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본문 전인 예레미야 26장 1~6절에서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이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너는 그들에게 이와 같이 이르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에게 나의 종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 그들의 말을 순종하라고 하였으나 너희는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증거된 말씀과 그 후에 증거되어 있는 말씀에서 잘 알 수 있는 것이듯이..
하나님의 선지자인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증거함에 있어서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 그대로 증거했을 정도의 말씀의 사람, 말씀의 신앙, 말씀에 최우선을 둔 치열하고 절실한 믿음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실제로 악한 세력들이 가득한 이 험악한 세상에서의 이치와 현실들, 상황과 실제들에 따라 정말 예레미야가 거의 죽임당하기 직전의 실상까지 된 것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아히감에 의해 죽음을 면하게 되었는데 물론 죽음이라는 것이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든지 죽지 않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라든지 순교 같은 죽음이 하나님의 섭리와 영광 안에 있는 것임이 아니라든지 등의 의미는 전혀 아닌 것이고, 진정 역경이나 죽음을 위시해서 모든 일들이 우리 인생들이 예측하기 힘든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인도 가운데에 속할 수 있는 것임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살아 있는 믿음과 함께 죽을 위기도 넘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응답과 선물과 이적들 등이 하나님의 세계에 있어 결코 작은 비중일 수는 없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어쨌든 잘 통찰해 보면..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아히감을 통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기적 같이 나타난 역사는 그 위치와 역할 상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상상도 못할 사랑과 은혜와 능력으로 창세 전부터 뜻하시고 계획하시며 약속하시고 예정하시며 준비하시고 진행하시면서 그의 시간에 따라 하나하나 나타내시고 누리게 하시며 성취해 나가시는 일들 중 일부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과 함께 한 바로 그러한 사랑과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공의와 형평과 질서의 하나님 또한 아니실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로 인한 값없는 은혜와 공짜와 같은 선물인 역사에 있어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신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악으로 인해 진노와 음부와 사망과 심판들의 영적 노예 상태에 빠진 우리 인생들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의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한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구주 예수님과 어떤 식으로든 전적으로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인 면에 있어서는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이며,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뜻과 약속과 말씀들을 다 실행하시고, 특히 그 한가운데 계신 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다 이루신 구원의 일들을 시간과 공간들을 초월해서 믿음과 함께 말씀대로 모두 실제가 되게 하시는 성령님께서 정말 아히감을 통해 실제로 누리고 경험하며 나타나고 성취되어 지게 하신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근원적으로는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또한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 근본, 실체이신 분인 것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라는 그 존재와 개념 상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들, 모든 인류 역사들,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 전,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잠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이실 수 없는 반면 언제나 함께 이시고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며 완전히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죽임당할 위기의 예레미야를 구하실 수 있는 방법은 아히감을 통한 방법 뿐 아니라 하고자 하시면 수백, 수천 가지 이상의 다른 방법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필요하면 기적 이상의 일들까지도 행하실 수 있는 것이며, 게다가 10가지 재앙을 일으키시고 홍해 바다를 가르시는 일도 또다시 못하실 수는 없는 것이고,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시고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일도 하나님께 있어서는 불가능이실 수가 없는 것이며, 실상 오늘날의 이 시간 우리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신 것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상상도 못할 일들을 실제로 행하시는 분인 것이고, 그 하나하나에 있어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 구원이 어떤 식으로든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직접적, 경험적인 면에 있어서는 성령님으로 인한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들이 아닐 수 없는 것이고, 근원적으로는 하나같이 모두 다 그렇듯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의 역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아무나에게, 아무렇게나 그렇게 생생하게 역사하시면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들을 강렬하게 행하시고 기적 이상의 응답과 예비들을 경험케 하시는 분은 아닌 것이며, 더군다나 죄악과 세속과 정욕들 등으로 잠자거나 미지근하거나 병들거나 마치 죽은듯한 신앙에게 이실 수는 더더욱 없는 것으로 단적으로 말하라면 말씀의 신앙, 진정 예레미야와 같은 말씀의 신앙에게 이신 것이고, 참으로 그 정도까지의 말씀대로의 믿음에 있어 그렇게까지나 기적적으로 역사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이유는 조금도 복잡할 수 없는 것으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는 그 자체가 바로 말씀이신 것이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실행하시고 다 이루시는 분인 것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야 말로 근본적으로는 말씀으로 존재, 창조, 통치하시는 분인 것이고, 구주 예수님께서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인 것이며, 성령님께서도 단적으로 말해 말씀의 영이 아니실 수 없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자세하게 말하면 아래 본문의 예레미야를 위시한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담과 하와 때부터 미리 구주 예수님에 대해 보이시고 안내하시며 연결될 수 있게 하신 아담과 하와 때의 여자의 후손에 대한 계시, 다양한 피 제사와 희생 제물들, 유월절 어린 양과 모세를 통한 장대 위의 놋뱀, 회막과 성전, 제사장과 선지자들 등과 같은 다양한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 등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말 그대로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근본적으로는 오늘날 우리들이 오신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과 결코 다를 바 없이 마찬가지로 값없이 구원에 참예케 된 것이고, 마치 목욕하듯 통째로 하나님의 것이 된 것이며..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으로는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로 인해 정말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고, 본질적으로는 말씀이신 하나님의 것, 말씀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곧 말씀의 백성으로 뒤바뀌게 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렇게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다양한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 등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말 그대로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함으로 인해 삶의 자리와 사역의 현장들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죄악들과 싸울 수 있었던 것이고 실제로 이길 수도 있었던 것이며, 뿐만 아니라 혹 범하게 된 죄악들에서는 자복하고 돌이킬 수도 있었던 것이고 그와 함께 정말 사함과 나음들, 회복과 역전들도 가능했던 것이며, 무엇보다 아래 본문의 예레미야와 같은 믿음의 선배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듯이 오늘날의 우리식으로 말하면 주야로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실천하며 증거하는 등과 같은 결단과 몸부림들로 나아가고 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고 그로 인해 살아 있고 깨어 있는 믿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일 뿐 아니라 목숨까지 아끼지 않을 정도의 장성한 믿음, 강한 군사 같은 믿음까지도 될 수 있었던 것이며, 특히 그와 함께 직접적으로는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더욱 강렬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이고 근원적으로는 말씀으로 하나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 온갖 응답과 승리와 이적들 등이 다 셀 수도 없이 생생하게 나타났던 것을 볼 수 있는 것인데..
그와 같은 모든 이치와 원리들, 특히 시대와 나라들, 시간과 공간들을 뛰어 넘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 및 기뻐 역사하심들, 무엇보다 순간순간마다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붙잡으며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음으로 가능한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이 된 자들에게 함께 하는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 온갖 응답과 예비들의 실제와 경험들, 생생함과 강렬함들은 오늘날 우리들에 있어서도 원론적으로는 조금도 다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손이 예레미야를 도와 주어 그를 백성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예레미야26:24)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2월 24일(토)1/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