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희로 절편계 친선인(戒喜怒、絶偏係, 親善人.)
“기뻐하거나 성내는 것을 경계하고, 편견을 끊으며, 착한 사람을 가까이 하여야 합니다[계희로 절편계 친선인(戒喜怒、絶偏係, 親善人,)]”
이는 백강 이경여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효종대왕에게 올린 마지막 당부의 말씀이다. 병자호란 후 피폐해진 나라를 바로잡아 국민들을 잘 살 수 있게 하고 나아가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해서 임금에게 가장 필요한 다스림의 도(道)를 말씀한 것인데, 이는 오늘날도 나라를 이끄는 리더가 반드시 되새겨 들어야할 교훈으로 생각된다.
대통령이 기뻐하는 감정을 쉽게 나타내면 아랫사람들이 이를 이용하여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는 데 이용하기 쉽고, 대통령이 성급하게 화를 내면 마음의 평정을 잃어 판단력을 흐리게 되며 아랫사람들의 비웃음과 이용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그러므로 대통령은 항상 평정심을 유지 하여야 한다.
대통령은 모든 국민들의 말을 두루 치우침 없이 들어야 하는데 일부 듣기 좋은 말만 들으면 민심을 잃고 정도에서 벗어나서 망하는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백강 이경여 선생은 사람의 마음이 가장 소중하다고 보아 학문을 하는 목적으로 민심(人心)을 바르게 살필 것을 가장 강조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學貴多聞 且闕疑 升高致遠 有前期(학귀다문 차궐의 승고치원 유전기)
千塗萬轍 同歸一 要把人心 戒入危(천도만철 동귀일 요파인심 계입위)
학문은 많이 듣고 널리 물어 의아(疑訝)한 것을 아는데 귀함이 있는 것이니, 그 배움이 높고 멀리 이르고자 하면 먼저 기약함이 있어야 한다.
학문하는 길은 천 가지 길과 만 가지 수레바퀴가 있으나 궁극은 하나이니, 반드시 민심(人心)을 옳게 파악해서 위험한 길에 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은 이미 오랫동안 수많은 애국 국민들이 극도로 심각한 부정선거의혹을 수사하라는 외침이 강을 이루고 있는 형편인데도 이를 애써 외면하고 모르는 체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은 국민들의 마음에 분노를 심어 언제인가는 화산처럼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 이는 가장 중대하고 화급한 문제로 이를 소홀히 하다가는 머지않아 나라가 무너져 내려 공산·전체주의국가로 전락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주변의 인물들을 사사로운 욕심에 찬 사람을 멀리하고 인륜도의(人倫道義)에 충실하고 경륜(經綸)을 갖춘 정직한 사람들로 채우고 바른 말을 수시로 구해야 일마다 올바른 조언을 들을 수 있어 대사를 그르치지 않을 수가 있다. 생각건대 얼마 전 2030세계박람회를 유치하려고 스스로 발 벗고 나서다가 참패를 당한 것은 바로 이런 점이 부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2024. 2.24. 素淡
효종 8년(1657년) 8월 8일 영중추부사 이경여의 졸기 및 그의 유차(遺箚)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죽었다. 그의 유차(遺箚)에,
“신이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나 티끌만큼의 도움도 드리지 못한 채 지금 미천한 신의 병세가 위독해져 하찮은 목숨이 곧 끊어지게 되어 다시금 상의 모습을 우러러 뵙지 못하고서 밝은 시대를 영원히 결별하게 되었으니 이 점을 땅속으로 들어가면서 구구하게 한하고 있습니다. 오직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기뻐하거나 성내는 것을 경계하고 편견을 끊으시며 착한 사람을 가까이 하고 백성의 힘을 양성하여 원대한 업을 공고하게 다져 죽음을 눈앞에 둔 신하의 소원에 부응해 주소서. 신의 정신이 이미 흩어져 직접 초안을 잡지 못하고 신의 자식에게 구두로 불러 주어 죽은 뒤에 올리도록 하였습니다.”하였는데,
상이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막 원로를 잃고 내 몹시 슬퍼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이어 유소를 받아 보니 경계해 가르침이 더없이 절실하고 내용이 깊고 멀어 간절한 충성과 연연해하는 정성이 말에 넘쳐흘렀으므로 더욱 슬퍼서 마음을 진정할 수 없다. 띠에다 써서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경여는 인품이 단아하고 몸가짐이 맑고 간결하였으며 문학에도 뛰어난데다 정사의 재능도 있어서 사림들에게 존중받았다. 젊은 시절부터 벼슬에 나오고 물러가는 것을 구차하게 하지 않았고 혼조(昏朝)1) 에 있으면서도 정도를 지켜 굽히지 않았다. 계해 반정(癸亥反正)2) 에 맨 먼저 옥당에 뽑혀 들어가 화평하고 조용하게 간하니 사랑과 대우가 특별히 높았다. 고 정승 장유(張維)가 일찍이 한 시대의 인물을 평론하면서 말하기를 “이경여는 경악(經幄)에 있을 때에는 마음을 쏟아 임금을 인도하는 책임을 다했고 지방에 있을 때에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펴는 임무를 다했으니 지금에 있어서 재능을 두루 갖춘 자이다”고 하였다. 병자년 이후로 벼슬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인조가 그를 소중하게 여기고 신임하였으므로 발탁해 우상에 제수하였다. 그런데 이계(李烓)가, 경여가 명나라에 뜻을 두고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는다고 청나라 사람에게 고하여 두 번이나 심양에 잡혀갔었으나 몸과 마음가짐이 더욱 굳건하였다. 을유년 세자를 세울 때 자기의 소견을 변동하지 않았는데3) 이로 인해서 남북으로 귀양살이를 다녔으나 상이 즉위하자 방면하고 수상에 제수하였다. 이 때 선비들의 의논이 매우 격렬하였으나 경여가 화평한 의논으로 견지하면서 이들을 조화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는데 혹 이를 그의 단점으로 여기기도 했다. 얼마 안되어 청나라에서 경여가 정승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힐책하자 이 때부터 정승의 자리에서 물러나 묻혀 살았다. 그러나 나라에 일이 있을 때마다 말씀을 올려 건의한 바가 많았었다. 이 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73세이다.
[註 1005]혼조(昏朝) : 광해군.
[註 1006]계해 반정(癸亥反正) : 인조 반정.
[註 1007]을유년 세자를 세울 때 자기의 소견을 변동하지 않았는데 : 인조 23년에 소현 세자가 죽고 봉림 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경여가 반대하였다.
○戊寅/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李敬輿卒。 遺箚曰:
臣受國厚恩, 無補涓埃, 今者賤疾已革, 微喘將絶, 更不得瞻望玉色, 永訣明時, 此爲區區入地之恨耳。 唯願聖明, 戒喜怒、絶偏係, 親善人、養民力, 以鞏遠大之業, 以副臨簀之願。 臣神精已散, 未能搆草, 口授臣子, 以爲死後之獻。"
上下敎于政院曰: “新喪元老, 予用痛悼, 繼有遺疏, 而誡誨切至, 語意深遠, 懇懇之忠, 戀戀之誠, 溢於辭表, 益用悲愴, 無以爲懷。可不書紳, 而服膺焉。”
敬輿爲人端雅, 律己淸簡, 優於文學, 且有政事才, 爲士林所推重。 自少進退不苟, 在昏朝守正不撓。 癸亥反正, 首入玉堂, 雍容納約, 眷遇特隆。 故相張維, 嘗論一時人物曰: ‘在經幄盡啓沃之責, 按藩服盡承宣之任, 當爲今世全才云。’ 丙子以後, 不樂仕宦, 而仁祖倚重之, 擢授右相。 李烓以敬輿志在南朝, 不書淸國年號, 告于淸人, 拘入瀋陽者再, 而操履愈堅。 乙酉建儲之際, 不變己見, 坐是竄逐南北, 上卽位, 遂放還, 拜首相。 時士論峻激, 而敬輿持論和平, 專務調劑, 或以此短之。 未幾淸國聞敬輿作相詰之, 自是免相屛居, 而國有事, 輒進言多所建白, 至是卒, 年七十三。
<출처 :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