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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돌과 비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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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문학관* 스크랩 칸나의 저녁 / 손순미
동산 추천 0 조회 4 15.10.19 20: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칸나의 저녁 / 손순미

 

 

  찬물에 밥을 말아 먹었다 더운 바람이 불어오고 마당에

칸나가 피었다 소스라치게 피었다 체한 것이 아닐까 아닐까

했을 때 붉은 꽃의 성대에서 칸나가 피었다 터져 나오는

자궁의 홍등紅燈을 어쩌지 못한 나는 주근깨가 많은 소녀였다

달은 아예 뜨지도 않은 밤에 수돗가에서 몰래 팬티를 빨았다

공포와 수치심이 온몸에 스멀거리는 꽃의 향기는 어두웠다

야광의 안구를 갈아 낀 고양이가 뒤꼍으로 돌아나가고 나는

자궁이 쏘아대는 꽃폭탄에 배를 싸쥐고 누웠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식구들은 밥을 먹고 있었다

 

  칸나가 피었다 칸나만 보아도 배가 아프다 뜨거운 태양의

여름이 칸나를 지진다 칸나의 음순이 붉어졌다 십만 볼트의

전류가 내 자궁을 지지는 고통을 지나 나는 새끼를 낳은

어미가 되었다 칸나가 어둡다 새끼를 낳은 공포의 추억이

몰려온다

 

- 손순미 시집 『 칸나의 저녁 』 2010

 

 

 

**************************************************

 

손순미 시인이 무려 등단 13년 만에 첫시집을 상재했습니다.

그가 그의 삶을, 그의 시를 얼마나 느리게 기어 넘어왔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세월입니다.

시집은 긴 세월 시인의 상처로 꽃피운 꽃들로 그만 꽃천지입니다.

그야말로 자신은 물론 타인의 상처를 안고넘으며 피워낸

꽃들입니다. 그중에서 한 편을 고릅니다.

시집의 제목으로도 쓰인 <칸나의 저녁>입니다.

 

일면으로는 시인 자신이 겪은 초경의 기억을 칸나로 비유한

시입니다만 좀더 깊게 살피면 생리와 생식의 고통(‘십만 볼트의

전류가 내 자궁을 지지는 고통’)을 지나 ‘새끼를 낳은 어미’가

되는 여성의 근원적 트라우마를 칸나로 비유하고 있는

시이기도 합니다.

 

꽃이 번식을 위한 식물의 생식기관이라는 사실은 새삼스러울

없습니다만, 모든 열매가 꽃의 고통을 지나온 산물이라는

사실이 시를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것이 아니라, 내 어미가

기나긴 세월 수치심과 고통을 견뎌냄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

 

그러고 보니 그동안 아내의 생리통에 참 무심했습니다.

큰 딸이 언제 초경을 시작했는지, 둘째 딸은 초경을 했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방마다 칸나가 피고 지었을 무수한

날들을 무척이나 무심하게 지나쳐 왔습니다.

새삼 딸들에게 아내에게 미안한 아침입니다.

 

/ 박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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