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배구계에는 여러 명의 귀화 선수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국적까지 바꾸면서 지름 20㎝, 무게 270g짜리 공 하나에 운명을 맡겼다. 피부색과 생김새는 미묘하게 다르지만 배구를 향한 열정만큼은 국내 선수들 못지않다. 이들의 ‘코리안 드림’은 현재진행형이다.
GS칼텍스의 중국인 선수 이영
GS칼텍스와 흥국생명이 2016~2017 V-리그 5라운드 맞대결을 벌인 2월 1일 서울 장충체육관. 세간의 예상을 깨고 GS칼텍스가 선두 흥국생명의 거침없는 질주를 가로 막았다.
귀화 선수인 이영이 제대로 이름을 알린 날이기도 하다. 이영은 이날 어깨가 좋지 않은 한송이를 대신해 네 세트를 모두 뛰며 8득점, 공격성공률 53.84%를 기록했다. 고비 때마다 나온 속공과 블로킹은 이영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던 흥국생명 선수들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아직은 코트보다 웜업존에 있는 시간이 많지만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중국 지린성 연변 출신인 이영의 삶은 고향 땅에서 걱정 없이 뛰놀던 여느 또래 소녀들과 다를 바 없었다. 평탄하게 흘러가던 그의 인생은 2011년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전용대 씨를 만난 뒤 180도 바뀌었다. 학창시절 배구 선수로 활동했던 전용대 씨의 시선은 일반 선교사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영의 가능성을 확인한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김경수 강릉여고 총감독에게 이영을 소개했다. 이영의 한국행 배구 유학은 이렇듯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한국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배구공을 만지기 시작한 이영은 빠른 속도로 기량을 쌓았다. 가르쳐주는 기술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발전을 거듭했다. 강릉여고에 입학한 뒤에는 전국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실력만으로 성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목표로 삼던 V-리그 입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 국적이 필요했다. 이런 이영을 위해 김경수 감독이 팔을 걷어붙였다. 김경수 감독은 2014년 7월 이영을 양녀로 입적시켜 한국 국적 취득의 길을 열어줬다. 스승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을 얻은 이영은 그 해 가을 신인 드래프트에서 GS칼텍스의 지명을 받는 데 성공했다. 11월에는 귀화 시험 합격으로 완전한 한국인이 됐다. 최종 목표인 태극마크 획득을 위한 제도적 걸림돌을 모두 치운 이영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도 굵은 땀을 쏟아내고 있다.
귀화 선수의 대표 주자 후인정
국내 스포츠에서 귀화 선수를 논할 때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현재 한국전력 코치를 맡고 있는 후인정이다.
후인정은 화교 3세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한국 국적은 없었다. 배구 지도자인 아버지 후국기 씨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배구를 접한 후인정은 고교 재학 시절인 1995년 ‘한국 국가대표가 되겠다’라며 귀화를 선언했다. 아버지 반대로 한국 국적을 얻지 못했던 후국기 씨는 흔쾌히 아들이 내린 선택을 존중해줬다. 후인정의 기량은 기대대로였다. 경기대에 입학한 후인정은 순식간에 주포로 자리매김했다. ‘스커드 미사일’이라는 별명은 그가 얼마나 위력적인 선수였는지를 쉽게 짐작케 한다.
그러나 최고라는 수식어는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1년 선배이자 월드스타로 통하던 김세진(현 OK저축은행 감독) 존재는 넘기 힘든 산과 같았다. 현대자동차써비스(현대캐피탈 전신) 입단 후에도 2인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던 후인정은 프로 원년인 2005시즌 마침내 고대하던 정상을 밟았다. 그 해 현대자동차써비스는 삼성화재를 누르고 정규리그 패권을 거머쥐었고 공격종합(53.99%), 오픈(50.29%), 시간차(73.47%)에서 1위에 오른 후인정은 최우수선수(MVP) 영예를 안았다. 2005~2006시즌과 2006~2007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영원할 것 같던 삼성화재 아성을 무너뜨리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런 그를 대표팀에서 가만 놔둘 리 없었다. 대한배구협회는 후인정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자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태극마크를 선사했다. 후인정은 10년 넘게 아포짓 스파이커로 한국 배구를 빛냈다.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을 통해서는 금메달리스트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며 아버지의 한까지 풀었다.
제2의 후인정을 꿈꾸며
대학 무대에서는 ‘제2의 후인정’을 꿈꾸는 예비 한국인들이 활발히 활동 중이다. 경희대 3년생인 알렉스는 홍콩 출신이다. 홍콩 국가대표 자격으로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도 출전했다.
자국에서의 성공가도가 어느 정도 보장된 알렉스는 김찬호 경희대 감독 눈에 띄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경우다.
2013년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대표팀을 이끌었던 김찬호 감독은 알렉스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홍콩과 경기를 치를 때였다. 알렉스를 처음 보고 깜짝 놀랐다. ‘홍콩에 저렇게 잘하는 선수가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김찬호 감독은 경기가 끝나기 무섭게 알렉스에게 다가가 명함을 건넸다. “너 정도 기량이면 충분히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다. 우리 학교로 와서 같이 운동해보자”라는 말에 알렉스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의 등장은 대학리그를 들끓게 했다. 2m에 육박하는 큰 키와 프로 선수 못지않은 탄력은 관계자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2016 전국대학배구리그 6강 플레이오프에서는 5경기에서 20개(세트당 1.05개) 블로킹을 잡아냈다. 서브 에이스도 9개나 솎아내며 팀 내 1위를 차지했다. 마치 무대가 좁다며 시위를 하는 듯 했다. 그의 꿈은 V-리그 입성이다. 예정대로 귀화 시험을 통과하면 내후년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V-리그 진출을 타진할 계획이다.
순천제일고에는 바이라와 에디라는 몽골 출신 두 소년이 있다. 고교 3년생인 바이라와 고교 1년생인 에디는 올해 초 한국땅을 밟았다. 이영, 알렉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한국인 지도자와 연이 닿았다.
순천제일고 이용선 감독이 두 선수의 한국 행에 발 벗고 나섰다. 이용선 감독은 직접 몽골로 넘어가 경기력을 체크한 뒤 입학까지 성사시켰다. 이용선 감독은 “국내 선수가 많지 않아 고민하던 중 두 선수를 발견했다. 하드웨어가 좋아 보탬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떠올렸다.
그의 설명대로 바이라와 에디는 빼어난 신체조건을 자랑한다. 바이라의 신장은 195cm, 에디는 198cm다. 배구에 적합한 체격을 갖췄다. 게다가 여전히 성장 중이다. 팀 사정상 지금은 미들블로커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지만 이용선 감독은 두 선수를 윙스파이커 자원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열풍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지나친 면이 있지만 현재 배구계에 귀화 선수들이 늘어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 두고 배구 관계자들은 “배구를 하기에는 한국 여건이 나쁘지 않다”라고 입을 모은다.
김찬호 감독은 “아시아 각국의 배구리그를 볼 때 V-리그는 체계가 잘 잡힌 편이다. 타 대륙에서는 경쟁력이 떨어지지만 같은 아시아인 한국에서는 해볼만하겠다고 느끼는 선수들이 귀화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배구 외적으로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용선 감독은 “한창 자라나는 학생 선수들에게 외국 친구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영어로 대화를 하면서 자연스레 회화 능력도 익히게 된다”라고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