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회원 알림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bigather
    2. 역사가좋지요
    3. 도올파리
    4. 엄용식
    5. 역사조아
    1. 헤젤
    2. 원사료중독자
    3. 풀빛
    4. 장군아
    5. 그란마
 
 
카페 게시글
신라,가야토론방 스크랩 신라사 어떻게 쓸것인가 학술회의 질문 답변 자료(2011.12.19.경주현대호텔)
정성일 추천 0 조회 356 11.12.21 18:31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11.12.22 02:41

    첫댓글 글쎄요..너무 많은 의미가 내포 되어 있어서...댓글 다는 것조차 조심스러운데요....삼국사기, 삼국유사.남당유고.일본서기가 오랜 시간을 두고 기록된점...그리고 그 시대의 지식층 내부에서 바라본 역사 지식일뿐...한마디로 카더라 통신을 짜집기 했다고 봐야죠.....오류가 있는건 당연하고....그것때문에 전체의 흐름을 의심해선 안 된다고 봅니다..당대의 그 집단 생각이라고 봐야죠...해석의 오류는 기록한 사람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그걸 보고 나름대로 해석하는 사람의 책임이라고 봐야죠..그래서 소극적인 해석보다는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 11.12.22 09:33

    제가 남당유고를 해석하면서 느꼈던 점은 처음의 해석이 두번째 해석할 때 의미가 달라집니다. 또한 뒤에 나타나는 어떤 기사를 통해 앞에서 해석한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예를 들면 신라의 초기기록에 문제가 있는 부분을 신라에 문자가 없어서 기록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양서동이열전의 기록을 내세웁니다. 고고학적으로 주변국가의 상황으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이것이 잘못된 해석임이 논증될 수 있습니다.
    양서동이열전 無文字 刻木爲信라는 문장을 처음 대하면 신라에는 문자가 없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아달라이사금조에 보면 길선이 반역을 일으키고 도망가자 왕이 글을 보내 넘겨주기를 청합니다

  • 작성자 11.12.22 10:10

    양서동이열전은 법흥왕대의 사실이고, 북사에는 其文字甲兵 同於中國이라고 되어 있으나 법흥왕의 이전인지 후대인지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어 참고하더라도, 중원고구려비(눌지왕) 등 금석문이 법흥왕대 이전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양서동이열전은 단순해석하지 말고 의역이 필요한 것입니다. 無文字 刻木爲信라는 뜻은 文字(외교문서)가 없고 刻木(임금의 부절)을 증표로 삼았다라고 해석하면 의미전달이 될 수 있습니다. 소극적으로 해석하더라도 최소한 아달라이사금 이후로는 신라에 문자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문자가 없었는지는 신라의 근원을 추적하다보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 작성자 11.12.22 10:14

    신라의 이전은 삼한으로 삼한은 기자조선의 마지막왕인 기준이 위만에게 습격당하여 남으로 도망쳐 세운 나라입니다. 기자조선은 주나라의 기자가 세운 나라로써 기자는 은나라 왕실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역시 문자를 알고 있었으며, 신라를 秦韓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秦나라에서 도망쳐온 사람들로써 역시 문자를 알던 사람입니다. 즉, 신라의 조상은 본래부터 문자를 알던 사람들이며, 문자가 없어서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 작성자 11.12.22 10:24

    남당유고 신라사초를 보면 어디에도 국가적인 역사편찬작업이 있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대부분 개인의 저술을 참고하였으며 양적,질적인 면에서 공평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석씨 왕계의 내용이 부실합니다. 개인적인 성생활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므로 어떻게 사관이 그런 내용을 기록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내물왕의 경우에는 성장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외할머니 달례(유례의 누나)의 월내신경을 참고한 기록이 보입니다. 그만큼 남당유고(신라사초)는 내용적으로는 흠잡기 어렵습니다.

  • 12.02.24 18:37

    아도화상에 대해서는... 우선 아도 자체를 한 개인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일종의 보통명사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고요.... 승려를 지칭하는 보통명사죠. 그리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다른데... 소지왕의 다른 이름이 비처왕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미추왕대의 아도화상의 불교 전교 기록은 비처왕을 미추왕으로 착각했거나 김씨 왕족의 신성성을 높이고자 왜곡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죠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