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2월15일 [(자)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집회서 48,1-4.9-11
복음 마태오 17,10-13
◈ [서울] 대림 제2주간 토요일
2018년 다해 12월15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지난 목요일에는 눈이 내렸습니다. 신학교에 갈 일이 있었는데, 눈이
내리는 신학교의 교정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신학교의 곳곳에
추억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녁에는 성당 주일학교 친구들과
함께했습니다. 4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친구들이 반가웠던 것은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힘들고 어려웠지만 아름다운 추억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앙은 거친 세상 속에서 진리의 빛을
비춰주는 등대와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성서는 신앙인들이 따라야 할 ‘이정표’와 같은 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구약성서에 엘리야 예언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와 싸워서 이긴 이야기, 사렙다
과부에게 기적을 베푼 이야기, 하느님을 만난 이야기, 하늘에서 불을
내린 이야기, 승천한 이야기들이 전해집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인
엘리야는 지금도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우리 신앙의 역사에도 ‘이정표’와 같은 분들이
많습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순교의 씨를
뿌렸기에 이 땅에 복음의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성인이 되셨고, 그분들은 복자가 되셨습니다. 교구장님,
사제들, 수도자들, 교우들이 하늘의 별처럼 신앙의 역사에 별이
되었습니다.
‘달의 신비’라는 프로를 보았습니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30억 년 전에 커다란 운석이 지구와
충돌했고, 그 결과 지구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갔고 그것이 달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전에 지구는 지금보다 훨씬 빨리 돌아서 6시간에
한 번씩 돌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빨리 도니까 지구의 환경은 엄청난
바람과 폭풍이 계속 있었다고 합니다.
지구에서 떨어져 나간 일부분이 달이 되었고, 이제 달은 지구에
영향을 끼쳐서 지구의 자전 속도를 느리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6시간
만에 돌던 지구는 이제 24시간에 한 번 돌게 되었고, 그동안 있었던
엄청난 폭풍우는 약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달이
지구에 있는 바닷물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바로 밀물과 썰물의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밀물과 썰물로 인해서 지구는 생물의
다양성이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밤에 보이는 둥근 달이,
지구로부터 40만 킬로 떨어져 있는 달이 바로 우리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신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꼭 가까이 있지 않아도,
같은 곳에 살고 있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달도 40만 킬로 떨어져 있는데, 우리 삶에 저렇게 큰 영향을 줍니다.
사람은 말과 행동으로, 기도와 나눔으로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지치고 힘든 이에게 해준 따뜻한 말은 삶의 의욕을 줍니다. 매섭게
토해낸 분노의 말은 가정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어릴 때, 저의 잘못을
이해하고, 기다려주었던 어머니의 모습은 제가 삶을 살아가는데
커다란 힘이 되었고, 저 또한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했던 많은 말과 행동들이
메아리처럼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을 봅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은 꿈꾸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면 하였을 일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할까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현대의 엘리야들
2018년 다해 12월15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현대의 엘리야들>
복음: 마태오 17,10-13
2016년 루터 종교개혁 500년을 맞아 개신교 청년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며 교회를 향한 30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비단 개신교의 문제만이 아닐듯하여 그 중에서
몇 마디만 인용해보겠습니다.
“교회의 중심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특정 성직자 혹은 목회자들의
개인소유물이 아닙니다. ...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의
도덕적 타락이 심각합니다. 금권선거는 물론이거니와 절차를 무시한
여러 편법들이 난무합니다. ... 한국교회의 재정은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교인들의 헌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여러 불투명한 방식으로 소위 ‘재량 것’ 사용, 즉 남용하고
있습니다. ...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철저히 구분합니다.
하지만 사회생활이 곧, 신앙생활이며, 예수의 제자 됨을 훈련하는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삶과 신앙이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
현재에도 기복신앙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생활을 통해서, 일방적인 성공지향적인
복(福)개념을 강요하고, 개인 신앙에 몰두하게 하고, 개교회
(개체교회)의 신앙생활에만 몰두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회적 성공이
개인 신앙의 열매로만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
오늘날 강단에서의 말씀선포에는 시대적 메시지가 상실되어
있습니다. 알맹이 없는 설교에다가 끝날 것 같으면서도 끝나지 않는
긴 설교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흥미를 떨어뜨립니다. ...
꾸준한 성경공부와 성경연구를 하지 않는 강단에서의 권위주의,
특별히 능력 없는 권위주의에 반대합니다. ...
일부 교회목회자들의 사치와 탐욕은 도를 지나치고 있습니다. 고급
자가용은 물론이고, 서민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소비, 해외여행, 취미
심지어 연봉 그리고 퇴직금까지 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고
있습니다.”
루터가 잘 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당시 가톨릭교회가 지금 개신교
청년들이 부르짖는 이와 같은 모습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저는 개신교 청년들이지만 조심스럽게나마
그들이 오늘 복음말씀처럼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 파견된 엘리야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엘리야는 주님을 만나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대부분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
예언자를 합치면 850명이었지만 하느님의 예언자는 엘리야 한
명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을 바로잡으려면 먼저 우상을
섬기도록 하는 예언자들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르멜 산에서
그들과 시합을 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 재단에 바친 재물을
사르는 시합이었습니다. 우상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리지 못했지만
엘리야는 내리게 했습니다. 참 하느님이 누구인지 온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해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엘리야가 없었다면 마지막까지 참
하느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죽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세상의 영화를
섬기는 이들과 대적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참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은 하느님을 볼
눈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메시아는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고
선포하러 오시는데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돈에 눈이 멀어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좋아할 수는 없다고 그들의 마음을
바로잡아 줄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가 필요했습니다. 그 역할을 한
인물이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역할은 세상의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을 광야로 이끌어내는 일이었습니다. 돈에 집착한
이들은 나눔의 실천으로, 쾌락에 집착한 이들은 절제로, 시기와 질투,
미움 등에 사로잡힌 이들은 용서와 겸손으로 이끄는 것이 요한의
역할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엘리야는 기다리면서도 여전히 도시의 쾌락을
좋아했고,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여전히 재물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셔도 그 말씀을
비웃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말부터 무시하고 폭행을 가했습니다.
세속-육신-마귀를 먼저 끊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는 엘리야와 같은 인물을 거부하였으니 그가 만나게 해 줄 메시야도
거부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현대의 엘리야는 그리스도께서 당신께 오도록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아 주라고 파견하신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먼저 믿고
마음을 바로잡으려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성체 안의
예수님을 알아 뵈옵고 모시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교회를 먼저 믿지 못하면 예수님도 모실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먼저 믿지 못하면 성경을 해석해도 오류에 떨어지게 돼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기로 예정된 엘리야가 요한임을
알아보지 못했듯, 수많은 사람들이 성변화 한 빵과 포도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는 엘리야적, 혹은 세례자 요한적 역할이 매우
감소된 것처럼 보입니다. 강의하면서 신자들보고 “돈이 더 좋아요,
예수님이 더 좋아요?”, “가난한 게 행복한 건가요, 부자가 더 행복한
건가요?”라고 물으면 이 단순한 질문에도 거의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성당 다니면 세상에서 더 잘 살 게 될 것이라는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재물을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이렇게 된 책임은 현재 교회에도 있습니다. 자아와 그것이 일으키는
세 욕망(三仇)과 싸워 이겨야만 주님을 모실 수 있음을 온전히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돈에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엘리야 역할,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온전히 하지 못하게 될 때,
세상은 점점 바알과 아세라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혹은
메시아가 탄생하기 이전의 어둠의 때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점점 더 세속의 유혹이 강력해져가는 이때에, 점점 더 새로운
엘리야들이 많이 나와야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세례자 요한|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8년 다해 12월15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17,10-13: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야의 재림에 대한 논쟁을 보여주고 있다.
바리사이들은 엘리야가 종말 전에 온다(말라 3,23 참조)고 하였다.
엘리야는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며 모든 것을 예전의 상태로 돌려놓는다고 하였다. 바로 앞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변모가 그분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왜
선구자인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는지 물었던 것이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0절) 여기서
“먼저”라는 말에는 엘리야가 먼저 오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자의 오심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소개하시지만,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지 못하고 참수 당했기 때문에
재림한 엘리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 엘리야가 아직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다음에 오실 메시아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재림한 엘리야로 생각하였다
(11,14 참조).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헤로데에게
죽음을 당했다(14,3-12). 이렇게 메시아의 선구자가 배척을 당한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도 배척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11,16-19 참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12절) 그를 감옥에 가두고 처형한 헤로데와
그들이 공범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2절)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그들이 엘리야에게 한 것과
같은 일을 당신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12절)는 말과 그에 대한 구원자의 설명을 듣고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았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신다고 이야기 한다. 첫 번째 오심은
지금 오심이다. 바오로 사도는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티토 2,11-12)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을 잘 맞을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바오로 사도께서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티토 2,13)라고 한다. 엘리야나 메시아의
참 모습은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엘리야가 되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 기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은총을 구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아무리 성탄이 수백번, 수천번 반복된다 할지라도...
2018년 다해 12월15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아무리 성탄이 수백번, 수천번 반복된다 할지라도...
얼마 전 선종하신 저희 살레시오회 모예수 신부님께서는, 살아 생전
전형적인 스페인 분이셨습니다. 한때 스페인 교회는 가톨릭 교회의
돌격 대장 역할을 담당했었지요. 교황님께서 요청하시는 곳이라면
지구 끝이라도 건너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그런 피를
물려받으셨던지, 마치 돈키호테처럼 가톨릭 교회의 수호를 위해
깃발을 올리곤 하셨습니다.
길을 걸어가시다가도,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예수님이나 성모님,
성령이나 가톨릭 교회를 폄하하거나 왜곡시킬 때, 모신부님께서는
절대로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습니다. 한판 격하게 붙으셨고, 단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성탄이 가까워오면 모신부님께서 자주 불편한 심기를 털어놓곤
하셨습니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참으로 한심합니다. 여기도
산타, 저기도 산타, 산타 클로스 이 ×× 때문에, 아기 예수님이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산타 클로스 이 나쁜 ××” ^^
모신부님께서 돌아가신 후, 첫번 째 맞이하는 성탄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신부님 말씀이 전혀 틀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성탄이 수백번, 수천번 반복된다 할지라도,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 탄생하지 않는다면, 그 성탄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열심히 성탄 트리를 장식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정성을 다해
구유를 꾸민다할지라도, 우리가 성대하게 성탄 파티를 준비한다
할지라도, 우리 각자 내면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지 않는다면,
그 성탄이 과연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성탄이 우리에게 건네는 핵심 의미요 가치인 육화강생의 영성, 지극한
겸손의 영성이 사라진 성탄, 그저 형식적이고 일회적이며,
연중행사처럼 치러지는 성탄은 그저 이벤트일 뿐입니다.
또 다시 우리는 성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성탄을
준비하는 것, 참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아기 예수님께서 또 다시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홀로 태어나시고, 홀로 떨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기 예수님 성탄의 핵심 의미인 육화강생과 철저한 자기 낮춤,
한없는 겸손의 가난함의 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요란스럽고
정신사나운 축하 파티에만 여념이 없는 것은 아닌지? 아기 예수님과는
전혀 별개의 행사, 아기 예수님이 사라진 성탄 행사에 전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마태 17,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8년 다해 12월15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 12)
하느님께서는 제멋대로 사는 우리를 끊임없이 기다려주십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제멋대로의 관계는 그 어떤 것도 품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멋대로 우리가 살기에 예수님께서는 머무는 삶으로
우리게 오십니다.
온전히 받아들이는 관계가 믿음의 삶입니다.
제멋대로의 시간이 지나야 무릎을 꿇는 겸손의 시간이 됩니다.
제멋대로 다루는 우리의 관계를 비추어주는 빛이 우리게 오십니다.
빛이 내려오는 이 시간에도 피 흘리는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소중한 이웃들이 있습니다.
제멋대로 사는 우리들에게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오시는 그분을 맞아들이는 은총의 대림 되십시오.
하느님이 전부가 아니고는 우리의 반성과 회개없이는
오시는 그분을 결코 알아볼 수 없습니다.
회개의 빛이 대림의 빛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12월15일(토) - 견고한 믿음
오늘은 “견고한 믿음”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로마서 4장 20~23절 말씀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룰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닮고 싶어 합니다.
‘믿음이 갈수록 견고하여졌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에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니 단순하게 그냥 이 생각 저 생각하지
아니하고 훌쩍 떠나는 것 하나님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시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면서 아브라함이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했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 믿음은 식어진 것이 아니라
갈수록 견고하여 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집을 지을 때 모래, 자갈, 시멘트를 넣어서
튼튼하게 콘크리트가 되게 하여 집을 짓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세
가지가 들어가면 시간이 지나면 지나갈수록 단단하고지고 견고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러한 모습으로
표현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세월이 갈수록 단단해져 갑니까? 아니면 세월이
갈수록 타성에 젖어 흐물흐물 마사토같이 되어갑니까?
이제 정말 정신 바짝 차릴 때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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