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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열풍의 원조 만화 - 고스트 바둑왕
초등학교 6학년 ‘히카루’가 우연히 헤이안 시대 천재 바둑 기사 ‘후지와라노 사이’의 영혼에 빙의되어 바
둑의 세계에 눈을 뜨고, 프로기사로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를 그린 소년 만화. 1998년 일본 만화 잡지 『소년 점프』에서 연재되어 2003년 단행본 23권으로 완결되었다. 한국에는 2000년부터 『고스트 바
둑왕』이라는 제목으로 정식 발매되었다. 연재 당시 한일 양국에 바둑 열풍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큰 인
기를 끌었다. 1999년 45회 쇼가쿠칸 만화상 소년만화부문, 2003년 제7회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신생상
을 수상했다.
2009년, 인터넷 바둑 사이트 ‘타이젬’이 시끄러워졌다. ‘외톨이’라는 무명 유저의 대국에 1500명의 갤러
리가 모여든 것이다. 2009년 8월 홀연히 나타난 그는 당시 랭킹 1위였던 lxlx 9단에게 승부를 걸었고,
대국 14분 만에 불계승을 거두는 파란을 일으켰다. 소식을 접한 타이젬의 상위권 기사들은 일제히 외톨
이에게 대국을 신청했다. 외톨이는 다음날까지 이어진 대국에서 무려 54연승을 기록하고 접속을 종료했
다.
바둑 커뮤니티들은 일제히 ‘외톨이’가 누구인지 갑론을박하기 시작했다. 바둑 언론도 주목했다. 당시 잠
정 은퇴를 선언했던 이세돌이 화풀이를 한 것이라는 소문이 그럴듯하게 떠돌았다. 외톨이에게는 ‘고스트
바둑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의 정체는 2013년에 와서야 밝혀졌다. 바둑계를 흥분시켰던 고스트 바
둑왕은 다름 아닌 1993년생의 젊은 프로 바둑기사 박정환 9단이었다. 타이젬을 뒤흔들었던 2009년에
그는 16세였다.
박정환 9단을 ‘고스트 바둑왕’이라고 부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인터넷 바둑으로 무명의 기사가
거짓말처럼 연승을 거두는 모습이 일본 만화 『고스트 바둑왕』(원제 ‘히카루의 바둑’)과 겹쳐 보였기 때
문이다.
1999년 일본 만화 잡지 『소년 점프』에서 연재되기 시작한 『히카루의 바둑』은 소년들의 ‘바둑 대
결’을 소재로 한 성장 만화다. 초등학교 6학년인 소년 ‘히카루’는 어느 날 다락방에서 오래된 바둑판을 찾
아내고, 바둑판에 봉인되어 있던 ‘후지와라노 사이’의 영혼에 빙의된다.
후지와라노 사이는 헤이안 시대의 천재 바둑 기사로, 바둑은 ‘할아버지들이나 두는 고리타분한 것’이라
고 생각하던 히카루를 기원으로 이끈다. 처음에 히카루는 그저 귀찮게 하는 사이를 떼어낼 겸 그가 지시
하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바둑을 두어주다가, 기원에서 도우야 아키라 등 재능 있는 바둑 기사 지망생들
을 만나 자극을 받으면서 점차 바둑의 세계에 입문한다.
사이는 히카루에게 바둑을 가르치면서 인터넷 바둑을 통해 세계의 강호들과 대결해 무패 행진을 벌인다.
마침내 성사된 일본 바둑의 명인이자 아키라의 아버지 ‘도우야 고요’와의 인터넷 대국에서 히카루가 ‘역
전의 한 수’를 알아내자 사이는 ‘신은 히카루에게 이 일국을 보여주기 위해 나에게 천 년의 시간을 기다
리게 했구나’라고 깨닫고 성불한다. 이후부터는 홀로 남은 히카루가 스스로 고군분투하며 이야기를 끌어
간다.
바둑은 동양의 보드게임을 대표한다 할 수 있지만, 현대 동아시아에서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서 메달 종목으로 채택되는 등 스포츠로서도 취급되고 있다. 『고스트 바둑왕』도 고수를 상대로 한 도
전과 라이벌과의 대결을 통해 성장하는 스포츠 만화 작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대충 돌을 두는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라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국 내용을 제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바둑을 아는 독자라면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수 있다. 작중 이루어지는 대국은 실제 유명 바둑 기사들의
기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원작자가 꼼꼼히 취재한 한중일 삼국 바둑계 경쟁 구도와 현실이 잘 반영되어 있어 몰입도를 더한다. 등
장인물의 이름이나 성격은 대부분 실제 바둑기사에게서 따 왔다고 한다.
작품 후반부 한국 바둑 기사 고영하 3단이 히카루를 상대로 승리하는 결말은 한일 양국에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 만화에서 주인공이 결정적인 대결에서 패배하는 것은 드문 일인데다 하필 그 대결이 한
일전이었기 때문. 『고스트 바둑왕』이 연재될 당시 동아시아 바둑 최강국이었던 한국 기사들의 실력을
단순히 만화라는 이유로 폄하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기존 일본 스포츠 만화에서 한국 선수
가 딱딱하고 못생긴 얼굴과 거친 플레이 등으로 묘사되는 것에 익숙했던 한국 독자들에게도 훤칠하고 잘
생긴 고영하의 승리는 꽤 신선한 결말이었다.
전투를 방불케 하는 치열한 수 싸움과 고수들이 즐비한 프로의 세계. 『고스트 바둑왕』은 독자들로 하
여금 ‘바둑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쇠락하
던 일본 바둑계는 『고스트 바둑왕』을 읽은 아이들이 앞 다투어 바둑에 입문하기 시작하면서 사멸을 면
했다. 『고스트 바둑왕』으로 바둑에 입문한 기사들은 지금 ‘히카고 세대’로 불리며 일본 바둑을 이끌고
있다. 지대한 영향을 인정받아 『고스트 바둑왕』은 1999년 45회 쇼가쿠칸 만화상 소년만화부문을 수
상했으며 2003년 제7회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신생상을 수상했다.
일본보다는 사정이 낫다곤 하지만, 기원의 원생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우리나라 바둑계 입장에서도 『고
스트 바둑왕』은 고맙고 흥미로운 작품이다. 『미생』이 등장하기 전까지 거의 유일무이한 바둑 만화였
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생』은 바둑 대결을 주제로 하는 작품은 아니다. 바둑의 매력과 대국의 재미를
전면적으로 내세워 오락성과 작품성, 시사성 모두를 잡는 데 성공한 『고스트 바둑왕』은 완결 후 10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바둑 만화의 바이블로 사랑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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