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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신앙, "이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다-04
하얼빈 대도관(大道館) 중학교 입학
만주에 도착한 나는 하얼빈 대도관(大道館) 중학교에 합격하여 입학할 수 있었다.
만주국은 일제의 괴뢰국이었는데, 여기에서도 일인 교육이 그대로 실시되고 있었다. 학생 대다수가 일본인이었고, 한국인은 몇 명 정도였다. 러시아나 중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
이때 일본은 북지사변을 계기로 중국 침략을 노골화하면서 점점 내륙 깊은 곳까지 그 침략의 마수를 뻗치고 있었는데, 일제의 침략 앞에 중국인들은 거의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 만주로 올 때 기차에서 일본 군인이 중국인들을 그렇게 멸시하듯 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의 교육 내용은 철저히 일본 정신을 주입하는 군국주의 교육이었다. 예를 들면 한문을 배울 때도 일본식으로 무릎을 꿇고 배웠고, 교사는 전부 일본인이었다. 다만 러시아어나 중국어는 러시아, 중국 교사들이 담당했다. 학제는 4년제로 학년별로 세 반, 한 반에 약 50~60명이었고, 여학생은 물론 한 명도 없었다. 특히 국군주의 교육의 영향으로 무도 함양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데 나는 검도를 즐겨 연마했다.
당시의 하얼빈에는 한인 교회가 있었는데 숙부님이 그 교회 장로님이셨다. 나는 숙부님을 따라 한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주일학교 교사로도 봉사를 했다. 그 교회의 교인 수는 약 120~130명이었는데 이국땅에서도 뜨거운 신앙생활은 계속되고 있었다. 만주에서의 학창생활은 유복한 숙부님의 힘으로 별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비록 일제가 멸망을 향한 전쟁에 광분하고, 대륙은 전쟁으로 시달리고 있었지만 드넓은 만주에서의 학창생활은 젊은 나에게는 또 하나의 낭만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나는 원래 신경의 법대나 군관학교 쪽으로 진학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학교에는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많이 입학해 있었고, 정일권, 백선엽 씨 등도 만주 군관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숙부님께서 그쪽으로의 진학을 반대하셨다. 예수 믿는 교인에게 군관학교 등은 맞지 않는다며 숙부님은 하얼빈 농대 진학을 권유하셨다.
하얼빈 농대는 4년제 국립대학으로 전 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했고 졸업 후에는 만주국 고등관 관료(판임관)로 등용될 수 있었다. 만주국은 농업국가이기 때문에, 농업의 발전은 필수적이다라는 생각에 나도 흔쾌히 숙부님의 의견을 따랐다.
하얼빈 농대에 입학해 공부를 하면서 나의 선택이 훌륭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토양학 등 농업에 대한 기초 학문은 특히 나의 흥미를 끌었고, 체계적으로 배우는 농업은 그 범위가 너무 방대해 놀라기도 했다. 학교의 선택까지도 만주라는 환경을 고려했던 나는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가 꿈을 이루기 위해 선택하셨던 만주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았다.
만주가 나에게 준 여러 가지 의미들
소중한 꿈을 키워 준 만주 벌판
만주의 모든 것은 젊은 나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것은 만주의 광활한 지리적 환경과 함께 일제의 박해를 피해 온 애국지사들, 정든 고향을 뒤로 하고 정처 없이 떠나온 우리 농민들이 많이 거주한 한(恨)의 땅이기도 하여 발길 닿는 곳마다 감회가 새로웠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유명한 악극단들이 오면 숙부님 여관에 투숙하곤 했는데, 그 유명한 <타향살이>를 부른 고복수, <눈물 젖은 두만강>의 김정구,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 기타의 박시춘, 김해송 단장 등을 직접 보기도 했다.
이들의 공연이 있을 때마다 드넓은 만주에 흩어져 있던 우리 민족들은 기차나 마차를 타고 하얼빈까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공연은 주로 유대인이 경영하던 모데룽이라는 극장에서 했는데, 특히‘타향살이 몇 해인가, 손꼽아 헤어 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가고…….’로 시작되는 고복수의 <타향살이>는 구슬픈 가사와 멜로디 때문에 노래를 듣던 사람들이 서로 껴안고 통곡하기도 했다.
아마 나라 잃은 설움,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고향, 두고 온 산하가 보고 싶어 감정이 복받쳐 그렇게 통곡했던 것 같다.
이러한 만주였기 때문에 만주에 대한 나의 감회는 특별했다. 만주는 심양, 장춘 등 시베리아와 흑룡강(헤이룽강) 일대를 북만주라고 하고, 하얼빈을 중심으로 우리 땅과 가까운 곳을 남만주라 부르는데, 하얼빈은 상해와 같은 국제도시였다.
상해(상하이)는 일찍부터 양자강(양쯔강)을 통해 들어온 서유럽 여러 나라의 문화가 혼합되어 있는 국제도시였고, 하얼빈은 만주와 조선 진출을 위해 러시아가 확보한 거점 도시였다. 그 때문에 하얼빈은 상당히 러시아화한 도시였고, 요동반도(랴오둥 반도) 끝까지 와서 여순(뤼순), 대련(다롄) 항구로 이어지는 유명한 남만주 철도의 중심지였다.
그 부근의 무순(푸순) 탄광이라는 곳을 가 보았는데 엄청난 석탄의 양에 놀랐다. 그곳에서는 지하에 갱도를 파고 채탄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땅을 걷어내고 석탄을 파냈다. 여의도보다 훨씬 넓은 그 노천 탄광에서는 기차가 빙빙 나선형으로 돌아다니면서 노천 채굴을 한다. 무순의 석탄은 엄청난 양뿐 아니라 송진이 들어 있어 탄질도 아주 우수하다. 탄 자체가 반짝거려 타고 나면 재가 남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화력을 내며 거의 100% 연소된다.
이렇듯 하얼빈은 제정 러시아가 남만주 철도 경영과 무순 탄광에 대한 이권과 함께 한반도 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자 구축한 도시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한데 이어 일어난 러시아 공산혁명으로 당시 니콜라이 황제의 측근들, 즉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 귀족, 왕족, 고급 관료, 고급 장성, 지주 들이 공산당의 피의 숙청을 피해 하얼빈으로 도망 나와 정착했다.
러시아인 중 러시아가 공산화되자 이를 피해 하얼빈이나 다른 곳으로 피한 사람들을 ‘백계 러시아인’으로 불렀는데, 이들은 반공사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피난 온 백계 러시안인들의 생활은 대체로 비참했다. 급하게 피하느라 많은 것을 챙겨오지 못했고, 러시아에서 상류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라 만주에서 쉽게 일자리를 얻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러시아계 유대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나왔거나 뛰어난 상재줜商材)를 발휘하여 대개 금은방, 고급 모피상, 금융업 등 소득가치가 높은 사업을 운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러시아 귀족이나 관료들은 자신이 타고 온 마차로 손님을 실어나르며 연명하든지, 택시 운전이나 백화점 경비원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했다.
언젠가 나는 백화점 앞에서 군모를 쓰고, 번쩍거리는 견장과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경비하는 멋진 수염을 기른 노인들을 보았는데, 첫눈에도 위엄이 있어 보였다. 알고 보았더니 그들은 제정 러시아의 원수나 장군들이었는데,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경비를 하면서도 자신들의 위엄을 지키고자 그런 복장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나 우리나 다같이 나라 잃은 처지라는 것이 상기되어 그들의 쇄락한 영광을 한참 동안 지켜 보기도 했다.
백계 러시아인 중 여자들은 더 심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호스티스가 되어 이국 사람들의 성 노리개감으로 전락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백계 러시아인에 대한 일제의 간섭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제가 만주 통치를 위해 사용한 유화정책 때문이었다. 일본은 중국의 혼란을 틈타 만주를 장악하고,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명분뿐인 황제로 세워 만주국을 자신들의 괴뢰국으로 만들었다. 만주국은 5족 협화, 즉 일본, 조선, 중국, 몽고, 러시아가 함께하는 나라라는 독특한 식민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만주였지만 드넓은 만주 벌판은 나의 꿈을 키워 가는 소중한 대상이었다. 나의 믿음의 조상이었던 조부님이 그 꿈을 펴지 못하고 눈 감은 곳이라는 생각에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 시절의 나는 돌 하나, 풀뿌리 하나를 봐도 피끓는 정열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토록 만주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드넓은 벌판이 있고 세상에는 이토록여러 인종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던 곳. 드넓은 벌판을 보며 나의 또 다른 야망을 키우던 곳이었다.
또한 유유히 흐르는 송화강(쑹화 강)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낭만적이었다.
송화강 양안으로는 하루 종일 가도 산 하나 보이지 않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데 모두가 넓고 비옥한 땅이었다. 지평선에서 뜨고 지평선으로 지는 해를 보며 나는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었다. 눈앞의 조급함보다 먼 앞날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던 것도 만주의 자연이 나에게 준 훌륭한 선물이었다.
만주는 나에게 그런 의미였다.
하얼빈의 여러 가지 모습들
한편, 가난하고 못 살았던 조국 산골의 빈한한 모습에 비해 하얼빈의 모든 것은 경이로웠다. 도시 곳곳에는 로마네스크식 건물과 예술적인 조각과 빌딩들이 많았다.
러시아인들은 하얼빈을 설계할 때 파리와 똑같이 설계했다고 한다. 도시 중앙에는 대형 러시아 정교회 교회가 세워졌고, 그곳에서 십자로를 내고 그 사이로 길을 내었다. 90도 사이를 다시 30도씩 세분화하여 방사선 형 도로를 만들었다. 길은 전부 돌을 깎아 포장했는데, 짙은 회색 화강암을 꽃무늬같이 펼쳐 놓아 정교함과 웅장함을 자랑한다. 그 모양도 모양이지만 내가 더 경이롭게 여긴 것은 하얼빈 인근은 땅이 비옥해 돌 하나 제대로 주울 수 없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하얼빈 주변에는 산 하나 없이 넓게 펼쳐진 대지였고, 기차를 타고 몇 시간을 가도 허허벌판이라 그런 돌을 가져올 만한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고 아름다운 돌들을 어디에서 가지고 왔을까.
더욱 놀라운 것은 러시아인들의 묘지였다. 묘지를 장식하는 묘석들은 문자 그대로 예술적 조각품들이었다.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그 당시에도 러시아인들의 묘지는 관광 코스였다.
묘비석은 주로 프랑스에서 제작해 운반되었고, 비석 안에는 망자의 사진도 들어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어떤 피아니스트의 묘였는데, 새까만 대리석으로 그랜드 피아노 모습을 만들고 흰색과 검은색의 악보까지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의 묘석은 예수님 부활 시 상황을 그대로 조각해 놓았다. 무덤 위의 천사, 마리아, 살로메 들이 비어 있는 무덤을 보며 놀라는 모습이었는데 그들의 예술감각과 더불어 신앙의 한 모습을 본 것 같아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얼빈에서 내가 특별히 가슴에 새긴 곳은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일본의 이등박문을 저격한 하얼빈 역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 간 시점이었지만 나는 어머니가 안중근 의사와 같은 순흥 안씨였기에 어린 시절 안중근 의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하얼빈 역을 찾았는데, 당시 하얼빈 역사는 예전 서울역과 비슷한 모습으로 그곳에 갔어도 이미 많은 세월이 흘러 안중근 의사의 저격지를 알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만 무심히 오가는 하얼빈 역사의 한쪽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안중근 의사의 단심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하얼빈의 모든 곳이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인, 일본인, 중국인들의 거주지역이 달랐는데, 특히 중국인 거주지역은 정말 더러웠다. 거리 곳곳에는 가래, 쓰레기, 수박 씨, 해바라기 씨 등이 수도 없이 버려져 있어 지저분했고, 악취까지 풍겨 이처럼 더러운 곳이 또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것에 비해 러시아인이나 일본인 거주지역은 깨끗했다.
또한 장묘 문화도 만주의 중국인들은 러시아의 화려함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특히 하얼빈의 겨울 기온은 보통 영하 30~35도로 상상이 되지 않는 추위였다. 눈도 함박눈은 오지 않고 밀가루 같은 가느다란 눈만 내려 뭉쳐도 뭉쳐지지 않는다. 그런 추위에 땅이 얼면 파지 못했기 때문에 겨울에 상을 당한 사람들은 그냥 시신을 관에 넣고 눈으로만 덮어 두었고, 여름에는 그냥 관 위에 흙을 쌓아 놓았다. 우리 같은 매장 문화가 아니었다.
그래서 들개나 늑대들이 시신을 훼손했고, 봄에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겨울에 눈으로 덮어 두었던 시신들이 눈 녹은 뒤 드러나 시체 썩는 모습들이 즐비하다.
이것이 바로 하얼빈의 여러 가지 모습들이다.
군인의 길과 농업대학
평생을 군에서 보낸 내가 군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하얼빈 농대를 택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인생의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만주의 광활함에 대한 매력, 그리고 광활한 만주의 농토에서 부를 이루고자 하셨던 조부님의 꿈을 듣고 살아왔던 나로서는 어쩌면 농대 입학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비옥한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기차를 타고 많은 여행을 하면서 나는 이러한 만주에 대한 나의 꿈을 한시도 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에 더해 전 학년 학비 국가 부담, 전원 기숙사 생활, 교복까지 지급되는 여러 혜택, 졸업하면 만주국의 관리로 채용될 수 있다는 매력 등이 하얼빈 농대를 택한 큰 이유였다.
만주 시절 학교에서는 미국과 영국을 배척했던 일제의 정책으로 영어를 배우지 못했다. 대신 러시아어를 배웠는데 이는 일본이 장차 소련 진출을 대비한 인재 양성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학교에는 등하교 시 학생들이 반드시 고개 숙여 참배해야 하는 일본인 의사(義士)의 사당이 있었다. 그는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하얼빈을 지나 심양에 도착하는 러시아 군수열차를 폭파하려다 전사했는데, 일본인들은 그를 순국 정신의 사표(師表)로 높이 추앙하고 있었다. 비록 일제 하의 교육이었지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후손들에게 추앙받는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그때 배웠다.
그러나 점차 치열해지는 전쟁과 패망을 앞둔 일제의 단말마적 횡포는 하얼빈 농대 시절의 우리 한국 학생에게 항상 큰 부담이었다. 학창시절의 꿈과 낭만도 있었지만, 우리로서는 일제의 무서운 발톱을 어떻게 피해 가느냐가 더 큰 문제였다.
그 우려가 마침내 현실로 다가왔다.
1945년 8월 3학년 때, 결국 학교는 문을 닫았다. 학생들에게는 소련군의 만주 진입에 대비하여 비상동원령이 내려져 소집 시 하얼빈의 일본군 13사단으로 입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다 마침내 8월 5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고, 이어서 소만국경의 극동 소련군이 만주의 일제 관동군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당시 일제 관동군은 100만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한 부대였다.
노도와 같이 밀려 든 소련군에 관동군들은 총 한번 제대로 쏘아 보지 못하고 항복했고, 소련군들은 만주에 무혈 입성하였다. 미국의 일본 원폭투하 이후 소련군은 즉각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소만국경을 넘어 하얼빈을 점령하였는데, 이 모든 게 일 주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때 내가 본 것은 소련군의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는데, 하얼빈으로 진군해 들어오는 소련군의 위용은 정말로 대단했다. 커다란 대포와 탱크 등 엄청난 무기를 앞세우고 하얼빈 시내로 진군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일본군들이 과연 저들과 어떻게 싸우려고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어 하얼빈에는 큰 혼란이 찾아왔다. 왜냐하면 하얼빈이 북만주 일대의 일본인, 한인들이 귀국하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하얼빈에 소련군이 아직 진주하지 않았을 때는 그런 대로 평온을 유지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그들의 노골적인 야만성 때문에 한인, 일본인들의 피해는 엄청나게 늘어갔다.
소련군들은 대낮에도 술에 취한 채 피난민들이 수용되어 있는 학교 등으로 몰려 와 일본인, 한인 등을 가리지 않고 물건을 빼앗았다. 심지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여자들을 강간하기도 하는 등 금수와 같은 짓을 서슴치 않고 저질렀다.
특히 손목시계는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기호품이었는데, 총을 들이대고 빼앗아 팔목에 손목시계 10여 개 이상을 차고 자랑하는 군인들도 많았다. 그들에게서는 군인이라는 자부심과 군율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대낮에도 독한 보드카를 병 채로 마셔 댔고, 고함을 지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소련의 보안군(게페우)들이었다. 이들은 만취 병사들의 행동을 제지하다 안 되면 현장에서 바로 사살해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야만적인 군대, 이들이 바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 군대의 모습인가 하는 생각에 나는 공산주의에 점차 큰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소련 군대의 만행 때문에 하얼빈을 하루라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어 했다. 지옥 같은 하얼빈에는 한인 피난민들이 약 10여 만 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민간인들은 소련군의 통제로 유일한 교통수단인 기차를 거의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요동반도 끝에 위치한 여순, 대련, 심양(봉천)을 비롯한 항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업지대에 소련군들이 진주하면서 이 지대의 군수품, 생필품을 만드는 공장 시설을 뜯어 소련으로 가지고 가는 데 기차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고려 자위단을 만들다
이때 나는 고려 자위단을 조직했다. 이것이 내가 군인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1945년 8월 20일, 만주의 대도관 중학 출신을 중심으로 만주 여러 학교 출신 한인 청년들에 의해 고려 자위단이 조직되었다. 무법천지 하의 하얼빈에서 갈수록 심해지는 소련군의 만행으로부터 동포들이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돕고, 중국 폭도들로부터 동포들의 재산과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우리 청년들이 나설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자력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고려 자위단을 발족시키며 먼 만주 땅에서 가졌던 흥분과 감격을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우리는 태극기를 꺼내 들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고, 대한민국 만세를 수도 없이 외쳤다. 또한 애국가를 목이 터져라 불렀고, 그 감격에 서로 부등겨 안고 거리 행진을 하기도 했다.
고려 자위단의 주요 인사들은 하얼빈 농대 동창과 후배들 약 50~6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억나는 주요 인사인 김동석(金東石)은 내가 숙부님과 함께 먼저 귀국하면서 고려 자위단의 일을 맡았는데 그는 나중에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하얼빈에서 약 3년간 투옥생활을 했다. 그리고 육이오 전쟁 직전에 귀국하여 육군에 입대했는데, 육이오 전쟁 때에는 원산에서 북괴군 부사단장을 체포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해 함북 지사, 속초 시장, 목포 시장 등을 지냈다.
먼저 귀국한 나와 고려 자위단의 친구와 후배들이 모두 해군을 거쳐 해병대를 창설하게 되었는데 김동석은 늦게 귀국하는 통에 육군에 입대하였던 것이다. 유도로 단련된 다부진 체구를 가진 그는 대북 정보공작에 탁월한 솜씨를 보여 미 8군에서도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그밖에 한예택, 정봉익, 정만진, 김종록, 박철, 박경철, 박성철(작고, 평민당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 경호실장, 해병대 소장으로 예편), 박상철, 백운기, 허승룡, 김중식, 백남표 씨 등이 있었다. 이들은 가족들도 버리고 남하하여 나와 모든 것을 함께하며 해군으로 갔거나 해병대 창설의 주역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자위단 활동은 모든 것이 자발적이었다. 후견인이나 후원 단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숙식조차 자신들이 직접 해결해야 했지만 젊은 우리는‘이런 일은 우리밖에 할 수 없다.’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임했다.
그러나 불행한 사건도 겪었는데 바로 만주 하얼빈 농대 동기동창인 백용기의 죽음이었다. 어느 날 밤 그는 하얼빈 역에서 3km 정도 떨어진 금강 초등학교(피난민들이 수용된 곳)로 피난민을 호송하던 중 러시아군의 발포로 복부에 관통상을 당해 병원으로 호송했지만 절명하고 말았다. 러시아 군의 발포 이유는 통행금지 위반이었다. 이때 우리 모두가 체포되기도 했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하얼빈 교포들이 참석하여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하얼빈에서의 하루 하루는 긴장의 연속이었고, 고려 자위단은 하루 빨리 조국으로 돌아가려고 발을 동동 구르는 많은 동포들의 운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필요한 열차를 확보하고, 귀환동포들이 우리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고려 자위단이 해야 할 일이었다. 피난민들로부터 돈을 걷어 소련군으로부터 열차를 배정받았는데 그때 고려민단장 한광숙(러시아명 : 한 빠샤)이라는 분이 큰 도움을 주었다. 그 분은 함경도 출신으로 일찍부터 소련에서 살았기 때문에 러시아어에 능통했고, 재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엄청난 부자였다. 고려민단 사무총장 오기섭 씨 역시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한 분이었다. 귀국동포들은 확보된 열차로 압록강변 안동(단둥)까지 가서 강을 건너 신의주로 들어갔다. 나는 12월 귀국할 때까지 두 번의 왕복 호위를 했지만 무사하게 호송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후 치안이 제대로 확보되지 못한 무법천지 만주에서 열차 수송은 항상 위험이 수반되었다. 그 때문에 자위단장이었던 나는 무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한광숙 씨에게 부탁을 했다. “우리도 무장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기를 구해 주십시오.” 며칠 후 한광숙 씨가 불러 가 보니 탁자 위에는 일본군 구식 소총 30여 자루가 있었다. 무기를 보자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 우리를 보며 한광숙 씨가 말했다. “이것은 소련군 사령부로부터 발급된 무기 휴대허가증이야.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꼭 필요해. 소련군이 보증하는 증표니까 잘 관리해.” 한광숙 씨가 어떻게 무기허가증까지 받아 낼 수 있었는지 우리는 한광숙 씨의 수완에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받은 무기허가증은 나중에 중공 팔로군과의 대치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10월쯤부터 봉천에 나타나기 시작한 팔로군들이었다. 이들은 기차를 정지시키고 조사하는 등 행패를 부렸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무기가 있었지만 항상 긴장한 가운데 만일을 대비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감격에 차 피난민들과 함께 기차 지붕 위에서 애국가를 목 터지게 부르기도 했다. 그 중 ‘가을 하늘 공활한데’라는 가사에 이르러 만주의 맑은 가을 하늘을 보면 정말 가사같이 구름 한 점 없이 파란데 그 하늘마저 감격스러웠다. 또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라는 가사에 이르러서는 교교한 달빛 속에 잠들어 있는 만주 벌판을 보면서 해방 조국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렇듯 귀국동포 호송을 위해 오가던 위험한 길도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귀국동포들을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의 실체를 더욱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동포들을 안동에 내려 주고 돌아갈 때였다. 소련군들이 일본 군수시설을 뜯어 가는 열차에 동승하게 되어 하얼빈까지 같이 왔는데, 이때 나는 소련군들의 무지하고 난잡한 모습들을 보았다. 그들에게는 군대가 가지는 최소한의 규율이나 군기라는 것도 없었고, 모든 행동이 동물적이고 즉흥적이었다. 소련 극동군들이 죄수나 구 러시아 천민 출신이 많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러시아 상류층의 문화는 세계적이었지만 하층민들의 문화는 그렇게 천박할 수가 없었다. 이런 소련군들의 모습을 보면서 공산주의를 실감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 군대가 저런 모습이니 나머지 공산국가는 뻔한 것일 터였다.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회의를 넘어 슬픔마저 느껴졌다. 공산주의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막연한 꿈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학창시절 내가 탐구했던 공산주의란 공동 생산, 공동 분배를 통해 부의 평등한 삶을 추구하는 유토피아였다. 그러기에 나는 공산주의에 상당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탐독했던 『자본론』, 『제국주의의 멸망』이라는 저서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대자본가들이 모든 것을 흡수하여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국은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을 쓰러뜨리고 인민이 지배하는 공산주의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간과한 것은 ‘인간의 본능인 소유욕’이었다. 능력에 관계없이 똑같이 분배한다면 누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려고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나는 많은 의문을 가졌고, 그들의 종말을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으로 일어난 공산주의는 결국 70여 년 동안 수명을 누리다가 제풀에 넘어지고 만다. 채 1세기도 버티지 못한 것이었다. 귀국열차를 타다
“친구가 좋다. 죽어도 같이 죽는다!” 나를 따라 귀국한 친구들 이러던 중 나에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숙부님의 귀국 종용이었다. 만주에는 10월 초순까지 팔로군이나 국부군이 들어오지 않았고 행정치안은 소련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에 맡겨진 하얼빈의 치안은 엉망이었다. 10월 초순이 조금 지나자 중국공산당 연안파(모택동파) 정치 공작원들이 하얼빈으로 들어와 민간인 단체들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선무공작은 군대나 행정 조직이 들어오기 전에 주로 민간단체를 대상으로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교회에까지 집요하게 이루어졌다. 나와 숙부님 가족이 출석했던 교회도 점차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하루는 목사님의 축도가 끝나자 교회 집사 한 분이 일어섰다. 그 분은 일본 대학 출신으로 나보다 연장자였고, 찬양 봉사도 열심히 하신 분이었다. 그 분은 일어서 ‘사도행전’을 읽으며 말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재산을 팔아 베드로에게 가져가 같이 먹고 바치고 기도에 힘썼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같이 생산하고 같이 나누어 먹는 공산, 공존해야 한다.” 그리고 그 분은 공산주의 선전을 노골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이토록 교회에까지 뻗친 그들의 공작은 집요하게 이루어졌다. 그러자 교회 내에서도 점차 동조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예배까지 방해했다. 목사님은 마침내 목회 시무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 되자 숙부님은 나를 불러 말했다. “이제 만주는 공산주의가 장악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신앙, 재산 등 모든 것을 잃는다. 저들의 숙청 대상자는 교육자, 지식인, 기독교인인 만큼 여기를 빨리 떠야 한다.” 그러나 젊은 나는 아직도 만주에 대한 꿈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 넓은 대륙을 두고 떠난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내 말에 숙부님은 어처구니가 없으신지 달래듯 말했다. “다른 소리 말아라. 절대로 공산 치하에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너는 내가 형님에게 책임진다고 해서 데려 왔다. 너를 놔 두고 갈 수 없다.” 이러한 숙부님의 강력한 종용에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내가 귀국하기로 결정하게 된 것은 바로 김택명이라는 사나이 때문이었다. 그는 독립동맹이라는 아리송한 단체의 장이었는데, 알고 보니 팔로군 선무공작원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나를 만나자고 해서 만났더니 덥석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하얼빈에 이런 애국단체가 있다니 무척 기쁘다. 함께 손잡고 일하자.” 하지만 나는 이미 소련군의 만행을 보고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이 깨어진데다 숙부님의 강력한 귀국 종용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나의 이러한 태도를 알았는지 그의 포섭 공작은 정말 집요하고 끈질겼다. “심양의 군관학교에 들어가라. 그러면 당신을 대대장으로 임명하겠다.”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내가 듣지 않자 그는 나를 미행하며 납치 모의까지 했다. 그래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는 항상 모젤 권총을 휴대하고 다니기도 했다. 나는 10여 년 뒤 판문점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상조 대령으로 이름을 바꾸어 육이오 전쟁 후 정전협정에서 이북 정전대표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렇듯 하얼빈은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개 상황이었다. 갈수록 심해지는 공산당의 전횡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나날이었고, 나 또한 여러 가지 협박과 회유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자 숙부님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만주를 뜨기 위해 재산을 정리했는데, 모든것을 헐값에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중 내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하얼빈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숙부님의 큰 농장이었다. 이 농장은 내가 철새들을 사냥하면서 만주 벌판의 광활함을 만끽했던 추억 어린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 역시 거의 공짜로 넘기다시피하고 숙부님 가족과 내가 만주를 떠난 것은 12월 중순쯤이었다. 그때 함께 기차를 타고 귀국길에 오른 사람들은 약 1천 5백여 명이었다. 숙부님이 피난민을 책임지는 단체장이 되어 기차를 마련했다. 마침내 귀국열차가 출발했다. 나는 그 동안 정들었던 만주를 떠난다는 것이 아쉬워 점차 내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하얼빈 시내의 하나하나를 보면서 감상에 젖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일생 중 가장 소중한 시기를 드넓은 만주 벌판과 함께 호흡하며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은 만주가 나에게 준 큰 의미였다. 이때 나와 함께 나온 자위단 대원들이 4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중에는 부모님이 하얼빈에 있는 사람들도 있고, 또 고향이 이북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두 앞뒤 가리지 않고 나를 따라 왔던 것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친구가 좋다. 죽어도 같이 죽는다!”라는 각오로 함께 혈서까지 쓰며 나와 끝까지 행동을 같이하겠다는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거의 나중에 내가 해병대 참모장으로 해병대를 창설할 때 나를 따라 해병대로 와서 평생 군인의 길을 걸었던 분들이다. 대표적인 인사로 정세웅(5.16때 최고회의 위원을 지냄. 대령으로 예편), 윤영준(해병 소장으로 예편), 박성철(평민당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 경호실장, 해병 소장으로 예편) 등이었다. 정일권 씨와의 운명적인 만남 귀국열차는 출발했지만 어려움은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가는 도중에 일어나는 돌발사태들 때문이었다. 하얼빈에서 안동까지 가는 도중, 기관차를 교체할 때에도 러시아 군인들에게 돈을 주어야 물과 석탄을 주었다. 또 기관사가 슬그머니 사라져 버려 할 수 없이 역사의 러시아인들에게 가서 보드카, 시계, 돈 등을 주고 새로운 기관사를 배정받고 출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내가 정일권 씨를 만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장소는 심양을 지나 안동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동계관산역이라는 곳으로, 기차는 역내에서 석탄 보충을 하려고 서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수백 명의 중국인 폭도들이 몰려오더니 갑자기 기차를 향해 기어오르며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에 우리 자위단은 그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중에 총을 발포했다. 그러자 폭도들은 주춤하고 물러갔지만 곧이어 중공군(팔로군) 100여 명이 역 구내로 몰려왔다. 그들의 표정은 살벌하기까지 했다. 그들 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앞으로 나오더니 우리를 보며 물었다. “누가 대장인가?” 그런데 인민복 차림인 그의 옷 어디에도 계급장 같은 것은 붙어 있지 않았다 “나다.” 내가 앞으로 나서자 그들은 다짜고짜 내가 차고 있던 모젤 권총부터 빼앗은 다음 나를 사무실로 끌고 갔다. “무기는 어디에서 났고, 고려 자위단은 무슨 일을 하는 곳이냐?” 지휘관은 그래도 상당히 합리적인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학교 선생님 같은 인상과 태도로 나를 취조했다. 그는 나에게 정중하게 자리를 권했고 예의를 지켜 나를 조사했는데, ‘과연 팔로군은 민간인에게 호감을 받는 군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안심하고 설명했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려는 동포들이 중국, 소련 군인들에게 불법적으로 약탈, 강간, 폭행, 심지어는 죽음까지 당했다. 그래서 청년들이 우리 동포들을 보호하고자 소련군 사령부와 협의 하에 기차를 빌렸고, 도중의 사태에 대한 호송 책임까지 허락받았다. 그리고 소련군 사령관이 발급한 무기 대여증은 여기 있다.” 내가 무기 대여증을 내어 보이자, 그는 한참을 보더니 말했다. “왜 중국인들을 쏘았느냐?” “중국인들이 약탈을 해서 접근하지 말라는 의미로 공포를 쏘았다. 중국인들에게 어떤 위해나 적개심에서 한 행동이 아니고 자위를 위한 행동이었다. 이해해 달라.” 중공군 지휘관은 내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결코 호락호락하게 지나가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무엇인가를 열심히 상의하고 이곳저곳으로 전화를 했다. 이러는 동안 시간이 길어지자 기차 안의 피난민들은 점차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때 중국인 복장을 한 한인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는 둥그런 안경을 쓰고 있었고, 용모가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휘관에게 가더니 유창한 중국말로 나를 변호했다. “중국과 조선은 형제지국이다. 우호로 살아 왔고 일본에게 똑같은 아픔을 당한 민족들이다. 이제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는 다시 옛날의 우호를 지닐 수 있게 되었는데, 고국 가는 길에 중국 형제들에게 아픔을 당한다면 서로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이것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그런 것이지 결코 나쁜 뜻은 아니었다. 발포 사건은 이 정도로 마치자.” 그의 논리는 정연했고, 언변은 유수 같았다. 중국인들도 그의 유창한 중국말에 넋을 빼고 서 있었다. 이 분이 바로 나에게 군인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그 후 한국 정치사의 한 장을 마련한 정일권 씨였다. 그와 나는 이런 곳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가 정연하게 설득을 하자 중공군 지휘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당신들의 뜻은 인정하겠다. 그러나 안동까지 또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 총격전이 일어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그 무기는 잠시 여기에 보관하고 가야 한다. 대신 무기 보관증을 써 줄 테니 돌아가는 길에 들러 가져 가라.” 나는 처음에는 그들의 의도를 의심했다. 하지만 지휘관의 절도 있고 성실한 태도와 정일권 씨의 권유도 있고 하여 총을 맡기고 일단 물러 나왔다. 이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중공군들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했는데, 그것은 바로 말로만 들었던 ‘팔로군은 진정으로 인민을 위한 군대’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었다. 발포 사건으로 나를 심문하던 지휘관의 태도는 정중했고,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았다. 이러한 중공군들의 정신적 무장은 미국의 지원 하에 우수한 장비와 병력으로 무장한 장개석 국부군을 맥없이 무너뜨리는 데 큰 힘이 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다. 나는 비록 적이지만 중공군들에게서 얻은 이러한 교훈을 훗날 우리 해병대가 국민의 군대로서 역할을 감당하는 데 정신적 지주로 활용하였다. 이 문제는 차후에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위기를 모면한 나는 기차 안에서 정일권 씨에게 정식으로 인사하고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미처 몰라 뵈었습니다.” 당시 만주에서 정일권 씨는 한국인 중 가장 유명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만주 군관학교 출신으로, 젊은 나이에 만주군 소좌(소령)가 되어 떨치고 있는 그의 명성은 한인들 사이에서 자랑이었다. 나의 감사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정말 가슴 뿌듯해. 이렇게 훌륭한 젊은이들이 있으니. 앞으로 해방된 조국에서 많은 일들을 하기 바라네.” 이렇게 만난 정일권 씨는 그 후 내가 군인으로서의 길을 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 주었다. 하얼빈 대도관(大道館) 중학교 입학 만주에 도착한 나는 하얼빈 대도관(大道館) 중학교에 합격하여 입학할 수 있었다. 만주국은 일제의 괴뢰국이었는데, 여기에서도 일인 교육이 그대로 실시되고 있었다. 학생 대다수가 일본인이었고, 한국인은 몇 명 정도였다. 러시아나 중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 이때 일본은 북지사변을 계기로 중국 침략을 노골화하면서 점점 내륙 깊은 곳까지 그 침략의 마수를 뻗치고 있었는데, 일제의 침략 앞에 중국인들은 거의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 만주로 올 때 기차에서 일본 군인이 중국인들을 그렇게 멸시하듯 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의 교육 내용은 철저히 일본 정신을 주입하는 군국주의 교육이었다. 예를 들면 한문을 배울 때도 일본식으로 무릎을 꿇고 배웠고, 교사는 전부 일본인이었다. 다만 러시아어나 중국어는 러시아, 중국 교사들이 담당했다. 학제는 4년제로 학년별로 세 반, 한 반에 약 50~60명이었고, 여학생은 물론 한 명도 없었다. 특히 국군주의 교육의 영향으로 무도 함양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데 나는 검도를 즐겨 연마했다. 당시의 하얼빈에는 한인 교회가 있었는데 숙부님이 그 교회 장로님이셨다. 나는 숙부님을 따라 한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주일학교 교사로도 봉사를 했다. 그 교회의 교인 수는 약 120~130명이었는데 이국땅에서도 뜨거운 신앙생활은 계속되고 있었다. 만주에서의 학창생활은 유복한 숙부님의 힘으로 별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비록 일제가 멸망을 향한 전쟁에 광분하고, 대륙은 전쟁으로 시달리고 있었지만 드넓은 만주에서의 학창생활은 젊은 나에게는 또 하나의 낭만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나는 원래 신경의 법대나 군관학교 쪽으로 진학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학교에는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많이 입학해 있었고, 정일권, 백선엽 씨 등도 만주 군관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숙부님께서 그쪽으로의 진학을 반대하셨다. 예수 믿는 교인에게 군관학교 등은 맞지 않는다며 숙부님은 하얼빈 농대 진학을 권유하셨다. 하얼빈 농대는 4년제 국립대학으로 전 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했고 졸업 후에는 만주국 고등관 관료(판임관)로 등용될 수 있었다. 만주국은 농업국가이기 때문에, 농업의 발전은 필수적이다라는 생각에 나도 흔쾌히 숙부님의 의견을 따랐다. 하얼빈 농대에 입학해 공부를 하면서 나의 선택이 훌륭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토양학 등 농업에 대한 기초 학문은 특히 나의 흥미를 끌었고, 체계적으로 배우는 농업은 그 범위가 너무 방대해 놀라기도 했다. 학교의 선택까지도 만주라는 환경을 고려했던 나는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가 꿈을 이루기 위해 선택하셨던 만주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았다. 만주가 나에게 준 여러 가지 의미들 소중한 꿈을 키워 준 만주 벌판 만주의 모든 것은 젊은 나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것은 만주의 광활한 지리적 환경과 함께 일제의 박해를 피해 온 애국지사들, 정든 고향을 뒤로 하고 정처 없이 떠나온 우리 농민들이 많이 거주한 한(恨)의 땅이기도 하여 발길 닿는 곳마다 감회가 새로웠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유명한 악극단들이 오면 숙부님 여관에 투숙하곤 했는데, 그 유명한 <타향살이>를 부른 고복수, <눈물 젖은 두만강>의 김정구,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 기타의 박시춘, 김해송 단장 등을 직접 보기도 했다. 이들의 공연이 있을 때마다 드넓은 만주에 흩어져 있던 우리 민족들은 기차나 마차를 타고 하얼빈까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공연은 주로 유대인이 경영하던 모데룽이라는 극장에서 했는데, 특히‘타향살이 몇 해인가, 손꼽아 헤어 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가고…….’로 시작되는 고복수의 <타향살이>는 구슬픈 가사와 멜로디 때문에 노래를 듣던 사람들이 서로 껴안고 통곡하기도 했다. 아마 나라 잃은 설움,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고향, 두고 온 산하가 보고 싶어 감정이 복받쳐 그렇게 통곡했던 것 같다. 이러한 만주였기 때문에 만주에 대한 나의 감회는 특별했다. 만주는 심양, 장춘 등 시베리아와 흑룡강(헤이룽강) 일대를 북만주라고 하고, 하얼빈을 중심으로 우리 땅과 가까운 곳을 남만주라 부르는데, 하얼빈은 상해와 같은 국제도시였다. 상해(상하이)는 일찍부터 양자강(양쯔강)을 통해 들어온 서유럽 여러 나라의 문화가 혼합되어 있는 국제도시였고, 하얼빈은 만주와 조선 진출을 위해 러시아가 확보한 거점 도시였다. 그 때문에 하얼빈은 상당히 러시아화한 도시였고, 요동반도(랴오둥 반도) 끝까지 와서 여순(뤼순), 대련(다롄) 항구로 이어지는 유명한 남만주 철도의 중심지였다. 그 부근의 무순(푸순) 탄광이라는 곳을 가 보았는데 엄청난 석탄의 양에 놀랐다. 그곳에서는 지하에 갱도를 파고 채탄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땅을 걷어내고 석탄을 파냈다. 여의도보다 훨씬 넓은 그 노천 탄광에서는 기차가 빙빙 나선형으로 돌아다니면서 노천 채굴을 한다. 무순의 석탄은 엄청난 양뿐 아니라 송진이 들어 있어 탄질도 아주 우수하다. 탄 자체가 반짝거려 타고 나면 재가 남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화력을 내며 거의 100% 연소된다. 이렇듯 하얼빈은 제정 러시아가 남만주 철도 경영과 무순 탄광에 대한 이권과 함께 한반도 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자 구축한 도시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한데 이어 일어난 러시아 공산혁명으로 당시 니콜라이 황제의 측근들, 즉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 귀족, 왕족, 고급 관료, 고급 장성, 지주 들이 공산당의 피의 숙청을 피해 하얼빈으로 도망 나와 정착했다. 러시아인 중 러시아가 공산화되자 이를 피해 하얼빈이나 다른 곳으로 피한 사람들을 ‘백계 러시아인’으로 불렀는데, 이들은 반공사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피난 온 백계 러시안인들의 생활은 대체로 비참했다. 급하게 피하느라 많은 것을 챙겨오지 못했고, 러시아에서 상류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라 만주에서 쉽게 일자리를 얻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러시아계 유대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나왔거나 뛰어난 상재줜商材)를 발휘하여 대개 금은방, 고급 모피상, 금융업 등 소득가치가 높은 사업을 운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러시아 귀족이나 관료들은 자신이 타고 온 마차로 손님을 실어나르며 연명하든지, 택시 운전이나 백화점 경비원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했다. 언젠가 나는 백화점 앞에서 군모를 쓰고, 번쩍거리는 견장과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경비하는 멋진 수염을 기른 노인들을 보았는데, 첫눈에도 위엄이 있어 보였다. 알고 보았더니 그들은 제정 러시아의 원수나 장군들이었는데,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경비를 하면서도 자신들의 위엄을 지키고자 그런 복장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나 우리나 다같이 나라 잃은 처지라는 것이 상기되어 그들의 쇄락한 영광을 한참 동안 지켜 보기도 했다. 백계 러시아인 중 여자들은 더 심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호스티스가 되어 이국 사람들의 성 노리개감으로 전락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백계 러시아인에 대한 일제의 간섭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제가 만주 통치를 위해 사용한 유화정책 때문이었다. 일본은 중국의 혼란을 틈타 만주를 장악하고,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명분뿐인 황제로 세워 만주국을 자신들의 괴뢰국으로 만들었다. 만주국은 5족 협화, 즉 일본, 조선, 중국, 몽고, 러시아가 함께하는 나라라는 독특한 식민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만주였지만 드넓은 만주 벌판은 나의 꿈을 키워 가는 소중한 대상이었다. 나의 믿음의 조상이었던 조부님이 그 꿈을 펴지 못하고 눈 감은 곳이라는 생각에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 시절의 나는 돌 하나, 풀뿌리 하나를 봐도 피끓는 정열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토록 만주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드넓은 벌판이 있고 세상에는 이토록여러 인종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던 곳. 드넓은 벌판을 보며 나의 또 다른 야망을 키우던 곳이었다. 또한 유유히 흐르는 송화강(쑹화 강)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낭만적이었다. 송화강 양안으로는 하루 종일 가도 산 하나 보이지 않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데 모두가 넓고 비옥한 땅이었다. 지평선에서 뜨고 지평선으로 지는 해를 보며 나는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었다. 눈앞의 조급함보다 먼 앞날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던 것도 만주의 자연이 나에게 준 훌륭한 선물이었다. 만주는 나에게 그런 의미였다. 하얼빈의 여러 가지 모습들 한편, 가난하고 못 살았던 조국 산골의 빈한한 모습에 비해 하얼빈의 모든 것은 경이로웠다. 도시 곳곳에는 로마네스크식 건물과 예술적인 조각과 빌딩들이 많았다. 러시아인들은 하얼빈을 설계할 때 파리와 똑같이 설계했다고 한다. 도시 중앙에는 대형 러시아 정교회 교회가 세워졌고, 그곳에서 십자로를 내고 그 사이로 길을 내었다. 90도 사이를 다시 30도씩 세분화하여 방사선 형 도로를 만들었다. 길은 전부 돌을 깎아 포장했는데, 짙은 회색 화강암을 꽃무늬같이 펼쳐 놓아 정교함과 웅장함을 자랑한다. 그 모양도 모양이지만 내가 더 경이롭게 여긴 것은 하얼빈 인근은 땅이 비옥해 돌 하나 제대로 주울 수 없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하얼빈 주변에는 산 하나 없이 넓게 펼쳐진 대지였고, 기차를 타고 몇 시간을 가도 허허벌판이라 그런 돌을 가져올 만한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고 아름다운 돌들을 어디에서 가지고 왔을까. 더욱 놀라운 것은 러시아인들의 묘지였다. 묘지를 장식하는 묘석들은 문자 그대로 예술적 조각품들이었다.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그 당시에도 러시아인들의 묘지는 관광 코스였다. 묘비석은 주로 프랑스에서 제작해 운반되었고, 비석 안에는 망자의 사진도 들어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어떤 피아니스트의 묘였는데, 새까만 대리석으로 그랜드 피아노 모습을 만들고 흰색과 검은색의 악보까지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의 묘석은 예수님 부활 시 상황을 그대로 조각해 놓았다. 무덤 위의 천사, 마리아, 살로메 들이 비어 있는 무덤을 보며 놀라는 모습이었는데 그들의 예술감각과 더불어 신앙의 한 모습을 본 것 같아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얼빈에서 내가 특별히 가슴에 새긴 곳은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일본의 이등박문을 저격한 하얼빈 역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 간 시점이었지만 나는 어머니가 안중근 의사와 같은 순흥 안씨였기에 어린 시절 안중근 의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하얼빈 역을 찾았는데, 당시 하얼빈 역사는 예전 서울역과 비슷한 모습으로 그곳에 갔어도 이미 많은 세월이 흘러 안중근 의사의 저격지를 알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만 무심히 오가는 하얼빈 역사의 한쪽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안중근 의사의 단심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하얼빈의 모든 곳이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인, 일본인, 중국인들의 거주지역이 달랐는데, 특히 중국인 거주지역은 정말 더러웠다. 거리 곳곳에는 가래, 쓰레기, 수박 씨, 해바라기 씨 등이 수도 없이 버려져 있어 지저분했고, 악취까지 풍겨 이처럼 더러운 곳이 또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것에 비해 러시아인이나 일본인 거주지역은 깨끗했다. 또한 장묘 문화도 만주의 중국인들은 러시아의 화려함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특히 하얼빈의 겨울 기온은 보통 영하 30~35도로 상상이 되지 않는 추위였다. 눈도 함박눈은 오지 않고 밀가루 같은 가느다란 눈만 내려 뭉쳐도 뭉쳐지지 않는다. 그런 추위에 땅이 얼면 파지 못했기 때문에 겨울에 상을 당한 사람들은 그냥 시신을 관에 넣고 눈으로만 덮어 두었고, 여름에는 그냥 관 위에 흙을 쌓아 놓았다. 우리 같은 매장 문화가 아니었다. 그래서 들개나 늑대들이 시신을 훼손했고, 봄에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겨울에 눈으로 덮어 두었던 시신들이 눈 녹은 뒤 드러나 시체 썩는 모습들이 즐비하다. 이것이 바로 하얼빈의 여러 가지 모습들이다. 군인의 길과 농업대학 평생을 군에서 보낸 내가 군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하얼빈 농대를 택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인생의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만주의 광활함에 대한 매력, 그리고 광활한 만주의 농토에서 부를 이루고자 하셨던 조부님의 꿈을 듣고 살아왔던 나로서는 어쩌면 농대 입학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비옥한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기차를 타고 많은 여행을 하면서 나는 이러한 만주에 대한 나의 꿈을 한시도 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에 더해 전 학년 학비 국가 부담, 전원 기숙사 생활, 교복까지 지급되는 여러 혜택, 졸업하면 만주국의 관리로 채용될 수 있다는 매력 등이 하얼빈 농대를 택한 큰 이유였다. 만주 시절 학교에서는 미국과 영국을 배척했던 일제의 정책으로 영어를 배우지 못했다. 대신 러시아어를 배웠는데 이는 일본이 장차 소련 진출을 대비한 인재 양성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학교에는 등하교 시 학생들이 반드시 고개 숙여 참배해야 하는 일본인 의사(義士)의 사당이 있었다. 그는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하얼빈을 지나 심양에 도착하는 러시아 군수열차를 폭파하려다 전사했는데, 일본인들은 그를 순국 정신의 사표(師表)로 높이 추앙하고 있었다. 비록 일제 하의 교육이었지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후손들에게 추앙받는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그때 배웠다. 그러나 점차 치열해지는 전쟁과 패망을 앞둔 일제의 단말마적 횡포는 하얼빈 농대 시절의 우리 한국 학생에게 항상 큰 부담이었다. 학창시절의 꿈과 낭만도 있었지만, 우리로서는 일제의 무서운 발톱을 어떻게 피해 가느냐가 더 큰 문제였다. 그 우려가 마침내 현실로 다가왔다. 1945년 8월 3학년 때, 결국 학교는 문을 닫았다. 학생들에게는 소련군의 만주 진입에 대비하여 비상동원령이 내려져 소집 시 하얼빈의 일본군 13사단으로 입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다 마침내 8월 5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고, 이어서 소만국경의 극동 소련군이 만주의 일제 관동군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당시 일제 관동군은 100만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한 부대였다. 노도와 같이 밀려 든 소련군에 관동군들은 총 한번 제대로 쏘아 보지 못하고 항복했고, 소련군들은 만주에 무혈 입성하였다. 미국의 일본 원폭투하 이후 소련군은 즉각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소만국경을 넘어 하얼빈을 점령하였는데, 이 모든 게 일 주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때 내가 본 것은 소련군의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는데, 하얼빈으로 진군해 들어오는 소련군의 위용은 정말로 대단했다. 커다란 대포와 탱크 등 엄청난 무기를 앞세우고 하얼빈 시내로 진군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일본군들이 과연 저들과 어떻게 싸우려고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어 하얼빈에는 큰 혼란이 찾아왔다. 왜냐하면 하얼빈이 북만주 일대의 일본인, 한인들이 귀국하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하얼빈에 소련군이 아직 진주하지 않았을 때는 그런 대로 평온을 유지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그들의 노골적인 야만성 때문에 한인, 일본인들의 피해는 엄청나게 늘어갔다. 소련군들은 대낮에도 술에 취한 채 피난민들이 수용되어 있는 학교 등으로 몰려 와 일본인, 한인 등을 가리지 않고 물건을 빼앗았다. 심지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여자들을 강간하기도 하는 등 금수와 같은 짓을 서슴치 않고 저질렀다. 특히 손목시계는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기호품이었는데, 총을 들이대고 빼앗아 팔목에 손목시계 10여 개 이상을 차고 자랑하는 군인들도 많았다. 그들에게서는 군인이라는 자부심과 군율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대낮에도 독한 보드카를 병 채로 마셔 댔고, 고함을 지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소련의 보안군(게페우)들이었다. 이들은 만취 병사들의 행동을 제지하다 안 되면 현장에서 바로 사살해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야만적인 군대, 이들이 바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 군대의 모습인가 하는 생각에 나는 공산주의에 점차 큰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소련 군대의 만행 때문에 하얼빈을 하루라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어 했다. 지옥 같은 하얼빈에는 한인 피난민들이 약 10여 만 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민간인들은 소련군의 통제로 유일한 교통수단인 기차를 거의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요동반도 끝에 위치한 여순, 대련, 심양(봉천)을 비롯한 항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업지대에 소련군들이 진주하면서 이 지대의 군수품, 생필품을 만드는 공장 시설을 뜯어 소련으로 가지고 가는 데 기차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고려 자위단을 만들다 이때 나는 고려 자위단을 조직했다. 이것이 내가 군인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1945년 8월 20일, 만주의 대도관 중학 출신을 중심으로 만주 여러 학교 출신 한인 청년들에 의해 고려 자위단이 조직되었다. 무법천지 하의 하얼빈에서 갈수록 심해지는 소련군의 만행으로부터 동포들이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돕고, 중국 폭도들로부터 동포들의 재산과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우리 청년들이 나설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자력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고려 자위단을 발족시키며 먼 만주 땅에서 가졌던 흥분과 감격을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우리는 태극기를 꺼내 들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고, 대한민국 만세를 수도 없이 외쳤다. 또한 애국가를 목이 터져라 불렀고, 그 감격에 서로 부등겨 안고 거리 행진을 하기도 했다. 고려 자위단의 주요 인사들은 하얼빈 농대 동창과 후배들 약 50~6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억나는 주요 인사인 김동석(金東石)은 내가 숙부님과 함께 먼저 귀국하면서 고려 자위단의 일을 맡았는데 그는 나중에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하얼빈에서 약 3년간 투옥생활을 했다. 그리고 육이오 전쟁 직전에 귀국하여 육군에 입대했는데, 육이오 전쟁 때에는 원산에서 북괴군 부사단장을 체포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해 함북 지사, 속초 시장, 목포 시장 등을 지냈다. 먼저 귀국한 나와 고려 자위단의 친구와 후배들이 모두 해군을 거쳐 해병대를 창설하게 되었는데 김동석은 늦게 귀국하는 통에 육군에 입대하였던 것이다. 유도로 단련된 다부진 체구를 가진 그는 대북 정보공작에 탁월한 솜씨를 보여 미 8군에서도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그밖에 한예택, 정봉익, 정만진, 김종록, 박철, 박경철, 박성철(작고, 평민당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 경호실장, 해병대 소장으로 예편), 박상철, 백운기, 허승룡, 김중식, 백남표 씨 등이 있었다. 이들은 가족들도 버리고 남하하여 나와 모든 것을 함께하며 해군으로 갔거나 해병대 창설의 주역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자위단 활동은 모든 것이 자발적이었다. 후견인이나 후원 단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숙식조차 자신들이 직접 해결해야 했지만 젊은 우리는‘이런 일은 우리밖에 할 수 없다.’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임했다. 그러나 불행한 사건도 겪었는데 바로 만주 하얼빈 농대 동기동창인 백용기의 죽음이었다. 어느 날 밤 그는 하얼빈 역에서 3km 정도 떨어진 금강 초등학교(피난민들이 수용된 곳)로 피난민을 호송하던 중 러시아군의 발포로 복부에 관통상을 당해 병원으로 호송했지만 절명하고 말았다. 러시아 군의 발포 이유는 통행금지 위반이었다. 이때 우리 모두가 체포되기도 했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하얼빈 교포들이 참석하여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하얼빈에서의 하루 하루는 긴장의 연속이었고, 고려 자위단은 하루 빨리 조국으로 돌아가려고 발을 동동 구르는 많은 동포들의 운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필요한 열차를 확보하고, 귀환동포들이 우리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고려 자위단이 해야 할 일이었다. 피난민들로부터 돈을 걷어 소련군으로부터 열차를 배정받았는데 그때 고려민단장 한광숙(러시아명 : 한 빠샤)이라는 분이 큰 도움을 주었다. 그 분은 함경도 출신으로 일찍부터 소련에서 살았기 때문에 러시아어에 능통했고, 재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엄청난 부자였다. 고려민단 사무총장 오기섭 씨 역시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한 분이었다. 귀국동포들은 확보된 열차로 압록강변 안동(단둥)까지 가서 강을 건너 신의주로 들어갔다. 나는 12월 귀국할 때까지 두 번의 왕복 호위를 했지만 무사하게 호송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후 치안이 제대로 확보되지 못한 무법천지 만주에서 열차 수송은 항상 위험이 수반되었다. 그 때문에 자위단장이었던 나는 무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한광숙 씨에게 부탁을 했다. “우리도 무장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기를 구해 주십시오.” 며칠 후 한광숙 씨가 불러 가 보니 탁자 위에는 일본군 구식 소총 30여 자루가 있었다. 무기를 보자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 우리를 보며 한광숙 씨가 말했다. “이것은 소련군 사령부로부터 발급된 무기 휴대허가증이야.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꼭 필요해. 소련군이 보증하는 증표니까 잘 관리해.” 한광숙 씨가 어떻게 무기허가증까지 받아 낼 수 있었는지 우리는 한광숙 씨의 수완에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받은 무기허가증은 나중에 중공 팔로군과의 대치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10월쯤부터 봉천에 나타나기 시작한 팔로군들이었다. 이들은 기차를 정지시키고 조사하는 등 행패를 부렸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무기가 있었지만 항상 긴장한 가운데 만일을 대비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감격에 차 피난민들과 함께 기차 지붕 위에서 애국가를 목 터지게 부르기도 했다. 그 중 ‘가을 하늘 공활한데’라는 가사에 이르러 만주의 맑은 가을 하늘을 보면 정말 가사같이 구름 한 점 없이 파란데 그 하늘마저 감격스러웠다. 또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라는 가사에 이르러서는 교교한 달빛 속에 잠들어 있는 만주 벌판을 보면서 해방 조국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렇듯 귀국동포 호송을 위해 오가던 위험한 길도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귀국동포들을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의 실체를 더욱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동포들을 안동에 내려 주고 돌아갈 때였다. 소련군들이 일본 군수시설을 뜯어 가는 열차에 동승하게 되어 하얼빈까지 같이 왔는데, 이때 나는 소련군들의 무지하고 난잡한 모습들을 보았다. 그들에게는 군대가 가지는 최소한의 규율이나 군기라는 것도 없었고, 모든 행동이 동물적이고 즉흥적이었다. 소련 극동군들이 죄수나 구 러시아 천민 출신이 많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러시아 상류층의 문화는 세계적이었지만 하층민들의 문화는 그렇게 천박할 수가 없었다. 이런 소련군들의 모습을 보면서 공산주의를 실감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 군대가 저런 모습이니 나머지 공산국가는 뻔한 것일 터였다.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회의를 넘어 슬픔마저 느껴졌다. 공산주의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막연한 꿈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학창시절 내가 탐구했던 공산주의란 공동 생산, 공동 분배를 통해 부의 평등한 삶을 추구하는 유토피아였다. 그러기에 나는 공산주의에 상당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탐독했던 『자본론』, 『제국주의의 멸망』이라는 저서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대자본가들이 모든 것을 흡수하여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국은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을 쓰러뜨리고 인민이 지배하는 공산주의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간과한 것은 ‘인간의 본능인 소유욕’이었다. 능력에 관계없이 똑같이 분배한다면 누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려고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나는 많은 의문을 가졌고, 그들의 종말을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으로 일어난 공산주의는 결국 70여 년 동안 수명을 누리다가 제풀에 넘어지고 만다. 채 1세기도 버티지 못한 것이었다. 귀국열차를 타다
“친구가 좋다. 죽어도 같이 죽는다!” 나를 따라 귀국한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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