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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奠祭, drink offering)와 주의 몸
딤후4:6 나는 이제 부어지고 있으며, 내가 떠날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 을 지켰습니다.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나에게 그것을 보상으로 주실 것인데, 나에게만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 는 모든 사람에게 주실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태어나 과연 이보다 더 영광스럽고 아름다우며 확신에 찬 말을 할 수 있을까? 바울 형제의 이 고백과 확신, 자신의 유언이 되기도 한 이 말은 제겐 정말 가슴을 저며 오는 말입니다. 똑 같은 한 인간으로서 바울이 솔직히 너무 부럽습니다. 그러나 내 스스로 자문해 보건데 나의 이런 부러운 마음의 한 켠에는 바울 형제와 같은 그런 삶을 감당하고 수용할 만한 용기도 열정도 없다는 조용하고도 솔직한 음성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 주 예수여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6절에서 “떠날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고 말할 때의 “때”는 원어로 ‘카이로스 καιρός’입니다. 헬라어에서 시간을 표현하는 두 단어가 있는데 일반적인 물리적 시간이나 때를 표시할 때는 ‘크로노스 χρόνος’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의미 있는 어떤 때를 의미할 때는 ‘카이로스’ (a fixed and definite time(the decisive epoch waited for), the right time)로 표현합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께서 자기가 떠날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한 말에서, 세상 사람들처럼 우리가 단순히 세월이 가고 나이가 먹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의미 있는 때에 우리가 하나님 곁으로 가게 된다는 것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과연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지고 계시는 그 ‘의미’에 부응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용히 이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욥기서는 우리의 삶의 날들이 ‘베틀의 북처럼 빠르고’(7장 6절) 또한 ‘체부(遞夫 ; 우편배달부)보다 빠르다.’(9장 25절) 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바울 형제는 자신의 그 “의미 있는 때”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의 삶이 그 “의미”에 합당하게 살았음을 확신에 가득 차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삶인가요!
저는 교회에서 실행 중인 회복역 RSG에 동참하는 동안 빌립보서에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전제”라는 단어에 강한 부담을 주심을 느꼈습니다. 한 주일 동안 그 느낌에 순종하여 “전제”에 관해 추구하는 동안 저는 하나님께서 왜 저에게 그런 강한 부담을 주셨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제”가 하나님의 경륜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주의 몸”과 관련된 것이며 그 구체적이고도 확장된 새로운 이해를 주시기 위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 빌2:17 “그러나 여러분의 믿음의 희생 제물과 믿음의 봉사 위에 내가 전제로 부어지더라도, 나는 기뻐하며,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합니다.”
1. 전제(奠祭, drink offering)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연계시’의 흔적들은 인류의 문화와 역사를 조금만 주의해 보면 여러 곳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전제’의 희미한 그림자도 세계의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성묘 때 술을 붓는데 이것은 땅 아래로 내려간 조상의 백(魄)을 불러오기 위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진리로 계시된 전제의 의미가 왜곡되고 오히려 그것이 사단이 사람을 붙들어 매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단은 본래 속이는 자이고 인간도 자신의 정욕에 따라 속는 자입니다. 속이고 속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그런 인간입니다.
- 렘 19:13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 곧 그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萬象)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奠祭)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 하셨다 하라”(렘32:29; 렘44:17,18; 겔20:28)
오! 주 예수여! 그런데 내가 구원받다니요!
그러므로 내가 구원 받은 것도 전적인 당신의 은혜요, 더구나 손발이 마비된 자와 같이 되지 않고 당신의 몸을 알고 그 안에서 풍성히 공급받고 누리게 함도 오직 전적인 당신의 은혜입니다. 백만번 생각해도 오직 당신만이 모든 것이며, 일생에 우리가 구할 것이 당신 밖에 없음을 진심으로 고백 드립니다.
2. 전제의 의미 원어 성경에서 "전제"란 단어를 검색해보면 구약에서 64번, 신약에서는 단 2번 사용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전제’는 히브리어로 נסך(necek 네섹)으로서 ‘술을 붓는 제사’를 의미하며, 비유적으로 ‘부어 만든 형상’ 이나 ‘부어진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drink offering, libation, molten image, something poured out), 신약에서는 빌2:17과 딤후4:6에서 ‘스펜도 σπένδω’로서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관제’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전제의 사전적 의미는, “구약 시대에 행해진 제사 방법 중의 하나로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붓는 의식을 말하며(출29:40-41, 민15:5), 제물을 제단에 올려놓고 불사르기 전에 그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의식입니다.(출30:9, 레23:13)” 하지만 전제가 가지고 있는 참 의미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석은 빌립보서 라이프스타디 메시지 14번에 있습니다. The drink offering was additional to the basic offerings revealed in Leviticus chapters one through seven (Num. 15:1-10; 28:7-10). The basic offerings were types of various aspects of Christ. The drink offering was a type of Christ as enjoyed by the offerer, an offering that fills him with Christ as the heavenly wine and even causes him to become wine to God. The apostle Paul became such a drink offering by so enjoying Christ that he could be poured out by the shedding of his blood upon the believers’ faith as a sacrifice to God. 전제는 레위기 1장에서 7장을 통해 계시된 대로 기본적인 제사에 첨가되는 것입니다.(민15:1-10; 28:7-10 참조) 기본적인 제사는 그리스도의 다양한 방면들을 예표 합니다. 그러나 전제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누린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늘에 속한 포도주로서 자신 안에 가득 채워질 때 그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에게 자신을 심지어 포도주가 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그리스도를 극도로 누렸고 그리고 지체들의 믿음 위에 자신의 피를 뿌림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희생 제물로서 전제로 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The burnt offering, the meal offering, the peace offering, the sin offering, and the trespass offering were the basic offerings, but the drink offering was not. The five basic offerings covered in chapters one through seven of Leviticus are types of various aspects of what Christ is to God on our behalf. If we read Numbers 15:1-10 and 28:7-10, we shall see that the drink offering was something additional. If one of the basic offerings was offered without the drink offering, this was an indication that there was something lacking with the presentation of the basic offering. The one who offered the basic offering must have been rather poor.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그리고 속건제 이 다섯 가지는 기본적인 제사입니다. 그러나 전제는 아닙니다. 레위기 1장부터 7장에서 다루어진 다섯 가지 기본적 제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다양한 방면들을 예표 합니다. 민수기 15:1-10과 28:7-10을 읽어본다면 전제가 기본적 제사에 더하여진 어떤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한 사람이 전제가 없이 기본적인 제사만을 드렸다면, 우리는 그가 드린 제사에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제사만을 드리는 것은 부족한 것입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전제는 기본적인 제사 위에 부가하여 드리는 제사이지만, 그것에 더하여 전제를 드리는 사람이 자신 안에 충만히 채워지고 누려서 조성된 그리스도가 바로 전제의 조성물임을 리 형제님께서는 새롭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전제를 붓는 대상이 교회의 지체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몸인 교회 생활을 함에 있어 기본적인 제사만으로는 부족한 것입니다. 거기에 전제가 부어질 때 비로소 교회가 건축되며 하나님의 만족이 되며, 또한 드리는 자의 기쁨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통해 우리가 얻은 객관적인 그리스도는 기본 제사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위에 온전히 누린 그리스도가 있어야 하고 또한 지체에게 부어져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하늘의 포도주 곧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3. 성경에 숨겨져 있는 전제의 실제(實際) 라이프스타디를 통해 전제의 의미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참된 의미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전제’에 관한 성경의 단어를 전부 검색해 보면서, 또한 전제가 실제로 행해진 성경의 실례를 보면서 그 안에 놀라운 사실이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제가 언제나 주의 몸과 함께 언급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하락은 바로 이 몸을 보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전제를 통해 몸을 보게 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우리 모든 지체들이 전제로서 교회 위에 부어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전제가 성경에서 사용된 예를 보면 ①전제를 드리는 방법에 대한 기술(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②제사로서 전제를 드린 사례(열왕기하, 역대상하) ③잘못된 전제에 대한 지적(이사야서; 부어 만든 주상에 대한 기술,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전제의 참된 의미를 계시해주는 사례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록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놀랍게도 주의 몸과 관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래에서 전제가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성경의 다섯 가지 사례와 그 안에 내포된 의미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 야곱이 드린 전제와 주의 몸 성경에서 ‘전제’란 단어가 최초로 언급된 곳은 출애굽기나 레위기에서 구체적인 규례로서 전제가 주어지기 전인 창세기의 야곱에게서 입니다. 야곱이야말로 바로 천연적인 우리의 상태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형 에서를 피해 머나먼 타향에서 오랜 세월 갖은 고초를 겪은 후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형 에서가 옛날 일을 잊지 않고 그를 해치기 위해 마중 나옵니다. 얍복 강을 앞에 두고 모든 식솔들과 가족들만 먼저 보낸 체 자신만 홀로 남은 야곱이 고민으로 밤을 맞게 됩니다. 그 때 한 천사가 나타나 다짜고짜 야곱을 붙잡고 씨름을 하게 됩니다. 날이 새도록 씨름하다가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칩니다. 환도뼈는 넓적다리로서 우리의 천연적인 힘의 근원입니다.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져 축 늘어진 채 가려는 천사를 붙들고 축복을 구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야곱의 이름을 묻고,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축복한 후 떠나게 됩니다. 야곱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동안 자신의 힘과 꾀에 의지해 살았던 자신의 무능함과 추한 모습의 실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음을 깊이깊이 경험합니다. 그 때부터 야곱은 다리를 절었습니다. 그는 다리를 절 때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주께서 모든 것임을 경험하고 살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거듭난 것입니다. 그리고 34장에서 야곱은 형 에서와 화해하게 되며 그런 자신의 변화를 하나님께 고백하게 되는데 세겜에서 여호와 앞에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 합니다. 여기서 "엘 엘로헤 이스라엘"의 의미는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하나님”(El-elohe-Israel = "the mighty God of Israel")입니다. 이것은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그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의 고백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실재요 능력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이 전부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야곱의 경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또 하나의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34장에서 야곱은 예기치 않은 비통한 일을 겪게 됩니다.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외동딸 디나가 히위 족속 세겜에 의해 강간을 당하는 사건을 겪게 됩니다. 그는 이 일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겪었지만 사실 야곱에겐 더 큰 충격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화가 난 아들들이 그들에게 할례 받지 않은 족속에겐 누이를 줄 수 없다며 거짓으로 할례를 받게 한 후, 그들이 심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가지고 성을 습격하여 모든 사람을 살육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야곱은 이 일로 말로 할 수 없는 충격을 겪게 됩니다. 자신의 분신이요 자식이 당한 일과 또한 그들이 저지른 일로 심한 고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욱 야곱을 절망케 한 것은 아들들이 하나님이 주신 할례의 약속을 가지고 그들을 속이고 사건을 저지른 것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세겜이 나쁜 방법으로 디나를 취했지만 그들은 디나를 아내로 맞아들이길 원했으며,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규례인 할례까지 받았음에도 아들들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야곱은 이 사건과 과정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그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겪게 되며 드디어 하늘에 속한 이상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자신 만이 아니요 하나님의 집 곧 주님의 몸의 하나라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낳은 분신이요 자식이 저지른 그것이 고스란히 자신의 아픔이 되었습니다. 마치 다메섹 도상에서 주께서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하신 것과 동일한 이상을 본 것입니다. 그런 후 35장에서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서 그곳에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벧엘”이라 부릅니다. 그런 뒤 밧단아람을 거쳐 다시 돌아온 다음 그곳에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를 붓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전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벧엘”이라 부릅니다. 히브리어에서 '벧'( בית )은 ‘집’을 말하며, '엘'( אל )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엘벧엘" (El Bethel = "The God of the House of God") 곧 “하나님 집의 하나님”이라는 야곱의 이 신앙 고백은 곧 앞에서 “엘 엘로헤 이스라엘” 즉 자신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개인적인 고백에서, 한 걸음 더 그 계시가 나아가 주님을 하나님 집의 하나님 곧 몸의 하나님임을 본 것입니다. 할렐루야! - 창35:14-15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우리의 계시도 이곳에 이르러야 비로소 온전한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회복 안에서 우리가 이러한 계시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축복입니다. 제가 이것을 보게 된 것은 주를 믿은 지 20년이 지나서입니다. 야곱처럼 과정을 통과한 다음에 비로소 몸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자신의 신앙 고백 위에 야곱은 전제를 붓게 됩니다. 기본제사 위에 첨가되는 전제는 이와 같이 몸을 위한 것입니다. 이런 전제가 따를 때 우리의 헌신은 비로소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 정말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몸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잘못된 길(정욕으로나 신비주의로)로 가게 됩니다. 몸의 공급과 보호와 제한이 없으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어쩌면 구조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몸의 계시를 보여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나. 민수기 15장에 나타난 전제와 주의 몸 민수기 13장, 14장에서 모세는 열두지파에서 한 사람씩을 뽑아서 그들이 들어갈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보냅니다. 하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소극적인 보고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와 아론은 물론 여호와까지도 원망하면서 차라리 애굽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백성의 죄를 사해 달라고 여호와께 간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간청대로 죄는 사하겠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백성이 결단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에게 맹세하여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애굽에서 나온 일세대의 백성들은 모조리 죽고 오직 여호수와 갈렙 단 두 사람과 이세대인 그들의 자녀들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말씀을 하신 후, 15장에 이르러 하나님께서는 그 남은 백성들 곧 광야에서 죽지 않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백성들이 그 땅에서 할 일을 모세에게 일러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제사에 관한 규례들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리 형제님께서 언급하신 대로 다섯 가지 기본제사들이 언급되면서 거기에 전제를 드릴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민수기 15장에서 언급하는 제사 규례는 40년 후에 그 땅에 들어가서 행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원망하는 일이 있고 난 후에 언급하셨으며, 그리고 그 땅에 들어가서 기본제사에 더하여 전제를 드릴 것을 명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쳐야 할 과정이지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최종 목적지는 그리스도의 예표인 가나안 땅입니다.
그렇다면 그 땅에 들어가서 드릴 제사에 왜 전제를 드릴 것을 언급하셨을까요? 그것은 그 가나안 땅이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간 후 각자 거하고 누리고 싸울 땅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가나안 땅의 예표에 대해 많은 말씀을 공급받았습니다. 그 땅은 제사장을 필두로 하여 백성이 단체적으로 요단강을 건너서 일시에 들어간 땅이지 한 사람씩 따로 들어간 땅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자 위에서 내리던 물이 마치 보이지 않는 투명유리에 막힌 것처럼 쌓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꺼번에 단체로 그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 땅은 더 이상 개인의 누림만을 위한 땅이 아닙니다. 몸이 누릴 땅이요, 몸이 경작할 땅이며, 단체적인 전투를 치를 땅인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몸으로서 함께 누릴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런 단체적인 누림에는 반드시 지체 상호간에 자신이 누린 그리스도가 지체를 위해 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몸은 자라고 교회는 건축되며, 단체적인 한 새 예루살렘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에 필요한 것이 "전제"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 땅에서 행할 것을 미리 모세를 통해 명하시면서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이 '번제'와 '소제'와 '화제'와 '속죄제'를 드릴 때에 전제를 행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이 부분의 성경에서 '속건제'가 빠져 있는데 그것은 속건제가 개인적인 자신의 죄를 위해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땅과 몸과 그리고 전제는 필연적으로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면서 지체를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를 위해 죽었습니까? 바로 몸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면서 몸을 모른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 주 예수여! 그들의 가린 베일을 걷어주시고 관념의 벽을 허물어주시옵소서. 아멘!
다. 초실절과 오순절과 초막절 그리고 전제와 주의 몸 <초실절 규례> - 레23:10, 13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오순절 규례> - 레23:16, 18 “제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실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는 또 이 떡과 함께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일곱과 젊은 수소 하나와 숫양 둘을 드리되 이들을 그 소제와 그 전제와 함께 여호와께 드려서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며” <초막절 규례> - 레23:34, 37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 월 십오 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삼고 번제와 소제와 희생과 전제를 각각 그날에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지니” 우리가 잘 알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규례 중에는 “일곱 절기”와 “다섯 제사”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다섯 제사”도 그리스도의 모형이지만, “일곱 제사” 역시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규례대로 일곱 절기와 다섯 제사를 지켜야만 했습니다. '제사'는 공간을 관통하고 '절기'는 시간을 관통합니다. 그러므로 둘이 합쳐 주님을 온전히 계시합니다.
일곱 절기는 ①유월절 ②무교절 ③초실절 ④오순절 ⑤나팔절 ⑥속죄절 ⑦초막절입니다. 그리고 이에 관한 규례는 모두 레위기 23장에 있습니다. 앞의 네 절기는 이미 역사 가운데서 시대적인 성취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뒤의 세 절기는 장차 도래할 것입니다. 이 절기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레위기 라이프스다디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결정성경의 “결정 240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일곱 절기 중에 왜 하필 초실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의 규례에만 “전제”가 언급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형제자매들께서도 이미 간파하셨겠지만, 이 세 절기가 모두 주님의 몸과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1) 초실절은 바로 주의 부활을 상징하는 절기입니다. 주께서는 한 알의 밀알로 자신을 드림으로써 많은 열매 곧 당신의 몸을 얻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곡물을 거둘 때에 그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가서 거제로(이삭을 흔들어서 드리는 제사) 드려야 했습니다. 주님은 한 알의 밀알로 자신을 죽음에 넘기셨지만, 그러나 그 분의 죽음은 많은 열매로 결실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초실절 날에 소제에 전제를 붓도록 정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붓는 전제가 많은 열매 곧 주의 몸과 관련되어 부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구약의 오순절 절기는 신약에 와서 성취가 되는데, 주께서 부활에서부터 계산하여 정확히 오십 번째 되는 날에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셨고 모든 사람이 충일하게 한 영으로 침례 받음으로 인해 교회 곧 주의 몸이 산출된 것입니다. 따라서 레위기 23장의 오순절 날에 전제를 드린 것은 바로 주의 몸과 관련된 것입니다. 3) 초막절 절기는 여호와의 마지막 절기로서 큰 기쁨과 즐거움을 표시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장차 천년왕국에서 성취되며, 옛 창조 안의 완전한 한 과정의 시기와 시대에서 하나님께서 그 분의 구속받은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하신 모든 것의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때의 주인공은 특별히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이긴 자들이 주와 함께 공동 왕들과 제사장들이 되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대에서 혼 생명을 잃어버림으로서 오는 시대에 이기는 자가 되는 길을 취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에 전제가 부어짐도 역시 주의 몸에 관련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라. 그리스도와 전제 본성적인 면에서 하나님은 그 거룩으로 인해 피조물과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거룩 곧 “쉐키나”는 우리 피조물에게 하나님과 똑 같이 거룩하던지, 아니면 죽든지 둘 중의 하나를 요구할 뿐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피조세계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임재 하셨던 지성소에 들어갈 때입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그는 방울을 달고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거룩에 합당치 않을 때 지성소에서 즉사하기 때문입니다. 방울소리가 들리면 살아있는 것이요, 들리지 않으면 죽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은 엄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내 안에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죽이신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가 임할 때 산은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으로 덥혔으며, 나팔 소리가 크게 들리고 연기가 자욱하였습니다. 심지어 죄를 알지도 못하는 짐승까지도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본래 이와 같은 것입니다. 결코 거룩하지 않은 피조물과 함께 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숨을 거두실 때 해가 빛을 잃었으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시내산에서 있었던 그 현상들이 동일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주께서는 당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심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거룩과 죽음 외에는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우리에게 사망 대신에 하나님의 그 거룩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위해 전제의 참 실재인 피를 당신의 몸을 산출하기 위해 흘리신 것입니다.
그 보배로운 피는 그가 구속하실 몸 위에 뿌려졌으며,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은 물론이요, 생명과 본성과 그 표현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사람’이 되는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전제의 실제는 그리스도이며 그 분이 성취하신 것입니다.
마. 바울과 전제 전제의 실체가 그리스도에게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에게 채워져야 할 잔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그 분께서 이루신 객관적인 기본제사의 모든 요소들을 우리 안에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것이며 그것을 내 안에 있는 성령께서 영원히 보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관적인 면에서 그 분의 생명으로 끊임없이 채워져야 하고 적셔져야 하고 조성되어져야 하며, 결국에는 지체들에게 전제로 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빌2:17절에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전제로 바칠 것이라고 하면서 보여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글의 처음에서 언급된 대로 딤후4:6절에서 결실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전제가 몸과 관련된 것임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누린 전제에 대해 리형제님의 라이프스타디에서 아름다운 글을 인용해 봅니다. With the typology in the Old Testament as a basis, Paul came to regard himself as a drink offering poured out upon the sacrifice and priestly service of the believers’ faith. For years Paul had been drinking of Christ and enjoying Him so that he came to the point that he was filled with Christ and saturated with Him. Eventually, Christ as the heavenly wine caused Paul to become a constitution of wine in his very being. This was the reason Paul could consider himself wine poured out as a drink offering upon the sacrifice he offered to God as a priest. 구약의 예표를 기반으로, 바울은 자신을 믿는 이들의 믿음의 희생과 제사장의 봉사 위에 부어지는 전제로서 여겼던 것입니다. 수년 동안 바울은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채워지고 침투될 때까지 그 분을 마시고 누려왔던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늘의 포도주로서 바울로 하여금 그의 실재(實在)에 있어서 하늘에 속한 그 포도주의 성분이 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자신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드린 제물 위에 바로 자신이 전제로 부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 하였으며 확신케 한 실제(實際)인 것입니다. Both the believers’ faith as the basic offering and the drink offering are something which has been constituted over a period of time. Faith does not grow and develop suddenly, for it is a constitution of the believers’ enjoyment of Christ and spiritual experience. Likewise, a drink offering can only be produced out of our experience with the Lord. In order to become a drink offering, we need to be filled with the Lord and saturated with Him. Only in this way can we have the spiritual constitution which makes us a drink offering. What a tremendous matter that sinners such as we can be constituted into heavenly wine for God’s satisfaction! 그러나 기본 제사로서의 성도의 믿음과 그리고 전제는 둘 다 시간을 요합니다. 이런 믿음은 갑자기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는 이의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누림과 영적 경험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전제도 우리의 주님에 대한 영적 경험으로부터 산출됩니다. 전제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으로 채워져야 하고 또한 그로 적셔져야 합니다. 오직 이 길만이 우리를 전제가 되게 하는 영적 조성을 이루게 합니다. 죄인인 우리와 같은 자를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하늘의 포도주로 조성되게 하는 이 일보다 더 놀랍고 큰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4. 글을 마치면서 지금까지 전제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알고 그런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에 있어 자신 안에 승천 안에서 하늘에 속한 포도주로 계시는 주께서 가득 채워지고 적셔지지 않고 메마른 상태에 있다면 그것보다 안타까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 형제처럼 끊임없이 하늘에 속한 포도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채워지도록 그 분을 앙망하고 그 분 앞에 모든 것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아닌 모든 것을 놓고 오직 그 분만을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분은 내 안에서 전제로 채워질 것이고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전제가 되어 지체들 위에 부어질 것입니다. 오! 주 예수여! 간절히 바라오니 내 안에 당신으로 가득 채워주소서, 그리고 지체 위에 뿌려지길 원합니다. 오늘도 주께서는 애통한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의 전제로 드려지는 바울 형제를 보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 형제를 보았을 때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기쁠까요? 그러나 혹시라도 이 땅에서 전제가 끊어지거나 메말라서 주님께서 이런 애통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 것은 혹 아닐까요? - 요엘 1:13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를 입고 밤이 맞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참고 ; 욜1:8-9; 2:14) 주여 두려운 마음으로 당신 앞에 섭니다. 나를 받으시옵소서! 오직 당신으로 더욱 채워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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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하늘이 열립니다.
아멘. 형제님 풍성하네요. 달콤하고요.
'전제' 에 대해서 공급해주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