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이중성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조는 빛과 어둠을 많이 사용한 사람입니다.
즉 빛과 어둠으로 인간의 이중성을 그려낸 것이죠.
빛과 어둠의 극렬한 대비가 애초부터 인간은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숲에 사는 사람이 숲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듯이
우린 스스로 자신의 이중성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자연계를 살아가는 인간은 자연계의 법칙을 거스르려는 본능을 가진 유일한 존재입니다.
선하디선한 지킬박사와 악의 화신 하이드는 같은 사람입니다.
인간 본성은 어둠과 빛 사이의 무한한 싸움에 대한 고민이 있는 것이지요.
우린 무심코 사람의 행동이나 말을 성품이나 마음씨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껍질은 한 겹이 아닙니다.
사회에 만연해 있는 자본의 폐해와 부정부패 한탕주의 및 배금주의를 부정하면서도
자신에게 맞닥뜨렸을 때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성경 마태복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外飾, 겉으로 꾸미기만 하는 사람)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나의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로 치부하며 글을 읽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즉 이중인격은 나와 상관없는 말로 자기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고 선하다는 편향적 믿음을 갖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인데
그게 쉽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거짓말하는 동물은 오직 인간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는 동물도 인간에 국한되어 있지요.
우린 가면을 쓰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것을 페르소나라고 하지요.
직장에서의 위치로 불리는 명칭에서 오는 권위적 가면
그리고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사회적 가면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한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도구적 가면
우린 타인의 얼굴을 하고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신의 내부를 진솔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사는 것이 좋을 때가 많습니다.
어차피 인식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중성이라면 그 강도를 낮추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