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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쭉빵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응답하라 88
장옥정(훗날 희빈장씨禧嬪 張氏)은 1659년 음력 9월 9일 한성부 연은방(현재 서울시 은평구)에 위치한 유명한 역관집안에서 태어났다. 역관으로 중인 출신 집안이였으나 역사서에 기록이 남을만큼 막대한 재산가였으니, 그 부가 막대하여 그것을 매개로 권력까지 누릴 수 있는 지금으로 따지면 수백억대의 자산가 집안의 막내 딸이였다. (숙종실록 1686년 12월 10일) "역관 장현은 국중 (國中)의 거부(巨富)다." 숙종이 1661년생이였으니 숙종보다는 2살 연상의 여인이였고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1667년)와는 무려 8살의 나이차이가 났다.
조선실록에서 여성의 외모를 기록되어 있는 것은 숙종이 (숙종실록 13년 6월 16일) "얼굴이 자못 아름다웠다" 라고 말한 것으로 장옥정이 유일하다. 그 이후에도 장옥정의 미모를 조심하라는 서인들의 견제가 담긴 상소가 여러번이나 올라와 실록에 몇번씩이나 더 장옥정의 미색에대하여 기록되었으니 이는 정사가 보증해주는 유일한 미모를 가진 여인이라 할 수 있다. 숙종실록 (1686년 12월 14일) "사간원의 한성우가 궁인 장씨를 염려하여 왕에게 미인(美人)을 경계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숙종실록 (1686년 9월 13일) "김창협이 장씨의 미색에 마음이 현혹되어 은총을 열어준다는 비난을 없게 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장옥정과 숙종의 첫만남 당시 정국 사정을 살펴보자면 정국을 주도하던 남인들이 1680년 경신환국으로 인하여 몰락하고 서인들이 집권 중인 상태였다. 가뜩이나 후사가 없어 입지가 좁았던 남인의 대표주자 대왕대비 장렬왕후(인조의 계비)는 경신환국으로 내명부의 실권력을 숙종의 모후이자 서인의 대표주자였던 대비 명성왕후에게 빼았길 수 밖에 없었다. 장옥정의 숙부 장현은 남인과의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인들은 무너져가는 남인세력을 다시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장옥정 선택했다. 그리하여 장옥정은 재력이 상당했던 집안의 여식임에도 궁인으로 입궐하여 대왕대비 장렬왕후의 처소에서 일을 하였고 그리하여 숙종의 눈에 들게되었다. 장옥정이 왕의 총애를 받자 서인들은 일개 궁녀일뿐인 장옥정을 계속하여 견제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조선역사상 적통중의 적통인 숙종을 생산해 내었다는 자부심이 굉장히 강하였던 명성왕후(숙종의 모후)역시 역관 출신인데다가 남인과 관계를 맺고있던 장옥정이 숙종과 엮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여 결국 장옥정을 궐 밖으로 쫓아냈다. (*조선 역사에는 적통 타이틀을 가진 왕은 열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몇 되지 않는다. 게다가 숙종의 부친인 현종 역시 외동아들이였으니 숙종은 적통 출신의 2대 독자인 엄청나게 귀한 소생이였다. 숙종 이후로도 150년 간이나 왕후에게서 왕자가 탄생하지 않았을 정도로 적통이 귀했으니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에게 내려진 저주라는 말이 있을정도였다.) 왕의 승은을 입은 궁녀가 궐 밖으로 쫓겨남은 곧 여자의 지조를 보증 할 수 없는일로 궁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과 마찬가지였으나, 장렬왕후의 도움으로 장옥정은 종친의 집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명성왕후는 그 당시 최고의 명문가이자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민유중의 여식 인현왕후 민씨(숙종의 두번째 부인. 계비)를 숙종의 계비로 맞이하였다. ㄴ(숙종의 첫번째 부인, 정비: 인경왕후) 숙종과 장옥정의 재회 그로부터 6년 뒤 명성왕후가 승하하고나서야 장옥정은 28살, 서른에 가까운 나이로 숙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궁궐로 복귀 할 수 있었다. 궐로 내쳐진 궁녀가 6년이나 지나서 다시 궐로 들어오게된 일은 한번도 없었으니 서인들은 날로 커져만 가는 왕의 장옥정을 향한 드높은 총애가 자신들에게 화가 될까 심히 걱정하여 반대하였으나 인현왕후가 숙종에게 자신이 다른 후궁 한명을 직접 간택하여 들일 것을 조건으로 장옥정을 궐로 들이는 것을 허락하였다. 장옥정이 궁궐로 복귀 한 후에도 장옥정을 견제하는 서인들의 수 많은 상소들이 빗발쳤고 이에 숙종은 장옥정을 다시 폐출할 것을 건의한 관료 이징명을 파직시켰다. 숙종실록 (1686년 7월 6일) "이징명이 '장희빈은 복선군에게 빌붙었던 장현의 친척으로 가까이 한다면 걱정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상소했다." (복선군: 경신환국을 일으킨 남인들의 반란의 중심이 되었던 종친.) 이어 숙종은 인현왕후가 간택해 온 후궁 김씨에게 종 4품을 하사하고 곧 바로 연이어 종 1품의 첩지를 내렸다. 이같은 처사는 숙종이 후궁김씨를 총애했던 것인가 하고 볼 수도 있지만 이는 단순히 장옥정에게도 별무리 없이 첩지를 내리기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숙종은 곧 이어 장옥정에게 숙원 첩지를 내려 서인들에게서 보호하며 장옥정에게 노비100명을 하사하였다. (숙종실록 1686년 12월 14일 "숙종이 궁인 장씨를 숙원으로 봉하고 노비 100명을 하사했다.) 조선시대의 정 4품 후궁에게 노비를 100명이나 하사한 일은 전무후무 한 일로, 그 당시에도 말이 많았으니 실로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가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장옥정을 향한 숙종의 총애가 깊어 장옥정 관련의 작은 일이라도 과민반응을 보이는 탓에 신하들이 장옥정 관련하여 별 다른 말을 못하였다고 한다. 숙종, 재위 14년만에 첫 아들을 보다. 숙종은 왕위에 오른지 14년동안이나 후계가 없었다.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가 두 공주를 낳았으나 둘 다 태어난 지 며칠 안되어 죽음을 맞이했고 계비인 인현왕후와는 후사가 없으니 2대 독자 숙종에게 후계 문제는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그도 그럴만 한 것이 그 당시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고 계속하여 공주만을 생산하여 그 문제가 숙종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시선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이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이 바로 장옥정이 1688년 10월 27일 왕자 윤(昀.경종)을 낳은 것이였다. 재위 14년만에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첫 장자를 얻은 숙종의 기쁨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장옥정에게 정 1품 빈의 첩지를 내리며 칭호 '禧' 희 자를 직접 지어준 후 희빈만을 위한 전각 '취선당'을 지어 하사하였다. 또 숙종은 장희빈의 어머니 윤씨에게 옥교(나무로 집과 같이 꾸미고, 출입하는 문과 창을 달아 만든 가마)를 하사하게되는데, 훗 날, 이 옥교를 타고 궐에 들어오는 윤씨는 서인출신 사헌부 관리들에게 정 3품 이상의 여인만이 가마를 탈 수 있는 것을 빌미로 가마에서 끌어내려졌다. 또 윤씨의 가마를 지고 있던 종들을 매질을 당했으며 숙종이 하사한 옥교에 불까지 질러지는 옥교 사건(1688년)이 발생하게 된다. 숙종은 이에 크게 분노하여 사헌부관리들을 잡아들여 벌했는데 사헌부관리들은 고문을 받다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말 정도로 형벌이 가혹하였으니 숙종이 장희빈에게 얼마나 마음이 기울어져있는 지를 알아볼 수 있는 사건이였다. 인현왕후의 폐출 이 옥교사건으로 조정에서 대신들과 숙종이 사흘씩이나 대립을 펼쳤고 숙종은 수 많은 전례들을 이유로 대며 대립을 펼쳤지만 결국 숙종이 명분에서 밀려 신하들에게 한발짝 물러나게 되는데 자존심 강한 숙종은 이 일을 보복이라도 하려는 건지 며칠 지나지않아서 태어난 지 세달 채 안된 경종을 원자로 올린다고 발표하였다. 인현왕후가 스물두살의 나이로 후계를 잉태할 수 있는 나이인데 희빈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올리는 것은 너무 성급한 처사라며 신하들이 만류하였음에도 숙종은 강하게 밀어붙여 3개월 된 아들 윤을 원자로 책봉하였다. 원자가 네살이 되던 해 아예 세자로까지 봉하였으니 이 일은 서인들에게 결코 가볍게 넘어 갈 일이 아니였다. (숙종실록 1689년 1월 10일) "국본을 정하지 못해 민심이 안정되지 않으니 이제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로 정하려 한다." 효종시절부터 조선의 최고의 권력가 송시열이 이를 만류하는 상소를 올리자 (숙종실록 1689년 2월 1일) "송시열이 송나라 신종은 철종이 10살이 된 후에야 태자로 삼았다며 여유 있게 천천히 함을 귀하게 여기라 상소했다." 숙종은 송시열과 인현왕후가 간택한 후궁 김씨의 증조부였던 김수흥(영의정), 김수항(전 영의정)을 삭탈관직을 시켜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고 송시열이 귀양지에서 도성으로 다시 압송되는 당시, 도성에 도착하는것조차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중간지인 정읍에서 사사해버리고는 후궁 김씨 마저 폐출시켜 궐 밖으로 쫓아내었다. 그 후 송시열을 필두로 100명이 넘는 서인들이 일망타진 당하며 기사환국(己巳煥局. 1689년 장희빈의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이 재집권한 사건) 이 일어났다. 일사천리로 서인을 쳐내는 일을 진행한 숙종은 인현왕후의 생일 날, 인현왕후의 생일 음식을 뜰에다 갖다버리라고 명하며 인현왕후를 폐위 할 것을 공표했다. 선대 왕인 성종의 계비였던 폐비윤씨 이 후 또 다시 왕후의 생일에 폐비 이야기가 붉어져 올라왔다. 폐비 명분으로 숙종이 말한 것은 이와 같았다. 인현왕후는 과거 숙종에게 선대왕후인 명성왕후가 꿈에 나왔다며
"숙원(장옥정)은 전생에 짐승의 몸이었는데, 주상께서 쏘아 죽이셨음로 묵은 원한을 갚고자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경신년(숙종 6년) 역옥후에 불령한 무리와 서로 결탁하였던 것이며, 화는 헤아리지 못할 것 입니다. 또 숙원의 팔자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주상이 노고하셔도 큰 공이 없을 것이며, 내전에는 자손이 많아 장차 선묘(선조)때와 다름이 없을 것 입니다." 라고 고하며 장희빈의 퇴궁을 청하였었는데, 희빈 장씨가 아들을 보란듯이 생산 해냈으니 그 고변은 인현왕후에게 투기죄와 저주죄로 되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명성왕후가 꿈에 나타나 자신에게 일러준 것이라 말하였으니, 그것은 명성왕후를 욕 보이는 불효죄까지 해당 되는 일이였다. 또, 그간 인현왕후가 희빈이 만삭이였을 때 종아리를 쳤던 일들과 중전이 된 지 수년이 흘러도 후계가 없는 일들을 빌미 삼아 투기와 저주죄 불효죄를 명분삼았다.
"중궁 인현왕후는 투기가 심하여 반드시 종사에 화를 미칠 것이다. 인현왕후는 하루도 국모 노릇을 할 수 없겠다. 희빈 장씨는 인효공검하여 덕이 후궁에 드러나 장희빈이 일국의 모의가 될만 하니 인현왕후를 폐출하라고 명하는 바이며 장희빈을 왕비로 삼도록 명한다." 그 후 숙종은 폐위에 반대를 하는 대신들에게 국청까지 열어 중전 폐출을 밀어붙였다. (숙종실록 1689년 4월 25일) "내가 무죄한 사람을 폐출하려고 한다니, 과연 이럴 수가 있는가?"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차라리 나를 폐위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 과정에서 반대하던 박태보와 오두인은 압슬(깨진 사기조각 위에 무릎을 꿇리고 위에서 짓누르는 고문 방법)과 낙형 (불에 달군 쇠붙이로 피부를 지지는 고문 방법) 으로 고문을 당하다 결국 유배 가는 길에서 사망하고 만다. 이렇게 조정이 시끄러울 때 장옥정은 둘째아들을 만삭 상태였는데 출산을 하여 둘째 아들를 얻었지만 난산 탓에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숙종이 크게 슬퍼하며 이 아이의 이름을 (성할 盛 목숨 수壽 )하여 성수라 붙여주었다. 희빈 장씨 역시 이 때의 난산으로 인하여 건강이 급격히 악화가 되었지만 이 모든 일들도 희빈 장씨가 중궁전에 오르는데 방해가 되지 못하였다. 희빈 장씨 중궁전에 오르다. 그리하여 중궁전의 자리에 오른 장희빈에게 숙종은 장씨의 친아버지인 장형뿐만 증조할아버지까지 총 3대를 증직해주었다. (아버지- 영의정, 할아버지-우의정, 증조 할아버지-좌의정) 왕후의 친가를 3대씩이나 추증한 것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 였으며 이로써 궁녀출신으로 중전이 된 것, 후궁을 총애하여 중궁교체가 된 일 모두 장옥정이 유일했다.
숙빈의 등장 그렇게 중전 장씨와 숙종의 행복은 7년 가까이 이어졌다. 그러나 난산으로 인한 중전 장씨의 건강 악화로 부부사이가 소홀해졌을때쯤 숙빈의 등장으로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숙빈은 장옥정이나 인현왕후에 비하여 기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야사>에 따르면 숙빈의 출생은 전쟁 중 고아, 인현왕후집의 노비출신 등등 다양하다. 드라마에서 알려진 것 처럼 몰락한 양반 집 출신이거나 양반 집의 서자 출신은 아니고 천민 출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씨와 숙종과의 첫만남은 숙종이 길을 거닐다가 우연히 불이 밝혀있는 처소를 보게되어 들어가보니 한 무수리가 폐비 민씨의 생일을 맞이하여 혼자 공덕을 기리는 것을 보고 숙종이 그 마음을 어여삐 여기게 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현실적으로는 행동반경이 제한 적이였던 궁녀가 궁에서 왕을 만나는 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여 평생가도 왕 얼굴 한번 못보는 궁녀가 수두룩 했기 때문에 그 시각 무수리가 처소에 홀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 출신이 불분명한 이 무수리 최씨의 뒤를 서인들이 봐주던 점, 무수리 최씨가 계속하여 인현왕후의 복위를 도왔던 점들로 보아 최씨와 숙종의 만남은 의도적인 정치적 접근이였다는 말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그렇게 무수리최씨가 숙원으로 첩지를 받고 올랐고, 후에도 숙원 최씨는 계속하여 인현왕후의 무고함을 숙종에게 알린다. 숙종시절 정권이 5년마다 한번씩 바뀌었던 점으로 숙종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던 서인들에게서 인현왕후 복위 운동 조짐이 조금씩 보였으며 민가에서는 어린 아이들의 입을 통하여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일세." 라는 인현왕후 민씨와 중전 장씨를 비유하는 노래가 빠르게 유행으로 퍼져나갔고 인현왕후의 오빠를 비롯한 서인들이 쓴 사씨남정기와 인현왕후전이 그 당시 책을 접하기 힘든 서민들에게까지 쉽게 접할 수 있게끔 널리 퍼졌다. 그 때 중전 장씨의 오빠인 장희재가 최숙원을 독살 시도를 했었다는 고변이 올라온다. 중전 장씨는 최씨 독살 사건과 무관함이 밝혀졌고 증좌 또한 발견되지 않았으나 이것을 계기로 장희재가 유배되고 중전 장씨는 폐위되고 말았다. 하지만 여기서 특이한 점은 중전장씨는 폐서인으로 내쳐지지않고 희빈으로 강등되어 궁에 남게되었다는 것이다. 중궁전에서 희빈으로 강등 되었다는 점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장희빈의 이야기가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희빈 장씨가 중궁전에서 밀려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희빈의 아들인 세자 윤이 인현왕후의 자식이 되었고 그 후 세자 윤이 세자빈을 맞이하여 혼인을 하게되었는데 희빈은 후궁 신분으로 며느리의 인사 조차 받을 수 없었다. 희빈 장씨의 최후. 하지만 오랜 폐서인 생활로 건강이 온전하지 못했던 인현왕후는 복위된지 얼마 안되어 종기로 허리와 피부가 온연한 곳이 없이 결국 승하하게 되었고 이 시점은 희빈의 아들 세자 윤도 두창으로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였는데 최숙원에게서 장희빈이 취선당에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를 저주하였다 고변이 올라왔다. 이 때 서인들에게선 장희빈이 다시 중궁전을 차지 하고 그런 희빈의 아들이 보위에 오르는 것, 그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었다. 장희빈을 폐비 시키는 데에 한몫했던 자신들의 입지를 걱정하였던 서인들은 이 저주사건을 빌미삼아 장옥정의 사사와 경종의 세자 폐위를 부추기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장희빈은 저주가 아닌 아들을 위한 치성이였을 뿐이라 억울함을 주장하였고 저주 증좌 역시 숙빈최씨의 고변 이외에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사건은 제대로 수사되지 않은 채 일망타진으로 장옥정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세자의 모후인 희빈 장씨를 사사하는 일은 너무한 처사" 라고 의견을 내는 남인들도 간혹 있었으나
상당 수의 남인들이 남인의 마지막 희망인 '경종'을 지키기 위하여 희빈장씨를 정치적희생양으로 내어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하여 숙종은 장희빈에게 자진하라는 비망기를 내렸다. 숙종 27년 (1701년 10월 8일) "장씨에게 자진할 것을 명하는 비망기를 내렸다." 숙종 27년(1701년 10월 10일) "임금이 장씨가 이미 자진하였다고 하교했다" 숙종실록에 장씨가 자진하였다 라고만 기록되고 더 이상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수 많은 드라마들 처럼 장희빈은 사약을 받고 죽은 것이 아닌 스스로 목을 메고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해본다. 그렇게 희빈 장씨는 42세의 나이로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남겨둔 채 숙종과 행복했던 취선당에서 쓸쓸하게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희빈 장씨의 이미지는 훗 날 영조가 모후인 숙빈최씨를 추증하던 때에 더욱 더 안좋게 퍼졌고 고종때에 희빈 장씨를 경종의 모후로써 복위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영조 때 뿌리깊게 박혀진 희빈장씨의 악녀 이미지 때문에 난항을 겪으며 무산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희빈 장씨의 죽음에서도 또 한가지 특이한 점이 있는데 궁 내에서는 왕실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는데 숙종이 희빈장씨에게 취선당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한 것이였다. 등장부터 이례적인 전례를 많이 남긴 희빈 장씨에게 장희빈다운 이례적인 최후가 아닐 수 없었다.
희빈 장씨가 죽고 다음 중궁전 후보로는 연잉군(훗날 영조)를 낳은 최숙빈이 유력했으나 숙종이 희빈에게 비망기를 내리기 하루 전 (숙종실록 1701년 10월 7일) "임금이 후궁에서 왕비로 승격되는 일을 금지시키는 법을 만들었다." 후궁 출신은 중전이 될 수 없는 법을 만들었다. 이를 두고, 혹자는 장희빈에게 질려 후대에는 자신과 같은 일이 없고자 그런 법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최숙빈이 왕비의 자리에 올라가 경종의 입지가 흔들리는 점을 막기 위하여 그리 했다는 가설이 더 설득력이 있게 전해진다.
장희빈의 장례는 종친부 1품의 급으로 인현왕후 못지않게 성대하게 치뤄졌으며 상례기간 역시 왕의 장례보다 딱 한 달 낮은 4개월이였고 세자 내외(경종)에게는 삼년상을 치루게 하며 기망제사도 꼭 참석하게 하였다. (경종이 후계를 이어가지 못하고 일찍 요절한 이유로 희빈 장씨가 죽으며 경종에게 해를 가하였다, 영조와 숙빈최씨가 독살을 하였다 등 경종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가 떠돌았으나, 경종은 태어났을 때부터 심신이 약하였고 어머니의 죽음을 직접 지켜본 충격에 마음의 병이 크게 생겼다는 후문이 있다.) 장희빈의 묘자리는 숙종이 직접 알아보러 다녀 경기도 양주로 골랐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훗 날 희빈 장씨의 양주 묘에 빗물이 새고 지리적으로 좋지 않다는 상소를 받고는 경기도 광주시 문형리로 묘를 이장해주었다. (도로개발문제로 희빈 장씨의 묘는 현재 숙종 묘가 있는 서오릉으로 이장되었다. 현재 장희빈 묘에 절을 하면 연애운이 생긴다는 미신과 장희빈의 기를 누르려고 바위로 눌러 놓았는데 기가 너무 쎄서 나무가 바위를 뚫고 나왔다는 미신이 전해 내려온다.) 희빈장씨의 생 마감 그 이후. 장희빈이 사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희빈 장씨의 죽음에 크게 공헌한 숙빈최씨는 숙종의 명령으로 궐 밖으로 출궁하였는데 곧 숙종이 숙빈이 머무는 곳이 너무 크고 화려하다며 숙빈의 사가 또한 크고 쾌적하니 거처를 옮길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사실상 출신이 불분명한 천인 출신 숙빈의 사가가 좋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하여 숙빈은 다른 조그만한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숙종은 숙빈최씨가 아들 연잉군을 평생 보지 못할 것을 명하였으나 어머니를 그리워 하는 연잉군을 위하여 훗날에는 함께 세월을 보낼 수 있게 해주었고 숙빈최씨가 출궁을 한 후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숙빈최씨를 단 한번도 찾지 않았다고 한다.
숙빈이 그렇게 쓸쓸한 말년을 보내며 세상을 떠나자, 연잉군(영조)의 모후인 숙빈의 장례가 열렸는데 희빈장씨의 장례와 비교하여 너무도 초라했다고 한다.
최씨의 묘자리를 숙종이 다섯번이나 반대했는데 그 이유중 하나는 묘자리 옆 산이 왕족히 묻힌 곳이라고 반대하며 그곳을 장지로 정했다는 내관을 파직할 정도였다.. 희빈 장씨의 묘에는 같은 산에 왕족의 묘가 있었음에도 숙빈의 묘만을 옆산이 왕족의 묘라고 반대한 점, 다른 여러곳도 골라오는 족족 다른 이유로 모두 반대하여 영조가 직접 묘자리를 알아보고 택점하였으나 숙종이 이런 영조의 처사를 크게 꾸짖은 점, 또 영조에게 일주일도 되지 않아 상복을 벗으라 명하여 상례기간을 치루지 못하게 한 점, 또한 숙종이 승하할 때까지 이복형제인 세자 윤(경종)이 대리청정을 통하여 정국을 다스렸던 점에서 심한 심리적 압박감을 느껴 훗날 영조에게 궁녀출신 어머니를 둔 왕으로써 큰 컴플렉스로 남게되었다고 한다. * 희빈 장씨의 악행이 후대에 이렇게 유명할 만큼 실록에 기록 된 것이 없다길래 흥미 돋아서 알아보고 쓴 글입니다. 희빈 장씨에 관해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부분들에 대하여 쓴 글이다보니 읽는 분들로 하여금 한 쪽으로 치우쳐 진 시각을 심어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세한 역사적 사실은 생략된 글이니 객관적인 판단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
진짜 존잼 ㅠㅠㅠㅠ그리고 장옥정사랑에살다는 진짜 인생드라마ㅠㅠ존재뮤ㅠㅜㅠ
ㅠㅠ...
장옥정 저 드라마 진짜 색감도 너무이쁘고 ㅠㅠㅠ무엇보다김태희 존ㅇㅖ보스에 연기도 잘함...장옥정 안좋은 이미지 다 사라짐
장옥정 인생드라마ㅜㅜㅜ3번은 돌려본듯
장옥정진심인생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