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함락과 함께 왜적에게 당한 여인들의 수난은 실로 마로 표현할 수 없이 엄청났다. 강간을 하고 코와 귀를 잘라 가기도 하고 항거하는 여인의 간을 꺼내어 나무에 걸어놓기도 하고 산체로 불에 던져 죽이거나 눈알을 파고 얼굴 가죽을 벗겨 내기까지 했다.<삼강행실도아이를 안은 채 머리 잘린 김씨등 그림생략 >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먼저 죽이고는 유방을 잘라 내거나 이미 숨이 끊긴 시체에 도 다시 칼질을 가하는 등, 왜적의 만행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하나씩 자르거나 팔다리를 자르기도 했다. 배를 가르고 온몸을 칼로 찢어서 살해하기도 했다.
여인들은 나라를 짓밟은 왜적에게 빈손과 몸으로 저항했다. 절개와 의지였다. 절개를 생명보다 소중히 여기며 저항하다가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이들을 다 기록할 수는 없지만 ,진주성함락 후에 사실을 후에간행 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열녀가 356명이나 오려져 있다.
이는 효자67명, 충신11명과 비교해서 엄청나게 많은 숫자이다. 진주성 전투에서 정절을 지키다가 순절한 여인들의 살려보면 그 사연이 비참하여 가슴이 메어지지 아니할 수 있단 말인가?
수문장 정천계의 아내 이씨는 왜적이 말 위에 끌어올리려고 해도 끝내 항거했다. 놈이 칼을 뽑아서 목덜미에 걸치며 협박하다가 안되니 이씨를 마디 마디 잘라서 처참하게 죽였다. 그때 이씨의 딸은 어머니가 당하는 처절함을 보다못해 연못에 몸을 날려 빠져 죽었으니 그때나이 16세였다.
승사랑 정승업의 아내 최씨는 항상 패도를 지니고 있으면서 불행이 밀어닥칠 때는 스스로 죽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있었다. 과연 왜적에게 붙들리게 되자 부인은 태연한 자세로 준절히 왜놈을 꾸짖고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다.
의금부 도사 이번의 아내 황씨도, 왜적과 맞부딪치자 칼을 들고 싸우다가 죽음으로 고귀한 절개를 지켰다.
아버지나 남편을 위해 몸 바친 여인도 있었다. 허진의 아내 김소사는 왜적이 친정아버지를 죽이려고 하자 자기 몸으로 막으면서 막대기로 놈을 후려치며 꾸짖었다. 그러자 놈이 큰칼을 휘둘러서 함께 죽여버렸다. 정훈의 아내 이씨는 적이 남편을 찔러 죽이고 자신에게 덮쳐들자 돌을 던지며 분연히 꾸짖었다.
그러자 적이 칼을 번쩍 들어서 내리치니, 부인은 두 팔이 잘려져 나갔으며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산골에 숨어 있거나 피난길에 붙들려서 화를 입은 여인들도 많았다.
효자 김경훈의 아내 성씨는 진주성전투 후 남편과 함께 산골 깊이 피난하고 있었다. 마침 산골짝을 뒤지던 적에게 발각되어 남편은 그 자리에서 무참히 살해되었다. 자색이 아름다운 부인은 적의 포로가 되어 끌려 다니다가 달탄에 일렀을 때,적의 눈을 피해 강물에 몸을 날려서 절개를 지키고 죽었다.
이유해의 아내 하소사도 진주성침공으로 집현산으로 숨었는데, 뜻하지 않게 그 산골에서 왜적을 만나게 되었다. 왜적은 부인을 억지로 말 위로 끌어 올렸다.
부인이 잠자코 기회만 노리고 있는데, 마침 물을 건너게 되었다. 강의절반쯤에 이르렀을 때, 아기를 업은채로 몸을 날려 강물에 빠져 죽었다. 부인이 뛰어난 미인이었던 터라, 적은 그 죽은 모양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아깝다고 한탄했다. 부인의 9홉 살짜리 딸도 물에 빠져 죽었으며,19세 이 친정여동생도 적에게 항거하며 절개를 지키고 숨을 거두었다.
선비 정삼성의 아내 강씨는 어머니와 같이 산중으로 숨었는데, 왜적들이 산속까지 찾아 들어왔다. 부인이 어머니를 막아섰으나 ,적은 어머니를 쳐죽이고 부인에게 덤벼들었다. 부인이 죽음으로써 무도함을 꾸짖자 이에 성난 적이 부인의 두 팔을 잘라 버렸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들을 매도하니, 부인을 마디마디 잘라서 죽였다.
김선명의 아내 정소사는 산속에서 왜적을 만나서 붙들렸다. 적이 그를 앞세워가자고 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왜적이 하는 수 없어 꽁꽁 묶어서 소등에 싣고 가는데 어느 산굽이에 일렀을 때에 몸을 버둥거려서 낭떠러지 떨어져 자결하였다.
강순의 딸 강소저도 왜적을 피해 산속에 숨었다가 도리어 왜놈에게 붙들리게되었다. 적이 그의 미모에 눈이 어두워 마구 덮쳤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절개를 지키기 위해 적의 칼 아래 이슬로 사라지니 그의 나이 꽃다운 19세였다. 보인 채학의 아내 변씨도 산골에서 왜적을 만나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다가 끝내 죽음을 당했다. 선비 강검의 아내 정씨는 산속에서 피난살이를 하다가 왜적이 덤벼들므로 호되게 적을 꾸짖고 죽음을 당했다.
그밖에도 절개를 지킨 여인들이 많았다. 한응의 딸 한소저는 평소 “여자란 불행을 맞으면 죽음뿐이다”라고 하더니 ,왜적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다.
선비 강순의 아내 하시는 피난길에서 왜적에게 붙들렸으나 “여자의 생명보다 중한 절개를 더럽히고 구차하게 살아서 어디에 쓰겠는가?” 하고, 끝내 왜적을 꾸짖다가 칼 아래 이슬로 사라졌다.
강세진의 아내 김씨도 왜적이 겁탈하려고 하자 목숨을 걸고 항거하니, 소원을 이루지 못한 놈은 부인을 처참하게 죽였다. 선비 윤여훈의 아내 최씨, 정희성의 아내 정씨, 부장 유흥의 딸 유소저, 첨사 김진의 아내 강씨도 이번 진주성 전투 때에 왜적에게 붙들렸으나 ,절개를 지키면서 죽음으로 항거했다.
수군 장억수의 아내 김소사는 일찍이 혼자 되었는데, 왜적에게 붙들리자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 그리고 평민 김소사는 밤중에 적을 피해 달아나다가 붙잡혀서 팔과 다리가 잘려 죽었다. 함안으로 피난했던 이형복의 아내 강씨도 적에게 양손이 잘리고 머리가 절단되며 배가 갈라져서 죽었다.
하증의 어머니 강씨도 적에게 항거하다가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하증은 그 일이 응어리져서 평생토록 일본이 있는 동쪽을 향해 앉은 적이 없었다. 그의 아우 하변이 적에게 잡혀갔으므로 밤낮으로 살릴 계획을 세워 마침내 무사히 돌아오게 하였다. 사람들이 이형제의 우애를 위해 노래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하증은 나중에 충효의 장려를 받았는데 성(誠)자 하나로 종신토록 행세하였다.
안몽량 ·광윤· 몽구 3형제의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의령으로 피난하였다. 피난길에 적이 그녀를 겁탈하려하자, 울면서 “욕을 당하고 구차히 사는 것보다는 조용히 죽는 게 낫다.”하고는 목숨을 끊어 버렸다. 적이 그 시신을 창에 꿰어 춤추려고 하니, 3형제가 어머니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그 곁에서 서로 죽고자 하니 적들도 갸륵히 여겨 내버려두었다. 3형제의 나이가 각각 15, 11 ,7,살 이였다. 이들은 시신을 메고 산으로 들어가 손가락을 깨물고 맹세하였다.
“우리들이 비록 어른은 아니지만 떳떳한 윤리를 지녔으니, 어찌 적들과 같은 하늘아래 살수 있겠는가?”3형제는 정유재란 때 곽재우 장군를 따라 출전했는데, 전투 때마다 매 냥 몸을 던져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싸웠다. 형 몽량은 전사하고 광윤·몽구는 시종 힘을 합쳐서 적을 수없이 많이 죽였다. 임금이 치하하였다
한집안 3형제의 효성과 우애가 이와 같으니, 나라의 왕기라도 이들보다 장하지 않다.
이탁영 쓴 <장만록>의 기록에의 하면“상주에 사는 하락이 가족과 함께 피난 중에 왜적을 만났다. 적은 먼저 부인을 잡고 항복하라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목을 벴다. 그리고는 동생의 아내를 보리밭에 끌고 가서 십여 명의 적이 욕을 보이고 놓아주었는데 그녀는 결국 목을 메어 죽었다. 여자 하나를 잡으면 30∼40여명이 서로 윤간하여 죽게 한다고 한다. 또한 책을 찢어서 더러운 것을 닦는다고 하며 장독에다 방뇨하고는 이를 사람에게 먹도록 한다.”고 하였다
오희문도 <쇄미록>에 눈으로 본 사실을 겼다.“전일 금산 싸움에 한 여인이 적에게 붙잡혀서 창고 안에 들어가 있다가 싸움이 끝난 후에 나와서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본래 경상도 성주에 살던 선비의 부인으로 왜적이 뜻밖에 마을로 들어오자, 시어머니와 함께 피해 달아날 때 적에게 잡혀서 여에 왔다고 하였다. 적들이 돌아가면서 강간을 하여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죽으려고 했으나 차마 죽지 못하고, 시어머니의 생사도 모른다고 하였다. 입고 있는 옷이란 찢어진 치마만 허리에 걸려 있고 속옷도 없었다. 우리군사들이 치마를 올리고 보니 음문이 부어서 걷지도 못하니 아주 참혹한 일이다”
진주성에 있었던 하명의 기록에는 그는 진주성 전투동안 김천일·최경희·황진 등의 측근에 있으면서 장수들의 시중을 들고 군사들을 독려하기도 하다가 성이 함락될 대에 남강으로 몸을 던진 기생들의 사연을 쓰고 그녀들의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이라고 했다. 논개의 사연은 그 후 널리 알려졌다.
진주성 함락한해 7월 칠석이 되었다 .진주성 안에 거의 유일하게 남은 남장대, 촉석류에서 적들의 큰잔치가 벌어 졌다. 살아남은 기생들과 여념집 여인들이 시중을 들었다. 논개는 갓 스무 살이었다. 요염한 교태로 남강 가의 바위 위에서 왜장을 껴안았다. 열 손가락에 가득한 쌍가락지는 그대로 저승길로 가는 포승줄이었다.
둘은 물속 깊이 가라앉아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그 왜장은 가토의 부장 게야무라 로구스께 (毛谷村六助)였다. .이일로 그는 일본에서 용감하지 못한 비운의 장수가 되었고 반면에 논개는 천고의 의기(義妓)가되었다
평야의 계월향과 진주의 논개, 둘은 역사상 둘도 없는 의기다. 사람들은작년이맘 때의 부산 수영에 있느 익대(二妓臺)에서 동래성을 유린한 왜장들을 껴안고 바다에 뛰어든 기생 둘을 상기했다.
사람들은 이제 그 바위도 위암(危岩)이 아니라 의암(義岩)이라고 불렀다. 30여 년이 지난 1629년 정대룡이 위암에 전서체로 「의암」이라고 세겼다. 그는 함경도에서 가토를 물려 친 정문부의 둘째 아들이다. 다시 1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조정은 논개에게 의암 부인이란 칭호를 내렸다.
후일 정약용은 진주성을 돌아보며 <진주의기사기>를 지었다.
“계사년에 왜적이 진주성을 함락시켰을 때, 기생 의낭(義娘)은 왜장을 유인해 강 가운데 바위에 마주서서 춤추다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그를 안고 물 속에 빠져 죽었으니 이것이 그녀의 사당이다. 이 어찌 열렬한 현부인이 아니냐? 지금 한 왜장 죽인 것만으로 3장사의 치욕을 씻을 수는 없다고 하겠지만 , 서이 함락될 무렵에 인근 읍에 서는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구원하지 않았고, 조정에서는 전공을 시기하고 패배를 달갑게 여겨 성곽의 견고함을 적에게 넘어가게 하였으니, 충신지사들의 분계 함이 이 싸움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한 여인이 왜장을 죽여 나라에 보답할 수 있었으므로 군신간의 의리가 천지간에 밝혀졌으니 한 성의 패배쯤은 근심 할 것이 없다. 이 어찌 장쾌하지 않는가?”라고 적고있다.
이 얼마나 통분 할 일인지고. 전쟁을 통하여 15만 병력의 말발굽아래 살아남은 아녀자들도 하나같이 온전할 수 없었던 비참한 모욕과 전쟁의 참화를 입고도 뉘우침과 국민을 위한 정치는 안중에 없이, 당리당략에 따른 정권야욕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명분 쌓기 정치 논쟁을 하다가 또 다른 역사의 질곡 속으로 들어가지 아니하였던가?
-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
만해 한용운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는 살 같은 광음을 따라서
달음질 칩니다.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지 않는다.. -중략 -
천추에 죽지 않는 논개여,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나는 웃음이 겨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겨워서 웃음이 됩니다
용서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논개여,
유일무한청정지역 퀸연아 행성~~
별빠님 인장쌩유여~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