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명산 구미 금오산 현월봉(金烏山 顯月峰, 976m) 산행 #6
18:38 동국제일문(東國第一門)의 현판을 붙인 약사암 일주문
경북 구미시 남통동 금오산 정상에 자리한 약사암(藥師庵)은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기이한 바위 봉우리 앞에 기둥을 박아 받쳐 지은 암자다.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현존하는 당우도 모두 근세에 이루어진 것이다.
암자 건물은 1985년에 지어진 것이지만 절터의 내력은 삼국시대까지 올라간다.
신라 눌지왕 때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당시의 유물은 발견된 바 없다.
1618년(광해군 10년) 간행된 <일선지(一善誌)>, 1799년(정조 23년) 간행된 <범우고(梵宇攷)>에
고찰(古刹)이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종 때 편찬된 <영남진지(嶺南鎭誌)>에는 ‘법당은 8칸으로 성내(城內) 삼리(三里)에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 중기에 사명 유정(四溟 惟政)스님이 금오산성을 축성하면서 중창했다고 한다.
현존하는 두칸의 법당은 모두 근대에 들어 세운 것이고 법당 좌측에 요사를 지었으며 앞 봉우리에 조교를 가설하여 종각을 세웠다.
약사암은 약사전·삼성각·일주문·종각·요사채로 구성되어 있다.
약사암 석조여래좌상은 개금이 두텁게 되어 있어 원상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이나 재질은 화강암으로 짐작되며
1960년대의 개금하기 전 사진에 의하면 원만한 상호에 완전한 형태의 석가여래상임을 알 수 있다.
크기는 높이 95㎝, 어깨 너비 45㎝, 무릎 폭 67㎝이다.
불신에 비해 불두가 큰 편이고 머리의 나발(螺髮)도 굵직한데 육계(肉髻)가 넓어 머리와 구분이 모호하다.
상호는 방형이며 가늘게 뜬 눈이나 콧망울, 너비로 잡은 입술이 작게 표현되었으나 비교적 원만한 편이고 백호는 수정을 감입하였다.
통견(通肩)으로 걸친 옷자락은 수직으로 내려오고 있고 가슴에는 비스듬하게 사선으로 내의를 입었다.
불신의 조각은 다소 평면성을 띠는데 측면에서 보는 불상의 너비가 좁고 결가부좌한 다리도 폭이 좁아졌다.
오른손은 항마촉지인(觸地印)이고 왼손에는 작은 약호(藥壺)를 들었으나 약호는 후대에 추가된 것이다.
보물 제296호인 수도암 약광전 석불좌상의 설명문에 “금오산 약사암에 있는 석불, 직지사 약사전의 석불과 함께 3형제라 하고
그 중 한 석불이 하품을 하면 다른 두 석불은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약사암 석조여래좌상은 신라 말기, 혹은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이 되며 영남 지역의 석불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2005년 3월 14일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62호로 지정되었다.
삼성각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 크기로 맞배집으로 안에는 최근에 조성한 약사여래후불탱과 산신탱, 독성탱을 봉안하고 있다.
의상대사의 좌상
이 절의 동쪽 암벽에는 약수가 용출하고 있는데 옛날에는 이 구멍에서 쌀알이 하나씩 떨어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약사암은 옛날부터 참선도량으로 유명해서 오늘날까지 수행승뿐만 아니라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약사전중수기」에 의하면 지리산에 삼불(三佛)이 있어서 금산 삼성암(三省庵), 성주 수도암(修道庵)과 구미 약사암에 나누어 봉안했다 하는데
도인 박유술(朴有述)이 불상을 만들고 지리산에 와서 석봉대(石峯臺) 아래서 쉬고 있을 때
홀연히 불상이 땅에 정좌하여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곳에 암자를 세웠다 한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사인(士人) 우상학(禹象學)이 중수하였다.
1985년 기암절벽 아래에 남향으로 건립한 약사전은 정면 4칸·측면 2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집으로 약사암의 중심법당이다.
약사전 내부에는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석조여래좌상(경북 유형문화재 제362호)이 모셔져 있고
석조여래좌상의 좌우로는 일광과 월광보살을 협시로 봉안하였는데 모두 근세 것이다.
뒷면에는 최근 조성한 후불탱화와 신중탱, 독성탱 등이 있다.
지리산 석불삼구 중 일구가 법당에 봉안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보물 제296호인 수도암 약광전 석불좌상의 설명문에 ‘금오산 약사암에 있는 석불, 직지사 약사전의 석불과 함께 3형제라 하고,
그중 한 석불이 하품을 하면 다른 두 석불은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암자 앞 작은 암봉에는 종각을 지어 구름다리를 걸쳐 놓았다.
18:45 약사암 출발
약사암 화장실
주변이 어둡기 시작한다.
스마트폰의 후레쉬를 이용하여 18:54 마애여래입상0.4km, 법성사 2.4km 이정표 지점을 지난다.
18:54 약사암 0.2km, 마애여래입상 0.4km, 오형돌탑 0.5km 지점 이정표
18:55 약사암 0.2km, 마애여래입상 0.4km, 오형돌탑 0.5km 지점 이정표
19:12 마애여래입상
오형돌탑 가기 전 어두움 속의 1968년 보물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과 만나게 된다.
마애여래입상은 삼형제라 부르는 금오산의 세개 봉우리인 현월봉과 약사봉, 보봉 중 막내격인 보봉 아래 있다.
금오산의 마애여래입상의 가장 특별한 건 한쪽면과 다른면이 수직으로 만나는 암벽의 툭 튀어나온 모서리를 깎아서
연꽃 대좌 위에 광배를 두르고 선 부처를 정성껏 새겼다는 것이다.
대좌부터 광배까지 마애불의 높이는 5m 남짓이다.
마애불은 오른손을 아래로 내려 옷자락을 잡고 왼손은 팔꿈치를 살짝 구부려 상체에 붙이고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
여원인(與願印)이다. 중생들의 소원을 모두 성취하게 해준다는…. 마애불이 새겨진 건 10세기 중엽 고려 때로 추정된다.
그 자리에서 여원인의 수인을 하고 서 있었던 게 자그마치 1000년이다.
1000년이 지났어도 마애불 앞의 제대(祭臺) 유리 상자 안에는 오늘도 기원의 촛불이 꺼지지 않는다.
<마애여래입상>
19:33 오형돌탑 가는 등로에서 오형돌밭 방향으로 100m 정도 진행하다 다시 되돌아 온다.
어둠속에 절벽위의 오형돌탑까지 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간절한 기원으로 세운 오형돌탑은 깎아지른 해발 900m 남짓 아찔한 벼랑 위에 세워놓은 수많은 돌탑군(群)을 부르는 이름이다.
10년에 걸쳐 쌓은 수십 기의 돌탑은 갖가지 장식과 모양으로 가히 예술품의 경지다.
10세 때 죽은 손주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할아버지가 10년 동안 금오산을 오르내리며 깎아지른 벼랑에다 쌓은 돌탑이다.
돌탑은 장애가 있어 말하지도 걷지도 못했던 손주가 10년을 살고 세상을 뜨자 생전에 아픈 손주를 돌봤던 할아버지가 애통한 마음으로 쌓은 것이다.
손주가 10년을 살다 갔으니 돌탑도 10년에 걸쳐 쌓았다.
돌탑을 ‘오형돌탑’이라 부르는 것은 돌탑 아래 할아버지가 쓴 친절한 설명이 있다.
금오산에서 ‘오(烏)’ 자를 가져오고, 손주 이름 형석에서 ‘형(亨)’ 자를 가져왔단다.
오형돌탑에는 탑 하나하나마다 손주가 다음 생애에는 건강한 몸으로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할아버지가 가장 먼저 쌓은 탑이 ‘오형학당’ 돌탑이다.
손주가 태어나서 딱 한 번 학교에 가봤는데, 그게 못내 한이 돼서 세운 탑이다.
인상적인 것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아찔한 벼랑의 가장 끝에 아슬아슬 세워놓은 돌탑과 장식이었다.
쉽게 쌓은 탑이 소원을 들어줄 리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할아버지의 돌탑 쌓기가 고행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더 어려울수록 더 고될수록 소원에 다가갈 수 있다는 믿음이 지금의 돌탑을 만들었다.
그 돌탑이 보여주고 있는 건 못다 한 사랑과 간절한 기도, 그리고 소망의 힘이다.
금오산 도립공원의 주요 등산 코스는 총 4개로 1코스(4km)는 관리소에서 대혜폭포, 금오산성을 거쳐 정상인 현월봉까지 이어지며
야간산행으로 가장 추천되는 코스로 숲 속을 걸으며 은은한 달빛과 함께 대구 시내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20:23 힘들게 내려오면서 할딱고개 전망대에 도착한다.
20:39 대혜폭포의 야경
20:55 금오산성의 대혜문
금오산성 안내도
금오산성은 경북 구미시 금오산 도립공원내에 있는 해발 976m의 험준한 금오산의 정상부와
계곡을 감싸 내·외성 2중으로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금오산성을 처음 쌓은 연대가 문헌상에 있지 않아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고려 후기 왜구들이 내륙 깊숙이까지 빈번히 쳐들어와 인명을 살상하고 노략질을 일삼자
인근 선산, 인동, 개령, 성주 백성들이 금오산(金烏山)에 피난하여 왜구들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고
군병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이곳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하는 군창까지 두었다고 한다.
내성은 정상부에 테를 두른 모양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0리나 되며 험한 절벽에는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았다.
외성은 계곡을 감싼 둘레가 5리이며 내·외성벽의 길이는 6.3㎞나 된다.
조선 태종 10년(1410)에 국가적 계획으로 성을 크게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때 이 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인식되어 선조 28년(1596)에 다시 고쳐 쌓았다.
인조 17년(1639)에 외성을 쌓는 확장 공사가 시행되어 이중의 산성이 되었고 고종 5년(1868)에 새로 고쳐 쌓았다.
기록에 의하면 성 안에 1개의 계곡과 여러 개의 연못, 우물이 있었으며, 대혜창과 내성창이라는 창고, 군기고, 진남사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내·외성의 문터, 적이 알 수 없게 만든 작은 성문인 암문의 형체, 건물 터들이 남아있다.
한편, 성 안에는 고종 5년(1868) 무렵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금오산성 중 수송 공비가 성을 쓸쓸히 지키고 있다.
21:20 금오산 제1주차장에 도착한다.
11.9km, 6시간 30분이 소요되었고 정상에서의 일몰감상과 더불어 하산시에는 어두움속에 스마트폰 후레쉬를 이용한 힘든 산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