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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 (누가복음 2장 22-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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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의 1장과 2장에는 교회사에서 널리 애창되고 있는 세 개의 중요한 찬송이 나옵니다. 첫째 찬송은, 1장 46절에서 55절까지의 성모마리아 찬송으로 ‘내 영혼은 하나님을 찬양하네(Magnificat anima mea Dominum)’라는 라틴어 텍스트로 시작하는 구절을 인용해서 ‘마그니피카트(Magnificat, 찬양하다)’로 불립니다. 둘째 찬송은, 1장 68-70절까지의 사가랴의 찬송으로, 이를 ‘베네딕투스(Benedictus, 주를 찬양하여라, Praise be to the Lord)’라고 부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찬송이 오늘 말씀 구절인 2장 29-32절에 나오는 시므온의 찬송으로, 이를 ‘눈크 도미티스(Nunc Dimittis, 이제 종을 평안히 가게 하소서)’라고 부릅니다. 마리아, 사가랴, 시므온은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심을 아름다운 노래로 부른 인물들입니다. 오늘 말씀은 세 번째 찬송의 주인공인 시므온이 일생 동안 오직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다가, 드디어 아기 예수와 마나는 감동적인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22절에서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정결예식’이란 산모인 마리아가 율법(레 12장)이 정한 바에 따라 속죄제를 드리러 성전에 올라간 것을 말합니다. 율법에 의해 산모들은 남자 아기를 출산하면 40일, 여자 아기를 출산하면 80일을 지낸 후에 성전에 나와 속죄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아기는 축복의 대상이지만, 출산의 고통은 죄에서 근원되었기 때문에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출산 가정 중에 부자들은 속죄 제물로 어린 양을 드렸고,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한 처지였기 때문에 비둘기로 대신했습니다.
성전에 올라간 1차 목적이 산모인 마리아가 산후 정결예식을 드리러 간 것이지만, 더불어서 아기 예수님도 율법에 의한 예식을 치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정에서 남자 어린 아기가 출생하면 8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받아야만 하는 명문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아기 예수님은 이미 할례를 받은 상태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부모와 함께 성전에 간 이유를 23, 24절에서 구체적으로 말해 줍니다. 23절에,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렸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가정에서 처음 태어난 장자와 동물의 초태생은 다 하나님께 바쳐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12-13절에,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장자 분들 계시죠? 장자 분들은, 이제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구나, 나는 하나님께 드려진 몸이라고 여기십시오. 성경에서 장자는 두 배의 복을 받습니다. 장자들에게 두 배의 복을 예비해 놓으신 것을 다 받으시려면, 두 배 몫의 열심과 충성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자부심과, 구별되어 드려진 만큼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거룩한 부담감을 지녀야 하는 것이 장자의 위치입니다. 동물들의 초태생은 희생제물로 드렸지만, 사람의 장자들은 어린양과 같은 다른 희생제물로 대속(代贖, 대신 값을 치름)하게 했습니다. “아기를 주께 드렸다”는 말씀이 장자인 아기 예수님을 봉헌(奉獻)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정결의식을 치르러 성전에 나간 예수님의 부모와 아기 예수님은 뜻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시므온 이라는 남자 노인입니다. 25절에서 시므온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라고 설명합니다. ‘의롭다’는 말(헬, 디카이오오스, 히, 차디크)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다는 뜻과 사람의 법을 준수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죄인과 의인을 구분할 때 쓰는 것처럼 죄가 없는 의로운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시므온처럼 의롭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세례요한의 부모였던 사가랴와 엘리사벳, 예수님을 장사지내 주었던 아리마대 요셉, 그리고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던 로마군인 백부장 고넬료 등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오직 일생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따라 철저하게 행동했던 순종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므온이 또한 ‘경건하다’고 했는데, 이는 종교적인 의무에서 매우 투철하고 일관성 있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시므온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나,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나, 신앙생활의 모습들에 있어서 칭찬과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고, 유대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구원자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압제에서 구해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 백성이 위로(구원자)를 기다리는 와중에 특별히 시므온을 대표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왜 하필 노인 시므온인가? 바로 연결해서 나오는 말씀,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라는 말이 답을 말해 줍니다. 위에 계셨다는 말이 머물러 있다는 뜻인데, 한시적으로가 아니라 움직이는 곳곳마다 떠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시므온 곁에는 항상 성령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는 지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하늘의 위로(구원자)를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이 대림절 마지막 주간입니다. 한 주간만이라도 성령님을 의지하고 하늘의 위로를 기다리신다면 빛으로 오신 아기예수님을 만나보시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꼭 성령님을 붙드시고, 간절함으로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시므온은 나이가 많았지만 죽음에 대한 염려는 없었습니다. 26절에,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시므온의 수명은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곧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그리스도(구원자)를 보기 전까지는 완벽하게 보장되었습니다. 도저히 죽을 수가 없는 희한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시므온은 노인이었지만 성령님이 지켜 주시기 때문에 늙어가면서도 건강을 잃지 않았을 것이고,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기 때문에 지루하고 따분하고 짜증날 법도 한데, 전혀 그런 기분이 들지 않도록 마음에 평안이 있었을 겁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일을 하는 사람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하느냐를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므온과 같이 단순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미래의 희망과 소망이 넘쳐나게 마련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유명한 유대인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e)’ 박사가 있었습니다. 수용소에서는 아침 조회 시간에 사람들을 줄지어 세워 놓고 얼굴을 확인하여 피부색이 나빠 보이거나 얼굴이 푸석푸석한 사람은 선별해서 곧바로 총살을 시켰습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땅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숨겨서 저녁 잠들기 전에 항상 수염을 깎았고, 아침에는 얼굴 마사지를 해서 탄력 있어 보이고 홍조를 띤 얼굴이 되게 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는 결국 살아났고, 후일에 그가 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는 자신이 나치 치하의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독일의 패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인 1944년 겨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번 크리스마스만큼은 수용소에서 나가 가족과 함께 지내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식이 없자, 많은 사람들이 그 해 겨울에 숨을 거두었다. 이 때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도저히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에서(극한 상황)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나중에야 그것을 깨달았다. 마음에 분명한 희망을 가진 사람, 분명한 기다림이 있는 사람, 사랑하는 애인이나 아내,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 돌아가서 자신이 꼭 이룩해야할 일이 남아있는 사람. 그러한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사람은 먹는 것으로 사는 것도 아니요 오직 희망으로 산다. 오직 기다림으로 산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죽음의 문턱에 있는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새로운 삶을 기다리는 간절한 기다림을 붙잡았기 때문에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결국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언제 올지 모르는 위로자(구원자)를 포기하지 않고 희망 가운데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인고의 세월을 지냈더니, 드디어 약속의 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27절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보십시오. 시므온은 성령이 그 위에 계시면서 동행하면서 하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고,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나할 것이라고 지시하셨고, 결정적으로 아기 예수가 정결의식을 치르러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바로 그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전에 들어갑니다. 공통점이 보이시죠. 모든 일마다 성령이 시므온에게 임하셔서 역사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을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의와 경건에 힘쓰면,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동하고 말씀에 순종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반드시 성령께서 우리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을 누리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성전에 들어간 시므온은 아기를 안고 오는 젊은 부부를 보고 한 눈에 그 부모와 아기가 자신이 일평생 기다리던 사람들 이었다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성령이 시므온의 영안을 열어 구원자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시므온은 곧바로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께 찬양을 올립니다. 이 찬양이 앞서 설명 드린 ‘눈크 도미티스(Nunc Dimittis, 이제 종을 평안히 가게 하소서)’입니다. 29-32절을 우리말 성경으로 읽어드립니다. “다스리시는 주여, 이제 주께서는 주의 종이 평안히 가게 해 주십니다. 제 두 눈으로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 구원은 주께서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신 것으로 이방 사람에게는 계시의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성전에서 갑자기 한 노인이 아기예수를 사랑스러워서 안아 주는가 싶었는데, 이런 어마어마한 찬송을 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전 개역성경에는 이 장면을 “기이하게 여겼더라”라고 했는데, 놀라고 기이하게 여긴 두 모습이 크로스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생전처음 보는 사람이 한 말치고는 너무나도 엄청난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구원”, “계시의 빛”, “이스라엘의 영광” 이러한 단어들은 하나님을 향해서만 찬양할 수 있는 단어들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하나님과 동격 수준으로 보고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크게 놀라고 기이하게 여긴 것입니다. 단 한 번의 만남을 위해 일생의 시간을 기다려온 시므온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시므온과 아기 예수님의 만남을 보면서 우리 인생의 방향과 목적을 생각해 봅니다. 노인이 되어서 인생의 성적표를 받아 볼 때에 우리가 이루어 놓은 많은 성과물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시므온처럼, 돈도 안 되고, 명예도 안 되고, 털끝만큼도 알아주지 않는 단 하나의 과제인, “마냥 기다림”을 위해서 평생의 시간을 바치려고 한다면, 집에서 쫓겨나고 자식들에게도 무시와 차별을 받게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명들은 우아하고, 품위 있고, 호위호식 하는 일이 아닙니다.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거의 죽음의 경계선에서 몸과 영혼이 바스러지는 환난과 고통을 강요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단 하나의 사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구원자요, 빛이요, 영광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날이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시므온은 세상이 평가하기를 실패자요, 쓸모없는 자요, 거룩한 성전에서 노숙자처럼 생활을 하는 청산 대상 제 1순위의 잉여 인간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에서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을 주목하십니다. 그 사람은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이요, 성령의 지시를 받는 사람이요, 성령이 감동 주는 장소에서 맡겨진 일들을 묵묵히 감당해 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현재에 실생활에서는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받을지라도, 인내하고 기다림을 포기하지 아니하여 때가 이르면 하늘의 위로를 받을 것이고, 구원자 예수를 만나고 증거 하는 일을 마치기 전에는 결코 죽음에도 이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시므온과 같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두 눈으로 목도하는 영광의 순간을 기필코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번 한 주간 시므온과 같이 기다림에 순종하는 시간을 보내시기를 권면합니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시므온과 같이 평생을 그렇게 살아갈 자신감은 저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대림절 마지막 한 주간만이라도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보려는 결단과 실행은 할 수 있으실 겁니다. 시간을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성전에 나와서 예배와 기도에 함께 참여해 주십시오. 하늘의 위로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시므온이 감격의 찬송을 올려 드렸던 그 만남의 순간을 허락해 주셔서,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늘의 위로가 폭포수 같이 부어질 때에, 내 마음의 근심과, 염려와, 고민과, 낙담과, 상처와, 아픔과, 불안과, 암울함과, 약함과, 연약함과, 화병과, 우울증과, 모든 문제와 불투명 한 것들이 깨끗하게 제거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위로가 부어질 때에, 나태와, 게으름과, 불순종과, 불의와, 거짓과, 아집과, 독선과, 불통과, 분노와, 외식과, 자랑과, 모든 자아의 교만 덩어리들이 제거가 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제거가 된 연후에야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예수님이 눈에 들어올 겁니다. 성탄절에 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목이 터져라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부르짖고, 찬양하십시오. 이 번 기회를 또 놓치면, 앞에서 언급한 많은 문제들과 불순종의 씨앗들이 내 육신을 짓누르고, 내 영혼을 파괴하고, 내 소중한 시간들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릴 것입니다. 버리고 가시렵니까? 계속 안고 내년에도 그대로 가시렵니까? 마지막 골든타임을 놓치지 마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만난 후에 요셉과 마리아를 축복합니다. 축복이면서도 단 한 번의 만남과 작별의 인사를 한 것입니다. 헤어지면서 특별히 아기 엄마인 마리아에게 당부하기를, “예수님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넘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세워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복음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음의 성도가 되는 사람과, 복음을 거부하고 오히려 공격하는 무리가 있을 것을 예언하는 말입니다. 시므온은 또, “예수님은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될 것이고, 칼이 마리아의 마음을 찌르듯 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내리라”고 예언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받으실 고난을 암시하면서, 동시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의 모습이 인간에 불과한 어머니에게는 감당하기 큰 고통일 것이 될 것임을 걱정해 주는 말입니다. 이 예언의 말은 마리아에게만 국한 된 예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남겨진 자들, 믿음의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며 받는 핍박과 박해로 인해 온 몸을 칼로 찌르듯 하는 무수한 고난을 당해 왔습니다. 시므온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구원자인 예수님을 보고 믿는 다는 것은 대단한 복이지만, 그로 인해 감내해야 할 고난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 믿음을 받은 성도가 받아야 할 몫입니다.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해 주었던 축복과 안위에 대한 걱정의 예언은 우리에게도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과, 그리고 00교회에서 성도로서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반면에, 신앙생활 하면서 겪는 여러 가지 삶의 문제들이 칼이 되어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 믿고 자녀가 되는 복을 받는 것은 일회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수히 날아오는 칼날을 피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십자가의 보호와 은혜가 필요 합니다. 예수님을 평생 붙잡아야 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결코 만만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 또 한 번 증명이 됩니다. 어쩌면, 시므온과 같이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오직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단 한 번의 만남을 기다리면서 목숨까지 내걸고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제 저를 편안한 천국으로 보내 주옵소서” 감격적인 이 말을 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끝내기 위함입니다. 한 주간 힘내셔서 성령하나님에 의지하여 기도 열심히 하시고 마음에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 가운데 지내십시오. 그리고 일평생 “하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 시므온이 우리의 신앙 모델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므온과 같이 평생을 고대하던 주님을 반드시 만나서, 하늘의 위로가 충만하게 임하는 가운데 참 평안과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는 00교회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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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하늘의 위로를 기다렸던 시므온과 같이 00교회 모든 성도들이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함으로, 구원이요, 빛이요, 영광으로 이 땅에 임하실 아기 예수를 고대하는 마음으로 한 주간을 지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참 하늘의 위로와 평화와 하늘 소망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우리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