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탈출 능력이 마법사 같아” 절친 터너의 말이 사실로
조회수 1.9만2023. 9. 18. 08:0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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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서 화제가 된 ‘미우새’의 한 장면
2년 전이다. 그러니까 2021년 12월의 일이다. 국내 예능 프로그램 한 장면이 미국 SNS에서 화제가 됐다. 현지 매체 ‘다저 웨이(Dodger Way)’에도 소개됐다. 99번 투수가 출연한 SBS의 ‘미우새(미운 우리 새끼)’다.
MC 서장훈이 묻는다. “진짜로 류현진이 생각하는 가장 친한 사람, 가장 친했던 선수. 한 명만 딱 꼽으라면 누구예요?”
1초도 걸리지 않는다. 게스트의 대답은 분명하다. “저는… 저스틴 터너.”
서장훈 “오~. 저스틴 터너가 더 나이가 많죠?”
류현진 “그렇죠. 저보다 나이도 더 많고(1987년 3월생 VS 1984년 11월생)…. (중략) 다저스 있을 때 잘해준 것도 있고, 팀을 (토론도) 옮겨서도 계속 문자로 연락하고, 한 번씩 영상 통화하고 그렇게 지내고 있죠.”
둘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2014년이다. 터너가 메츠에서 방출된 이후다. 초청 선수 자격으로 다저스 스프링 캠프에 합류했다. 당시만 해도 내야 백업 정도였다. 그리고 30대 중반이 돼 만개했다. 클럽 하우스의 리더로도 신망이 두터웠다.
먼저 떠난 것은 99번 투수다. FA 이적이 발표되자 누구보다 먼저 아쉬움을 나타냈다. 3루수는 인스타그램에 사진 하나를 올렸다. 둘이 손을 꼭 잡은 장면이다. 그리고 이런 멘션을 남겼다.
“정말로 그리워할 거야. 내가 가장 좋아했던 선수였는데. 좋은 시간을 함께해 준 류현진. 고마워.” 마무리는 멋진 조크다. “네가 (지명타자가 있는) 아메리칸 리그로 가기 전에 홈런 치는 걸 볼 수 있어서 기쁘군!!!”
저스틴 터너 인스타그램붉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레드삭스로
그의 머리와 수염을 놓고 의견이 갈린다. 누구는 금발, 누구는 붉은색이라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후자라고 정의한다. SNS 아이디도 ‘redturn’으로 쓴다. 아마 ‘붉은 머리(수염) 터너’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아무튼. 그는 타격 못지않게 스타일링으로도 성공한 케이스다.
무명 시절에는 평범했다. 오리올스 때는 삭발(buzz cut)을 유지했다. 메츠 때도 그다지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었다. 그런데 다저스로 가면서 달라졌다. 머리와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간의 염색을 보태 자신만의 개성을 살렸다. 동시에 포텐이 터졌다. 그가 타석에 등장하면 다저 스타디움에는 외침이 폭발한다. “It’s Turner Time.”
터너 타임의 스타일은 우연이 아니다. 치밀한 전략과 안목이 바탕이다. 아내 커트니의 작품이다(2017년 결혼식 주례는 오렐 허샤이저였다). 그녀는 NHL(아이스하키) LA 킹스의 치어리더 출신이다. 동시에 명문 UCLA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재원이다. 온라인 쇼핑몰 CEO다운 미적 감각을 발휘해 인생작(?)을 남긴 것이다.
레드 터너는 2022년을 끝으로 다저스 생활을 마쳤다. 올해 이사한 곳은 보스턴이다. 머리와 수염 색과 잘 맞는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마치 자기 옷을 입은 것처럼 화려하게 부활했다. 17일까지 타율 0.283, 홈런 23개, 타점 94개, OPS 0.827. 전성기 못지않은 활약이다.
5회 헛스윙으로 삼진당하는 저스틴 터너 mlb.tv 중계화면초구 커브 “친구, 정신 차려. 봐주는 거 없어”
묘한 상황에 재회가 이뤄졌다. 2살 차이 브로맨스가 18일 토론토 로저스 센터에서 맞대결을 펼친다. 99번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백넘버도 그대로다. 디자인은 좀 다르지만, 파란색 유니폼도 여전하다. 반면 터너 타임은 꽤 달라졌다. 10번에서 2번이 됐다. 붉은 양말에 선글라스까지 빨간 테를 강조했다.
그렇게 마주한 1회 첫 타석이다. 2아웃에 주자는 없다. 초구는 느린 커브다. 70마일짜리가 가장 먼 곳을 통과했다. 스트라이크. 선전 포고다. “이봐 친구, 봐주는 것 없어. 죽기 살기로 붙는 거야.”
2구 포심은 높게 버리는 볼, 3구째 커터는 파울이 된다. 카운트가 1-2로 투수 편이다. 이제 슬슬 승부를 끝낼 시간이다. 4구째 결정구다. 바깥쪽을 파고든다. 초구 스트라이크와 같은 코스다. 그냥 놔두면 루킹 삼진이다.
화들짝. 빨간 머리가 깜짝 놀란다. 엉겁결에 스윙이 출발한다. 하지만 속았다. 직구처럼 오다가 갑자기 휘어져 나간다. 체인지업(76마일)이다. 간신히 배트를 뻗어 커트에 성공한다. 파울로 생명이 연장된다.
한숨 돌린 빨간 머리다. 잠시 타석을 벗어난다. ‘이게 그 유명한 체인지업이구나.’ 말은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한때 리그 톱 레벨의 구종 가치를 호가하던 공이다. 아마 직접 본 것만 수백 번이 넘을 것이다. 그러나 관측 위치는 모두 3루수 자리였다. 타석에서 겪은 것은 처음이다. 빙긋이 웃음 짓는다. ‘역시, 만만한 공이 아니군.’ 그런 의미가 담긴 것 같다.
결국 7구째 실랑이는 끝났다. 마지막 공은 또 체인지업이다. 77마일로 떨어지는 변화에 배트가 끌려 나간다. 좌익수(돌튼 바쇼) 위로 뜬 공이다.
류현진의 체인지업을 본 뒤 웃음짓는 터너 mlb.tv 중계화면5회 삼진 당한 뒤 마운드를 돌아보며 퇴장
이후 두 번을 더 만난다.
두 번째 타석은 3회 1사 2, 3루다.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나가기로 했다. 초구부터 스윙을 돌렸다. 아차. 또 체인지업이다. 79마일짜리에 타이밍이 어긋난다. 3루수 맷 채프먼 앞으로 땅볼(타구 속도 81마일)이다. 1루에서 아웃. 주자들은 꼼짝 못 한다. 득점 기회가 사라진다.
세 번째는 5회다. 1사 후 주자가 1루에 있었다. 1~3구까지는 빠른 볼로 압박한다. 89마일짜리지만 양쪽 코너를 공략한다. 덕분에 스트라이크 2개를 먼저 먹고 시작한다. 그러던 카운트 2-2다. 이번에는 처음 보는 커터(87마일)다. 야무지게 돌렸지만 바람 소리만 요란하다. 헛스윙 삼진.
‘이거 너무하는 거 아냐.’ 야속한 마음이다. 돌아오는 길에 마운드를 돌아본다. 투수는 이내 등을 돌린다. 섭섭한 눈길이 넓은 등판에 꽂힐 뿐이다.
(둘의 맞대결은 2013년 8월 13일에 있었다. 다저스 선발과 메츠 6번 타자로 만났다. 당시 기록은 3타수 1안타다. 세 번의 타석 결과는 2루수 땅볼, 우익수 플라이, 중견수 앞 안타였다. 구사된 공은 포심, 슬라이더, 커브였다. 체인지업은 던지지 않았다. 류현진이 7이닝 1실점으로 12승째를 올린 경기였다.)
2회 홈으로 뛰어드는 레드삭스의 3루 주자 라파엘 데버스를 잡아내는 장면 mlb.tv 중계화면빨간 머리가 절친을 향해 남긴 절찬 퍼레이드
아마 빨간 머리 입장에서는 3회가 가장 아쉬웠을 것이다. 1사 2, 3루를 살리지 못했다. 아무리 절친을 상대했지만 3번 타자의 체면을 구겼다. 외야 플라이라도 쳤어야 하는데 말이다.
물론 혼자 잘못은 아니다. 빨간 양말은 무사 2, 3루를 두 번이나 놓쳤다. 스치기만 해도 점수가 나는 상황 아닌가. 1점 차 패배도 할 말이 없을 터다.
하지만 잘 기억해 보라. 예전에 자신이 뱉은 말이 있다. 빨간 머리가 2019년 99번 몬스터를 평가한 얘기다. “저 친구는 말이죠. 꼭 후디니 같아요. 위기에 빠졌을 때면 귀신같이 벗어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무수한 고비를 아무렇지 않게 이겨내는 모습을 탈출 묘기의 달인인 마술사 해리 후디니를 떠올린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절친을 향한 절찬은 끊이질 않았다. 2018년이면 잦은 부상에 시달릴 때다. 겨우 7승(3패) 투수를 이렇게 진단했다. “그가 던진 경기를 유심히 보세요. 정말 뛰어난 투수라는 걸 느낄 수 있어요. 부상이 무척 아쉬워요. 몇 달간 빠지지만 않았으면 아마 사이영상 후보로도 오르내렸을 거예요.”
당시로는 좀 오버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평가는 곧바로 입증됐다. 이듬해인 2019시즌이다. 몬스터가 14승 5패, ERA 2.32(1위)를 기록하며 활짝 피어났다. 올스타전 선발, 사이영상 2위를 예언한 셈이다.
터너 타임이 99번 투수를 좋아한 이유다. 이런 감상을 남겼다.
“그는 던지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어요. 스피드를 조절할 줄 알고, 원할 때 스트라이크를 던질 줄도 알아요. 4가지 구종 모두 커맨드가 기가 막히죠. 코너 깊숙이 꽂아 넣어 타자들을 꼼짝 못 하게 만들죠. 이런 투수를 찾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