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어쩌다 가족이어서
최은묵
맞아, 쌀은 식물이었지, 잊고 있었네, 익숙한 건 그래, 가끔 우리도 약병에서 나와 노래를 부르며 살자, 니나노 뽕짝 그런 거 말고, 숭늉 맛 노래, 뭐라 하더라, 그걸 뭐라 하는데
종이 한 장에 나란히 이름을 적고 우리는 가족이 되었지 새벽기도 취침기도 식사기도
감사할 게 없어도 감사한
아버지,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복은 몇 층부터 내려올까, 저녁밥을 차려도 복은 2층에 도착하지 않아, 당신은 지금 몇 층입니까?
이 방은 기도로 꽉 차서
어제는 책상을 버렸고 오늘은 옷장을 버렸어요
침대가 있던 자리에 교회를 짓고 처음으로 가족을 초대한다 쌀 씻고 쌀뜨물로 십자가를 닦고
삼촌은 늦는다지
아버지는 가족이 아닌데 왜 오셨어요
복을 내려주시고
위층보다 큰 복을 내려주시고
엄마, 복은 어떻게 생긴 거야?
기도할 땐 조용히 있어야지!
쌀밥 위로 기도가 올라간다 따뜻하게 올라간다, 숟가락을 놓고, 약병 속에는 늦잠을 자는 조카 둘, 잊고 있었네, 익숙한 건 그래, 용돈을 받으려면 기도를 해야지, 그런데 엄마, 헌금은 누가 갖는 거야?
위로 올라가는, 오르다 팔을 벌리고 기도를 하는 식물처럼, 맞아, 기도할 땐 조용히 있으랬지, 이상해, 익숙한 건 쉽게 잊는데 또 배가 고파!
올라가는 기도와 내려오는 복 사이로 가지를 뻗는 식물들, 비슷한 허기, 우리의 기도는 왜 늘 이 모양이지? 잘 먹고 잘 자고, 도대체 아버지는 누구세요?
창문이 있는 벽에
가족은 식물성이라고 적었다
밥때가 지나면 우린 아버지를 지운다 배부른 기도는 느긋하다 내일까지 비가 내린다고 한다 식물이 자라는 동안 가족은 쉴 수 있다
우리는 놀이처럼 기도를 하고
수다스러원 날씨처럼 흩어지고
삼촌은 오지 않으려나 봐요
식어버린 기도는 어떻가 할까요?
얼렸다가 다음 식사 때 다시 데우면 돼
일회용 교회를 치우고 도로 침대를 옮기고, 부른다고 늘 오시지는 마세요 아버지는 매번 빈손이잖아요, 복은 지금쯤 몇 층일까, 빈방에 복이 채워지는 밤을 상상하다가 익숙한 후렴처럼 잠자리를 뒤척이다가
잊고 있었네, 익숙한 건 그래, 약병 속에서 자장가 한 알 꺼내먹고, 정오까지 가족 없이 살자
시간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미안하지도 않나? 복은 어떻게 생겼을까? 아버지, 형편 좋으실 때 좀 챙겨주세요
복으로 채워질 방에 복 한 마리 복 두 마리 복 세 마리
미리 아멘을 하고
복 열다섯 마리 복 열여섯 마리,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위층보다 큰 복을 내려주시고, 얼굴을 모르는 아버지를 부르는, 아쉬운 믿음, 그런데,
쌀은, 정말, 식물일까?
― 《아토포스》 (2022 / 창간호) 2022.12.10.
발행인 문근식 / 편집인 조정 / 편집주간 박남희 / 편집장 권성은 / 편집위원 고광식 김효숙 전영관 김옥전 김경린
최은묵
대전에서 태어나 2007년 《월간문학》, 201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시집 『괜찮아』 『키워드』 『내일은 덜컥 일요일』이 있다. 수주문학상, 천강문학상,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