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일기 여덟 번째
5월 5일 오늘은 노동절이다. 아니 어린이날이라고 달력에 빨간 표시가 되 있었다. 내가 20여년 새벽에 일어나 신문배달을 해온것 그것이 바로 노동 아니엉T을까. 듣기 좋은 말로 ‘창간지국장’ 그러나 빛좋은 개살구다. 누가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독자들이 많아, 수금이 저절로 들어오는게 아니다. 초창기 구독료 한달에 2,500원 할 때 무슨 토건회사인데 찾아 갔더니 사장이 없다며 내일 오란다. 여사무원 문전박대다. ‘빨갱이 신문’이라 소문속에 학교 선생들이 외면한다. 그나마 <한겨레>와 비슷하게 태어난 ‘전교조’ 교사들이 가뭄에 콩나듯 구독해주어 그저 고마울 뿐. 읍내 있는 관공서란 관공서는 물론 농협까지도 배척한다. 내가 농민운동을 시작하며 알게 된 농민들에게 주로 새벽 1~2시에 일어나 신문을 접어 띠지에 끼워 우체국에 갔다주면 읍내 변두리와 면단위는 다행히 그날치를 받아 보는데, 매일우송료를 현금 지불해야한다. 우표값 마련에 허둥지둥. 그리하여 일년치를 갖고 지국사무실(전세집에 살며)로 찾아 온다든가. 또는 고향의 형님 친구(농민)에게 신문을 보내 다행히 반송 않고 1년 넘게 보다가 도로상에서 경운기 사고로 죽은 후, 그 가족들은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또다른 후배는 십수년전에 학산면으로 귀농했다며 구독을 했는데, 열성적으로 농민회 초창기에 나타나고 하더니 30대 중반이었지, 경운기사고로 죽었지. 이러한 사연 글로 쓰면 소설 몇 권은 될거야. 그러다 보니 시집 올 때 자전거도 못타턴 아내에게 영동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자전거 타기를 가리켜 주어 배달을 하게 되었고, 새벽녘에 횡단보도를 타고 가던 아내가 과속 택시에 받혀 입원하고, 초등학교 다니는 맏아들과 둘째놈 밥도 해주어야 하고 그렇게 살아오면서 십수년이 지나 아내는 오토바이를 사서 타고 배달을 하고, 다니다가 무슨 보험에 들지도 않은 승용차가 뒤에서 들이 받아 병원에 실려 갔다고 누가 전화를 하여 정신없이 찾아갔더니 죽지는 않고 다행히 입원을 했지만 나의 눈앞은 캄캄하다.
잘생긴 맏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때지. 공부를 못해 시내 인문고는 직한 못하고, 주변에서 실업계 보내지 말고, 면단위에 있는 인문계를 보내라하여 ‘사춘기홍역’을 치루며 음악도 좋아하더니, 여름날 억수같이 비가 쏟아 지는 날, 우비입고 신문배달을 자전거타고 하고 오면 옷은 속에서 내품는 열기 땀으로 흠뻑 젖고, 정신없이 아침밥 먹고, 아파트(전세) 1층에 살며 아들은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나가는데, 등뒤에서 신기하게도 시원한 바람이 확 풍겨 오더군. 집 떠난지 30분도 되지 않았는데 전화가 왔다. 금방 날아가듯 가보니 아들의 얼굴음 피범벅으로 시체였다.
아내가 타고온 오토바이는 이 판국에 누가 훔쳐가고. 맏아들 4살 때 ‘농민가’도 그렇게 잘 불렀건만 잘난 전두환 대통령 시대에 소기르고, 돼지 기르다 농협에 빚지고 어쩔수 없이 읍내로 ‘이농’하여 아내라 리어카를 끌고 채소 장사를 하다가 <한겨레>가 창간된다는 소식에 기뻤고, 마침 누군가 10만원을 주어 가용에 보태고 싶었다. 그러나 20주 주식을 샀다. 소액주주로 ‘참언론’ 신문사 주인이 되다니. 이 자부심 창간전신 받들며, 맏아들이 죽은 18세 나이가 아까워 나는 “네 몫까지 살아줄께”라고 다짐하며 살았다.
아들이 죽고 나니 나는 죄를 지은듯 큰 도로 인도를 못다니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뒷골목으로 다녔고,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신문, 나 혼자서 아들처럼 생각하면 살아온 사연을 수년전에 <빈 항아리 울음>이라는 책으로 엮어냈지만 누가 사서 읽어주나. 별 볼일 없는 신변잡기를. 그래도 이 책 속에는 ‘민주화기념운동생활글’ 응모 장려상(30만원) 받은 -신문배달이야기-를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지겹다 ‘신문이야기’, ‘한겨레의 노예’ 처럼 지나온 세월이 결코 내게 헛된 것은 아니지.
오늘 이렇게 ‘불운’처럼 병상에 누워 있는데 서울에서 병문안 온 존경스런 두 분이다. 한사모(한겨레신문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 회장 임성호(임크라데스)와 김상진(한겨레 주주, 한국철도공사 영등포역 근무). 너무 반갑다. 어떻게 알고 왔을까. 나의 기억이 토막난 듯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튼 지난 3월 31일, 올해 따라 유별나게 숙대강당이 아닌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열린 제19차 정기 주주총회에 참석, 해마다 3월에 열리는 총회 지금까지 한 번 불참한 적이 없다. 총회 때 자유토론시간에 보면 모두 저 잘난 질문을 경쟁적으로 하지만 실속은 잘못 알고서 하는 '시간낭비‘이고, 세 번 네 번 질문 기회를 나꿔채며 주관적인 장광설로 귀중한 시간을 흘러보낸다.
올해 질문자들도 민주적이지 못한 마지막 순간을 놓칠 수 없는 나는 미리 ‘질문내용’을 A4 용지 200매를 복사하여 나눠 주었다. 다행히 마지막 질문자가 됐다. 지난해는 고 문익환 목사가 일흔 둘에 안동교도소에선가 쓴 ‘통일시’ 나<나의 기도>를 낭송한 것으로 만족했다. 올해는 기왕이면 김남주의 <조국은 하나다>를 낭송하고 싶은데, 마지막이고 보니 시간이 없다. 차라리 문목사와 동갑내기 이기형시인(90세)이 1월에 펴낸 <해연은 날아온다-을사능략 100년 고리끼의 해연을 보고>(실천문학). 최근에 너무 좋아서 외우게 된 이 시를 낭송하고 싶었는데, 자꾸 사람들은 떠나가고, 그렇다고 사회자가 시낭송하라며 배려해 주지도 않고, 간단히 요지만 질문했다.
고광헌 총괄상무가 답한다. 전교조 해직 교사 출신으로 시인이기도 고상무가 뭐라고 나를 칭찬하고 추켜 세우는 듯 한 답변은 좌우지간 ‘사과’ 한다였다. 그러나 인터넷 하늬바람 주주독자 게시판에 나의 아이디 ‘흰머리소년’(흰소)으로 애초엔 글이 올려졌는데, 그 ‘어느날’부터 실명(이주형)으로만 강요당하고 있다. ‘사과’ 했는데 개선되지 않고 있다. 나의 실명은 주민등록증에나 사용될 뿐, 인터넷의 나의 이름은 흰머리소년이다. 왜 하늬바람은 실명을 강요하냐? 이유가 뭔가?
청와대 게시판도 강요하지 않고, 노사모게시판도, 참언모(참언론을 사랑하는 시민)는 흰머리소년 5자가 길다가 누군가가 ‘흰소’라고 하여 지금은 흰소로 대접 받고 있는데, 하늬바람만 막가파식으로 나오니, 차라리 내가 이 사이트 포기하고 들어오지 말자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오늘 한사모 회장이 찾아오셨으니 강력히 시정해 달라고 매달려 본다. 함께 온 김상진님은 유명한 ‘고향아줌마’를 부른 가수 이름과 같아 기억하기 쉽다.
지난 주주총회 끝나고 8시. 전국 주주독자대표자 등과 전임 한사모 노재우 회장, 20여명이 여의도 큰 중국집에서 서로 자기소개 인사를 하고, 결의도 다지고 나도 술 소주 두어 잔을 했다. 음식은 맛이 좋았다. 헤어지면서, 나는 사실 피로했다. 토요일이라 새벽 3시반에 일어나 3시간 가량 신문배달을 했기 때문에 지친데다가 열차로 상경해야 했고, 오랜만에 알고 있는 출판사 이사한 사무실로 알고 싶어 남산 밑 회현동으로 찾아갔다. 서로 반가워 점심을 함께 먹고, 새로나온 책이라며 3권을 주는데 작은 배낭에 넣고 어깨에 짊어지니 시간이 지날수록 무게가 느껴지고 아픔이 느껴진다. 아무튼 서점에 가서는 단 1권도 얻을 수 없지만 출판사 50대 사장은 나를 형처럼 생각하고 책까지 주는데 얼마나 고마운지.
이렇게 무거운 책가방을 매고, 김상진님은 ‘선배’님을 찜질방이나 여관으로 보낼 수 없다며 봉천동의 자기 동생이 살고 있는 아파트로 나를 안내하겠단다. 지하철을 몇 번 환승하고 내려서 “택시타고 가자”라고 했더니 걸어가도 된다면서 꼬불꼬불 언덕빼기 걷고 걸어서 도착하니 밤 12시. 몇시간을 걸었을까. 잠시 쉬며 과일과 약술을 대접 받고, 두어잔 마시고 편안히 잠을 자고 깨니 아침 6시. 상쾌하다. 그래도 20분간 ‘물구나무서기 명상’을 하고나니 더 기분이 좋다. 이 젊은 부부는 남매를 두고 있다. 큰 아이가 초등1학년. 그런데 내가 아무리 찾아봐도 <한겨레>가 없다. 구독하지 않고 있다. 다른 신문도 안 본다. 뜻 있는 분은 신문을 ‘교과서’라고도 하는데. 아이 엄마는 “아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신문 읽는 연습이 없는데, 어찌 책 읽기가 쉽겠는가. 꼭 신문을 보면 아이 교육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해주고는, 밥을 얻어 먹었으니, 밥 값을 해야한다면서 지난해 가을에 외운 ‘님의 침묵’(한용운)과 여름에 외운 ‘어린아기’(조명희)를 밥상머리에 앉아 낭송하니 젊은엄마는 암송하는 나의 기억력이 신기한 듯, 그러나 나의 경험으론 정상적인 보통인간이면 누구나 시 몇 편은 쉽게 외울 수 있고, 맘막 먹으면 중,고등학교 영어 교과서 1권 정도는 어렵지 않게 외울 수 있다는게 나의 주장이고, 인간뇌의 무한한 잠재적인 가능성의 기억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날마다 제대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봉천동길 걷기, 이후로 나의 두 다리가 얼마나 혹사를 당했는지. 내 몸은 가혹한 정신력에 채찍질 당하며 시달려야 했는지. 이러한 절박한 상태에서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한 가중된 스트레스. 입원하기 사흘 전에도 목욕탕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했던 바보스러운 나!
저녁 때 두 번째 찾아온, 형수님과 장조카 둘째와 셋째, 저마다 쾌유를 빌며 ‘봉투’를 주고 간다.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말라고 나는 말했는데, 아내가 대전에 가까이 있는 생질녀한테 말한 것이 부산 누님, 인천의 여동생까지 오게 하다니. "오빠 부끄럽다“라며 주고간 봉투에 10만원. 이 돈 차라리 중2 유나 책이나 사주라며 돌려주고 싶다.
지난해 가을 영동에 살다 인천으로 이사 간 유나는 그 곳 낯선 학교에서 왕따 당하고 죽을 뻔 했다는 이야기는 동화책 한권 정도. 당찬 외동딸 유나는 그들(6명)을 이겨냈고 꼬리를 내리게 했다는 것. 지금 유나 실력은 반에서 상위권, 기가 살아났다. 미래의 꿈이 피디다.
작심삼일이라고 엄마가 핀잔을 주지만, 나하고 새벽 4시에 일어나기로 지난해 추석 때 약속한 유나에게 나는 신문배달을 하다가 4시에 휴대폰으로 깨워주고, 신문배달 해주러 7층에 가면 유나 방에 불이 켜져 있었지. 창문에 신문 끼워 놓고 두 번 똑똑 두드리며 외삼촌이 살며시 왔다갔다는 것 알려주었지. 이제 유나는 작심삼일이 아닌 작심삼백일을 지켜가겠지.
07. 5. 6. 5시반.
첫댓글 훌륭하신 장문의글 솜씨는 변함이없습니다..잘읽고 갑니다..빠른 쾌유를 빌면서......
흰머리 소년 형님의 쾌유를 빕니다,몸이 아파서 결혼식도 못보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