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99년 국내 천문학자
나일성 교수 이름 딴 소행성 탄생
국내 원로 천문학자인 나일성(66) 연세대
명예교수의 이름을 딴 소행성이 탄생했다. 국제천문연맹(IAU)은 1995년 8월 21일
일본 천체관측가인 와타나베 가즈오씨가
삿포로과학관에서 발견한 소행성을 나교
수의 이름을 따 ‘(8895) NHA-1995QN’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1999
년 5월 3일 밝혔다.
국제천문연맹은 회보에서 나교수가 사재
를 털어 한국 예천에 건립하는 ‘나일성
천문관’의 개관을 기념하고 그동안 그가
천문학 분야에서 쌓은 업적을 기려 이같이
결정했다.
이로써 한국 이름이 붙은 소행성은 지난
1993년 후루카와 기이치로 도쿄대 명예
교수가 발견해 일본에 천문학을 전수한
백제인 관륵의 이름을 딴 ‘칸로쿠(KAN
LOKU)’와 1996년 와타나베씨가 발견한
‘세종’에 이어 세번째다.
▶2009년 아시아 공동기금 출범..
한국 192억달러 부담
▶2009년 ~5일(호) 시니어선교한국
2009대회 남서울교회,
신반포교회 공동으로 열림.
▶2007년 대우건설 임직원 3명 나이지리아서 피랍
2007년 5월 3일 오전 9~10시(한국 시각·현지 시각 새벽 1~2시) 나이지리아 남부 니제르 델타지역 포트 하코트시(市)에서 북동쪽으로 30㎞ 떨어진 아팜발전소 건설 현장에 무장 괴한들이 총을 쏘며 난입해 대우건설 임직원 3명과 필리핀 출신 근로자 8명, 현지인 운전사 1명 등 12명을 납치했다.
피랍된 대우건설 임직원은 정태영(52) 상무와 안종태(53) 전문위원(상무급), 하익환(50) 부장으로 파악됐다.
무장 괴한들은 현장을 경비 중이던 나이지리아 군인,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고 차량을 탈취해 당시 숙소에서 자고 있던 대우건설 임직원을 납치했으며, 이 과정에서 나이지리아 군인과 민간인 등 2명이 사망했다.
▶2004년 에어프랑스 네덜란드 KLM항공 인수
▶2004년 유한일 서울대 교수,
한국인 최초 훔볼트 연구상 수상
서울대 재료공학부 유한일(柳漢一·53) 교수가 한국 공학자로는 최초로 세계적 권위의 독일 훔볼트 연구상(Humboldt Research Award) 수상자로 선정됐다.
서울대는 3일 유 교수가 나노이온공학이라는 새로운 학문분야를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 상을 받게 됐다고 밝혔다. 훔볼트 연구상은 인문·자연과학·공학 분야에서 매년 국제적으로 뛰어난 연구업적을 인정받은 학자에게 주는 상으로, 독일 자연과학계의 태두로 불리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를 기념해 제정한 상이다.
유 교수는 수상배경에 대해 “새로운 나노의 발견을 통해 연료전지(Fuel Cell)에 들어가는 전극 또는 전해질 소재 입자를 나노사이즈로 작게 만드는 분야를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았다”고 밝혔다.
유 교수의 연구는 세계적인 학술지인 네이처(Nature)지에도 소개된 바 있으며, 초정밀 전자재료 분야에서 다양한 응용이 기대된다고 서울대측은 밝혔다. 유 교수는 5만 유로(한화 7000여만원)의 상금과 함께, 독일에서 6개월~1년 동안 관심분야의 연구를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연구비용을 추가로 지원받게 된다.
유 교수는 74년 서울대 재료공학과를 거쳐 76년 한국과학원(현 KAIST)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84년 MIT에서 공학박사학위를 받은 뒤 85년부터 서울대에서 교수로 재직해왔다.
▶2004년 한국, 혈전증(뇌졸증) 치료제
오줌으로 생산하는 `바이오 돼지` 생산에 성공
▶2004년 무형문화재 김상용씨 사망.
▶2003년 강남 교보 개장,
광화문 교보에 이어 문고량 2위
▶2001년 독일에서 사상 처음으로 휴대폰을
이 용한 젊은이들의 사이버 예배가 거행됐다
▶2001년 김정일 장남 추정 인물
일본 불법입국 하다 체포.
▶2001년 김대통령-페르손총리 만찬.
▶2000년 스리랑카 반군소탕 전시체제 돌입.
▶1999년 조흥은행-충북은행 합병 선언
▶1999년 정부수립후 첫 `문화재청` 설립.
문화재관리국이 문화재청으로 승격
▶1998년 유럽연합 정상들,
유럽단일통화인 유로화 참가 11개국을 발표
유로화 통합 선언
유럽연합(EU) 15개국 정상들이 1998년 5월3일 11개 회원국이 참여하는 유럽통화동맹(EMU) 출범을 공식 선언했다.
이들 정상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회담을 갖고 유럽 단일통화인 유로를 1999년 1월1일부터 출범시키기로 공식 합의했다. ‘하나의 유럽’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유로화의 탄생은 세계경제의 판도변화는 물론 중장기적으로 세계질서의 변화를 예고하는 20세기 대사건 중 하나임에 틀림없었다.
유럽의 자존심이기도 한 유로화는 미국의 달러화에 눌려왔던 경제패권을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울러 유럽의 경제뿐 아니라 정치ㆍ사회ㆍ문화 전반에 걸친 통합을 이뤄내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EU는 미국의 독점적 우위와 압도적 경제력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유럽 단일화의 결과물인 유러화 출범에 동의한 것이다.
EU는 이에 앞서 1979년에 유럽통화제도(European Monetary System)를 구축했고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단일통화의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
EU가 70년대 침체기를 거쳐 경제통합 추진에 활력을 되찾은 것은 80년대 중반 유럽공동체 계획과 단계별 통화통합이 현실로 옮겨지면서부터.
EU는 경제통합은 이론으로만 실현되는 게 아니라 엄연한 현실의 제약을 극복해야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했다.
이런 의미에서 EU는 구체적이고 현실에 기초한 실천계획을 담았으며 실물시장 통합의 완성은 금융ㆍ통화 측면에서의 통합이 병행돼야 한다는 데 동감했다.
EMU의 출범과 함께 실물 유로화를 통용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유럽의 경제통합은 마무리됐다.
https://m.blog.daum.net/sharon2025/1471
▶1997년 고양 세계꽃박람회 개최
고양국제꽃박람회는 ’꽃의 도시‘로서 고양시 브랜드 가치를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세계 화훼시장에 우리꽃의 우수성과 국가 우호증진을 통해 대한민국 홍보대사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1996년 영국, 광우병에 걸린 소 첫 도살
광우병으로 도살된 소들.
영국 정부가 자국산 소고기가 사람에게도 전염되는 광우병에 오염됐다고 1996년 3월 공식 발표하자 유럽은 온통 공황상태에 빠졌다. 유럽연합(EU)은 영국산 소고기 전면 금수 조치를 내렸고 대륙과 영국은 긴장 상태에 빠졌다. 영국 정부는 460만 마리가 광우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를 다 도살하는데는 최소 6년은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첫 도살은 1996년 5월 3일, 30개월 이상된 소 8만 마리에 대해 이뤄졌다. 화장 시설이 갖춰진 영국내 9개 공식 도살장이 완전 가동되면서 한달간 20만 마리를 도살했다. 파동은 곧 대륙으로 번져,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포르투갈, 독일 등 곳곳에서 적게는 몇마리에서 십수만 마리까지 도살됐다.
광우병 공포는 식생활에만 직접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소뼈, 부산물을 사용하는 화장품도 위험물 목록에 올랐고 의약품 캡슐도 유통이 전면 금지됐다. 광우병은 전세계에서 발견됐다.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은 영국으로 1996년 4월 현재 16만1663건이 보고됐고 스위스에서 205건, 아일랜드 123건, 포르투갈 31건 등 유럽에서 주로 발견됐지만 중동의 오만, 캐나다, 포클랜드에서도 한두건씩 발생이 보고됐다.
▶ 1993년 오늘,
환경처, 중국에서 날아온 황사에서 1~3월보다 납이 2배,
크롬이 5배 늘었다고 발표
▶1989년 부산 동의대에서 일어난 화재로
경찰관 7명 사망
▶1987년 샹송 가수 달리다 자살
▶1986년 5.3 인천사태 발생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 방한
분단의 아픔과 민주화를 향한 진통으로 신음하던 한국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러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1984년 5월 3일 방한했다. 바오로2세는 김포공항에 도착, 트랩을 내리자마자 허리를 굽혀 땅에 입을 맞추었다. 교황은 이 친구의식(親口儀式)을 하는 내내 “순교자의 땅, 순교자의 땅”이라고 되내었다.
“여러분의 벗으로 평화의 사도로 여기에 왔습니다”. 서투른 한국말이었지만, 그가 전하는 평화의 위력만은 대단했다. 우리는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것 같았다.
김포공항에 도착, 트랩에서 내려온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분단된 순교자의 땅에
친구(親口) 하고 있다.
가톨릭 교황으로는 처음으로 이날 한국을 방문한 그는 인자한 얼굴, 조용한 미소, 하얀 수단 차림에 환영인파를 향해 두 손을 흔들었다. 그가 지나는 거리마다 태극기와 교황청기가 물결쳤고, 1백5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인도를 메운 채 경건한 마음으로 성호를 긋거나 십자가를 높이 들고 그를 맞았다.
교황이 방한한 이날, 교황 방한 기념으로 발행한 우표 및 우표책, 우표첩 등이 발매 1시간 만에 동이 나기도 했다.
교황은 광주와 소록도 등지를 순방한 후 5월 6일에 1백여 만명이 모인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천주교 박해 순교자 103명의 시성식을 가졌다.
당시 가히 ‘슈퍼스타’라고 일컬어질 만큼 많은 인파를 몰고 다닌 그는 평소 정신질환증세를 보이던 한 대학생이 교황전용방탄차에 뛰어들어 장난감권총 2발을 쏘는 웃지 못할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4박 5일간의 탈도 많고 말도 많던 한국 방문을 마치고 5월 7일 한국을 떠났다.
▶1981년 테레사 수녀 내한
가난한 사람들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
하느님의 연필, 그것이 바로 나이다. 하느님은 작은 몽당연필로 좋아하는 것을 그리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아무리 불완전한 도구일지라도, 그것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신다.
- 마더 테레사
허리를 굽혀 섬기는 자는 위를 보지 않는다
인간은 오랜 문명의 역사를 거치면서 이성과 인류애라는 인간만이 만들어낸 가치로 스스로를 다듬기는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육식 동물의 욕구를 완전히 누를 수 없는 존재이다. 약자를 괴롭히고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며, 심한 경우는 서로를 죽인다. 세계 곳곳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심지어는 이런 가해 의식을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인간다움이라는 정의의 한 꺼풀 아래는 기실 육식동물이 가진 정글의 법칙 속에서 인류는 타인을 밟고 일어서기 위해 위만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 한 사람, ‘허리를 굽혀 섬기는 자는 위를 보지 않는다’며 자신의 몸을 가장 낮은 데로 낮추어 인류애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 사람, 그녀가 있었기에 20세기 혼란과 살육의 인류사는 한 뼘 정도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보통의 사람, 심지어 종교에 헌신한 사람조차도 좀처럼 해내기 어려운 끊임없는 자기희생으로 각박한 현대 인류사에 빛나는 정신을 보여주었던 그 사람은 마더 테레사라고 불린, 테레사 수녀이다.
중부유럽의 영민한 소녀가 인도의 수녀로
테레사 수녀의 본명은 아그네스 곤자 보야지우로 중부유럽과 아테네를 잇는 주요거점 도시인 스코페에서 태어났다. 스코페는 현재는 마케도니아공화국의 수도이지만 테레사 수녀가 태어날 당시에는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500년간이나 받아온 도시로 스코페 지역에는 여러 민족들이 섞여 살고 있었다. 테레사 수녀의 부모의 경우도 아버지는 아르메니아계이고 어머니는 알바니아계였다고 한다. 여러 민족이 모여 살았던 만큼 종교도 그리스 정교, 이슬람교 등이 혼재해있었다. 이 지역은 19세기말부터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 시작되어 20세기 초반 많은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그 와중에 부유한 사업가이던 테레사 수녀의 아버지 니콜도 정치운동에 휘말려 그녀가 태어난 그 해에 사망하고 마는데, 정적에 의한 암살이라는 의혹도 있다고 한다.
아버지의 손길은 받지 못했지만 어머니 드라나는 남겨진 아이들을 가톨릭 안에서 잘 보듬어 키웠던 것 같다. 당시 이 지역의 종교는 그리스 정교나 이슬람교가 대부분이었고 가톨릭을 믿은 집안은 별로 없었는데 테레사 수녀의 집안이 가톨릭을 믿은 것은 매우 희소한 경우였다.
테레사 수녀의 어린시절은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영민했으며 신앙심이 매우 돈독했고 12살 때부터 인도로 가서 수녀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18세에 어머니로부터 수녀가 될 것을 허락받은 테레사 수녀는 고향을 떠나 아일랜드에 있는 로레타 수녀회에 들어갔다. 그녀가 떠나올 당시 고향 스코페는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독립 한 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지배를 번갈아 받는 등 혼란의 시기였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에 있던 로레타 수녀회에서는 많은 수녀들을 교육해 이들을 역시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로 파견했다. 인도로 파견된 수녀들의 주요 임무는 식민지에 나가있는 영국계 백인의 딸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테레사 수녀는 1928년부터 3년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기초교육과 영어를 배우고 1931년 인도의 다질링으로 갔다. 이때 테레사 수녀는 본명 아그네스 외에 테레사라는 세례명을 선택했다.
어느 날 기차 안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다
테레사 수녀는 1931년부터 1947년까지 인도의 콜카타에 있는 성 마리아 수녀원의 부속 학교에서 소녀들에게 지리학을 가르쳤다. 이 생활에 테레사 수녀는 잘 적응했던 것 같다. 그녀는 성실히 학생을 가르쳤고 16년 동안 교사생활을 하면서 교장으로까지 승진했다. 그 사이 1937년 그녀는 로레타 수녀회 안에서 평생을 할 것을 서원하기도 하였다.
신안에서 평화롭게, 일개 수녀로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성실하며 살아갈 것만 같았던 테레사 수녀의 삶은 1946년 갑자기 바뀐다. 그녀는 1946년 콜카타에서 다즐링으로 피정을 가던 기차 안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녀가 안온한 로레타 수녀회에서 나가 거리에서 고통 받는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것을 이미 수녀로 자신을 부른 신이 다시 한번 자신에게 임무를 준 ‘부르심 속의 부르심’ 이라고 했다. 그녀는 신의 목소리에 즉각 응답하려 했다. 그러나 가톨릭 교단에서는 이미 로레타 수녀회 속에서 평생을 다하기로 한 테레사 수녀가 수녀회를 벗어나 거리로 나가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녀의 활동이 가져올 여러 가지 정치적 의미와 그녀의 신변보호문제, 종교적 문제 등등으로 인해 테레사 수녀의 청원은 2년의 세월을 질질 끌었다. 그러나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고 청원을 거듭했다. 마침내 당시 교황이던 비오 12세로부터 수도원 외부거주를 허가받은 테레사 수녀는 1948년 인도의 거리로 혈혈단신 나섰다. 이제 그녀를 보호해줄 단체나 기관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어느 날 기차 안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고 수녀회 생활을 벗어나 거리에서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안고 있는 테레사 수녀 (1985).
흰색 사리를 입은 수녀
테레사 수녀가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홀로 콜카타의 빈민 거리로 나선 1940년대 후반 인도는 복잡한 상황을 맞고 있었다. 2차 대전 이후 마침내 200여년 간의 영국 지배를 벗어난 인도는 독립의 기쁨을 누리기도 잠시, 종교적, 정치적인 상황이 맞물려 여러 곳에서 전쟁과 투쟁이 벌어지고 사람들은 서로를 질시하고 반목했다. 사회는 불안정했고 인도 거리 어디를 가나 난민들이 넘쳐 흘렀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굶주림과 병마 속에서 죽어갔다. 테레사 수녀는 신의 부름을 받고 그들을 돌보기 위해 거리로 나왔지만 처음에는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막막했다. 게다가 막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한 인도 사람들이 영국계 수녀회 출신의 수녀를 환영할 리가 없었다.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은 테레사 수녀의 봉사의 손길을 선교의 뜻으로 오해하고 적대시하였다. 그러나 수녀회를 벗어나 홀로 인도 사람들 앞에 나선 테레사 수녀에게는 이미 오래전에 품었던 선교의 뜻 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신의 부르심을 실천하며 가난하고 병들어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안식과 위안을 나누어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을 뿐이었다.
테레사 수녀는 인도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기 위해 검은 수녀복을 벗고 인도의 흰색 사리를 입었다. 흰색 사리는 인도의 여인 중 가장 가난하고 미천한 여인들이 입는 옷이었는데, 이 옷은 훗날 테레사 수녀를 상징하는 옷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테레사 수녀는 자신이 특정 국가나 특정 종교를 홍보하기 위해 나온 사람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인도의 국적을 취득해 인도인이 되었다.
그녀가 베푸는 봉사와 박애는 이미 가톨릭을 벗어난 더 큰 의미의 종교 같은 것이었다.
테레사 수녀가 1952년 인도 콜카타에 세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호스피스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맨 오른쪽 서있는 사람이 테레사 수녀(1976).
살아있는 성녀
맨 처음 5명의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시작했던 테레사 수녀의 봉사는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수녀회 부속 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 그녀를 도왔고 그녀의 진심을 이해하는 후원자들도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 병든 사람들을 간호하고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이 보살핌을 받으며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집을 지었다.
미혼모와 고아들을 위한 집이 만들어지고 나병환자들이 모여 재활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는 마을이 생겼다. 처음에는 그녀의 행동을 반신반의하며 바라보았던 가톨릭 교단도, 인도 정부도 그녀의 헌신적인 봉사와 박애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처에서 그녀를 돕기 위해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들기 시작했고 테레사 수녀를 중심으로 1950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결성되고 후원 단체도 생겼다. 사람들은 테레사 수녀를 마더 테레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가톨릭 교단과 교황도 그녀의 활동을 지지했으며 세계 각국에서 기부금이 모아졌다. 많은 유명인사들이 테레사 수녀를 만나기 위해 인도를 방문했고 그때마다 거액의 기부금을 내놓았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들어오는 기부금은 통째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고 본인은 다 낡아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역력한 흰색 사리 하나만을 걸친 채 나병 환자를 씻기고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런 그녀를 지켜본 세계인들은 테레사 수녀를 살아 있는 성녀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작 테레사 수녀 본인은 그 같은 세계적 찬사에 무덤덤했다. 자신은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고 돌보아야 할 사람을 돌볼 뿐이라며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에게로 달려갔다.
테레사 수녀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는데 시상식에도 평소와 같이 흰색 사리와 늘 신는 샌들 차림이었다. 그녀는 상금을 받으면서 ‘이 돈으로 빵을 몇 개 살 수 있을까요?’ 라고 했다. 그녀는 이 상금을 콜카타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두 썼고 시상식 만찬을 거부하고 그 비용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세계 평화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란 기자의 질문에는 "집에 돌아가 가족을 사랑해주세요."라고 말했다.
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설립한 인도 콜카타의 보호소. 사진은 식료품 배급을 기다리는 여성들을 돕고 있는 모습이다 (1980).
한편, 한때 미국에서는 그녀의 명성을 이용한 대규모 사기사건이 터지기도 했고 테레사 수녀가 소극적인 봉사에만 힘을 기울였을 뿐 20세기 중 후반 이후 일어난 세계의 폭력적 혼란에 아무런 코멘트를 달지 않았고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녀의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비판들도 그녀가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 앞에서 보인 허물없고 간곡한 행동들을 통째로 부정하지는 못하고 있다. 테레사 수녀는 죽음을 맞이할 때에도 더 나은 의료 시술을 거부한 채 자신이 돌보았던 환자들과 똑같은 치료를 해줄 것을 원했다고 한다.
1997년 테라사 수녀의 임종은 그녀의 보살핌을 받던 인도 콜카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은 세계인들의 마음을 울렸다. 세계인들은 그녀를 진심으로 애도하였다. 그것은 테레사 수녀의 삶 자체가 보여준 희망, 인간에게 반드시 있으리라 믿어 지는 또 다른 한 면, 숭고함이 저물어 가는데 대한 애도였다.
테레사 수녀의 장례는 인도의 국장으로 치러졌다.
1000여 명 천주교 신자들의 환영 인파로
김포공항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새통을 이뤘다.
▶1980년 한국-이란 석유 온산공장 준공
▶1979년 마거릿 대처,
영국 최초 여성 총리에 당선
1979년 5월 3일 `고복지 고부담 국가의 지속‘인가 `자유주의 경제시장으로의 회귀`인가를 놓고 영국 총선거가 실시됐다. 당시 영국은 1960년대 말부터 10여 년 동안 물가인상, 경제성장률 하락, 국제수지 악화 등으로 국가 전체가 흔들렸다. 그리고 개표결과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야당 보수당이 안정 과반수 의석을 획득, 5년 만에 정권을 탈환하면서 영국 최초의 여성 수상이 탄생했다.
1925년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집안의 둘째딸로 태어난 대처는 귀족과 상류계급 출신이 많은 보수당 당수로서는 이례적으로 서민출신이었으며 쌍둥이를 출산한 해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위대한 어머니였다. 게다가 실업가의 아내로서 가사업무를 담당하며 1959년 총선거에서 3번째 도전 만에 의원에 당선돼 의회에 진출한 당찬 아내이기도 했다. 그녀는 1975년에는 히스정권하에서 교육과학장관에 취임했고 그 해 실시된 보수당 당수 선거에서 대승, 사상 최초의 여성 당수가 됐다.
세계정치사에서 대처여사보다 먼저 정치정상에 오른 여인들은 4명이나 있었지만, 이들 모두 남편의 사망에 따른 승계 부친의 정치조직과 권력기반의 후방을 이용한 어쩌면 대타 같은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대처는 달랐다. 그녀는 어떤 부유한 배경 없이 스스로 정치의 초석을 쌓아 마침내 세계 정치 정상에서 오른 제1호 자수성가형 여인정치인이었다.
얼굴만 여성이었지, 그녀의 정치스타일은 윈스턴 처칠 못지않은 정통보수당의 체취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대처 여사는 일명 ’영국병‘이라고 불린 악성 인플레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조합 전횡 저지ㆍ자유경제주의ㆍ세제개혁 등을 강행, 병든 영국을 치료하는데 힘썼다.
그래도 경제가 소생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녀의 인기는 곤두박질 쳤지만 1982년 발생한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대처리즘'도 서서히 효과를 나타냈다. 하지만 1983년 정부가 적자를 기록하던 20개의 석탄채굴회사의 문을 닫아버리면서 또 다시 위기에 직면했다. 최강의 노조인 탄광노조가 반발한 것이다. 1974년 히스 정권을 몰락 시켰던 탄광노조는 1년 뒤 완패를 선언하고 대처에게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후 영국이 안정을 찾아가자 대처는 1983년과 1987년에 연거푸 총리에 당선되며 11년간 영국을 재정비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대처리즘'이 더이상 효과를 못보자 1990년 11월 당수 투표에서 패배한 뒤 사임했다.
당시 ’철의 여인’ ‘호전적인 여장부’ ‘새로운 냉전의 용사’ 등, 숱한 화약 냄새 짙은 별명들이 정치판에서 남성 못지않은 값을 해낸 그녀를 대변해주고 있다.
영국의 수상으로 영국 정치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다, 마거릿 대처
“어제 제가 하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플레이션을 잡으려면 고통스러운 결과를 감수해야 합니다 (…) 차악의 선택이라고 하겠지요. 지금 그냥 더 많은 돈을 찍어내는 식으로 대응한다면, 결국 물가는 엄청나게 뛰고 실업률도 치솟을 것입니다. 완전한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 결국 현실적인 경제원리가 작동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대안은 없습니다.”
- 마거릿 대처, 1980년 6월 25일, 런던 주재 미국 언론인 회견에서
깊어가는 "영국병", 대안은?
19세기에 “사상 최고 최대의 제국”을 자랑했던 영국의 국세는 세계대전 이후 쭉 내리막길을 걸었다. 1970년대에 들면서는 경제와 사회에서도 일종의 한계가 나타났다. 한때는 대안이 없는 듯했던 케인즈주의의 큰 정부, 복지사회가 일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세금은 많고, 일자리는 없는 “영국병”을 낳으며 심각한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1970년대 말 영국 경제는 실질성장률 마이너스, 실업률 4~6퍼센트, 인플레이션 15퍼센트라는 지표를 보였으며 새로 기업을 창업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꺾는 복잡한 정부규제와 무거운 세금, 걸핏하면 벌어지는 노동조합의 투쟁으로 사회 전반에 “경제하려는 의지”가 실종된 상황이었다. 이런 암울한 상황을 극복하려면 뭔가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리고 그런 새로운 대안은, 정책에서뿐 아니라 인물에서도 찾아져야 했다.
알려진 대로라면, 대처만큼 정치인이 되는 데 가정교육이 큰 영향을 준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녀는 영국 중부의 작은 마을인 그랜덤에서 태어났으며, 결혼 전의 이름은 마거릿 힐다 로버츠였다.
아버지 알프레드 로버츠는 식료품점을 경영했으며 따라서 대처에게는 수상이 된 뒤에도 “식료품집 딸”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칭찬과 비웃음 두 가지 다의 경우로). 하지만 알프레드는 마거릿이 두 살 때 시의원에 당선되고, 시의 여러 직책을 거쳐 그녀가 대학에 진학할 즈음에는 그랜덤 시장에 취임했으므로 대처가 평범한 식료품집 딸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일 수 있다. 그래도 알프레드는 본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공부도 제대로 마칠 수 없었지만 노력 끝에 점원으로 일하던 식료품점의 주인이 되고, 다시 정치에 입문해 시장까지 된 사람이었기에 여러 사람들의, 그리고 딸의 큰 존경을 받았다. 대처 자신도 특별한 배경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여성이라는 핸디캡도 극복하고 장관에 수상까지 되었으므로 “결국 개인이 노력하기 나름이다. 사회가 개인의 처지를 일일이 돌봐줄 필요는 없다”는 사고방식이 그녀의 정치철학에 자리잡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랜덤에 있는 대처의 생가
그녀의 집안 대대로 믿어온 감리교도 “남에게 기대지 말고, 뭐든 자기 힘으로”와 “늘 반듯하게, 모범적으로”라는 엄격한 가르침으로 대처에게 보수적인 성향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또한 그녀의 아버지는 어린 마거릿을 정치인으로 키우려 했다기보다, 자신의 정치활동을 도울 ‘운동원’으로 키웠다. 그가 1935년의 총선에서 보수당의 승리를 위해 발벗고 나섰을 때, 겨우 열 살이던 마거릿은 벽보를 붙이고 선전물을 돌리며 선거사무소에서 심부름을 하는 등 정신없이 일했다. 알프레드는 이후 스스로 선거에 나섰을 때도 딸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고, 정치문제에 대해 딸과 토론하거나 다른 후보의 장단점을 분석해서 브리핑해보도록 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자연스레 “정치적 인간”이 된 마거릿은 1943년에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 화학을 전공하면서도 바로 정치에 참여하려 했으나 당시 대학가는 진보파가 절대로 우세했기에 학생회에서 활동할 수는 없었고, 비교적 소수의 동아리인 옥스퍼드 보수협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리고 남다른 열성과 노력으로 곧 그 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당시 옥스퍼드에는 마거릿 같은 중류 출신은 드물었고, 어려움이라고는 조금도 모르고 자란 상류층 자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말끝마다 민중과 혁명을 이야기하며, 체제를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설치는 일을 마거릿은 차갑게 보았다.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부와 명예, 독실한 신앙, 가족과 전통에 대한 애착. 미국의 신보수주의 정치인들이 대부분 공유했던 특성과 신념을 그녀 역시 가졌고, 그 가치를 위해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고 맞섰다.
정치하는 과학도, “영국 최초”가 되다
마거릿은 1948년에 옥스퍼드를 졸업했는데, 그 해 보수당의 연차대회에 참석했다가 보수당 클럽 회장의 눈에 들어 다트포드의 보수당 후보로 1950년 총선에 출마하게 되었다. 여성 후보로서는 전국 최연소였고, 보수당 후보로는 유일한 여성 후보였다. 비록 선거에서는 떨어졌지만, 이 때 만난 11세 연상의 비즈니스맨, 데니스 대처와 1951년 12월에 결혼하여 마거릿 대처가 된다. 정계에 발을 디디는 한편 변호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던 그녀는 법률 공부 자금 마련을 위해 화학 관련 회사에서 일했으나, 결혼 이후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1950년, 화학 실험실에서 일하는 대처.
1966년, 재무장관 시절
1955년, 변호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는 정치에 본격적으로 나서고자 했으나 “집에서 애나 볼 것이지......”하는 인식에 젖은 보수당 간부들 때문에 계속해서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래도 선거 유세장마다 따라다니며 열성으로 보수당의 선거운동을 도운 결과, 1958년 런던의 핀츨리 선거구에 입후보할 수 있었다. 그 지역구는 보수당의 세력이 큰데다 대처처럼 자수성가한 사업가들이 많은 곳이어서, 대처는 마침내 1959년에 꿈에도 그리던 국회의사당에 입성할 수 있었다.
정치인으로서 대처는 여느 영국 정치인들과 다르게 유머감각이라고는 없었고, 말도 거창하고 화려한 표현을 쓰지 않고 필요한 말만 했다. 그래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역으로 “필요한 말한 하는” 점, 과학도답게 연설에서 반드시 통계수치와 계량적 지표 등을 내세우며 듣는 이의 신뢰감을 높인 점,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이면서도 당차고, 열정적이고, 강철 같은 의지를 내보인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의원이 된 지 2년 만에 차관 제의를 받았으며, 이는 금방 보수당 정권이 와해되면서 무산되었지만 1965년에 다시 에드워드 히스의 보수당 정권이 들어서자 1965년에 주택장관과 연금장관, 1966년에 재무장관, 1967년에 에너지장관, 1968년에 교육장관, 교통장관, 1970년에 다시 교육장관을 지내는 등 화려한 공직 이력을 쌓게 되었다. 그 중에서 대처의 이름이 가장 두드러졌을 때는 1970년에 다시 교육장관이 되었을 때인데, 그녀는 평소의 신념대로 취학 아동에게 무상으로 지급되던 우유를 유료로 전환하기로 했다. 그러자 노동당과 언론은 길길이 뛰며 정부를 성토했고, “우유 도둑은 물러가라!”고 쓴 플래카드를 든 학부모단체가 도심 시위를 벌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녀는 회고록에서 이를 “최소한의 효용 때문에 최대한의 정치적 희생을 겪은 일”이었다고 썼다. 스스로 대단치 않은 개혁에 너무 큰 위험을 감수했다고 자책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왜 영국의 정치는 그토록 대단치 않은 개혁에도 벌벌 떨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도 남겨준 사건이었다.
히스 내각이 1974년에 무너지면서 그녀는 야당 정치인으로서의 설움도 겪게 되었으나, 그것은 동시에 크나큰 기회였다. 정권을 빼앗긴 책임을 물어 히스의 당권에 도전하고, 1975년에 보수당 당수가 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그녀는 야당 당수로서 노동당 정부를 매섭게 몰아붙였고, 마침내 1979년, 경제난과 총파업이 엎친 데 덮치며 “불만의 겨울” 속에 노동당이 무릎을 꿇었다. 마거릿 대처는 보수당 최초의 여성 당수에 이어 영국 최초의 여성 수상이 되었다. 서구 국가들 중에는 최초의 민선 여성 최고통치자이기도 했다.
당연히 그녀는 여느 수상보다 훨씬 많은 주목을 받았고, 영국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이름난 정치인이 되었지만 정계에서는 입지가 튼튼하지 않았다. 아직도 정치는 남성의 영역이라고 보는 의원들, “많이 키워줬더니” 그녀가 배신했다며 이를 갈던 히스와 그를 따르는 보수당 원로들은 그녀를 흰눈으로 흘겨보며 뭔가 꼬투리만 잡았다 하면 물고 늘어졌다. 심지어 그녀의 각료들까지도 그녀를 수상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하지만 “철의 여인”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으며, 대중정치와 마키아벨리즘으로 난관을 극복했다. 매스컴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을 위대한 정치인으로 부각시키는 이미지메이킹을 하는 한편(가령 지루할 뿐이던 보수당 전당대회도 그녀는 자신과 보수당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화려한 볼거리로 탈바꿈시켰다), 자신을 싫어하는 정치인들의 뒷조사를 해서 만약 자신을 계속 적대시하면 그들의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결국 막강해 보였던 화이트홀의 반 대처 전선은 군데군데 구멍이 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중반쯤에는 그녀에게 대들 정치인은 사실상 없어져 버렸다.
“대안은 없다”
대처는 1979년의 총선에서 감세 정책과 자력경생, 법질서의 회복을 내세우며 승리했다. “불만의 겨울”을 거치며 지나친 세금과 고물가, 노조의 공격성에 부자들뿐 아니라 “조용한 다수”까지 진절머리를 내게 되었다는 표시였다. 대처는 자신과 보수당의 신자유주의 노선만이 해답이라면서 경제 정책 과제를 이렇게 정리했다. “정부는 통화안정에 힘쓰고, 세금과 정부지출을 줄여야 한다. 법인세와 준조세를 줄이고 각종 규제를 철폐하여 기업이 활동하기에 최대한 유리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민영화를 확대해야 하고, 노조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노동 유연성을 늘려야 한다.”
그녀는 이를 실천하고자 취임 첫해에 외국환 관리 철폐와 국영사업 민영화에 착수하는 한편, 노조 활동을 규제하는 입법에 나섰다. 1981년에는 공정금리를 폐지해 정부주도의 금리통제를 중지하고 시장기능에 맡긴다는 정책을 취했다. 이밖에 정부의 주택구입 보조비를 폐지하며, 고등교육 지원금을 폐지하는 등(이 때문에 그녀는 모교인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명예박사를 받기로 예정되었다가 학내 반발로 무산되기도 했다) 교육 투자 예산 대폭 감축 등을 추진했다.
1984년, 런던에서 벌어진 탄광 파업 노동자들의 시위
이런 정책들의 효과가 반드시 뚜렷하지는 않았으며, 특히 1980년대 초에는 성장률과 물가는 조금씩 나아졌지만 실업률(1982년에는 실업자 수가 300만 명을 돌파했다)과 무주택자 비율은 늘기만 하여 노동자들을 비롯한 서민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그리하여 1981년 여름에는 런던과 리버풀의 빈민가를 비롯한 각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나 “불만의 겨울이 끝나나 했더니, 이제는 무더운 여름이다”라는 푸념을 불렀고, 1984년에는 전국적인 탄광 파업이 일어났다. 대처 정부가 174개의 국영 탄광 중 20곳을 폐업하고 2만 명의 탄광 노동자를 해고하겠다고 발표한 데 따른 반발이었지만, 친기업 반노조의 대처 정권에 대한 노동계의 힘겨루기 성격을 짙게 띠었다. 그러나 결국 대처는 이 힘겨루기에서 승리했는데, 전에 없는 강경 진압이라는 카드를 꺼냈을 뿐 아니라 노조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고, 미리 확보해 둔 석탄 재고를 풀어 국민의 불편을 최소화하며 버텼기 때문이었다. 1985년 3월에 탄광조노가 파업을 풀자 대처는 “국가복지제도의 전면 재검토”를 선언하며 기세를 올렸고, 1988년에는 40억 파운드의 대규모 감세와 함께 고용법을 개정해 기존의 ‘클로즈드 숍(closed shop)’, 즉 노조 가입자만 고용이 가능한 제도를 없애고 사측의 입장을 따르는 개인 노동자나 제2노조도 가능하게 함으로써 “노조 천국”이라던 영국에서의 노조의 권력에 치명타를 안겼다.
그녀는 1980년 6월 25일의 인터뷰에서 자유 시장과 자유 경제를 옹호하며 “대안은 없습니다(There is no alternative).”라고 잘라 말했다. 이 발언은 TINA라고 약식 표기되며, 신자유주의만이 진리라는 입장을 나타내는 발언으로 종종 인용된다. 1987년 9월의 인터뷰에서는 “사회라는 것은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 개인이 있을 뿐입니다 (…) 개인은 반드시 스스로를 도와야 하며, 누가 당연히 뭘 해 주리라고 기대하면 안 됩니다”라고도 했다.
성조기와 나란히, 휘날리는 유니언 잭
한편 그녀는 외교와 안보에서 국방력을 강화하고 영국의 세계적 지위를 회복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1982년 2월에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으로 ‘확인’되었다. 당시 아르헨티나 근해의 영국령 포클랜드 섬을 아르헨티나가 무력 점령하자, 대처는 외교적 타협을 권하는 내외의 목소리를 일축하고 해군 기동부대를 파견했다. 결과는 두 달 만에 아르헨티나가 손을 드는 것으로 끝났고, 대처는 “대영제국의 영광이 되살아났다”며 한껏 기뻐했다. 이는 사실 그녀가 국방력 강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국방비는 대폭 감축해 버린 후에 벌어진 사건으로, 위험천만한 일이었으나 대처와 영국에게는 결과가 좋게 끝난 것이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 반대하여 수상 관저 앞에서 데모하는 영국 시민들
그런데 외교적으로 대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미국에 밀착하는 노선을 시종 유지했다. 1983년에는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을 유럽에서는 최초로 배치했으며, 1985년에는 레이건의 전략방위구상(SDI)을 외국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지지했다. 또 1986년에는 리비아 폭격을 위해 미군 폭격기들에게 영국 공군기지 사용을 허가함으로써 카다피에게서 “피의 보복” 위협을 받았다. 이런 노선은 대영제국의 영광은커녕 “미국의 푸들”로 전락하는 셈이 아니냐고 야당과 언론의 비난이 끊이지 않았으나, 대처는 당시의 미국과 이념적으로 맞았을 뿐 아니라 공산진영과의 대결에 있어 미국과의 협력을 긴밀히 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었다. 또한 초강대국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상정하고서야 비로소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의 모순, 즉 국방비를 비롯한 정부예산을 감축하면서 동시에 국방력을 강화한다는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처는 국내적으로도 항상 비타협적이고 치안 유지를 위해 무력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세웠으나, 이면에서는 협상과 타협에 힘쓰기도 했다. 탄광노조와 정면대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온건파 노조와 제휴했던 것처럼, 현대 영국의 고질병 중 하나였던 아일랜드공화국군(IRA)과의 갈등에서도 겉으로의 강경과 속으로의 유화로 대응했다. 그래서 1981년에는 수감되어 있던 IRA의 단식투쟁을 냉혹하게 외면하여 10명이 굶어죽는 사태를 빚고, 1984년에는 IRA의 폭탄 테러로 암살되는 것을 간신히 모면하기도 했지만, 1985년에는 이들과 타협하여 영국 정부 최초로 “북아일랜드 협정”을 맺었다.
1991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서 ‘자유의 메달’을 받는 대처.
다우닝 가 10번지를 떠나서
대처는 1979년에 처음 집권한 후 1983년, 1987년의 총선에서 잇달아 승리하며 20세기 들어 처음으로 총선 3연패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이 되어 경제지표가 일제히 나빠지면서 대처의 장기집권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처음 집권했을 때 마이너스를 기록했던 성장률은 1988년에 5.2퍼센트까지 올라갔으나, 이후 점점 낮아져서 1990년에는 0.8퍼센트가 되었다. 물가상승률도 1990년에는 10퍼센트에 육박했으며, 실업률과 주택보급률에서는 임기 내내 큰 개선이 없었다. “친기업 정책을 펴면 투자가 늘고, 투자가 늘면 경제가 성장하며 고용이 증가한다”는 신자유주의의 믿음이 현실적 한계를 드러냈던 것이다.
경제 악화로 일부 지방정부의 재정이 심각하게 나빠지자, 대처는 인두세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감세를 핵심으로 삼던 신자유주의 정책기조에도 어긋났을 뿐 아니라, 소득수준에 상관없이 머릿수로만 세금을 내는 세금이므로 저소득층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불공평한 세금이었다. 따라서 인두세에 반대하는 시위가 불길처럼 일었고, 진압경찰과의 몸싸움과 부상자가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유럽공동체 가입 문제가 겹쳤다. 대처는 신자유주의자답게 공동시장에는 원칙적으로 찬성했으나 영국이 당시의 유럽공동체에 가입하면 득보다 실이 많을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반유럽’ 정책을 취하자 이는 유럽 국가들의 반발과 보복을 불러왔고, 당시 영국의 사정이 더 힘들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녀의 인기가 전에 없이 떨어져 있던 1990년 11월 20일, 그녀는 보수당 당수 선거에서 과반수를 넘는 득표를 했으나 1차투표만으로 확정하기에는 불과 4표가 부족해(규정상 65%를 득표해야 했다) 2차투표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후계자격인 존 메이저를 밀기로 하고, 사임했다. 이로써 한 시대가 끝났다.
퇴임 후 그녀는 하원의원 신분으로 돌아와 있다가 1992년 선거에 불출마함으로써 그나마도 사퇴했으며, 이후에는 세계 각지를 다니며 강연을 하고, 필립 모리스 사의 경영고문이 되거나, 미국 윌리엄 메리 대학교의 총장을 지내는 등 여러 공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2002년에는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공식 행사를 자제하기로 하고, 2003년에는 남편 데니스의, 그리고 2004년에는 오랜 친구이자 동지인 로널드 레이건의 죽음을 맞았다. 현재 87세인 그녀는 아직도 건강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최근 영국의 가장 돋보이는 행사였던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2011)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했다.
“제3의 길”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한때 큰 주목을 받았던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대처리즘”을 모순되는 이념의 접합이라고 평가했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 증대와 정부의 권력 약화를 지향하는데, 보수주의는 오히려 전통과 가족, 종교의 이름으로 개인을 제약하고 국방과 치안 등에서 정부의 역할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대처리즘이 사상적으로 깔끔하지 못하며, 그 정책의 결과도 문제점이 많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대처는 행동가이지 사상가가 아니며, 그녀의 정책은 대부분 애덤 스미스나 하이에크의 책보다는 어린 시절 형성된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영국의 평범한 중류 가정이었던 그녀의 집에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자연스레 공존했다. 인두세조차도 “누구나 각자 자기의 몫을 해야 한다”는 어린 시절부터의 신념에 따라 정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소박한 생각과 정서가 대처리즘의 핵심이었기에,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 통하는 점이 있었기에, 많은 반발과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대처가 집권하여 그토록 오래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지 않았을까.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던 영국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고, 국민적 자존심과 일체감을 찾기 위해서는, 그녀의 무쇠 같은 의지와 마음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1969년 한국-이란 우호 조약 조인
▶1968년 프랑스 5월 사태
발단은 학내 문제였다. 부실한 학교 시설을 개선해달라는 것. 학생들이 교내에서 집회를 강행하자 대학의 요청을 받은 경찰이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1968년 3월 22일 파리대학 낭테르 분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5월 2일 학생들이 학교를 점거하며 반발하자 학교측도 다음날 ‘학교 폐쇄’로 맞섰다. 양측은 본교인 소르본에서도 충돌, 600여명의 학생들이 체포됐고 본교 역시 폐쇄됐다.
체류가스로 마스크를 한 학생이
경찰들에게 돌을 던지고 있다.
파리에서 베트남평화회담이 시작된 5월 10일 밤에는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해방구를 만들려는 급진파 학생들과 경찰 간의 난투극으로 아수라장이었다. 어느덧 구호도 기성 질서 전복을 겨냥했다. 노동자들이 가세했고, 미테랑 등의 좌파세력도 동참했다. 무정부주의자·마오주의자·트로츠키주의자 등 다양한 세력들도 정치·사회혁명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시설개선 요구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로, 다시 정권타도로 발전한 것은 그동안 쌓여온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프랑스(I am France)’라는 드 골 대통령의 가부장적 통치 스타일이 정치권을 짓누르고 있었고, 사회는 점점 보수화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5월 사태’는 단기간에 끝나버렸다. 공산당이 ‘5월 사태’를 프티 부르주아적 모험주의라고 비난하며 돌연 돌아선 데다 노동자들도 임금인상과 최저임금 상향조정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드 골은 여세를 몰아 의회해산과 총선실시라는 정면돌파를 시도해 6월 말에 실시된 총선에서 드 골은 485석 중 358석을 획득하는 유례없는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5월 사태가 이후 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여성운동·녹색운동·게이정치 등 모든 운동들이 이때를 기점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현대문명도 탈근대 쪽으로 물꼬를 틀어 포스트모던의 새 시대로 접어들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 박정희 당선
▶1965년 민정-민주 양당, 민중당 창당
민정당과 민주당이 1965년 5월 3일 서울시민회관에서 두당을 통합해 민중당 창당을 선언했다. 두 야당의 통합교섭 30인 전권대표들은 이날 대회에서 기립박수로 합당을 의결, 합당선언을 채택하고 윤보선 민정당총재와 박순천 민중당대표최고위원이 합당선언문에 서명했다. 이로써 두 야당은 지난 1963년 국민의 당으로 통합하는데 실패한지 2년 만에 통합한 셈이다.
이날 선언대회에는 두 당의 통합교섭 30인 전권대표와 이효상 국회의장을 비롯한 내빈과 일반 시민과 당원 3천여명이 참석했는데 윤보선 박순천 두등록대표자의 인사말을 듣고 한일간의 제협정 백지화 등을 요구하는 대일 매국외교저지투쟁 결의문을 채택했다. 6월 14일 개최한 제1차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참석 대의원 9백90명중 박순천씨가 5백13표를 얻어 4백60표를 얻은 윤보선씨를 누르고 당수가 됐다.
▶1964년 이라크 민주사회주의공화국을 선포
▶1960년 최인규 전 내무장관 첫 구속
▶1960년 국회 이승만의 3대 대통령직 및
4대 대통령의 당선사퇴를 선포
▶1956년 제1회 세계유도선수권대회 개막(일본 동경)
▶1947년 일본 신헌법 시행
▶1946년 2차대전 전범처리를 위한 동경재판 개정
세계2차대전 A급 전범을 재판하는 극동국제군사재판(동경재판)이 1946년 5월 3일 동경 구육군성 대강당에서 개정됐다. 기소된 28명중 도조 히데키 등을 비롯한 26명의 피고인이 무장한 MP의 지프의 호위를 받고 구치소로부터 도착했다.
오전 11시17분 오스트리아 재판장이 개정을 선언하자 법정에는 일순 긴장이 감돌았다. 수석검사가 11개국어로 된 기소장을 낭독했다. 기소장에는 `평화에 대한 죄` `살인범죄 및 살인 공모죄` `관례의 전쟁범죄 및 인도에 대한 죄`의 3가지로 크게 나뉘어져 있었고 구체적으로는 전쟁계획, 준비, 수행의 공동모의, 비전투원에 대한 학살, 노예화 등 55항목이 열거되어 있었다.
동경재판은 1948년 11월 12일까지 이어졌다. 판결문에서는 전체 55개의 항목 가운데 10개의 항목을 인정했다. 10개의 항목 가운데 8개는 평화에 대한 죄를 적용한 것이고 나머지 두개의 소인이 통례의 전쟁범죄 및 인도에 대한 죄가 적용됐다. 판결문의 낭독이 끝나고 비로서 모든 피고인에 대한 형이 선고됐다. 교수형 7명, 종신금고형 16명, 금고20년 1명, 금고7년 1명으로 25명 전원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1929년 인도 회교도와 힌두교도 충돌
▶1928년 일본군 제남서
장개석의 북벌군과 충돌(제남사건)
▶1919년 신흥무관학교 개교
▶1915년 이탈리아 3국동맹 탈퇴 선언
▶ 1592년 임진왜란의 일본군 서울 침입
▶ 1469년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 출생
우리에게 ‘군주론’ 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마키아벨리가 1469년 5월 3일,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법률가였던 아버지의 파산으로 매우 어려운 삶을 꾸려나가야 했다. 훗날 마키아벨리는 “나는 즐거움 이전에 인고(忍苦)를 먼저 배워야 했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가난으로 인한 독학은 인문주의 교육의 무절제와 오류로부터 그를 보호했고 이로부터 사고의 독창성과 기품뿐만 아니라 설득력을 갖춘 문체의 힘이 보전될 수 있었다.
그는 1498년부터 피렌체의 제2서기 관장직으로 내정과 군사를 담당하였으며, 대사로도 활약했다. 1512년 메디치가(家)가 피렌체로 복귀하게 되자, 한때 음모의 죄명으로 체포된 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실의 속에서 독서와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특히 ‘군주론’ 은 그의 대표작으로 마키아벨리즘이란 용어가 생기게 되었으며, 이 책은 군주의 자세를 논하는 형태로서 ‘정치는 도덕으로부터 구별된 고유의 영역’ 임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목적만 정당하다면 수단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비윤리적 견유주의를 제창한 것으로 인식돼 오랫동안 비난을 받아야했다. 그러나 정·교 분리의 주장과 함께 권력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 행해지자 근대 정치학의 초석으로 평가되고 있다.
https://youtu.be/uUEV9eXfzyk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