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동생 진석이 / 고혜숙
2008년 2월,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갓 마흔을 넘긴 해였다. 유달 공원묘지 납골당에 잠들어 있다. 그는 항상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한다. '어쩜 이렇게 잘 생겼을까?' 내 동생이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배우 원빈을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던 녀석이다. 그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생김새가 비슷했다. 분위기는 영 딴판이었다. 원빈의 눈빛은 왠지 우수에 젖어 있는 것 같았지만, 진석이 얼굴에는 언제나 미소가 가득했다.
진석이는 좀 별난 아이였다. 나는 시킨 대로, 한눈팔지 않고 산다. 그 녀석은 제멋대로,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모험심이 많았다고나 할까? 그는 막내도 다닌 적 없는 유치원 졸업생이다. 그 당시 인기 있었던 <꼬마신랑 김정훈>처럼 꾸며서 유치원 데리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던 이모가 있었다. 나비 넥타이에 양복차림으로 찍은 사진을 보고 우리는 그를 부러워했던 것 같다. 형제들 중에서 특별히 예쁨받았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전문대학을 두 달도 못 채우고 때려치웠으니 고졸이다. 엄마가 광주에 한살림 차려주고 왔는데 이불 보따리까지 들고 내려와 버렸다. 학교라고 가서 보니 자기도 한심한데 다른 애들은 한 술 더 뜨더란다. 그런 애들 사이에서 뭐 배울 게 있겠나 싶었다나? 솔직히 장학금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궁금하긴 했다. '도대체 어떤 학교길래 저 녀석한테 장학금까지 줬을까?' 한 마디 의논도 없이 학교를 때려치웠다니 식구들 모두 어이가 없었다. 재수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저 혼자 힘으로 세상 살아갈 수 있는 만큼은 다 배웠다고.
학교를 그만두고 나니 병역 판정 검사를 받아야 했다. 뜻밖에 현역 대상자에서 제외되었다. 결핵 때문이었다. 해병대 출신 막내가 놀리곤 했다. 방위는 유디티라고.
"유디티?"
"우리 동네 특공대라고."
"방위가 특공대? 인자 임자도에는 간첩도 안 올 건대 누가 온다고."
"귀신들이랑 목총 들고 싸웠다요."
"목총 갖고 귀신을 상대해? 해병대보다 더한 군인이었네."
"그래서 작은형 앞에서 저는 명함도 못 내밀었어요. 귀신 보이면 입으로 빵야빵야 그랬대요."
수중 파괴대 유디티가 우리 집에서는 졸지에 웃음거리가 돼버린 거다.
내가 학교를 서너 곳 옮겨다니는 동안, 진석이는 여러 우물을 파고 다녔다. 결혼 후 금방을 차렸다. 어느 틈에 세공 기술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잘 나간다 싶었는데, 3년쯤 후에 가게를 넘겼다. 횟집을 몇 년 하다가 광주로 이사를 갔다. 치킨 가게를 하면서 새로운 기술을 익혔다.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공장을 열었다. 처음에는 물량이 많은 다른 공장의 일을 넘겨받아서 했다. 하청의 하청이었던 거다. 마침내 직접 주문받아서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직업을 바꾸는 일은 없겠구나 생각했다.
11월 이맘때였던 것 같다. 느닷없이 진석이 사고 소식이 날아왔다. 현호 엄마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어쩔 줄 몰랐다. 병원에 갔더니 그녀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너무 많이 울어서 넋이 나간 것 같았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사고를 당했단다. 석 달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의식불명 상태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시체가 되어서 나온 동생을 본 순간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내 동생이 죽다니. 이제 겨우 마흔인데. 화장터에서 시신을 넣은 관을 화로 속에 넣을 때에야 비로소 동생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왔다. 이제는 영영 이별이구나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엉엉 울었다.
엄마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흥을 돋우는 데 우리 엄마만 한 사람이 없었다. 구성지고 찰진 목소리가 사람들 마음을 당겼다. 창이나 민요뿐만 아니라 <처녀 농군>이나 <고장 난 벽시계> 같은 노래도 즐겨 불렀다. 우리 집은 놀러 온 사람들로 들썩이는 날이 많았다. 진석이가 엄마의 끼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가수를 꿈꾸기도 했을 정도다. 노래방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김광석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언제나 덧붙이던 말이 있다. "누나, 우리 재밌게 살세." 내가 좀 멋없게 사는 것 같다는 뜻이었으리라.
이제는 형제들끼리 모이면 종종 진석이 뒷담화를 한다.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그늘진 엄마 얼굴이 조금 펴질 때가 있다. "내 새끼들 다 모탱께 좋다. 오늘은 나도 노래 한 자리 할란다." 막내가 잽싸게 녹음을 시작한다. 언제 또 엄마 노래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세월아 너는 어찌 돌아도 보지 않느냐...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예전처럼 목청껏 부르지는 못해도 가락은 살아 있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엄마의 목소리에 가슴이 아렸다.
지난여름, 서른두 살 된 현호가 우리 집에 왔다. 내년 봄에 결혼한다고 했다. 마치 내 아들이 결혼하겠다고 말한 것처럼 기뻤다. 잠시 머뭇머뭇 하더니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새아버지를 결혼식에 모시고 싶어요. 까칠하게 굴었던 저를 따뜻하게 보살펴 주셨거든요."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감정이 마음속에서 요동쳤다. "네 마음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너 좋으면 우리도 뭐든 좋다." 며칠 뒤 현호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형님, 현호 결혼식 때 저 혼자 참석할 거예요. 현호가 새아버지 이야기했다는데 내가 그렇게 안하겠다고 했어요. 상견례 자리야 함께 갔지만 결혼식은 혼자 치르겠다고 그분한테도 말해 두었어요." 명절 전날이면 언제나 아들 딸 데리고 우리 부모님 뵈러 오는 현호 엄마. 자기는 이제 며느리가 아니라 딸이라면서 갈비와 전까지 챙겨 온다.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지!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말할 것 같은 얼굴이 떠오른다. "누나, 나 결혼 잘 했제?" 그의 명랑성이 몹시 그립다.
첫댓글
현호에게 저를 대입했더니
너무 슬픕니다.
우리가 감당해야할 슬픔 중 가장 큰 것이 사별인 것 같습니다. 어머님 노랫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기까지는 긴 시간이 흘렀겠지요. 조카도 잘 자랐다니 다행입니다.
정말 마음 아프고 그립겠네요.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갑작스레 동생을 떠나보낸 상황이 참 아프네요. 오래 기억해 주는 가족이 있어서 평안할 거 같아요.
동생은 누나가 멋지게 사는 것을 보고 싶어할 겁니다. 즐겁게 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