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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
참회하는 법
"선남자여, 혹 부처님께서 세간에 머무시거나 혹 불멸 후에나 혹은 말법 시에 중생들이 대승의 성품을 갖추어 부처님의 비밀한 대원각의 마음을 믿어서 수행하고자 한다면, 만일 가람(伽藍)에 있게 되면 무리 중에 편안히 거처하며, 반연되는 일이 있으면 분에 따라 살펴 생각해야 함은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느니라.
만일 별다른 일의 인연이 없으면 곧 도량을 건립하되 마땅히 기한을 정해야 한다. 만일 긴 기한을 세우면 백 이십 일이요, 중간 기간은 백 일이요, 짧은 기한은 팔 십일이니 깨끗한 거처에 안치하도록 한다.
만일 부처님께서 현재 하시면 마땅히 바르게 사유하며,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이면 형상을 시설하고 마음에 두며 눈으로 상상하여 바르게 기억하되 여래께서 상주하시던 날과 같이하여 온갖 번(幡)과 꽃을 달고 삼 칠일 동안 시방 모든 부처님의 명자(名字)에 머리를 조아려 슬피 참회를 구하면 좋은 경계를 만나 마음이 편안함[輕安]을 얻으리라. 삼칠일을 지나도록 한결같이 생각을 거두어야 하느니라.
만일 첫여름을 경과하여 석 달 동안 안거하려거든 마땅히 청정한 보살의 그치고 머무름이 되어, 마음이 성문을 여의며 무리에 의하지 않도록 하라. 안거하는 날에 이르러 부처님 앞에서 말씀드리되, '나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인 아무[某甲]는 보살승(菩薩乘)에 걸터앉아 적멸의 행을 닦아서 청정한 실상에 함께 들어가 주지하여 대원각으로 나의 가람을 삼고 몸과 마음이 평등 성지(平等性智)에 안거하여 열반의 자성이 얽매임이 없으므로 이제 내가 공경히 청하옵니다. 성문에 의지하지 않고 시방의 여래와 대보살들과 함께 석달 동안 안거하여 보살의 위없는 묘각을 닦는 큰 인연이 된 까닭에 무리에 얽매이지 않겠습니다' 하라. 선남자여, 이를 보살이 시현한 안거라 이름하니 세 가지 기한의 날을 지내면 가는 데마다 걸림이 없으리라.
(<원각경 > ‘제11. 원각보살장’)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1. 다음은 노아의 아들들의 족보이다. 노아의 아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다. 홍수가 난 뒤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다.
2. 야벳의 자손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이다.
3. 고멜의 자손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이다.
4. 야완의 자손은 엘리사와 스페인과 키프로스와 로도스이다.
5. 이들에게서 바닷가 백성들이 지역과 언어와 종족과 부족을 따라서 저마다 갈라져 나갔다.
6. 함의 자손은 구스와 이집트와 리비아와 가나안이다.
7. 구스의 자손은 쓰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이다. 라아마의 자손은 스바와 드단이다.
8. 구스는 또 니므롯을 낳았다. 니므롯은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이다.
9.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도 힘이 센 사냥꾼이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시기에도 힘이 센 니므롯과 같은 사냥꾼"이라는 속담까지 생겼다.
10. 그가 다스린 나라의 처음 중심지는, 시날 지방 안에 있는 바빌론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이다.
11. 그는 그 지방을 떠나 앗시리아로 가서,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를 세우고,
12. 니느웨와 갈라 사이에는 레센을 세웠는데, 그것은 아주 큰 성이다.
13. 이집트는 리디아와 아남과 르합과 납두와
14. 바드루스와 가슬루와 크레타를 낳았다. 블레셋이 바로 크레타에게서 나왔다.
15. 가나안은 맏아들 시돈을 낳고, 그 아래로, 헷과
16. 여부스와 아모리와 기르가스와
17. 히위와 알가와 신과
18. 아르왓과 스말과 하맛을 낳았다. 그 뒤에 가나안 족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19.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 그랄을 지나서, 멀리 가사에까지 이르렀고, 거기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서, 라사에까지 이르렀다.
20. 이 사람들이 종족과 언어와 지역과 부족을 따라서 갈라져 나간 함의 자손이다.
21. 야벳의 형인 셈에게서도 아들딸이 태어났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다.
22. 셈의 자손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다.
23. 아람의 자손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이다.
24.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다.
25. 에벨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한 아들의 이름은, 그의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다고 해서 벨렉이라고 하였다. 벨렉의 아우 이름은 욕단이다.
26.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27.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28.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29.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다. 이 사람들이 모두 욕단의 자손이다.
30. 그들이 사는 곳은 메사에서 스발에 이르는 동쪽 산간지방이다.
31. 이 사람들이 종족과 언어와 지역과 부족을 따라서 갈라져 나간 셈의 자손이다.
32. 이들이 각 종족의 족보를 따라 갈라져 나간 노아의 자손 종족이다. 홍수가 난 뒤에, 이 사람들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와서,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창세기> 10장)
불교 공부하신 분들 책을 읽거나 동영상 강의를 보면 이런 이야기들이 나온다. 불경은 진짜 부처님 말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부처 당시에는 말로만 전달되다가 나중에 문자로 기록되면서 편집이 있을 수 있기에 가짜라는 것이고, 불경은 잘 모르겠지만 오래전 힌두교 경전을 지금도 그대로 외우고 있는 것을 보면 인도 풍습상 진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 글과 관련해 주의 깊게 생각해 볼 것은 세 가지다.
먼저 부처가 절을 짓게 한 것이 진짜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도 사찰 발원을 중요시 여기는 데 이 말은 부처의 말이 아니고, 부처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는 사람들의 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숲에서 머무는 것보다 특정 공간이 있으면 지속적으로 수행을 못하는 사람들도 세력 안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부처가 죽은 후 자신을 위해 형상을 만들고 기도를 부탁했다는 부분이다. 망자를 위한 기도는 망자에게는 아무 영향이 없고 오로지 산자를 위한 것이다. 자아가 없다고 열심히 설법한 부처가 과연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어디 자료에는 했다는 말이 있을 수 있다. 다만 내가 봤어도 망각했을 수도 있다. 모든 기억은 현재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석 달의 안거다. 이는 기록에 있다고 한다. 우기를 맞아 동굴 같은 곳에 모여 있어야 했는데, 이동하기 힘드니 부처도 제자들도 함께 수행에 전념했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향한 정진이라는 목표도 있었겠지만, 닫힌 공간에서 압박감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일 것이다. 즉 호흡에만 집중하여 호흡을 안정되게 하는 것, 호흡이 자아를 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좋은 방법이다. 삶과 죽음은 대략 1분의 호흡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불교를 잘 모르면서 이런 글을 썼다. 공부 많이 한 분들한테는 죄송하다. 그래도 현재의 기억으로 글을 써야 했기에 이렇게 썼다.
오늘 창세기는 족보 이야기다. 누가 누구를 낳았고. 이 글을 보면서 이런 풍경이 생각났다. 신학을 공부한 분들과 잠깐 있어 보면 족보를 많이 따지는 걸 느낀다. 어느 신학대 출신인지, 그 신학대는 인가 대학인지 무허가 신학교인지. 말로는 표현을 안 하지만 표정으로는 보인다. 서열이 매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자연스러운 게 아마 성경 영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교파도 그리 있는 건가?
<바가바드 기타> 유트브 강의를 조금 들어보았다. 강사는 마지막에 간디를 등장시켰다. <바가바드 기타>처럼 살기 힘든데, 그 중에 한 사람이 간디라는 것이다. 그런 간디는 종교를 나누지 않고 서로의 존중을 말했다. 이게 말이 안 된다는 논리에 따라 힌두교 극우파에게 암살을 당했다. 이게 현실인 것 같다. 합하지 말고 하나라고 말하지 말고 종교의 보편성 같은 것도 말하지 말고, 그저 영역 터치만 하지 말며 각자의 믿음대로 살면 되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하나만 믿으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각자의 교파에 따라 자기 것만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럼 신천지는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믿는 것은 좋은데, 은밀하고도 술수를 부리는 전도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모든 종교가 전도나 포교 등의 명목으로 길거리이든 카페이든 술자리이든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전략전술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종교 경전도 값싸게 공급되어 있고, 인터넷만 조금 검색해도 알 수가 있고, 이해를 돕기 위한 관련 서적도 많은 이 시대에 진리 인도가 아니라 세력 확장 혹은 다른 생각의 비존중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전도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도를 하지 못하면 포섭을 하지 못하면 어려움에 처한다는 그 논리는 인간의 본성일 뿐 영혼의 영원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니 전도 따위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기가 좋으면 자기만 열심히 믿고, 선한 모습을 보여주어라. 그럼 감화를 입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 아닌가. 더 나아가면 부처의 말대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게 인생살이에 제일 편하다. 서로를 속박하는 불편한 전도, 그 틈을 코로나가 노렸던 것 같다. 과장된 감정이입이지만 과감히 써봤다.
<자연의 노래를 들어라>에 나오는 글이다.
[우리가 복잡한 자연의 소리-생물음과 지구음-를 인간의 소음-인간음-으로 뒤덮는 동안 야생의 자연 자체도 바뀌고 있다. 우리도 물론 이 사실을 점차 의식하지만, 세계 경제가 성장만을 추구하고 그 이면은 무시하려는 상황에서 내가 수집한 음향들을 통해 야생이 얼마나 줄어들고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서로가 세력 팽창을 위해 열심히 말하는 인간음이 지구를 뒤덮는 동안 우리 지구는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다음 글을 또 보자.
[줄어드는 야생의 서식지와 늘어나는 인간의 요란한 소음은 동물들이 생존을 위해 사용하는 소통 채널에 과부하를 일으키고 있다. 나아가 우리는 정신건강에 꼭 필요한 야생의 자연을 체험할 기회를 잃고 있다. 야생은 현대인이 살아가면서 얻기 어려운 뿌리 깊은 지혜의 산실이다. 인간의 소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야생의 소리는 가히 화려한 교향곡이다. 생태학자 빌 매키번은 언젠가 과거의 정취를 회상하면 이런 말을 했다. “현재의 삶에서 황야를 멀어지게 하는 요인은 위험하다거나(웬만한 도시나 도로보다 안전하다) 고독하다거나(사람들로 번잡한 방에서도 얼마든지 외로울 수 있다) 색다른 동물들이 많다거나(동물원에 훨씬 더 많다) 하는 것이 아니다. 숲에서 두 시간만 들어가면 어떤 물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음악에 영감을 준 자연의 오케스트라는 날이 갈수록 소리가 줄어들고 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그 안에서 공존할 방법을 찾기보다 어떻게든 정복하려고 하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 때문에 섬세한 소리의 결이 찢어지고 있다.]
갑자기 ‘나는 자연인이다’ 주인공이 되고 싶다.
[시간이 더 지나서는 모든 생명체가 독특한 음향적 표식음을 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바이러스는 붙어 있던 표면에서 떨어질 때 진폭이 급격하게 요동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이 소리를 측정하려면 가장 민감한 기구를 동원해야 한다.]
침묵이 바이러스 전염을 막을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볼 수 있는 글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게 있다. 생태 논리는 소수의 말이다. 아주 온당하게 들리지만,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숲을 망가뜨려야만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있다. 바이러스와 세균이 득시글거리는 자연과 거리를 두어야만 생명이 늘어날 수 있다. 말을 하면서 연구를 해야만 이 바이러스를 다른 바이러스로 막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생태 논리를 껴안고 있는가? 이 세상은 무수히 많은 의견들이 존재해야 한다. 생물다양성이 필요하듯이 의견다양성도 필요하다. 다만 의견 관철을 위한 기만적인 전도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나무의 언어>에 나오는 글이다.
[오래전, 그 성자가 우리 섬에 가지고 왔던 종교는 인간의 약탈적 속성을 한층 부채질했다. 새 종교에 밀려난 이전의 종교와는 달리 그것은 인간을 세계의 주인으로서 특권을 누리게 했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존재에 대해 배려하지 않도록 가르쳤다. 그것들이 오로지 지배자인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도록 했던 것이다. 차라리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이보다 더 잘못되거나 더 부자연스러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발상에는 경악할 만한 무식함과 근시안적인 사고가 뒷받침되어 있었다.
내 이야기를 관대히 받아들이는 분위기라면 나는 좀더 과감하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인간은 눈이 멀었다. 그 이유는, 세상을 온통 뒤흔들어놓은 단 한 권의 책으로 인하여 눈이 멀고 잘못 인도되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자연을 존중하지 않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을 자연히 할당한 제자리에서 몰아낸 성서이다.”]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과감히 할 수 있었을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들로 하여금 지구를 마음대로 하라고 했고, 그 결과 지금 지구는 위기에 처해 있는 게 팩트이기 때문이다.
지구를 살리려면 어떤 종교를 믿어야 할까? 가장 가난한 나라, 즉 성장과 개발을 등한시 하는 나라의 종교를 찾아보면 될까?
어찌 보면 이제는 늦은 것 같다. 자본주의 공산품 하나 들어가지 않은 곳이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맛을 본 이상 몸이 힘든 과거로의 회귀는 바라지 않을 것이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아마 벌써 오래전부터 그는 그 자신의 자기(自己)가 바로 아트만이여, 바라문과 똑같은 영원한 본질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 즉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 자기를 사색의 그물로 붙잡으려 하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 자기라는 것을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육체도 자기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감각의 유희도 자기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였다.]
슬슬 어려워진다. 육체로서의 나가 있고, 이 나가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데, 긴 안목으로 보면 이 나가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 글에서 “그러나 그는 이 자기를 사색의 그물로 붙잡으려 하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 자기라는 것을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를 보자.
여기서 말하는 ‘사색의 그물’이 뭘까? 많이 인식하려고 공부하는 것, 공부한 내용을 열심히 사유하는 것, 그런 걸까? 이를 비우고 버리고 버리고 비워야만 자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일까? 그럼 하루 종일 무얼 해야 하나? 가만히 앉아서 명상을 하고, 배가 고프면 탁발을 하고, 그런 것인가? 갑자기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이 삶이 고(苦)인 것만은 분명하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오늘 나는 왜 어제보다 더 길게 글을 썼는가?
코로나로 계획을 세우기 어려워서다
즉 시간이 남아서다
그 계획은 무엇인가?
먹고 사는 문제다
지구 전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먹고 사는 계획이 중요한가?
미래보다 당장의 연명이 급선무다
이게 우리 인간의 본성이고
이 본성이
현재 지구를 만들고 있다
이 실체를 연구하고 또 연구해보자
틈나는 대로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일
코로나여! 빨리 소멸하거라!
너에게 공존과 배려와 존중은 없다!
이게 우리 본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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