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무술년(1598년) 7월에...
무술년(1598년) 7월에 경리 양호(楊鎬)가 파면되고 다시 만세덕(萬世德)이 대신 경리가 되었다. 당시 형개의 참모관인 병부 주사(兵部主事) 정응테(丁應泰)가 양호의 잘못한 일 20여 건을 보고해서 파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임금은 여러 경리들 중에서도 적을 파하는데 그가 가장 많은 힘을 썼으므로, 좌의정 이원익을 보내어 구원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8월에 드리어 그가 떠나가게 되자 임금은 몸소 홍제원(弘濟院)까지 나가 전송하며 석별의 눈물을 흘렸다. 아직까지 만세덕은 도착하지 않았다.
9월에 형개는 또 군사를 나누어 주둔했다. 마귀는 울산을 맡게 하고, 동일원은 사천을 맡게 했다. 유정은 순천, 그리고 진인은 수로(水路)를 맡게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동시에 진격했으나 모두 이롭지 못했다. 특히 동일원의 군사는 적에게 패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
◉ 10월에 유 제독(劉提督)은...
10월에 유 제독(劉提督)은 다시 순천에 웅거한 적을 쳤고, 통제사 이순신은 구원병을 바다 위에서 크게 이겼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순신은 전사했다. 적장 평행장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부산 · 울산 · 하동 등 바닷가에 주둔하고 있던 적병도 모두 퇴병했다. 행장은 순천 예교(芮橋)에 성을 쌓고 굳게 지키고 있었다. 유정이 중국 대병을 거느리고 쳤으나 전세가 불리해서 순천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나가 쳤다.
이순신은 진인과 함께 해구(海口)를 끼고 몰아나갔다. 이에 행장은 하는 수 없어 사천의 적장 심안돈오에게 구원을 청했다. 수로로 와서 합세하는 돈오를 이순신이 진격하여 대파시키고, 적의 배 2백여 척을 불사르고 무수한 적병을, 혹은 죽이고 혹은 사로잡는 대전과를 세웠다. 그리고 또 달아나는 적을 추격해서 남해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순신은 이 싸움에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힘써 싸우다가 날아온 적탄에 가슴을 맞았다. 좌우가 황급히 그를 부축해서 장중으로 들어갔다. 이때 이순신은 가만히 입을 열어,
“지금은 싸움이 심히 급한 때이니 아예 내가 죽었단 말을 내지 말라”
하고 한마디를 남긴 채 애석하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순신의 조카 이완(李莞)은 본래 담략과 국량(局量)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순신의 말대로 그의 죽음 소식을 발표하지 않고 이순신의 명령으로 더욱 싸움을 독려했으므로, 군중에서도 그의 죽음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진인이 탄 배가 적에게 포위되자 이완은 배를 몰아 헤쳐 들어가 구원했다. 진인은 이순신이 자기를 구원한 줄로만 알고 사람을 보내어 사례하다가 비로소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자에 앉았다가 몸을 땅에 던지면서,
“나는 통제사가 와서 구원해 주었거니 여겼는데 세상을 떠났다니 이게 웬말인가?”
하고 큰 소리로 통곡하니, 군중이 모두 소리를 내어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바닷속에 곡성이 진동했다. 행장은 우리 수군이 적병을 쫓아 그의 병영을 지나간 틈을 이용하여 뒤로 빠져 달아났다. 이보다 앞서 7월에 왜추(倭酋) 평수길(平秀吉)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바닷가에 둔쳤던 적들은 점차로 물러가기 시작했다.
한편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들은 우리 군사와 중국 군사들의 영책에는 곡성이 끊이지 않아 마치 자기들의 어버이를 잃은 듯 애통함을 이기지 못했다. 영구(靈柩)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이 곳곳에서 제물(祭物)을 차려가지고 따라나서며 울었다.
“공께서 우리를 살렸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시고 어디로 가신단 말입니까?”
하고 수레를 붙들고 우니, 길이 막혀 영구가 나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길에서 보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을 증직(贈職)했다.
형개가 이 해상(海上)에 사당(祠堂)을 지어 충혼(忠魂)을 제사 지내자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해변 사람들이 서로 의논해서 사당을 짓고 이를 ‘민충사(愍忠祠)’라 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다. 장사꾼들과 어선(漁船)들도 이곳을 왕래할 때마다 꼭 제사 지내고 간다 한다.
-----
◉ 이순신의 자는 여해(汝諧)요
이순신의 자는 여해(汝諧)요 본은 덕수(德水)이다. 조상에 변(邊)이란 분이 있어 벼슬이 판부사(判府事)에 이르렀는데, 강직하기로 이름이 있었다. 그의 증조 거(?)는 성종(成宗)을 섬겼다. 연산(燕山)이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 거는 강관(講官)이 되었는데, 너무 엄하다 해서 연산에게 미움을 받았다. 일찍이 장령(掌令)이 되었을 제, 탄핵하기를 서슴지 않으니, 백료(百僚)들이 그를 꺼려 ‘호랑이 장령’이란 별명까지 붙였다. 조부 백록(百祿)은 가문의 덕으로 음사(蔭仕)를 지냈고, 아버지 정(貞)은 벼슬하지 않았다.
순신은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고 씩씩하여, 여러 동무들과 놀 때에도 나무를 깎아 활을 만들어가지고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지나가면 그 사람의 눈에 대고 활을 쏘려 했기 때문에, 나이 많은 어른들도 이를 꺼려 그 집 문 앞을 잘 지나 다니지 못했다 한다.
차차 장성하자 과연 활쏘기를 잘해서 무과(武科)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조상들은 본래 문관(文官)이었는데, 유독 그만이 무과에 올라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에 보직되었다. 한번은 병조판서 김귀영(金貴營)이 자기 서녀(庶女)가 있어 이순신에게 첩으로 주고자 하였으나 순신은 이를 즐겨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까닭을 묻자 그는,
“내가 이제 처음 나가 벼슬을 하는데 어찌 권문(權門)에 장가들어 거기에 의지할 수 있으랴!”
하고 물리 쳤다. 어느 날 병조정랑 서익(徐益)은 자기와 친근한 사람이 훈련원(訓鍊院)에 있었는데, 서열을 건너뛰어 천거해서 올려 쓰려 했다. 이때 이순신은 훈련원 장무관(掌務官)으로서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서익이 이순신을 불러 힐문했으나 그는 조금도 얼굴을 변치 않고, 사리에 옳지 않은 짓이라고 직변(直辯)했다. 서익이 크게 노하여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판이었는데도 그는 조금도 동요됨이 없었다. 서익은 본래 성품이 사나운 사람으로 동료들도 그를 꺼려서 말다툼을 못하는 터였다. 계하(階下)에서 이 거동을 바라보던 하리(下吏)들은 서로 쳐다보고 혀를 내밀며,
“이 양반이 정랑(正郎)에게 항거하다니 앞길을 생각하지 못하는 분인 모양이로군.”
하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날이 저물도록 이순신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서익은 부끄러운 빛으로 이순신을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식자(識者)들 간에는 이순신의 이름이 차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옥에 갇혔을 때 장차 무슨 변고가 생길지 몰라 옥리(獄吏)들이 그의 조카 분(芬)을 보고 뇌물을 쓰면 나올 수 있겠다 하였으나, 이순신은 이 말을 듣고 조카를 불러,
“내가 죽으면 죽었지 어찌 도리에 어그러진 일을 해서 살기를 도모한단 말이냐?”
하고 꾸짖었다 한다. 그의 지조가 얼마나 곧은지를 이만하면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었고, 용모가 단아하고 수려하여 근엄한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는 담기가 있에 몸을 잊고 싸우다가 순국(殉國)하였으니, 이는 평소부터 그의 정신 속에 쌓여온 수양의 결정(結晶)이었다.
그에게는 희신(羲臣) 요신(堯臣)의 두 형이 있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그는 두 형들의 자녀를 자기 혈육과 같이 사랑으로 길렀고, 장가들고 시집보내는 것도 자기 자녀보다 먼저 서둘러 하곤 했다.
이러한 재질을 가진 그가 명(命)을 타지 못하여 재주의 한 가지도 제대로 베풀어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으니, 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
◉ 그는 통제사로 있을 때...
그는 통제사로 있을 때 주야로 마음을 스스로 단속하여 갑옷을 벗는 일이 없었다. 견내량(見乃梁)에서 적과 상치한 지 오래되던 어느 날 밤, 배는 모두 닻을 내리고 달밤은 낮과 같은데, 그는 갑옷을 입은 채 북을 베고 잠시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좌우를 불러 소주를 가져오라 했다. 그는 술 한 잔을 따라 마시더니 제장들을 불러오라 했다.
“오늘밤 달이 이렇듯 밝으니 필시 적병이 간계를 부릴 듯 하다. 달이 없는 날이면 반드시 우리를 엄습해 왔으니 이렇게 달이 유난히 밝은 날도 공격해 올 듯싶다. 제장들은 각별히 경비하여 소루(疎漏)함이 없도록 하라.”
이에 호령의 나팔을 불어 모든 배의 닻을 올리게 하고 또 척후를 시켜 적정(敵情)을 살피라 했다. 얼마 되지 않아 척후가 급히 와서 보고했다.
“적들이 진격해 옵니다.”
이때 달은 서산에 걸려 산 그림자가 바닷속에 거꾸로 있어 그곳은 약간 어두웠다. 그 위를 적선이 새까맣게 덮쳐 오고 있었다. 이를 기다리고 있던 이순신의 군사가 적선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일제히 대포를 쏘고 함성을 올리니 아군의 여러 배가 모두 이에 호응했다.
적은 우리가 준비하고 있음을 알고 더 접근치 못한 채 일시 조총을 쏘았으나, 소리만 바닷속에 진동할 뿐 탄환은 모두 물 위에 비처럼 떨어졌다. 결국 적들은 감히 범하지 못하고 패해 돌아갔다. 이것을 보고 제장들은 모두 그를 신(神)이라 했다.
-----
◉ 무인년(1578년) 가을.
무인년(1578년) 가을. 장경성(長庚星)이 하늘에 뻗쳤는데, 그 모양이 마치 흰 비단과 같았다. 이 별은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향해 그대로 뻗쳐 있다가 몇 달이나 되어서 없어졌다. 무자(1588년) 연간에 한강(漢江) 물빛이 사흘 동안이나 붉었었다. 신묘년(1591년)에 죽산(竹山) 태평원(太平院) 뒤에 있던 돌 하나가 저절로 일어섰다. 또 통진현(通津縣)에서는 누워 있던 버드나무가 다시 일어났다. 이런 일이 있는지라, 민간에서는 장차 도읍을 옮길 징조라는 유언이 전해졌다.
또 동해 바다에서 나던 물고기가 서해 바다에서 나더니 점점 한강으로 올라왔다. 해주(海州)에서는 본래 청어(靑魚)가 났었는데 근 십여 년 동안 도무지 나지 않았다. 이것이 요동(遼東) 바다로 옮겨가 요동 사람들은 이것을 신어(新魚)라고 불렀다. 또 요동 8참(站)에 사는 사람들이 어느 날 모두 놀라서 하는 말이,
“조선(朝鮮)에 적이 침입해 와서 조선 왕자가 교자를 타고 압록강에 이르렀다.”
하고 말을 서로 전하니, 이에 노약(老弱)들이 산에 올라가는 등 인심이 어수선했다. 그런 지 수일 후에야 비로소 안정되었다. 또 우리나라 사신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오다가 금석산(金石山)에서 하씨(河氏)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자게 되었다. 그 주인이 사신을 보고 말했다.
“조선 역관(譯官)이 나보고 하는 말이, 당신 집에 3년 된 술과 5년 된 술이 있다 하니 그걸 아끼지 마시오. 오래지 않아서 반드시 군사들이 쳐들어올 거요. 그때는 비록 술이 있어도 누구와 같이 먹으려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요동 사람들은 조선에 딴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해서 모두 놀라고 의심했다 한다.
사신이 돌아가 그 일을 조정에 아뢰었다. 조정에서는 역관이 말을 꾸며 일을 만들어가지고 본국을 무함(誣陷)한다고 생각했다. 몇 사람을 체포해서 인정전(仁政殿) 대뜰 아래 꿇려 놓고 무릎에 화형(火刑)을 썼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죽었다. 이는 신묘 연간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듬해에 결국 왜변(倭變)이 있었으니 이는 큰 난리가 장차 생길 것을 안 것이다.
사람은 비록 이를 깨닫지 못한다하더라도 조짐으로 나타난 그 형상은 한 가지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또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고 태백(太白 ; 金星)이 하늘에 뻗치는 등 이런 일이 없는 해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도 보통 일로 여겨 왔다.
또 서울 성안에는 항상 검은 기운이 있었다. 그것은 연기도 아니요, 안개도 아니었다. 이것이 땅에 서리고 하늘에 닿아 이렇게 하기를 십여 년이나 했다. 그 밖의 변괴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러고 보니, 하늘이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가위 깊고 간절하다 할 것이나, 사람들이 능히 살피지 못할 뿐이다.
두시(柱詩)에 이런 구절이 있다.
長安城頭頭白烏 _장안성 성머리 머리 흰 새,
夜飛延秋門上呼 _밤이면 연추문 위에 날아와 우네.
又向人家啄大屋 _사람의 집에 와서 대들보를 쪼니,
屋底達官走避胡 _그 집 높은 벼슬아치 달아나 오랑캐 피하네.
이것도 역시 이상한 조짐을 기록한 시(詩)다. 임진년(1592년) 4월 17일에 적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조야(朝野)가 황황했다. 이때 갑자기 괴상한 새가 궁중 후원에서 울더니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그 새는 혹 멀리 갔다가 혹 가까이도 왔다. 한 마리 새가 우는데 그 소리는 온 성중에 가득했다. 이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날이면 날, 밤이면 밤, 그 새는 잠시도 그치지 않고 울었다.
이러기를 십여 일 했는데, 임금의 행차는 서울을 떠나갔고 왜적들이 성으로 들어왔다. 궁궐과 묘사(廟社)와 모든 민가는 일제히 비워졌다. 아하! 이 또한 괴상한 일이로다.
또 이해 5월, 내가 임금의 행차를 따라 평양에 갔을 때였다. 나는 김내진(金乃進)의 집에 묵고 었었다. 내진이 어느 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연전에 표범이 성중으로 들어온 일이 있고, 또 대동강 물이 붉은 적이 있었습니다. 동쪽 가는 몹시 흐리고, 서쪽 가는 조금 맑았었지요. 그러더니 오늘날 이런 변고가 생기는군요.”
이때 아직 적병은 평양에 이르지 않았을 때라, 나는 이 말을 듣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 역시 심중으로는 몹시 불쾌했다. 이러고서 또 얼마 안 되어 평양이 함락되었다. 대개 표범이란 역시 야수(野獸)다. 이것이 성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 마치 춘추(春秋)에 구욕새가 와서 집을 짓고, 여섯 마리 익새가 날아가며 사슴과 물여우같은 짐승 등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었다는 말과 같다. 하늘이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이 분명하고, 성인(聖人)의 경계가 이같이 깊다.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랴. 어찌 삼갈 일이 아니랴!
또 임진년 봄과 여름 사이에 목성(木星)이 미기(尾箕)를 지키니 미기는 곧 연분(燕分)이라, 옛날부터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연(燕)과 같다고 해오던 터였다. 이때 적병들이 날로 밀어닥쳐 인심이 흉흉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어느 날 임금이 교서를 내려 말했다.
“복성(福星)이 지금 우리나라에 있으니 적을 두려워할 게 없다.”
이것은 이런 핑계로써 인심을 진정시켜 보려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런 뒤에 서울은 비록 잃었어도 마침내는 능히 예전대로 회복해서 옛 도읍으로 돌아갔다. 또 적추(賊酋) 수길(秀吉)은 마침내 제 흉칙한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저절로 죽었으니, 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모두 하늘의 뜻 아님이 없는 것이다.
왜인은 몹시 간교한 놈들이었다. 그들이 용병(用兵)하는 것은 하나도 사술(詐術)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임진년 일은 서울에만 중점을 두었고 평양에는 너무 소홀했었다.
우리나라는 택 년 동안 승평(昇平)한 세월이 흘러 백성들이 군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졸지에 적병이 왔다는 말을 듣고 보니 창황하고 어찌할 줄을 몰라 원근이 모두 넋을 잃고 우두커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병은 파죽(破竹)의 형제를 타고 열흘 동안에 서울에 몰아닥쳤다. 우리는 지혜가 있어도 꾀를 낼 수 없었고 용맹이 있어도 이것을 써보지 못했다. 인심은 무너져 수습할 길이 없었다. 이는 병가(兵家)에서 좋은 꾀를 냈어도 적의 간사한 계교에는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서울에 중점을 두었다고 말한 것이다.
적들은 상승(常勝)의 위엄을 믿고 저들의 뒤는 돌아다보지 않았다. 이리하여 여러 도로 흩어져 나와 저들 맘대로 방자히 굴었다. 대체 군사란 나누면 형세가 약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법이다. 천 리에 영책을 연하여 오랫동안 날짜를 끄니, 이는 이른바 아무리 강한 화살이라도 그것이 멀리 가고 보면 낡은 헝겊 하나도 뚫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 또 장숙야(張叔夜)가,
“여진(女眞)이 군사 쓰는 법을 알지 못하는구나. 외로운 군사가 깊이 들어가고서 능히 살아서 돌아갈 수가 있는가.”
라고 한 말과도 같다. 이 까닭에 증국 군사 4만 명으로 평양을 쳐서 깨쳤고, 평양이 깨지자 여러 도에 있는 군사들은 맥을 추지 못했다. 비록 서울만은 그대로 점령하고 있었으나 대세(大勢)는 이미 기울어졌었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우리 백성들이 곳곳에서 적을 맞아 공격해서 적의 수미(首尾)가 서로 통하지 못하게 되니 드디어 적은 퇴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양에는 소홀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아하! 적이 실수한 것은 오직 우리에겐 다행한 일이었다. 정말 우리나라에 훌륭한 장수라도 있어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때를 보아 기계(奇計)를 쓰고, 긴 뱀과 같은 적의 영책을 쳐서 저들의 어깨와 허리를 잘라 놓아 이것을 평양 싸움에 써먹었더라면 그들의 대병을 모두 무찌를 수가 있었을 것이다. 또 이런 계교를 서울 이남에서 썼더라면 그들의 수레바퀴 하나도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한 연후라야 적은 마음이 놀라고 담이 부서져저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난 뒤에라도 감히 우리를 바로 보지 못하여 다시는 뒷근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는 쇠잔한 기운을 겨우 지탱했을 뿐, 능히 이런 일을 하지 못했다. 또 중국의 여러 장수들도 이렇게 해야됨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적으로 하여금 조용히 물러가게 했을 뿐, 조금도 징계하고 두려움을 주지는 못했다.
이에 아주 하책(下策)으로서 그들을 봉공(封貢)하려 했으니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랴. 어찌 애식한 일이 아니랴.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이가 떨리고 주먹이 쥐어지는 일이다.
-----
◉ 옛날 조조는...
옛날 조조(전한 때의 정치가-역주)는 임금에게 병사(兵事)를 이렇게 말했다.
“군사를 쓰고 싸움에 임해 싸우는 데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지형(地形)을 얻을 것, 둘째는 군사들이 명령에 복종할 것, 셋째는 병기는 좋은 것을 쓰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군사를 쓰는 대요(大要)인 동시에 승부가 여기에서 결정되는 것이니 장수된 자가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과연 왜병은 공격하는 싸움에도 익숙하고 병기도 정밀했다. 옛날에 없던 조총(烏銃)이 있었으니, 그 멀리 가는 힘과 명중(命中)하는 것이 화살보다 배가 더하다. 우리 군사와 만일 넓은 들판에서 만나 양진(兩陣)이 서로 대해서 법도대로 교전한다면 그들을 대적하기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대개 우리가 쓰는 활이란 백 보(步)밖에 못 가는데 조총은 수백 보를 나간다. 그런데다가 바람 속에 우박처럼 쏟아지니 그것을 저당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먼저 지형(地形)을 골라서 산골짜기 험한 곳과 수목이 우거진 곳에 미리 활 쏘는 군사를 매복시켜, 적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고 있다가, 좌우에서 한꺼번에 활을 쏘고 보니 저들에게 비록 조총이나 창도(槍刀)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쓸 사이도 없이 크게 이겼던 것이다.
이제 한 가지 일을 들어서 증거로 삼겠다. 적은 임진년에 서울에 들어왔다. 날로 성 밖으로 노략질해 나갔다. 심지어 원릉(圓陵)까지도 보존하지 못했다. 고양(高陽) 사람 진사(進士) 이노(李櫓)는 활을 잘 쏘고 담력도 있었다.
어느 날 동지 두 사람과 함께 활을 가지고 창경릉(昌敬陵)에 들어 갔었다. 뜻밖에 적의 대부대가 나오더니 골짜기 속에 가득 찼다. 이노 등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등나무 가지가 우거진 숲속으로 몸을 숨겼다. 적들은 그들을 찾으려고 가까이 와서 기웃거렸다. 노(櫓) 등은 그 속에서 활을 당겼다. 시위 소리가 나면서 적은 번번이 맞아 거꾸러졌다. 이들은 다시 자리를 옮겼다. 이리저리 옮겨 숨으면서 적을 쏘아 죽이니, 적들은 그들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이로부터 적들은 숲만 보면 도망해 달아났기 때문에 능(陵)은 보존할 수가 있었다. 이것으로 보면, 지형을 얻고 못 얻는 데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이 상주(尙州)에 있을 때, 신입과 이일 등이 만일 이런 방법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먼저 토천(兎遷)과 조령(鳥嶺) 3, 40리 사이에 활 쏘는 군사 수천 명을 매복해 두어서, 그 수효를 적들에게 알리지 않았더라면 능히 적을 대적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합(烏合)의 무리와 훈련되지 않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더욱이 험한 요새지(要塞地)는 버려둔 채 평지에서 버티고 있었으니 패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내가 이것은 병기(兵機)에서 자세히 말했지만, 여기에 또 한 번 특별히 기록하는 것은 뒷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