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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지혜와 가치관
잠 20:20-30
20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의 등불이 흑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
21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22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23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
24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25 함부로 이 물건은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덫이 되느니라
26 지혜로운 왕은 악인들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느니라
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28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의 왕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29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
30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잠 20:20-30 / 아버지와 어머니를 업신여기는 자는 칠흑 같은 한밤중에 들고 있는 등불이 꺼지리라. 21) 하루 아침에 모은 재산은 뒤끝이 좋지 않다. 22) 원수 갚겠다는 말일랑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여호와께 맡겨라. 그분이 대신 알아서 하시지 않겠느냐? 23) 이 저울 저 저울로 눈속임하는 장삿속은 여호와께서 역겨워하시는 것이다. 저울눈을 속이는 짓이 바른 짓이냐? 24) 사람의 발걸음은 여호와께 비롯된 것, 어찌 사람이 자기가 갈길을 알 수 있으랴! 25) 물건을 바치겠다고 쉽사리 서원해 놓고도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고 아까워하면 올무에 걸려는 것이다. 26) 슬기로운 임금은 못된 짓 일삼고 남 등치고 착취하는 자들을 키질하듯 싹 쓸어 버리고 전차 바퀴로 깔아 뭉개듯 없애 버린다. 27) 양심은 여호와의 등불이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다 비추어 본다. 28) 임금이란 모름지기 따뜻하고 진실하게 백성을 대해야 걱정이 없으며 정의를 실천해야 왕위가 든든히 선다. 29) 젊은이가 뽐내는 것은 그 힘이요, 늙은이에게 아름다운 것은 그 백발이다. 30) 사람을 때리되 상하게 때려야 오히려 약이 되느니, 매는 무릇 마음속에 깊이 박히는 법이다.
악인들이 행한 불의에 대해 복수하는 일은 오직 여호와께 맡기고, 다툼을 피하여 선행과 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을 말씀합니다(신 32:35).
인간의 본분(20-23) 율법에서는 자기 부모를 저주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했습니다(출 21:17; 레 20:9). 20절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캄캄한 중에 남아있는 등불마저도 꺼져버리는 절망적인 상태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21절은 유산이나 뇌물 등을 통해 성급하게 부자가 되려고 하는 부당한 행동을 경계하라고 합니다(13:11; 15:27). 모든 판단과 심판을 여호와께서 행하실 수 있도록 맡겨야 한다는 것은 그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삼상 24:12; 시 98:9; 롬 2:3; 12:19). 또한 여호와께서는 공정한 상거래를 위해서 저울추나 저울의 눈금을 속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신 25:13-16; 11:1; 20:10).
지혜로운 삶(24-26)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방법으로 모든 것을 행동할 수는 있지만 그 결과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범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시 37:5; 55:22; 잠 16:3; 롬 12:19; 벧전 5:7), 그의 절대적 주권에 복종하는 것입니다(3:6; 16:2, 9, 33; 19:21; 20:24; 21:1). 또한 하나님 앞에 서원할 때 냉철한 판단 없이 성급하게 하면, 그 서약이 양심을 억누르고 함정과 굴레가 되어 죄를 짓게 하는 올가미가 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왕이 공의에 따라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여 심판하는 과정을 키질 및 탈곡하는 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사 28:27, 28; 암 1:3).
그리스도인의 가치관(27-30)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친히 불어넣어주신 것으로(창 2:7), 인간의 양심적인 기능과 하나님으로부터 조명을 받는 일, 그리고 선악을 판단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왕은 인자와 진리를 통하여 견고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합니다(28). ‘젊은 자의 영화’는 엄격한 자기 절제와 훈련을 통해서 얻어지며, ‘백발’은 늙은 자의 연륜이 묻어있는 고매한 인격을 통해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입니다. 또한 30절에 ‘상하게 때리는 것’은 폭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체벌이 영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입니다(22:15; 23:13).
적용: 성도들의 삶은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루 동안 얼마나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회를 마치 어린 아이가 해변에서 하는 놀이처럼 다룬다. 어린이들은 그들의 작은 손에 모래를 가득 채웠다가 다시 조금씩 쏟아버린다. 한 알의 모래도 남지 않을 때까지-테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 눈앞에 있는 기회가 작아 보일지라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그 기회가 제일 값진 것이 될 수도 있고, 커다란 기회로 이어지는 초석일 수도 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생사를 좌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앞세우지 마세요. 작은 일 하나가 인생 전체를 태울 수 있기에 교만하게 행하지 말고 악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 설 교 >
우연인가, 필연인가?
잠언 20:24 / 석원태 목사
어떤 경우든 하나님 자기 창조의 최절정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었습니다(창 1:26, 28). 하나님은 사람과 모든 다른 피조물, 특별히 동물들과 사람이 다른 점을 엄격히 차별화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언어(말)를 사용하게 함이요, 불(火)을 사용하게 함이요, 또 두 발로 걷게 하는 직립보행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하는 이성과 영혼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3000이 넘는 솔로몬의 잠언들 가운데 ‘사람의 걸음’에 대한 그의 영감의 교훈을 생각하기 원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고 한 사실입니다. ‘걸음’(walk)이란 발을 옮겨 놓는 동작을 뜻합니다. 어떤 때는 길이를 측정하는 데도 사용하였습니다(삼하 6:13). 활동 영역의 범위를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삼하 22:37). 오늘 주어진 본문의 큰 의미는 도덕적인 면이 아닌 인생의 행로, 혹은 생로(生路)를 나타내는 말이 됩니다.
Ⅰ. 사람의 걸음은 작정되고, 섭리되는 걸음이라는 뜻입니다.
잠언 16장 1절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한 말과 유사합니다. 잠언 16장 33절에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계획이나 노력은 결코 인간 그 자체의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시편 37편 23~24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의 걸음에도 넘어지는 실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넘어짐은 영원한 넘어짐(멸망)이 될 수 없고, 결국 하나님의 손이 그를 넘어짐에서 일으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일을 통하여 사람은 실족하는 인생 됨을 느끼게 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0장 23절에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늙은 종의 손을 자기 환도뼈 밑에 넣게 하고 단단히 맹세시킨 일이 있습니다(창 24:2). 그것은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의 배필을 택하게 하신 일에 심부름을 하게 한 때입니다. 그는 가나안 족속의 딸이 아닌 자기의 친척 중에서 이삭을 위한 배필을 구하려고 그 종을 먼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 아브라함의 종은 자기가 목적하고 가는 걸음에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그의 소원대로 우물가에서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인 심히 아름다운 딸 리브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창 24:45~48). 그때 그 늙은 종은 머리를 숙여 하나님께 경배하고, 여호와께서 길에서 자기(걸음)를 인도하사 자기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다고 감사하였습니다(창 24:26~27). 그리고 그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바른 길(걸음)로 인도했다고, 그 처녀의 아버지 브두엘에게 간증하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애굽의 왕 바로의 딸(공주)은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왔다가 하수가를 거닐 때에, 모세가 담겨있는 갈대 상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일 때문에 모세는 애굽 궁실에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출 2:5~10). 이런 경우 그녀의 걸음은 먼 앞날에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아브라함가의 축복을 집대성한 자 요셉의 걸음이 그러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을 가던 걸음이, 형들에게 잡혀 애굽 상고에게 팔려가던 걸음이, 누명을 쓰고 왕실 궁에 갇혀버린 걸음이 결국 장차 애굽 총리대신이 되러 가던 걸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총리대신이 되어 형들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5)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7~8)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그 아비의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찾아 헤매던 중, 선지자 사무엘에게 암나귀 찾는 길을 물으러 갔다가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 9:3~27). 정말 뜻밖의 걸음에 뜻밖의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저 아하수에로 왕의 악한 신하 하만은 유대인 모르드개를 달기 위해 자기 집에 오십 규빗이 되는 높은 나무를 세우고, 그날 밤 먼저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고 왕후 에스더가 초청한 잔치에 참석하고자 왕의 허락을 받기 위해 왕궁을 찾아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마침 그때 왕은 궁중서기관에게 궁중역사를 기록한 궁중일기를 읽게 하고 듣고 있던 중에, 언젠가 자기를 모반한 역적이 있었는데 궁중 문지기 모르드개로 말미암아 살게 된 기록을 듣게 되었습니다. 왕은 심중에 모르드개에게 상을 베풀어주고 싶었는데, 마침 그 시간에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품신(稟申)하러 왕에게 나아온 하만이 도착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날 밤에 역사는 역전하여 이미 하만의 악한 계교에 의하여 죽음의 법이 선포된 유대인과 모르드개는 살고, 저들을 죽이려던 하만과 그 일족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에 2~9장). 기독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다메섹 도상의 박해자 사울의 걸음은, 결국 예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러 가는 복음 전도자의 걸음으로 바꾸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행 9:1~22).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했던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 정배지 밧모섬으로 옮겨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배지를 향한 걸음은 결국 반드시 속히 될 세계종말의 계시를 받으러 가던 영광의 걸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사람의 걸음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걸음이요 하나님의 섭리의 걸음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연이 아니고 필연입니다.
Ⅱ. 사람의 걸음은 하나님을 믿고 가는 걸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본문 잠언 16장 9절이 말하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20장 24절에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라고 하였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 걸음의 미래를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사람 걸음의 미래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을 길을 모르는, 길을 잃은 양에 비하고 여호와는 자기의 길을 인도하는 목자에 비하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걸음을 푸른 초장,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 길은 영혼이 소생하는 길이요, 의의 길이라고 하였습니다(시 23:2~3). 그래서 다윗은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7:5)라고 하였습니다.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7:31)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40편 2절에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44편 18절에는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욥기 14장 16절에서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기를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욥 31:4)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사람의 걸음은 믿고 가야 되는 미로입니다. 저는 저의 생애 가운데 여러 극적인 변화들을 많이 겪은 사람입니다. 저는 1953년 1월에 입신(入信)하게 되고, 그해 4월 수난주간 수요일 밤 예배 중에 극적으로 주님의 방문을 받아 그분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저의 삶은 송두리째 변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召命)까지 받게 되었습니다(1954년 1월).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고(1964년), 경북 대구 서문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1967년 11월 2일). 그 후 다시 부산제일영도교회로 이동하여 시무하게 되고(1969년 2월 11일), 고신대학과 대학원 강의를 겸하여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부흥되어 예배당을 신축하게 되고, 목회사역과 가르치는 사역이 저에게 큰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항상 저의 마음에는
① ‘사람이(내가) 경남 창원에서 출생하여 진해에 살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목사사역을 하다가(1969년 11월 27일, 부산제일영도교회 위임목사) 세상을 떠나게 되는구나! 나의 활동 범위가 참 좁구나!’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② 그런 생각과 함께 ‘복음은 로마로…’ 하는 마음이 자주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넓은 곳인 서울로…?’ 하는 생각을 하곤 하였습니다. 복음운동의 넓은 무대(?)가 저를 자극하고 있었습니다.
③ 그러던 중 1972년 11월에, 부산 동광동 소재 남교회당에서 부산 도(都) 제직연합총회에서 제가 연합제직회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 일은 당시 39세였던 저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습니다. 보통 당시 연합제직회 회장은 6~70세에 가까운 원로 목사님들이 교회간의 친교와 화합의 상징으로 맡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결국 하나님께서 전도자로서의 제 걸음을 새로운 궤도로 진입시켜 주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날 총회를 끝내고, 저는 버스를 타지 않고 동광동에서 영도다리를 건너서 집에까지 오면서 “주님, 나는 내 인생을 3~40년이나 앞당길 수 없습니다. 나는 부산을 떠나야 되겠습니다.”라고 걸으면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동기가 되고, 얼마 후에는 서울 마포 성원교회당에서 개최된 전국학생신앙운동(S.F.C.) 동기수양회(1973년 1월) 주강사로 서울에 왔던 것이 저의 서울행 걸음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현재도 있는 서울 마포 혜성맨션아파트의 숙소에서 서울 개척의 불이 타오르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사단은 저 자신과 밖으로부터 저의 서울개척걸음에 많은 장애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저는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 31:15) 하는 확신을 가지고, 아무런 사전계획이나 보장이 없는 개척자의 걸음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1973년 4월 12일, 서울 도착(걸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완공된 부산제일영도교회당 신축 헌당을 앞에 두고, 오늘의 새로운 경향교회당 헌당을 위하여 저의 걸음을 결단하게 하였습니다. 시편 37편 5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걸음을 이미 정해놓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시 37:23). 결코 그 믿음의 걸음에는 실족함이 없고(시 37:31), 성취함만이 있게 됩니다(잠 16:1, 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종종 저희 교회에 등록하는 새 신자들을 영접하고 기도하는 시간에 저들의 두 다리를 잠시 어루만지면서, “당신의 이 두 다리가 이제 그 본래의 창조적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두 다리를 만들어 걷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찾아 나와 예배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 본래의 목적입니다.”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걸음은 하나님이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진행하고, 또 하늘에 이르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걸음을 인도하신다! 이 말은 모든 유의 무신론, 운명론, 허무론, 미신론, 자연신론, 불가지론을 배격하는 말씀입니다. 결코 인생과 인생의 걸음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란 말입니다. 맹목이 아닌 목적적이란 말입니다. 허무나 허실이나 허상이 아닌 실상이란 말입니다. 결코 무의미의 반복이 아닌 의미와 내용이 알찬 행동적 삶이란 뜻입니다. 사람의 걸음은 하나님의 작정된 섭리의 걸음이요, 그 걸음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가는 걸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결코 우연이 아닌 필연의 걸음입니다. - 아 멘 -
아름다운 노년의 꿈
잠 20:29 / 박봉수 목사
일전에 어떤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식사 도중에 한 분이 건배를 청했습니다. 그 분이 선창을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화답을 했습니다. 처음 들어본 구호였습니다. “9988!”, “234!”
무슨 암호 같았습니다. 알고 보니 ‘9988’은 ‘아흔 아홉 살까지 팔팔하게’ 즉 ‘99세까지 건강하게 삽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234’는 ‘2-3일 정도만 알아 누웠다가 죽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건강하게 오래 수를 누리다가 큰 고통 없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외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무병장수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 단순히 오래 사는 꿈만 꾸다가 이제 오래 건강하게 사는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9988”이라는 구호를 거꾸로 “8899”라고 하면 저주가 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답니다. “8899”란 여든 여덟 살까지 구질구질하게 산다는 뜻이기 때문이랍니다. 이제 오래 사는 양적인 관심에서 오래 건강하게 사는 질적인 관심으로 까지 꿈이 더 확대되고 구체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건강수명”이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건강수명(健康壽命)이란 “평균수명에서 질병이나 부상으로 인하여 활동하지 못한 기간을 뺀 기간”을 말합니다. 단순히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아니라 실제로 활동을 하며 건강하게 산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를 나타내는 지표를 말합니다.
지난 2000년 WHO(세계보건기구)가 세계 각국의 건강수명을 조사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건강수명은 65세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74.3세였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생 중 약 10년은 병에 걸려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며 병과 싸우느라 고생하며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대체로 죽기 전 10년 가까운 세월을 투병 생활에 보내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게 우리네 노년기의 현실입니다. 그러니 9988을 외칠만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모두 정말 9988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수명 동안 건강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노년기를 보내야 할까요? 본문 잠 20:29을 보면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아름다운 노년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모두가 외면하는 추한 노년이 아니라 모두가 흠모하는 아름다운 노년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름다운 노년기를 보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 하나를 꼽으라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갈렙입니다.
여호수아 14:10-12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제 보고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 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땅을 분배할 때 85의 노인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한 말입니다. 갈렙은 45년 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산지를 지금 자기에게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 땅은 아낙 자손이 버티고 있는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자기가 앞장서서 그 땅을 점령해 내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갈렙은 85의 나이이지만 여전히 강건하여 믿음을 지키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에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꿈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운 노년의 꿈이 있습니다. 갈렙처럼 아름다운 노년의 꿈을 꾸시고 그 꿈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노년의 꿈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강건함의 꿈
수 14:11을 보면 갈렙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나이 85세지만 40세 때와 같은 강건함을 지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찌 85세 때 40과 똑같겠습니까? 지금도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을 만큼 강건하다는 말입니다.
아름다운 노년의 첫 번째 모습은 강건함입니다.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여전히 강건함을 유지하는 모습입니다. 믿음이 흔들린다든지, 마음이 약해진다든지, 중병에 시달린다든지 하는 모습 속에서 노년의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노인들의 강건함을 위협하는 4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이것을 소위 “노년사고”(老年四苦)라 부릅니다.
첫째가 병고(病苦)입니다. 노년이 되었다는 것은 노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인 시기라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가 기력을 잃어가고 있고 온 몸이 예전 같지 않게 약해져 가는 시기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질병까지 찾아들면 그 고통은 견디기 힘듭니다. 병과 싸워 이기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강건함을 쉽게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노년을 맞기 위해서는 건강관리를 잘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몸을 잘 관리해야 하겠습니다. 청지기로서 몸을 잘 돌봐야 하겠습니다.
둘째가 빈고(貧苦)입니다. 나이 들어 빈손이면 정말 마음이 약해집니다. 같은 가난이라도 노년의 가난은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갈 곳이 없는 노인들이 공원에 모여 앉아 있다가 무료급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이분들은 정말 위축되어있습니다. 어디에서도 강건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노년을 맞기 위해서는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채워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산도 잘 관리해야 하겠습니다.
셋째가 고독고(孤獨苦)입니다. 나이 들면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갑니다. 자녀들이 떠납니다. 친구들도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외롭고 쓸쓸한 고통이 밀려옵니다. 이것이 마음의 병이 되어 우리를 위축시킵니다. 그래서 강건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노년을 맞기 위해서는 외로움을 이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열심히 교회 나오고 모임에도 참석하고 자녀들과의 만남 시간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혼자 있는 연습을 통해서 하나님과 둘만의 시간 속에서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넷째가 무위고(無爲苦)입니다. 사람이 나이 들어 마땅히 할 일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기나긴 시간을 아무 할 일이 없이 지낸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 쓸모없는 존재다”라는 생각에 마음이 약해집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노년을 맞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보람있고 의미있는 일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특히 주를 위해 오늘도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꾸준히 그 일을 감당해 가야 합니다.
이런 네 가지 고통은 계속해서 노년기의 사람들을 약하게 만듭니다. 강건함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노년을 이루려면 이런 위협을 극복하고 계속해서 강건함을 유지해 가야 하겠습니다.
2. 품위 유지의 꿈
갈렙은 여호수아로부터 원하던 산지를 얻게 됩니다. 수 15장을 보면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그 산지 헤브론을 공격하여 얻게 됩니다. 여전히 탁월한 지도력으로 따르는 사람들을 통솔하고 있습니다.
15:19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갈렙의 딸 악사와 사위 옷니엘이 갈렙을 존경하여 복을 구하고 도움을 청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름다운 노년의 또 다른 모습은 품위 유지입니다. 나이 들어서도 어른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젊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당당하게 저들을 지도하고 가르치고 이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노인이라 할 때 老자는 갑골문자에서 형상화 되어 생긴 문자입니다. 땅을 뜻하는 흙 토(土), 지팡이를 뜻하는 삐침 별(丿), 그리고 사람 인(人)이 합해서 만들어진 문자입니다. 그러니까 노인이란 “땅 위에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늙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어딜 봐도 품위를 찾기 힘든 쓸쓸한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모습으로 노인을 묘사합니다. 잠 16:31을 보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흰 머리카락의 백발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화를 누리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여전히 지도력을 행하시는 품위 있는 이미지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백발의 영화로운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공경의 대상입니다. 레19:3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하나님께서 노인들을 공경하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엡 6:1-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어른들을 공경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둘째는 배움 대상입니다. 욥 12:1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노인들은 젊은이에게 없는 지혜와 명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 32: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노인들에게 묻고 배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노인들은 공경의 대상이요 배움의 대상입니다. 거기에서 품위가 유지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노인들이 스스로 품위를 잃어버립니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도로시 파커라는 분의 기도입니다. 이분이 노년기에 품위를 지키려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저를 항상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 이제 제 나이가 노년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수다스럽게 말을 많이 하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저를 건져 주시고 무엇이던지 다 참견하고 싶어하는 저의 호기심과 간섭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자제하게 해 주소서! 주여! 저에게 참고 견디는 능력을 허락하시어 남의 얘기를 끝까지 들을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리고 남의 잘못이나 단점을 지적하기 전에 저 자신의 잘못과 단점을 고칠 수 있는 지혜와 인내심을 갖게 해 주소서! 저의 두 눈을 크게 뜨게 하시어 인간과 세상사의 밝은 면, 어두운 면 그리고 좋은 점 나쁜 점을 골고루 다 보게 하시어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해 주소서! 주여! 저로 하여금 인생의 만년을 용서하고 베풀고 돕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해 주시고 가족, 친인척, 이웃, 친구들에게 사랑과 신뢰와 존경을 받는 필요한 존재가 되게 해 주소서!
아름다운 노년은 하나님께서 주신 품위를 잘 지켜가는 삶입니다.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공경을 받고, 여전히 배움의 대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으로 존경을 받는 모습을 지켜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늘 마음으로 의지가 되는 자리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3. 비전의 꿈
갈렙은 85세의 노인입니다. 그가 수 14: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여기서 이 산지는 바로 전설적인 부족 아낙 자손이 버티고 있는 땅입니다. 깎아지른 듯한 지형이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낙 자손은 거대한 신장으로 상대를 압도합니다.
갈렙은 편히 쉬며 인생을 반추하고 정리할 85살입니다. 이미 정복한 땅 가운데 좋은 땅을 분배 받아서 손쉬운 인생의 마무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구태여 아낙 자손의 땅을 자청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45년 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갈렙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지금 저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아낙자손의 저 산지를 돌파해 나가지 못하면 결코 가나안 땅을 다 정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선 것입니다.
갈렙에게는 이 비전이 그를 강건케 만든 비결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 감당하기까지 결코 앉아있을 수만 없었습니다. 오늘도 그 비전을 향해 나아갈 때 그는 노년이지만 여전히 청년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노년은 여전히 그 마음에 비전이 있는 삶에서 발견됩니다. 아직도 주를 위해 할 일이 남아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노년 그 노년이야말로 아름다운 노년인 것입니다.
95세 할머니가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놀라 오츠즈 할머니입니다. 이분은 지난 1972년 남편과 사별한 후에 지역의 전문대학에 등록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수업을 들으며 대학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채워 왔습니다. 지난 가을에는 캔자스 주의 포트 헤이 주립대학 기숙사에 들어가 마지막 30시간을 채웠습니다.
이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나를 받아주고 배려해 주었어요 나도 다른 학생들과 다를 바 없다고 느꼈고요 나는 나이에 안주하지 않아요 나이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제한 할 뿐이죠 나의 마음과 건강이 있는 한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할 뿐이예요” 게다가 졸업 후에 유람선 관광회사에 취직해서 전 세계를 배로 유람하면서 승객들에게 역사 이야기를 들려줄 비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노년은 나이에 사로잡혀서 모든 꿈을 다 포기한 채 살아가는 삶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이를 따라 살지 말고 비전을 따라 사는 삶에서 아름다운 노년은 발견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름다운 노년은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찾아옵니다. 우선 갈렙에게서 보듯이 믿음의 준비가 가장 중요합니다. 믿음의 준비를 잘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런 믿음의 준비 위에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첫째로 강건함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살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품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공경을 받으며 무엇인가 가르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비전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잊지 않고 비전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등불
잠언 20:21-30 / - 한경직 목사 설교전집 7권 中에서 (一九六五년 八월 二十九일)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二十․二十七)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이 영혼은 하나님의 등불입니다. 창세기 二장 七절에『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이 된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몸은 흙으로 되었습니다. 물질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산 영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해서 욥기 三十二장 八절에는『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느니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혹은 전도서 十二장 七절에는『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혹은 영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서 돌아가기 전에(조물주를)기억하라』고 하는 권면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에는 불멸의 영혼이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유물론자가 한 목사에게 와서 이런 질문을 하였다고 합니다.『목사님께서는 우리 인간 육체 속에 영혼이 있다고 믿습니까?』그 목사가 대답하기를『나는 사실인줄 믿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청년이 하는 말이『내가 아무 대학 부속 박물관에 가보니 사람을 분석한 것이 있었는데, 사람의 육체 속에는 수분이 몇 퍼센트, 광물질이 몇 퍼센트, 탄수화물이 몇 퍼센트 등으로 열 여섯 가지 종류로 나누어 실험 병에다 넣었는데 그게 인간의 전부이고 영혼이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그 목사가 말하기를 그러면『당신에게는 그런 물질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는가?』했더니 그이 대답이『나는 그런 줄로 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는 말하기를 나는 그 문제에 대해『당신과 더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왜? 토론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지요.『당신과 같이 물 얼마, 광물질 얼마, 탄수화물 얼마로 된 사람과 나는 얘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하고 말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유물론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모순입니다. 인간이 물질뿐이면 유물론을 생각하는 그 자신이 부정됩니다. 없어지고 맙니다. 과연 사람의 속에는 불멸의 영혼이 있습니다. 그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입니다. 이 영혼에는 빛이 있습니다. 이 빛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말 가운데『인간은 한 갈대라』고 했습니다. 심히 약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실입니다. 생각도 보통 생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연구하고 분석하며, 창작을 하는 생각입니다. 즉 이성이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까치나 까마귀는 천년 전에 지은 집이나 오늘날 지은 집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호랑이는 단군 할아버지 때에도 굴속에 살았고 오늘날도 여전히 굴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주 원시시대에 굴속에서 살던 혈거시대가 있었습니다. 제주도에 가보면 지금도 삼성(三性) 혈(穴)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는 조그마한 구멍들이 있습니다. 아마 옛날 제주도의 삼성 조상들이 살던 굴인가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제주도 사람은 굴속에서는 살지 않습니다. 사실은 몇 해 전에 지은 집과 요사이 짓는 집이 다릅니다. 여러분, 서울 주변을 다녀 보세요. 얼마나 새로운 형태의 주택들이 세워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속에는 이성이 있어서 간단없는 새로운 것을 창작합니다. 이 이성의 빛이 과학을 발전케 하였습니다. 적은 현미경도 말들었습니다. 이 적은 현미경을 통해서 우리는 눈으로 보지 못하던 많은 세균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의학계에 새로운 기원이 되어서 많은 병을 알게 되어 고치게 되었고 예방의학이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망원경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이 망원경을 통해서 대 우주를 탐색하고 발견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원자를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원자핵의 비밀을 알아냈습니다. 원자력을 발견했습니다. 원자탄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 없던 새로운 능력을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성을 통해서 여러 가지 과학의 이기가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혹은 비행기, 혹은 라디오 혹은 텔레비전 혹은 우주선이니 해서 우리 인간생활에 큰 변혁을 오늘날에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아마 지금 이 시간도 제미니 五호 가운데는 우주인 두 사람이 이 지구를 선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이성의 빛은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사회나, 예술이나, 음악이나, 모든 방면의 새로운 발전과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창작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성의 불은 본래 하나님께서 부쳐주신 것입니다. 이성의 불을 우리 인간은 끄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방면에서, 모든 문제에 있어서 이성의 불이 꺼지면 안 됩니다. 감정에만 휩쓸리면 되지 않습니다. 이 이성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인간의 고집과 독선과 편견과 선입관과 감정과 권력의식과 교만과 같은 죄악들이 이성의 빛을 희미하게 하고 심지어 꺼지게 하고야 마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성의 빛이 밝아야 우리 개인의 생활이나 국가생활을 바로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깊숙한 곳에 다른 빛을 또 하나 주셨습니다.
로마서 二장 十四절--十五절에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인간의 깊은 속에 새겨진 율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양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신 다음에 누구에게든지 그 심경 속에 이 양심의 등불을 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요한 복음 八장에 보면 예수 님께서 한 번은 가르치실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가 붙잡힌 어떤 여인을 데리고 와서 예수 님께 질문을 합니다.『선생이시여, 모세의 율법을 보면 이런 여자는 당장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 질문을 받으시고 곧 대답지 않으시고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셨습니다. 빨리 대답하라고 성화가 시작됩니다. 이윽고 머리를 드신 예수 님은 조용히 그들에게 말씀을 던지셨습니다.『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은 먼저 돌을 들어 저 여자에게 던져라.』그리고는 다스 머리를 숙이고 땅을 보고 무슨 글씨를 쓰시고 한참동안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한참 후에 머리를 들고 보니 거기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슬며시 다 떠나가고 여자 혼자만 서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 사람들로 하여금 그 곳을 떠나게 하였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대로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양심의 채찍이 그들을 몰아냈습니다.
그들의 깊은 속에는 이 양심의 등불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심령에 이 양심의 등불을 켜놓았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도『하늘에는 별이 있고 인간 속에는 양심 곧, 도덕적 의식이 있다』고 감탄한 것입니다. 이 등불이 있으므로 인간인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영광이 사실은 여기에 있습니다.
짐승은 본능대로만 살면 그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능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양심대로 살아야 그것이 참 인간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누구나 고려말엽의 충신, 정 포은 선생의 시조를 다 기억할 것입니다.『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라는 말로 시작해서『백골이 진토 되도 임 향한 일편단심이 변할 줄 있으랴.』
우리가 왜 지금까지 이 시조를 기억합니까? 이 간단한 시도 가운데 정 포은 선생의 심령 속에 잎이 있는 양심의 밝은 빛이 간단한 이 시조를 통해서 비추이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 되는 것입니다. 이 양심의 불이 꺼지면 그는 인간으로서의 생활에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강한 욕심들, 즉 정욕, 물욕, 권세욕 등 강한 욕심 때문에 이 불이 희미해지고 어떤 때는 꺼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 양심이 왜곡되고 전도가 되는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양심의 불이 꺼지면 그 사람의 생활은 캄캄해지는 것입니다. 예수 님의 말씀과 같이 네게 있는 빛아 우두 우면 캄캄한 밤과 같아서 그 생활은 암흑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양심의 불이 꺼지면 안됩니다. 이상의 빛, 양심의 빛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누구에게나 주신 들불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등불이 있으니 성령의 빛입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할 때에 그는 외쳤습니다.『나는 물로 너희에게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 신들 매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장차 너희에게 성경을 불로써 세례를 주시리라』고 예고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二장에 보면 오순절에 一二0명에게 처음으로 성령께서 강하게 임재하실 때에 불같은 혀가 각 사람 머리 위에 임하였다고 하는 기록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불은 빛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심령 속에 새로운 성령의 등불을 더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요한 복음 十四장 十七절에『저는 진리의 영이라.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우리 속에 이 등불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생활을 지도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믿는 진리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옛날 사도들의 전도여행을 인도하였습니다. 회개하는 모든 길을 인도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사도시대 교회의 일과, 직분을 통하는 일과, 모든 활동을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시대만은 아닙니다. 세례를 통해 참된 그리스도인과 온 교회를 성령의 빛으로 지도하여 주신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이 성령의 밝은 빛 아래에서 내 생활을 스스로 살피고, 내 말을 스스로 살피고, 나의 행동을 스스로 주재해야 될 것입니다.
태양의 빛을 분석하면 흔히 일곱 가지로 나타납니다. 이와 비슷하게 성경에 보면 성령의 빛을 아홉 가지로 나타난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갈라디아 五장을 보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는 것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였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성령을 따라서 행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도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강한 욕심이나 편견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근심하게 할 수도 있고, 성령이 지시하는 불빛을 희미하게 만들 수도 있고, 마지막에는 소멸케 할 수도 또한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아야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는 하나님의 등불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양심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이성의 등불을 켜 주었습니다. 성령의 등불로 우리를 밝혔습니다. 우리는 어디 가든지 이 빛으로 살고 이 빛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산 위에 세운 성이 숨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燈檠) 위에 두어 모든 방안 사람들에게 비추이게 하느니라.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빛을 비추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五장 八절 이하에 이렇게 권면했습니다.『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성경에 보면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을 달음박질하는 경주에 비하여 말씀하신 데가 많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 신자의 생활은 달음박질 마당에서 경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기억하세요. 무슨 경주냐고 하면 촛불을 손에 들고 하는 촛불경주와 마찬가지입니다. 내 갈 길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촛불이 꺼지지 않아야 다른 사람의 길도 비추어 줄 수 있습니다. 촛불을 가지고 달음질하는 경주라는 것을 내가 기억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손에든 촛불은 어떻습니까?
촛불예배에 참석해 보신 분은 이런 경험이 다 있는 줄 압니다. 처음 예배를 시작할 대는 초 하나에 물을 켭니다. 초 하나의 불은 작고 희미합니다. 그러나 그 초 하나로 시작해서 옆에 있는 초에 불이 붙습니다. 또 다른 초에도 붙여집니다. 촛불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고, 다섯이 되고, 열이 되고, 오십이 되고, 백이 됩니다. 마지막에 교회당 안에 천명이 있으면 천명의 불이 다 붙게 됩니다. 그러면 온 방안이 환하게 밝아집니다. 내가 적은 촛불 하나가 이 캄캄한 세상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적은 촛불이지마는 내가 이 불을 밝히고, 친구가 밝히고, 믿는 사람 전부가 밝히고, 즉 오늘날 한국에 있는 믿는 사람들이 어디 있든지 이 양심과 이성과 성령의 불을 밝힌다고 한다면 이 삼천리 강산은 환하게 비췰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여러 사정을 본다면 민망할 때 많이 있습니다. 극한이 극한을 대하고 있습니다. 감정이 감정을 대하고 있습니다. 이성의 빛은 잃은 듯 싶습니다. 양심의 빛이 희미해진 것 같습니다. 성령의 불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의 심령 속에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이 이성과 양심의 빛이 꺼진다고 하면, 마치 그 사람의 생활은 캄캄한 밤에 불 없는 자동차가 마구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자동차의 앞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슴속에 이 불이 빛납니까? 우리 사회에 이 불이 빛납니까?
『너희는 여호와의 등불이라.』
우리는 이 등불을 밝혀서 우리의 생활을 밝히고 우리의 사회를 밝히는 사명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왕
잠언 20장 26-30절 / Victory Presbyterian Church 제임스 김 목사
이미 우리는 잠언 20장 8-12절 말씀 중심으로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이란 제목 아래 한 4가지로 교훈을 받았습니다. 다시 그 교훈을 복습을 한다면 첫째로,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선과 악을 구별하여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합니다(8절). 둘째로, 심판 자리에 앉은 왕 앞에서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없습니다(9절). 셋째로, 심판 자리에 앉은 왕 앞에서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10절). 넷째로,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모든 것을 들으시고 보고 계십니다(12절). 이 말씀 외에도 우리가 “왕”하면 이미 묵상한 잠언 16장 10-15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왕”이란 제목 아래 받은 3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다시 그 교훈을 복습 한다면 첫째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왕은 하나님의 지혜로 바른 결정을 내립니다(10절). 둘째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왕은 악을 행하는 것을 미워합니다(12절).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왕은 충신의 충고를 잘 받습니다(13절). 또한 우리는 잠언 19장 12절과 20장 2절 말씀 중심으로 “왕”에대해서 묵상하면서 “이상적인 대통령”이란 제목 아래 한 두 가지로 생각해 보았었습니다. 그 두 가지란 이상적인 대통령은 공의와 사랑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 잠언 20장 26-30절 말씀 중심으로 “지혜로운 왕”이란 제목 아래 지혜로운 왕은 누구인지 한 5가지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지혜로운 왕은 선인과 악인을 분별하여 분리한 후 악인을 벌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26절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왕은 악인들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느니라.” 여기서 “키질”한다는 말씀은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0장 8절에서 배운 것처럼 ‘곡식에서 쭉정이 등을 가려내려고 키질’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지혜로운 왕은 마치 알곡과 쭉정이를 키질하듯이 선인과 악인을 분리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린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타작하는 바퀴”는 '소가 끄는 탈곡기'를 말하며, 보통 3-4개의 바퀴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탈곡기는 돌아가면서 곡식을 눌러서 껍질을 벗겨내고 알곡이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럼, 지혜로운 왕은 농부가 키질을 통해서 알곡과 껍질을 구별하듯이 의인과 악인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그리고 마치 농부는 알곡과 껍질을 구별한 후에, 알곡은 모아서 창고에 들이고, 껍질은 바람에 날리거나 불에 태워 버리듯이 지혜로운 왕도 공정한 심리를 통해서 의인과 악인을 가려내고, 악인에게 적절한 형벌을 부과합니다(인터넷).
여러분, 만일 한 나라의 대통령이 선인과 악인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 나라가 어찌될지 상상이 되십니까? 한 2주전 한국 라디오 방송을 듣는데 지금 한국 정부에 여기 저기 기관장들이 임명이 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일에 차질이 많이 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왜 기관장들이 임명이 빨리 되고 있지 않나 들어보았더니 아마도 정부에서 인사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기관장들을 임명함에 있어서 철저하게 조사하다 보니 시간이 그리 걸린다고 합니다. 보통 기관장 공무원들은 한 1주일 걸리고 장관을 임명함에 있어서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저는 이 뉴스를 접한 후 박근혜 대통령 정권이 들어서서 사람을 잘못 세워 문제가 된 인사들을 생각할 때 정부 입장에서는 공직자를 임명함에 있어서 철저하게 점검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만일 한국 정부가 장관이나 기관장들을 임명함에 있어서 제대로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러한 중요한 직책에 악한 사람들을 세워 놓는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되십니까? 여러분,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정부에게도 적용되야 하는 원리지만 저는 이 원리가 교회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교회에서 당회가 일꾼들을 세워 임명함에 있어서 제대로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고 함부러 사람을 잘못 세워놓으면 그 잘못한 결과의 파장이 결코 작지 않다고 전 생각합니다. 이 원리를 가정에서 우리 자녀 양육함에 있어서 적용을 한다면 지혜로운 부모는 자기 자녀의 친구들을 알고 잘 파악해서 좋은 친구들과 나쁜 친구들을 분별하여 분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만일 부모가 자기 자녀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좋은 친구들인지 나쁜 친구들인지도 분별못하고 그러므로 분리하지도 못한다면 그 자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이 기브온에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린 후(왕상 3:4) 밤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사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5절)고 말씀하셨을 때 솔로몬이 구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열왕기상3장 9절을 보십시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 왕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11절)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기도 제목이 아닙니까? 우리도 솔로몬 왕처럼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 나라를 섬기는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 우리 나라 대통령에게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사 우리 나라 대통령에게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셔서 우리 나라 대통령이 선인과 악인을 분별하여 악인을 벌하는 지혜로운 대통령이 될 때 우리 나라에는 질서(order)와 공의(justice)가 바로 세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할 때 하나님께 분별하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실 때에 우리는 거룩하고 속된 것,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레10:10).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스스로를 속되고 부정한 것으로부터 분리(separate) 할 수 있을 것입니다(느13:3).
둘째로, 지혜로운 왕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나라를 다스립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27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얼마 전 한국에 사는 어느 목사님이 제 facebook 메시지에 이런 질문을 하셨음: “… 목사의 일중에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신경쓰고 관심 가져야 할 일이 무엇이겠읍니까?” 저는 그 질문을 받고 그 목사님에게 이렇게 답변을 썼습니다: “… 저는 목사로서 저의 일중에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신경쓰고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제 자신을 살펴보는 것'인 것 같습니다. 영적인 거울인 하나님의 말씀에 제 자신을 비춰보는 것을 중요시 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 그러니까 목사님의 말씀은 누구에게 설교하기 전에 한 사람의 신자로써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고 먼저 한사람의 진실한 교인으로 ,사람으로 서시고자 애쓰신다는 그런 말씀인 것 같읍니다 ….” 제가 그 목사님에게 목사로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신경쓰고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제 자신을 살펴보는 것’인 것 같다고 쓴 이유 중 하나는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면서 교회 성도님들에게 바로 신앙생활 하십시오 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좀 달리 말한다면, 제가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제 자신을 부지런히 살펴보는 것을 중요시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27절 상반절을 보면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사람의 영혼”은 사람의 양심(the conscience of man)을 가리킵니다(MacArthur). 지금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이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의 양심이 하나님의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이 “등불”이란 말씀이 잠언에 두 군데 더 나옴: (13:9)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24:20)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무슨 뜻입니까? 악인의 등불은 분명히 꺼진다는 말씀임. 그러나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난다고 솔로몬 왕이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지혜로운 왕은 의인으로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므로 악을 행하는 악인의 어두움을 들춰내되 그 악인의 깊은 속까지도 살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왕은 공의로 그 악인들을 벌하므로 악인의 등불을 끔니다.
여러분, 성경 시편 7편 9절을 보면 의로우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을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고 말하였습니다(행24:16). 그리고 사도 바울은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공회에서 대제사장 아니니아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등 앞에서 말하였습니다(행23:1).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실제로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은 어떠합니까? 과연 우리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행을 하고 있습니까? 만일 지금 우리가 그리하고 있다면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빛이 사람들 앞에 비취므로 말미암아 그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도 베드로의 말처럼 우리의 선행을 보고 우리를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고 있을 것입니다(벧전3:16). 그러나 만일 지금 우리가 선한 양심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고 있다면(고후8:7)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현상은 어떠할까요? 그러면 지금 우리는 우리를 욕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고 있지 못할 것입니다(벧전3:16). 그리고 지금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그들의 욕이니 비방에 할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양심히 굳어지고 마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만일 길거리에 모든 신호등이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아서 빨간 불이 들어와야 할 때 녹색 불이 들어오고, 녹색 불이 들어와야 할 때 빨간 불이 들어오면 교통이 어찌 되겠습니까? 아마도 대 혼란이 올 것임. 차 사고도 많이 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다치기도 할 것이며 심지어 교통사로고 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한 나라의 지도자인 대통령의 양심이 마비되었다면 그 나라는 어찌 되겠습니까? 악인들이 득실 거리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어떠합니까? 한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의 양심이 굳어졌다면 그 교회는 어찌 되겠습니까? 여러분, 지혜로운 왕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양심에 꺼리낌이 없도록 힘쓸 것이.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한 나라를 잘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빛이 환하게 비췰 것이며 악인의 등불은 꺼질 것입니다.
셋째로, 지혜로운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28절을 보십시오: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의 왕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제가 전도사 때 2세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 중에 하나는 타주에 몇몇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교회 본당 강대상 앞에서 동그랗게 앉아 (혹은 무릅끓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기억입니다. 그 후에 나중에 함께 기도했던 한 학생의 아버지인가 어머님께서 자기의 자녀가 자기에게 한 말을 저에게 해주셨는데 그 말 전체를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때 배운점은 ‘학생들이 제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안하고 있는지 다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후로는 제가 교역자로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물론 그들에게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일부러 보이려고 행동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학생들에게 본이 되려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는 자가 되야 겠다는 다짐을 하고 부족하나마 노력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한 나라의 시민들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그 시민들은 자기들의 대통령이 자기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고 있습니다. 만일 대통령이 자기들을 사랑한다고 말로만 한다면 시민들은 자기들을 대통령을 진심으로 존경하면서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만일 대통령이 선거하면서 시민들을 위해서 이것 저것을 약속을 했으면서 만일 대통령이 되어서 그 약속한 말들을 지켜 나아가지 않으면 시민들은 그 대통령을 결코 존경하며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만큼 지도자에게는 사랑과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28절을 보면 지혜로운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지혜로운 왕은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왕위도 견고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왕은 사랑과 진리로 자기의 왕위를 지키며 또한 견고케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혜로운 왕은 백성들을 사랑하며 백성들에게 약속한 바를 신실하게 지켜 행한다는 말입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왕이 백성들을 사랑하면 백성들에게 한 약속을 지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사랑과 진실성이 있는 왕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요 또한 자기의 왕위를 견고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랑과 진실성이 있는 지혜로운 왕은 결국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40:11). 즉, 그는 주님께서 맡기신 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주님의 인자와 진리를 백성들에게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주님의 인자와 진리로 주님께서 자기를 항상 보호해 주시길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지혜로운 왕은 기도와 실천이 함께 하였음. 그러므로 그는 주님의 보호하심을 받아 자기의 보좌를 견고케 한다는 말입니다.
넷째로, 지혜로운 왕은 힘과 지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29절을 보십시오: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 우리가 젊은 이를 생각하면 그에게는 힘이 있다는 것은 다 압니다. 그러면 우리가 늙은자를 생각할 때는 그에게 무엇이 있다고 생각됩니까? 바로 많은 경험을 통한 지혜입니다. 바로 지혜로운 왕은 이 두 가지를 다 겸비한 사람입니다. 즉, 지혜로운 왕은 힘도 있지만 많은 경험을 통한 지혜가 있습니다. 저는 지혜로운 왕이 가지고 있는 “힘”과 “지혜”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신명기 17장 15-20절에 나와 있는 왕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왕은 병마를 많이 둬서는 아니되고(16절) 또한 아내를 많이 둬서는 아니된다(17절)고 성경은 말씀하면서 율법책을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제 나름대로 내리는 결론은 왕은 병마를 많이 둬서 국력을 강화하며 또한 아내를 많이 둬서 정력을 강화하기 보다 말씀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왕은 평생에 율법책을 자기 옆에 두고 읽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왜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워야 합니까? 그 이유는 왕이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울 때에 악을 미워하며 악을 멀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14장 16절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바로 지혜의 근본입니다. 지혜로운 왕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바로 그는 지혜의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잠언 24장 5절을 보십시오: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지혜로운 왕은 젊은이처럼 힘도 있고 늙은이처럼 경험을 통한 지혜도 있는데 그는 곧 말씀의 힘이요 지혜의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지혜로운 왕은 징계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30절을 보십시오: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여러분, 우리 한국말에 ‘매를 맞아야 정신차린다’라는 말 다 아실 것입니다. 그 말은 그 만큼 우리 사람들을 매를 맞기 전에는 정신을 못차린다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 잠언 10장 13절 하반절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 채찍이 있으니라.” 또한 잠언 19장 2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지혜 없는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채찍이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미련한 자는 매를 맞아야 정신을 좀 차립니다. 그 만큼 매가 미련한 자식에게는 효과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잠언 22장 1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부모가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자녀의 마음에 엃힌 미련함을 멀이 쫓아내고자 그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마음에 얽힌 미련함을 쫓아내고자 징계를 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 4-1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징계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아들 또는 딸로 여기고 계시기에 우리를 징계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희망이 있”기에(19:18)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를 징계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3장 12절을 보십시오: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잠언 13장 24절을 보십시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징계하신다는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유익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통하여 우리는 연단하시사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시편80편 32절을 보십시오: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다스리시고 벌하시고자 회초리와 채찍으로 징계하십니다. 왜 회초리와 채찍입니까? 그 이유는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기 때문입니다(잠29;15).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자백하며 회개하므로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그 결과 심지어 우리는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합니다(23:14).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지혜로운 왕도 자기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자기 백성을 징계합니다. 징계하되 그는 자기 백성의 죄악을 없애고자 매를 들어 상하게 때립니다. 그가 그리하는 이유는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고 분리하여 악인을 공의로 징계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나라의 시민을 보호하며 나라의 질서를 세웁니다. 만일 징계를 받는 자가 지혜로운 자면 징계를 받으므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죄에서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징계를 받는 자가 미련한 자라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1) 징계를 받으므로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던지[(잠19:25)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으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 (2) 아니면 징계를 받고서도 계속해서 죄를 범하던지[(잠17:10)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지혜로운 왕에 대해서 한 5가지로 묵상했습니다. 지혜로운 왕은 선인과 악인을 분별하여 분리한 후 악인을 벌하며,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며, 힘과 지혜가 있으며 그리고 징계를 합니다. 이 시간 우리 나라 대통령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 대통령에게 지혜를 주시길 기도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는 말씀을 붙잡는 제임스 김 목사.
지혜로운 입술을 가진 자는...
잠언 20:15-30
오늘의 본문 말씀은 가장 먼저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고 교훈한다. '보배(宝贝)'란 '아주 귀중하며 꼭 필요한 사람이나 자산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세상에서는 대체적으로 금이나 진주와 같은 물질적인 재화(财货)를 보배로 여긴다. 그것이 자기가 바라는 바를 충족시켜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많은 재화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이 재화(灾祸)를 불러오게 되는 경우도 있다. 많은 재화가 뜻하지 않은 불행한 변고, 즉 갑작스럽게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지혜로운 입술이 우리나라 속담에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과 '말 한마디에 천금이 오르내린다'는 말이 있듯이, 어떤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하는 힘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그래서 본문 말씀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라고 한 것이다.
지혜로운 입술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의 보증을 함부로 서지 않는다. '보증(保证)'은 '어떤 사람이나 일에 대해 틀림이 없이 믿을 만함을 책임지고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자신이 책임지고 믿을 만한 사람이니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보증을 서야 할 처지에 놓여 그것이 자기 몸을 볼모로 억류되는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입술을 가진 사람은 지혜로운 말로 자기가 보증을 서야 할 자리를 피하거나, 그것을 면할 수 있어 볼모되는 일을 예방할 수 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입술을 귀한 보배라 하는 것이다.
'속이고 취한 음식물은 사람에게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의 입에 모래가 가득 하게 되리라'고 경계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입술을 가진 자는 결코 누구를 속여 음식물을 취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정당하게 취하여 음식의 참 맛을 음미할 줄 안다. 또한 지혜로운 입술을 가진 자는 공연히 두루 다니며 한담, 곧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자칫 남의 비밀을 누설하게 됨으로, 이렇게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라'고 본문 말씀은 권고한다. 따라서 이 또한 지혜로운 입술이 귀한 보배가 되는 이유가 된다.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것은 부모에게 불효하는 대표적인 행위다. 하나님은 이런 행위를 미워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행해야 할 중에, 부모를 공경해야 할 것을 가장 으뜸으로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여 효를 행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부모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일까?
요즘의 많은 사람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물질로 공경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아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물질로 공경하기 보다 더 필요한 것은 마음의 소통이다. 이런 마음의 소통은 물질이 아니라 입으로 하는 말이 더 중요하다. 말로 서로의 마음이 교감되어 소통을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의 소통이 단절되는 것이 불효다. 그리고 불효하는 자에게는 '그의 등불이 흑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고 본문 말씀은 경고한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라'며, 말을 함부로 하지 말 것을 본문 말씀은 권고한다. 사람의 말에는 권세가 있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말한대로 이루어 진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고,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신 사람에게도 말 한마디로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심지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라고 증거했을 정도다.
또한 지혜로운 입술을 가진 자는 '함부로 이 물건은 거 룩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급한 서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 말씀은 '함부로 이 물건은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는 것'을 조심하라고 경계한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덫이 되느니라'는 말로 권고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국나 자기가 하는 말을 항상 조심해야 한 다. 이럼게 조심할 줄 아는 자의 입술이 지혜로운 입술이요, 그것은 귀한 보배가 되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교훈한다. 또한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일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정당하고 공정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은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카멜레온처럼 민첩하게 자신을 현실에 적응하여 변화무쌍하게 변화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부단히 자기변화를 추구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언제나 초지일관하여 한결같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따라서 본문 말씀은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를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면서, 사람이 세운 모든 계획은 부질없는 일인 것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경륜 앞에서는 사람이 자기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 것인지를 알기를 원하신다.
본문 말씀은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면서, 그것으로 '사람의 깊은 속을 살핀다'고 권고한다. 또한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룸다움은 백발'이라 하여, 공존공생의 관계를 이루어야 할 것을 교훈한다. 그러면서 때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 일정한 규율이 있어 엄중한 징계가 필요함을 말하여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고 교훈한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지혜로운 입술을 가진 자'에 대해 깨닫게 하심을 감사한다. 따라서 오늘의 깨달음 대로 지혜로운 입술을 가진 자로 살아가길 소망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길을 걷는 모든 걸음이마다, 오직 여호와를 말미암음인 것을 믿으며,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결같은 마음으로 초지일관하는 생애가 되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기도] : 귀한 결단의 시간을 허락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날마다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하게 깨달아 알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소원하옵기는 깨닫게 하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저를 붙드시고 이끌어 주시옵소서. 오직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아버지께 간구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왕서방
속사람이란
잠 20:27-30
첫째, 속사람은 정죄함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본문 27절입니다.
사람의 영혼(spirit)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 니라
폭풍우 속을 항해나는 배가 등대의 불이 없으면 갈 길을 모르듯이 여 호와의 등불인 우리의 영혼이 꺼져가면 방향 감각을 상실해 버립니다.
학식이 아무리 많고 철학이 심오하고 물질적으로 풍성하고 명예가 있 다 하더라도 내 영혼의 등불이 꺼지면 우리 인생은 어두움 가운데 멸 망하고 맙니다.
자가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이 유암중에 꺼짐을 당 하리라(20절).
성경은 사람의 영혼을 여호와의 등불 또는 속사람이라고 합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께로 난 자이기에 죄가 없습니 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됩니다. 겉사람은 여전 히 죄로 말미암아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죄가 없으며 날로 새로워집니 다(고후 4:16).
아담이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죄가 없는 아담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장)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겉사람과 속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 많아 늙고 병든 겉사람을 보고 판단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인 속사람을 보시는 것입니다.
둘째, 속사람은 하나님의 생기를 새로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겉사람이 아니고 속사람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렇 다고 해서 겉사람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아담이 창조 되었을 때는 죄 가 없었으므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함께 매일 거닐며 교제하셨습니 다. 에덴은 기쁨,낙원이란 뜻이며 죄를 범하기 이전의 아담과 하 와는 에덴 동산에서 기쁨과 사랑과 행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 속 에 하나님의 영이신 생기가 있었으므로 그들의 속사람은 살아 있었습 니다.
여호와의 성령이 에스겔을 골짜기로 데려가서 많은 뼈들을 보고 에 스겔아, 이 뼈들이 능히 다시 살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에스겔이 하 나님께서 아신다고 대답하자 이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로 하여금 생기 에게 명하여 그 생기가 뼈들에 들어가 하나님의 살아있는 군대로 만들 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겔 37:1-10).
이 생기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힘입니다.생기는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 다. 타락 이전에 아담에게는 하나님의 생기가 있었기 때문에 모드 다 것을 다스릴 수 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신 후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 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능력을 주셨습니다(창 1:27-28,2:7). 하나님 의 생기가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이런 능력이 있 어야 합니다. 이 능력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범죄함으로써 이것을 잃 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spirit) 이 영원한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 6:3).
아담이 범죄하여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는 겉사람뿐인 육의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는 겉사람뿐 인 육의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 다. 하나님의 생기를 잃어버린 육에 속한 사람과 하나님의 생기를 다 시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있는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하나님의 생기가 그 속에 다시 들어감으로써 속사람이 생겨 난 거듭난 사람을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 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 속에 하나님의 생기가 다시 들어와 속사람이 생긴 자, 즉 성령으로 거듭나게 된 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 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the Spirit)으로 난 것은 영 (spirit)이니 (요 3:5-6).
셋째, 속사람은 썩지 아니할 씨로 난 사람입니다.
이 속사람을 영이라 하며 성령으로 났다고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 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자가 없습니다(고전 12:3). 속사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할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 에 태어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 면, 즉 하나님의 생기로 말미암아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 나 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거듭날 수 있도록 필요한 구원의 터를 마련하신 분은 예수님 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나를 거듭 나게 하십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사람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넷째, 속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내 속에 생기는 영인 속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전 것, 즉 육체속에 죽은 모든 것이 다 지나고 버리고 내 속에 새 로운 피조물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 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롬 8:1). 속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 에서 탄생되었으므로 죄가 없습니다. 정죄함이 없는 속사람은 하나님 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새로 창조된 속사람은 새로운 것을 즐겨하면서 그 속에는 생기가 넘 칩니다. 한 평생 예수를 믿으며 새로워집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피조 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워지지 못한다면 이는 생명의 양식인 하 나님의 말씀을 풍족히 받아 먹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분은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시므로 실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썩어질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가 어머니를 바라보듯 늘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 감 같을 것이요 달음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 니하리로다(사40:31).
다섯째, 하나님은 속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
새로운 피조물인 속사람이 주님을 앙망하면서 그것이 겉으로 드러날 때에 행함이 있는 믿음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죄가 없는 속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롬 8:16).
The Spirit Himself bears witness with our spirit thae we are children of God (NKJV).
죄가 없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죄로 물 들어 있지만 예수를 믿음으로 다시 태어난 속사람은 죄가 없습니다.
성령은 이렇게 죄가 없는 속사람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영 이시기에 우리의 영과 함께 하시며,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일터입니 다. 우리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4).
For as many as are led by the Spirit of God, these are sons of God (NKJV).
하나님의 아들은 겉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속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고 함께 하는 것은 우리의 영 원한 영이며 이 영이 곧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영인 속사람 을 통해 우리를 깨닫게 해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생명의 양식을 먹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통하 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은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입니 다. 우리의 지식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흔적인 것입니다. 흔적인 것으로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으 며 육적인 것으로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죄가 들어와서 활 동하는 곳이 육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흔적으로나 육적으로 하나님과 교통을 시도하기 때문에 늘 실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 로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교통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 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의 속사람, 즉 하나님의 영(Spirit)이 함께 거하는 우리의 영 (Spirit) 입니다.
여섯째, 속사람은 여호와의 등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사람인 영과 교통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영혼은 여 호와의 등불인 것입니다(잠 20:27).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그 빛 이 우리의 영과 함께 함으로 우리의 영은 여호와의 등불입니다. 우리 의 영이 밝으면 우리 생활이 밝고 우리의 영이 주님과 교통할수록 더 욱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예수님은 속사람인 우리를 보고 너희는 세상의 빛(마5:14)이라 하 셨습니다. 예를 들면 석유등의 등은 몸이요 불은 영혼입니다.
빛이 희미하면 어둠이 찾아옵니다. 이 빛이 밝으면 어둠이 물러갑니 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이 빛이 늘 밝아야 합니다.
일곱째, 속사람에 역사하는 성령을 좇아 행할 때 빛을 발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성령께서 우리 영과 더불어 함께 역사하심으로 성령과 더불어 역사하 는 그 영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깁니다. 육체의 소욕을 이기 면 이길수록 내 속의 빛은 밝아지며 이 빛이 밝아질 수록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내 속에 있는 영인 속사람의 빛이 밝아질수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비추지 못하여 내 속이 어두우면 하나님 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속사람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밝 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빛이 없으면서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으므로 죄가 없고, 빛이 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때에 빛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영혼이 밝아지면 우리 가 육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영적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일만 하게 됩 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우리의 모든 생각을 주님 뜻에 순종할 때 주님이 늘 함께 해주시므로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속사람은 생기가 있습니다. 성령과 함께 역사 하는 속사람을 좇아 행할 때 주님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속사 람은 늘 주님만 바라봅니다. 속사람은 죄가 없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 이나 계획하는 모든 것이 틀림없이 이루어지며 속사람을 통하여 하나 님의 복이 임하게 됩니다. 속사람이 밖으로 드러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