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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렬했던 중국의 권력 암투의 결말
◆ 시진핑 對 보시라이
◑ 중국과 서방 세계에서 차기 후계자로 주목 받던 태자당의 금수저 보시라이는 잘 나가다가 시진핑에게 왜 밀렸을까?
▲ 후야오방(胡耀邦, 호요방), 호남성 류앙시 출신, 1915~1989,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1982~1987),
등소평과 함께 개혁 개방을 추진하다
천안문 사태로 물러난 뒤 사망했다.
좌절된 민주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 보이보(薄一波, 박일파, 산서성 태원시 출신, 1908~2007, 국가경제위 주석, 당자문위 부주임을 역임했다.
1931년 국민당 경찰에게 잡혀 투옥돼
"반공 고백서"에 서명하고 풀려나서
국민당. 일본 제국과 싸우다가 공산당
초대 재무부 장관을 등을 역임했다.
▲ 왼쪽부터 보시라이, 보과과, 보이보,
구카이라이, 아들 며느리 손자와 함께
1966년 사인방에 의해 숙청됐지만,
등소평이 사면했다. 모택동의 측근 8대 원로들 중에 100세까지 최장수했다.
공산주의청년단(공천단)파의 뿌리나 다름 없는 후야호방 축출에 앞장서고, 호요방 몰락 후 혁명 원로들의 자제들로 구성된 태자당 파벌을 만들었다.
▲ 시중쉰(习仲勋, 습종훈) 1913년 산서성 푸핑현 출생, 문혁 때 반당 분자
로 몰려 16년간 야인으로 심한 수모를 겪다가 1978년 등소평이 사면, 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 정치국 위원, 공산당 중앙위원, 전인대 상무위 부워원장 역임
보이보에 유일하게 맞서 호요방을 보호
했고, 티베드 불교 보급에 힘썼다.
▲ 왼쪽이 시진핑
하이밍주(郝明珠, 학명주)와 결혼하여
푸핑, 허핑, 간핑을 낳았으나 허핑은 문화대혁명 때 박해로 인해 사망했다.
1944년 이혼, 바로 치신(齐心, 제심)과
재혼하여 2남(진핑, 안핑) 1녀(치차오
차오)를 낳았다.
▲ 시중쉰과 아들 시진핑
시중쉰과 보이보 둘 다 8대 원로지만 영향력은 보이보가 더 컸다. 그럼에도 후계구도 경쟁에서 시진핑이 앞섰다.
시중쉰이 호요방의 축출을 유일하게
반대했고, 아들 시진핑은 상하이방과 공청단파와도 무난한 관계였으나, 같은 태자당이면서 보시라이는 대를 이어서 공청단파를 철천지 원수처럼 여겼다.
▲ 시진핑(習近平, 1953년 북경 출생,
청화대학 대학원 법학 박사
▲ 1973년, 문혁 때 하방시절 동지들과
산서성 오지에서 7년간 지낼 때(왼쪽
두 번째), 시진핑은 리더십을 발휘하여 최고 생산량을 올렸다. 2007년 상하이 당서기로 발탁된 뒤부터 급부상했다.
▲ 펑리위안(彭麗媛, 1962년, 산둥성 허쩌시 출생)과 딸 시밍쩌
▲ 시밍쩌(習明澤, 습명택), 1992년
복건성 복주 출생, 하버드대학 졸업
후진타오와 시진핑은 등극하기 전까지
극도로 몸을 낮추었고, 시밍쩌도 처신에 조심했으나, 보시라이와 아들 보과과는 정반대였다.
▲ 보시라이(薄熙來, 박희래), 베이징
출신, 1949년생,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태자당 핵심 보이보의 아들로 금수저다.
182cm, 75kg, 총명한 호남형, 튀는 성격, 부친의 뒷배로 공산당의 엄친아로
각광을 받았다.
고급중학 때 터진 문화대혁명 홍비병의
분파인 연동(連動)에 가담해 위기를 넘겼다. 연동에서는 "뿌리가 붉으면 곧은 싹이 나온다. 아버지가 영웅이라면
아들은 호걸, 아버지가 반동이면 아들은
바보" 등의 혈통론을 선전했다.
아버지가 반동으로 몰려 출세길이 막힐
뻔하자 홍위병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
보이보를 두들겨 패 갈비뼈 2대를 부러
뜨렸다. 아들에게 맞던 보이보는 속으로
"제대로 정치인의 자질이 있구나" 하며
속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 문화대혁명 때의 홍위병
홍위병 엘리트들은 제 한 몸 살고자 이런 미친 패륜을 막으려고 할 정도로 양심과 여지는 있었으나, 그는 앞장서서 다른 '반동' 출신 홍위병들을 공격했다. 친일파가 일본놈 보다 더 일본인 같이 굴던 것처럼, '문혁'의 가해자인 동시에 모택동과 장청에게 놀아난 피해자였다.
혁명 공신 리쉐펑의 딸 리단위와 중매
결혼하고 아들 왕즈를 낳았다. 큰처남댁
동생인 유명한 변호사인 쿠가이라이
(谷开来, 곡개래)와 눈이 맞아 6년 만에 이혼했다. 왕즈는 다른 여자에게 간 아버지를 증오하여 어머니 성인 리씨로 바꿨다.
▲ 보시라이와 재혼한 부인 구카이라이
행정 능력도 탁월하여 기자들이 몰렸고 연설도 잘해 허구한 날 신문에 실렸다.
이를 배 아파한 이들의 견제도 심했다.
대련 시장 - 요녕 성장 - 상무부장 - 중경
당위원회 서기를 역임하다가 본인의
엽색 행각, 아내의 살인 은폐 시도, 당시
주석이던 후진타오 도청 의혹 등 엄청난 사건들이 공개되는 와중에도 쿠데타 시도 등의 무리수를 두다가 몰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