜벅뚜벅 걷다 보면 모두가 글쟁이가 되는 날이 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