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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마태오 11,11-15
하늘 나라는 자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의 것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칭찬하시며 여자의 몸에서 세례자 요한보다
큰 사람은 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보다는 크다고 하십니다.
이는 인간에게서만 태어난 존재는 하늘나라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나야 하고 성령은 하느님의 살과 피임을 압니다.
이후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여기서 폭행이나 폭력은 긍정적인 의미일까요, 부정적인 의미일까요?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쟁취하고 있다.”
저는 전에 하늘 나라는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고 유대 지도자들이 그분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폭력’은 분명 하늘 나라를 쟁취하는 도구로서 부정적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교부들의 해석을 읽어보니 대부분은 세례자 요한처럼 자기 자신을 ‘폭력적으로’ 낮추고 버리는 이들이 하늘 나라를 쟁취한다고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이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보려고 합니다.
하늘 나라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으로 얻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이를 위해 폭력을 쓰게 하는 자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사실 어린이들은 아버지에게 폭력을 가하며 평화를 얻습니다.
이를 어머니에게서 배웁니다.
어머니는 세례자 요한과 같습니다.
구약에서 레베카 어머니는 야곱에게 에사우의 장자권을 강탈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폭력입니다.
겨우 불콩죽으로 말입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분이 어머니이고 교회이고 세례자 요한입니다.
인간은 그리스도께 폭력을 가하지 않고는 자녀의 지위를 얻을 수 없습니다.
자녀만이 아버지에게 이러한 종류의 폭력을 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김창옥쇼 리부트] ‘아빠, 그동안 어찌 그렇게 사셨어요?’란 프로그램은 조금은 아빠를 고발하면서도 아빠의 마음을 뒤늦게나마 이해하게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34년 만에 철든(?) 남편’에서 결혼 34년 차 아내가 남편에 대한 불만을 이렇게 터뜨립니다.
“남편이 전화를 받으러 간 사이 두 아이를 다 자연분만으로 낳았고 친정의 도움을 받아 가며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아이들이 한창 자랄 무렵 ‘아이가 왜 날 보면 우는 겨~?’
그 말에 저는 ‘모르는 아저씨라 우는 겨~.’ 했습니다.
이 아이들이 성장하여 큰딸이 34살, 아들이 32살이 되었는데 딸이 결혼해 손녀를 낳고서야 자신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소홀했는지 남편 스스로가 느끼고 있습니다.
손녀가 예쁘긴 예쁜지 카톡 프로필에 사진 올리고 모임에서 자랑까지 합니다.
남편은 30년 전에는 왜 이 기쁨을 몰랐을까요?”
남편은 지금 와서 매우 미안해하면서 아내가 ‘골반’이 좋아서 잠깐 전화 받고 오면 아기가 태어나 있더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사람들은 다 어이없어합니다.
미안하다고 하면 될 것을 골반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때 김창옥 씨가 말합니다.
당시 남편이 15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소년 가장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돌봐야 할 동생이 다섯 이나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어머니까지 부양해야 했습니다.
분명 그때 걸려 왔던 전화는 일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섯 동생과 어머니, 아내, 두 자녀의 가장으로서 당시는 죽으라면 죽으라는 시늉을 할 정도로 돈을 벌어야 했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제 은퇴하고 손주가 태어날 때쯤엔 아내는 ‘내가 필요할 때 없었던 남편’, 자녀들은 ‘우리가 자랄 때 없었던 아빠’가 되어있습니다.
아빠는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것은 너무 당연하기에 그것을 주장할 수 없어
그저 미안하기만 합니다.
어쩌면 아이들도 엄마를 따라 아빠에게 폭행하는 게 아닐까요? 아이들의 설문 조사에서 자신에게 고민이 생기면 먼저 이야기를 나눌 사람으로 ‘1. 엄마, 2. 형제, 3. 친구, 4. 선생님, 5. 아빠’ 라고 적습니다.
아빠는 자녀가 자신에게 제일 먼저 이야기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50%이지만, 실제로 아이들의 4%만이 아버지를 대화 상대로 여겼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해 주는 것만큼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강탈하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비가 오면 일을 가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돈 때문에 걱정을 하셔야 했습니다.
저도 아버지가 일을 나가지 않으면 불안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오늘은 일 안 가?”라고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서운하셔서 조금 화를 내셨던 것도 기억합니다.
아들인 제가 돈 벌어오는 기계처럼 당신께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돈은 바로 성령과 같이 저에게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폭력을 당해주는 분이 계신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어린 양은 구약에서 폭력을 당하였습니다.
그 피가 문설주에 칠해지고 그 살이 그들에 의해 먹혔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먹히며 자녀에게 평화를 줍니다. 이것을 아는 자녀들은 가출하지 않습니다.
가출해서 살아봐야 부모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사는 것보다 나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어떻게 해서든 부모에게 폭력을 가해서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사는 곳에 살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세례자 요한이 왜 ‘엘리야’와 같다고 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렸습니다.
그때 바친 제물은 소였습니다.
제단에 바쳐지는 소는 바로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하늘 나라가 폭력을 당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아드님을 사르기 위해 성령을 불을 내려주셨습니다.
그 불로 우리가 하늘 나라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는 엄마를 통해 아버지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하늘 나라를 쟁취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존재일 수 있음을 아는 게 하늘 나라입니다. 아버지에게 돈 벌어오라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 자체가 바로 행복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당연히 아드님을 죽여 그 살과 피를 내어달라고 청할 수 있습니다.
이 위치란 얼마나 행복한 위치입니까? 하느님께 이러한 폭력을 쓸 줄 아는 존재만이 하늘 나라의 행복을 차지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마태오 11장 11-15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너무나 쉬운 하늘나라 입국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두고 하신 말씀은 꽤나 아리송합니다.
우선은 먼저 세례자 요한을 확 띄웁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극구 칭찬하십니다.
인류 역사상 세례자 요한은 가장 크고 위대한 인물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그 말에 이어 바로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내던지십니다.
그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들었을 때 엄청 기분 상하는 말씀입니다. 완전히 깔아뭉개는 듯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오늘 예수님의 이 상반된 말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위 말씀은 절대로 세례자 요한을 격하시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을 무시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늘나라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세례자 요한은 한 밤중에 등불을 켜든 시각 장애우와도 같았습니다.
자신이 든 등불로 지나가는 행인들의 앞길을 밝혀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빛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 시대를 정리하는 구약의 마지막 대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쉽게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나라의 실체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명확히 볼 수 있었던 신약의 백성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파스카의 신비를 체험하는 오늘의 우리 역시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후 한 가지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 하느님 나라는 그야말로 멀고도 먼 곳이었습니다.
도저히 다가서기가 힘든 곳이었습니다.
입국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까마득한 미지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래 이후 하늘나라는 얼마나 우리와 가까워졌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쉬운 하늘나라 입국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늘나라 입국이 얼마나 쉬워졌는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건 아니다’며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백성들과 하늘나라 사이를 가로막는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입국을 위한 방법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수천가지 율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가 아닙니다.
엄청난 요구를 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단 두 가지입니다.
이 땅의 오신 예수님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분께서 제시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
이 간단한 방법을 통해 이 지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하느님 나라를 사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제2주간 목요일 강론>
(2024. 12. 12. 목)(마태 11,11-15)
<‘회개’는 ‘구원의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1-15).”
1) 여기서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말라키서에 이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 3,23-24).”
가브리엘 천사는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할 때, 말라키서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3-17).”
엘리야 예언자가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하는 일은, “사람들이 메시아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한 것은, 사람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 일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다.’ 라고 강조하신 것으로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 메시아의 구원을 잘 받으려면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대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회개하여라.”가 예수님 말씀의 진짜 뜻입니다.
그렇지만 회개를, 구원받기 위한 조건이나 대가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시는 ‘자비’입니다.
<원래 ‘자비’는 어떤 조건도 없이,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무상으로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회개’는 그 자비에 대한 ‘응답’입니다.
‘혼인잔치의 비유’가 그것을 잘 나타냅니다.
그 비유를 보면, 임금은 잔칫상을 차려 놓고서
사람들을 부릅니다(마태 22,2-4).
초대받은 사람들은 잔치에 참석해서 이미 차려져 있는 음식을 먹기만 하면 됩니다.
음식 값이나 입장료를 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예물을 가지고 가서 바쳐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미 차려져 있는 잔칫상에 앉아서 잔치 음식을 먹는 것. 그렇기 때문에 ‘회개’와 ‘용서’도
‘구원’이라는 큰 은총에 포함되어 있는 은총입니다.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거부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합니다.>
3) 회개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이미 주신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곧 스스로 심판과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7-20).”
‘살길’을 알려 주고 그 길로 인도해도, 그것을 거부하고 ‘죽을 길’로만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사람은 구원하시지 못합니다.
권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서 강제로 구원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정치상황도 비슷합니다.
시민들은 ‘살길’을 알려주면서 그 길로 함께 가자고 호소하는데, 어리석은 정치인들은 ‘죽을 길’로만 가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회개’는 ‘살길’을 선택하는 지혜이고, 회개를 거부하는 것은 ‘죽을 길’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고집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