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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5: 6 밖에 버려져 - 요 15: 7 내 안에 거하고
요 15: 6 밖에 버려져 -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
잘라낸 가지는 말라 결국은 생명을 잃게 되고 열매를 맺는 것 위에는 아무 쓸모도 없는 포도나무는 불에 태워질 수밖에 없다.
이 말씀은 계 3: 1의 사데 교회의 경우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경고를 생각나게 한다.
1]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예수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연합과 교통은 날마다 말씀의 묵상과 기도, 성령의 감동과 인도, 믿음과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처럼 주님과 밀접히 교제하는 성도는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가 우리의 의와 생명이 되며 또 선행을 위한 힘과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2]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즉 그가 중생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으면, 그는 죽은 가지처럼 말라지고 버린 바 되고 지옥불에 던져질 것이다.
3] 참 포도나무와 가지 (요 15: 1-6)
예수님의 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열매와의 관계를 심오하게 말씀하신 것으로 뜻이 매우 깊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가룟 유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 다음에 하신 말씀으로,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신 가지란 곧 이 유다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 것이라고 해석한다.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아 꺾어진 가지처럼 불에 던져지지 않으려면 적어도 과실을 맺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1) 참 포도나무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는 말씀의 바른 해석은 “내가 그 참된 그 포도나무요”란 뜻이다. 여기서 포도나무란 생명의 과실을 맺는 생명의 나무로 하늘의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내려오신 둘째 사람을 말씀하신 다.
* 고전 15: 47 -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그러므로 인간에게 하나님의 새 생명을 공급해 줄 수 있는 나무란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하신 예수님밖에는 이 세상에 없다.
* 행 4: 12 -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① 예수님은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자기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표현하심으로 인간의 구원을 이루심에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밝히셨다.
②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이 다섯으로 나와 있다.
한 분은 참 포도나무가 되시는 예수님이다. 다른 한 분은 내 아버지라고 하신 농부이신 하나님이요, 세 번째는 열매 맺는 가지로 비유된 그리스도인들이며, 네 번째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들로 이들은 가라지들이며 다섯째는 열매 맺지 아니하는 가지들을 불에 던져 넣는 자들로 이 존재는 천사들을 가리키고 있다.
(2) 농부이신 하나님
우리는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서 열매를 맺으시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롬 7: 4).
① 하나님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이를 제해 버리신다.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한없는 은혜를 베푸셨다.
* 롬 5: 8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아무런 공로 없이 의롭다고 하심을 얻었고 생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 같은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그 후의 생활에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아니해도 된다고 하는 보증이 될 수는 없다.
② 중생은 새로운 영적인 생활의 시작이다.
우리가 거듭나기 이전에는 육적인 생명 안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이 불가능했다.
* 롬 8: 5-8 –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인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이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③ 나무와 열매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하셨다.
* 마 7: 16-18 –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우리가 참 포도나무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매인 영적인 열매를 맺어야 한다.
④ 하나님은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신다.
* 눅 13: 7 -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더 두고 보았자 열매를 맺을 가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다.
⑤ 하나님은 열매를 맺는 가지에 대하여 축복해 주신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똑같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많이 맺는 사람도 있고 적게 맺는 사람도 있다. 이 열매는 자신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자신이 받은 사명의 달란트대로 맺게 되는 것이다.
열매는 깨끗한 데서 열린다. 여기서 깨끗하다는 말은 ‘카다리조’로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생활, 도덕적인 순결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우리의 마음의 새로운 변화를 말한다.
과실을 더 맺게 하여 주신다고 하셨다. 우리가 맺는 작은 열매는 하나님의 더욱 풍성하신 축복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30배나 60배, 100배로 풍성하게 열매를 맺게 하신다.
* 고후 9: 10 -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5)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사도 바울은 현세의 복과 내세의 복을 알려 주었다. 먹을 양식은 현세의 복을 의미하며 씨는 내세의 복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향한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 아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빌 1: 6).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는 거짓 없는 순종의 의지만 간결히 보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육신의 정욕으로 따라 사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의지적인 노력이 뒤따를 때 열매를 많이 맺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요 15: 7 내 안에 거하고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주께서는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그의 말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으로 표현하셨다.
1]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그 아래 말씀이 알려 주는 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속에 가진 자이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의 왕좌를 점령하였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을 그의 대리(代理)로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 권위를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살아 계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
이처럼 주님 안에 거한 생활의 유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약에 참여한 자로서 신종(信從)하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한 성도의 신분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쓸 수 있고, 또한 성령께서 그런 성도의 의지를 성화(聖化)시켜 주님의 뜻대로만 기도할 수 있게 하신다. 곧 그가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여 기도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응답 되지 않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속죄의 복음을 믿는 자는 그 복음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자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되어 그의 영이 그 속에 계시고 그의 말씀이 그 속에 있는 자들에게는 복된 약속이 있다.
2]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것은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이다. 기도 응답은 구원받은 성도의 특권이다.
* 요 14: 13-14 –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그러나 성도도 죄 가운데 있으면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할 것이다.
* 사 59: 1-2 –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밀접히 교제하며 선한 열매를 맺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을 때 기도 응답의 특권은 더욱 효력을 나타낼 것이다.
* 요일 3: 21-22 –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할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상반절에서 벌써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생활이,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되어 있다.
성도가 주님과 연합한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의 계약 행위, 곧, 선택이 그 기본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순종이 그 실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부적 생활에서만 근근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얕은 경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깊은 계약과 생명에서 움직이는 내면적인 경건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무엇이든지 응답을 받는다는 진리는, 요한이 그 시선에서도 말씀한 바 있다. 곧,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라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요일 5: 14).
기도 응답을 받는 자들은 이렇게 내면적인 경건의 소유자들이다. 기도 응답을 많이 받은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고(신 34: 10), 히스기야는, 기도하여 자기의 병 고침을 받았다.
* 사 38: 2-6 – 2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3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 4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6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 왕하 20: 5-6 – 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6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그는 기도하여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파멸시켰다.
* 왕하 19: 14-19, 35 – 14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15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16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17 여호와여 앗수르 여러 왕이 과연 여러 민족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고 18 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19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3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하나님 앞에서 자백한 대로,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할 만큼, 경건하였다.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사도들을 위시하여 일반 성도들 전체에게 허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짐을 져 주시는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이다.
히 4: 14-16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약 5: 17-18에 말하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큰 죄인들도 회개하며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데, 구약 시대에도 그러하였고, 신약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 대하 33: 10-13 – 10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11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시매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간지라. 12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13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눅 18: 13-14에 말하기를,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였고, 계 3: 19-20에는 말하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하였다.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를 이 말씀에 비교하여 생각해 보면, 예수님 안에 거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도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이다.
예수 안에만 거한다면 이미 다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예수께 붙어 있는 가지가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올바른 간구는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 요일 2: 16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오직 자신에게 향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 롬 12: 2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루리라(genhvsetai 게네세타이)는 "- 되다"의 뜻으로 '이미 이루어졌다'는 뜻으로 사용되어 막 11: 24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라는 말씀을 연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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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사람은 망설이지만 시간은 망설이지 않는다
잃어버린 시간은 되돌아 오지 않는다 ".라는 말처럼
오늘도 내일도 ...순간 순간을 놓치지 말고
최고의 하루를 보내십시요.💖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